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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
1화
1. 입주 교사 구합니다(1)
「다음에 들으실 곡은 ‘귀염천사’ 님이 신청하신 곡입니다. 남자 친구와 방금 이별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하네요. ‘귀염천사’ 님이 신청하신 곡 띄워 드립니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채경 씨, 힘내세요. 세상에 남자는 많습니다.」
‘2시의 음악 사냥’ 게시판에 채경이 방금 신청한 백지영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살다 보면 별의별 재수 없는 날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 별의별 재수 없는 날들 중에 최고라 할 수 있었다. 1년간 사귀었던 강준수와 방금 이별을 선언하고 오는 길이니까.
채경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야에 다정하게 걷고 있는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은 커플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채경의 입에서 방언이 터지듯 육두문자가 절로 튀어나왔다.
“강준수 이 ××× 같은…….”
다행히 채경이 앉아 있는 버스 뒷좌석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채경은 눈물을 삼키며 마음껏 욕설을 퍼부었다. 해삼, 멍게, 말미잘과 함께 간혹 개도 튀어나왔다. 시베리안 허스키도 나오고. 식빵 비슷한 단어도 얼핏 나온 것도 같았다.
평소에 욕이라면 질색을 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채경은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불과 두 시간 전 상황을 떠올린다면 제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채경은 자신했다.
채경의 직업은 이탈리아 레스토랑 셰프였다.
두 시간 전, 채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방에서 점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료를 준비하는 도중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평소에도 채경은 식재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신선하지 않은 식재료가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고 보관 상태가 양호하지도 않았으며 날짜가 지난 재료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사장에게 수십 번 이야기를 했지만 원가절감이라는 이유로 채경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평소 정의감이 투철하고 아닌 걸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채경은, 언젠가는 한 번 뒤집어엎고야 말겠다며 이를 바락 갈고 있던 터였다.
넘치는 게 레스토랑인데 어디 일자리가 없으랴, 이렇게 비위생적이고 비양심적인 업소에서 일을 하느니 그만두겠다는 결심으로 거사를 치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이었다. 거사 시점이 오늘인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채경이 마법에 빠진 날이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는 데다 오전부터 재료 문제로 사장과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근에 너무나도 미온적인 준수의 태도였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왠지 이별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채경을 향해 다가오는 그런 느낌. 어제 저녁부터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서 채경의 성질이 뻗칠 대로 뻗쳐 있었는데 오늘 들어온 재료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셰프,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쓰레기 버리는 중이야.”
채경은 음식물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더니 각종 채소와 날짜 지난 소스들, 상하기 일보 직전인 식재료들을 마구 쏟아부었다. 마음 같아선 강준수도 같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거 사장님 보시면 한바탕 전쟁 나겠는데요.”
채경의 과감한 행동에 주방 직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채경은 날짜가 지난 우유를 싱크대에 쏟아부으며 말했다.
“매니저한테 전해. 오늘은 토마토소스가 들어가는 파스타는 다 안 된다고.”
“네? 그럼 점심 장사 못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게 야채랑 토마토랑 싱싱한 거 사 왔어야지. 재료도 전부 엉망이고. 한 접시에 만 오천 원이나 받아 처먹으면서 제대로 된 재료를 써야 될 것 아냐.”
“그럼 캔을 쓰면?”
“캔에 있는 건 맛없어. 소스는 직접 만들어야 돼.”
주방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자 50대 중반의 남자 사장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유 실장님,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누구 장사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하셨습니까?”
사장이 눈을 부릅뜨고서 채경에게 말하자 채경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맞받아쳤다.
“제가 하루에 한 번씩 사장님한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좋은 재료 쓰자고. 날짜 지난 거, 상한 거 다 버리자고. 사장님은 어떤지 모르지만 전 이런 재료로 요리 못 합니다.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말했다.
“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비양심적으로 장사하는 곳에서는 더 이상 일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당장 그만두세요. 오늘까지 계산해서 당장 입금할 테니까.”
그렇게 일을 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채경은 짐을 챙겨 들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왠지 기분이 꿀꿀해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할 겸 커피숍을 찾았다. 곧 점심시간이라 준수와 식사라도 할까 하고 준수에게 전화를 넣었다. 준수가 다니는 회사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몇 번을 더 전화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최근 들어 준수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오늘까지 하루 온종일 연락조차 없었다.
