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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
2화
1. 입주 교사 구합니다(2)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어깨에 힘이 쭉 빠진 채 오피스텔로 향하던 채경은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아무래도 맥주 한잔이 간절히 생각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제 6개월, 게다가 직장에선 잘리고 남자 친구와는 헤어지고 집에선 쫓겨나고.
괜히 서러웠다.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채경은 마트에 들러 과자와 땅콩, 버터를 바른 오징어, 캔 맥주를 몇 개 구입할 생각이었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같이 기분 더러운 날은 꼭 한잔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따라 마트로 가는 길이 평소와는 달리 온통 살구빛 저녁노을 속에 잠겨 있었다.
살구빛 저녁노을 속을 거닐던 채경의 시야에 반대편 거리에서 걸어오는 가족이 눈에 띄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띠며 걷고 있는 꼬마 아이.
채경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나란히 잡고 걷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채경의 엄마는 채경이 어릴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채경은 줄곧 아빠 밑에서 자랐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채경의 아버지는 채경과 놀아 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릴 적 채경의 기억 속에 아빠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었던 기억은 분명히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하고 싶은 일을 그려 보라고 했을 때 채경은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동물원에 가는 그림을 그렸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채경은 화목한 가족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길을 걸었다. 그때였다. 자동차 한 대가 채경의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끼이익!
가족에게 시선을 뺏기느라 채경은 곧 골목 교차로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고 그러다 미처 채경을 발견하지 못한 자동차가 채경의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한편, 민준은 일 때문에 놀이방에 지후를 맡긴 뒤 지후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민준에게 도로가 낯설었다. 게다가 갓길에 불법 주차 된 차들로 인해 시야가 가린 민준은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본능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채경이 차에 부딪혀 넘어졌다.
민준은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다. 놀란 나머지 채경이 잠깐 기절을 하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아 민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경을 안아서 흔들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제 말 들려요?”
채경은 정신이 드는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다친 데가 없냐고 물어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귀에 익었다. 마치 매일 듣는 목소리처럼.
이 남자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구급차 부를까요?”
부드럽고 달콤한 남자의 목소리에 채경은 다리가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홍수처럼 밀려오는 아픔에 채경은 체면 불고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다리를 조금 다쳤나 봐요.”
전화기를 꺼내어 119에 전화를 걸려던 민준은 바로 근처에 정형외과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채경의 앞에 허리를 숙이며 민준이 말했다.
“업혀요. 바로 앞에 병원 있으니까 제가 업고 갈게요.”
잠시 주뼛거리며 망설이던 채경은 곧 낯선 남자의 등에 업혔다.
남자에게선 진한 머스크 향이 감돌았다.
“죄송해요. 제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지독하게 달콤한 남자의 목소리가 채경의 가슴을 간질였다.
남자 친구와 이별을 한 지 고작 반나절, 낯선 남자의 등판에 업힌 채경의 가슴이 이상하게 설렌다.

“다리는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채경은 회복실에 누워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통사고란 게 자고 나면 또 아플 수도 있는 거니까 오늘 하루는 여기 계세요.”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괜찮아요.”
“제가 미안해서 그럽니다.”
무릎이 조금 아프긴 하지만 며칠 자고 나면 괜찮을 정도의 경미한 부상이었다.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멋지고 잘생긴 데다 목소리까지 좋은 이 남자는 미안하다며 채경에게 입원을 권유했다.
부상의 크고 작음을 떠나 내일 눈을 뜨자마자 당장 방을 알아봐야 하는 채경은 은근히 민준의 호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채경에게 눈길을 주던 민준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서연이었다. 민준은 전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아까 전화하니까 안 받더니.”
― 아까는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전에 말했던 거 말이야. 입주 교사. 아무래도 있는 게 좋겠어.”
서연은 언젠가 민준에게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남자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좀 그러니 입주 교사를 두면 어떻겠냐고.
― 그래, 잘 생각했어.
“주위에 있으면 한번 알아봐 줘. 사람만 좋으면 나이야 상관없지. 뭐, 유아교육 전공자도 좋고. 미술이나 음악 전공도 괜찮고……. 음, 요리도 잘하면 좋아. 아이 간식 정도는 해 줘야 되니까. 보수는 당연히 넉넉하게 주지. 식구는 아이하고 나하고 둘밖에 없으니까 신경 쓸 것도 없을 거야. 입주 교사니까 숙식도 가능하고.”
안타까운 듯 걱정하는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내가 안 바쁘면 도와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지후를 위해서는 옆에 누군가 있는 게 좋겠지. 한번 알아볼게.
“그래. 신경 좀 써 줘.”
통화 내용을 잠시 듣고 있던 채경의 귀가 갑자기 솔깃해졌다.
입주 교사라…….
입주 교사가 된다면 일단 그 집에서 먹고 자는 게 가능하단 소리?
채경은 등을 보이며 돌아선 민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운동을 했는지 역삼각형으로 벌어진 어깨가 제법 탄탄해 보였다. 그러다 힐끔 돌아보는 민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깐 마주치긴 했지만 남자의 얼굴은 꽤 미남형이었다.
그러니까 입주 교사를 하면 저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 데다 먹여 주고 재워 준다? 왠지 구미가 당겼다. 당장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직장과 숙소 두 가지가 한 번에 생긴다는 거 아닌가.
채경은 민준이 전화를 끊는 타이밍을 잡아 얼른 말을 꺼냈다.
“저기요.”
채경이 부르자 민준이 돌아보았다.
“네. 하실 말씀이라도…….”
“……방금 입주 교사 구한다고 하셨죠? 그거 제가 하고 싶은데…….”
민준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네?”
“입주 교사 제가 하고 싶다고요.”
“…….”
“제가 한식, 중식, 일식 요리사 자격증이 있어요. 그리고 전공은 이탈리아 요리예요. 그리고 제가 아이들이라면 완전 좋아해요. 가족 같은 분위기 너무 좋아요.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부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림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민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채경의 눈동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이 참 맑고 예뻤다.



2. 엄마가 되어 주세요(1)


채경의 병실에서 민준과 면접을 본 후, 이틀 뒤 채경은 민준의 집으로 첫 출근을 했다.
채경이 민준의 집 앞에 멈춰 서자 커다란 철제 대문이 ‘철컥’ 하고 열리더니 깔끔한 슈트를 을 차려입은 민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채경은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집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건물이 깔끔하고 심플했다. 담벼락이 유난히 높았고, 커다란 철제 대문을 열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잘 다듬어진 정원이 채경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는 돌로 만든 길이 이어져 있었다.
“아침 9시 30분이 되면 이 앞에 유치원 차가 설 겁니다. 그때 지후를 보내시면 됩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제가 나갈 때 데리고 나가니까 그 부분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리고 오후 5시에 이 집 앞에 차가 멈춰 설 겁니다. 그럼 그때 데리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제가 가끔 늦을 때가 있으니까 저녁에는 7시쯤에 아이 간식을 챙겨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무조건 10