여자의 직감. 준수는 예전 여자 친구와 다시 만난다. 최근에 채경이 그런 정보를 입수했으니까.
채경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안한 기운을 느끼며 남은 커피를 홀짝이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준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채경, 정말 미안한데……. 우리 그만 만나자.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메시지를 확인하던 채경은 잠시 전화기를 든 채로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채경은 따질 생각으로 준수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참았다. 그냥 쿨하기로 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채경은 활화산처럼 솟아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메시지를 넣었다.
[그래. 헤어져. 잘됐다. 사실 나도 남자 생겼거든. 축하해. 잘 먹고 잘 살아!]
문자를 보낸 뒤 다시 문자를 넣으려다 채경은 참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육두문자를 보내고 싶어 그녀의 손이 간질거렸다.
더 이상 준수에게선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그렇게 채경은 어설프게 이별을 맞았다.
사실, 준수와 대외적으로 사귀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둘 다 헤어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쇼윈도 커플이라고나 할까.
가끔씩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은 하나, 별다른 발전이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뭐,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관계이긴 해도 상대에게 차이는 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더 화가 나는 건,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차였다는 것. 심지어 서로 합의하에 이뤄진 이별이 아니라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화가 나지 않으면 그건 성인군자였다.
속으로 나쁜 자식, 벼락 맞아 죽을 놈 등등을 수십 번 외친 뒤에 채경은 그래도 뭔가 울적하고 우울한 마음에 평소에 애청하던 ‘2시의 음악 사냥’ 게시판에 신청곡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스물일곱의 청순가련한 여자입니다. 방금 전에 남자 친구와 이별을 했습니다. 듣고 싶은 노래는 백지영 언니의 ‘총 맞은 것처럼’입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 슬프네요. ㅠ,ㅠ]
신청곡을 올린 뒤 채경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후라 그런지 버스에는 승객이 몇 명 없었다.
곧 신청한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가슴에 총알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는 가사와 애절한 멜로디가 채경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내가 먼저 찼어야 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고 억울했다.
채경은 노래를 감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곧 노래가 끝이 나고 스피커에서 중저음의 부드러운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염천사 님, 듣고 계시나요? 고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 아닐까요?」
그나마 채경은 ‘2시의 음악 사냥’ 디제이의 중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이 남자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애청한 지 벌써 2년, 일을 하는 내내 채경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서민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른한 오후를 이겨 내곤 했었다.
가끔은 이 남자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이 남자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린다.
「귀염천사 님, 힘내세요. 어디선가 또 다른 인연이 귀염천사 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채경은 저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대답을 했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혼자 대답을 끝낸 채경은 게시판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청곡 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준 님의 목소리에 절로 힘이 납니다. 매일 좋은 음악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쓰러져 혼자 상념에 잠겨 있던 채경은 갑자기 걸려 온 룸메이트 수정의 전화에 정신이 몽롱했다.
― 채경아, 너 지금 어디야?
“집인데.”
― 이 시간에 네가 집에 왜 있어? 쉬는 날이야?
“잘렸어.”
― 헐!
“왜 잘렸느냐고 물어보지 말고 전화 건 용건만 말해.”
― 어, 어, 그래. 그게 그러니까…….
“나 집 나가야 돼?”
― 어, 그렇게 됐어. 부동산에서 전화 왔는데 오늘 계약했대. 내가 사흘 뒤에 들어오라고 부탁했어.
“알았어.”
― 미안.
“아냐,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
채경은 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그 일이 닥치자 뭔가 정신이 몽롱했다.
채경은 1년 가까이 수정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수정이 결혼을 한 뒤 신혼여행을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미리 마련한 신혼집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집이 나갈 때까지 채경이 살고 있었는데 오늘 집이 나간 것이다.
안 좋은 일들은 이렇게 한꺼번에 겹치는 건가?
잠시 소파에 앉아 있던 채경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방을 구해야만 했다.
밖으로 나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동네 부동산 투어를 끝낸 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방값이 비싼지.
작년에 폐암 말기로 투병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수술비와 입원비를 대느라 그동안 채경이 모았던 돈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끝내 채경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친척에게 돈을 빌려 장례식까지 치르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방을 구하려니 마음에 드는 방이 보이지가 않았다.
1화
1. 입주 교사 구합니다(1)
「다음에 들으실 곡은 ‘귀염천사’ 님이 신청하신 곡입니다. 남자 친구와 방금 이별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하네요. ‘귀염천사’ 님이 신청하신 곡 띄워 드립니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채경 씨, 힘내세요. 세상에 남자는 많습니다.」
‘2시의 음악 사냥’ 게시판에 채경이 방금 신청한 백지영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살다 보면 별의별 재수 없는 날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 별의별 재수 없는 날들 중에 최고라 할 수 있었다. 1년간 사귀었던 강준수와 방금 이별을 선언하고 오는 길이니까.
채경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야에 다정하게 걷고 있는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은 커플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채경의 입에서 방언이 터지듯 육두문자가 절로 튀어나왔다.
“강준수 이 ××× 같은…….”
다행히 채경이 앉아 있는 버스 뒷좌석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채경은 눈물을 삼키며 마음껏 욕설을 퍼부었다. 해삼, 멍게, 말미잘과 함께 간혹 개도 튀어나왔다. 시베리안 허스키도 나오고. 식빵 비슷한 단어도 얼핏 나온 것도 같았다.
평소에 욕이라면 질색을 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채경은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불과 두 시간 전 상황을 떠올린다면 제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채경은 자신했다.
채경의 직업은 이탈리아 레스토랑 셰프였다.
두 시간 전, 채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방에서 점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료를 준비하는 도중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평소에도 채경은 식재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신선하지 않은 식재료가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고 보관 상태가 양호하지도 않았으며 날짜가 지난 재료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사장에게 수십 번 이야기를 했지만 원가절감이라는 이유로 채경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평소 정의감이 투철하고 아닌 걸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채경은, 언젠가는 한 번 뒤집어엎고야 말겠다며 이를 바락 갈고 있던 터였다.
넘치는 게 레스토랑인데 어디 일자리가 없으랴, 이렇게 비위생적이고 비양심적인 업소에서 일을 하느니 그만두겠다는 결심으로 거사를 치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이었다. 거사 시점이 오늘인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채경이 마법에 빠진 날이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는 데다 오전부터 재료 문제로 사장과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근에 너무나도 미온적인 준수의 태도였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왠지 이별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채경을 향해 다가오는 그런 느낌. 어제 저녁부터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서 채경의 성질이 뻗칠 대로 뻗쳐 있었는데 오늘 들어온 재료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셰프,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쓰레기 버리는 중이야.”
채경은 음식물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더니 각종 채소와 날짜 지난 소스들, 상하기 일보 직전인 식재료들을 마구 쏟아부었다. 마음 같아선 강준수도 같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거 사장님 보시면 한바탕 전쟁 나겠는데요.”
채경의 과감한 행동에 주방 직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채경은 날짜가 지난 우유를 싱크대에 쏟아부으며 말했다.
“매니저한테 전해. 오늘은 토마토소스가 들어가는 파스타는 다 안 된다고.”
“네? 그럼 점심 장사 못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게 야채랑 토마토랑 싱싱한 거 사 왔어야지. 재료도 전부 엉망이고. 한 접시에 만 오천 원이나 받아 처먹으면서 제대로 된 재료를 써야 될 것 아냐.”
“그럼 캔을 쓰면?”
“캔에 있는 건 맛없어. 소스는 직접 만들어야 돼.”
주방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자 50대 중반의 남자 사장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유 실장님,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누구 장사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하셨습니까?”
사장이 눈을 부릅뜨고서 채경에게 말하자 채경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맞받아쳤다.
“제가 하루에 한 번씩 사장님한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좋은 재료 쓰자고. 날짜 지난 거, 상한 거 다 버리자고. 사장님은 어떤지 모르지만 전 이런 재료로 요리 못 합니다.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서 말했다.
“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비양심적으로 장사하는 곳에서는 더 이상 일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당장 그만두세요. 오늘까지 계산해서 당장 입금할 테니까.”
그렇게 일을 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채경은 짐을 챙겨 들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왠지 기분이 꿀꿀해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할 겸 커피숍을 찾았다. 곧 점심시간이라 준수와 식사라도 할까 하고 준수에게 전화를 넣었다. 준수가 다니는 회사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몇 번을 더 전화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최근 들어 준수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오늘까지 하루 온종일 연락조차 없었다.
여자의 직감. 준수는 예전 여자 친구와 다시 만난다. 최근에 채경이 그런 정보를 입수했으니까.
채경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안한 기운을 느끼며 남은 커피를 홀짝이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준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채경, 정말 미안한데……. 우리 그만 만나자.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메시지를 확인하던 채경은 잠시 전화기를 든 채로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채경은 따질 생각으로 준수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참았다. 그냥 쿨하기로 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채경은 활화산처럼 솟아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메시지를 넣었다.
[그래. 헤어져. 잘됐다. 사실 나도 남자 생겼거든. 축하해. 잘 먹고 잘 살아!]
문자를 보낸 뒤 다시 문자를 넣으려다 채경은 참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육두문자를 보내고 싶어 그녀의 손이 간질거렸다.
더 이상 준수에게선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그렇게 채경은 어설프게 이별을 맞았다.
사실, 준수와 대외적으로 사귀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둘 다 헤어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쇼윈도 커플이라고나 할까.
가끔씩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은 하나, 별다른 발전이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뭐,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관계이긴 해도 상대에게 차이는 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더 화가 나는 건,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차였다는 것. 심지어 서로 합의하에 이뤄진 이별이 아니라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화가 나지 않으면 그건 성인군자였다.
속으로 나쁜 자식, 벼락 맞아 죽을 놈 등등을 수십 번 외친 뒤에 채경은 그래도 뭔가 울적하고 우울한 마음에 평소에 애청하던 ‘2시의 음악 사냥’ 게시판에 신청곡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스물일곱의 청순가련한 여자입니다. 방금 전에 남자 친구와 이별을 했습니다. 듣고 싶은 노래는 백지영 언니의 ‘총 맞은 것처럼’입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 슬프네요. ㅠ,ㅠ]
신청곡을 올린 뒤 채경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후라 그런지 버스에는 승객이 몇 명 없었다.
곧 신청한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가슴에 총알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는 가사와 애절한 멜로디가 채경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내가 먼저 찼어야 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고 억울했다.
채경은 노래를 감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곧 노래가 끝이 나고 스피커에서 중저음의 부드러운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염천사 님, 듣고 계시나요? 고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 아닐까요?」
그나마 채경은 ‘2시의 음악 사냥’ 디제이의 중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이 남자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애청한 지 벌써 2년, 일을 하는 내내 채경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서민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른한 오후를 이겨 내곤 했었다.
가끔은 이 남자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이 남자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린다.
「귀염천사 님, 힘내세요. 어디선가 또 다른 인연이 귀염천사 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채경은 저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대답을 했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혼자 대답을 끝낸 채경은 게시판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청곡 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준 님의 목소리에 절로 힘이 납니다. 매일 좋은 음악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쓰러져 혼자 상념에 잠겨 있던 채경은 갑자기 걸려 온 룸메이트 수정의 전화에 정신이 몽롱했다.
― 채경아, 너 지금 어디야?
“집인데.”
― 이 시간에 네가 집에 왜 있어? 쉬는 날이야?
“잘렸어.”
― 헐!
“왜 잘렸느냐고 물어보지 말고 전화 건 용건만 말해.”
― 어, 어, 그래. 그게 그러니까…….
“나 집 나가야 돼?”
― 어, 그렇게 됐어. 부동산에서 전화 왔는데 오늘 계약했대. 내가 사흘 뒤에 들어오라고 부탁했어.
“알았어.”
― 미안.
“아냐,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
채경은 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그 일이 닥치자 뭔가 정신이 몽롱했다.
채경은 1년 가까이 수정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수정이 결혼을 한 뒤 신혼여행을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미리 마련한 신혼집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집이 나갈 때까지 채경이 살고 있었는데 오늘 집이 나간 것이다.
안 좋은 일들은 이렇게 한꺼번에 겹치는 건가?
잠시 소파에 앉아 있던 채경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방을 구해야만 했다.
밖으로 나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동네 부동산 투어를 끝낸 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방값이 비싼지.
작년에 폐암 말기로 투병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수술비와 입원비를 대느라 그동안 채경이 모았던 돈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끝내 채경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친척에게 돈을 빌려 장례식까지 치르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방을 구하려니 마음에 드는 방이 보이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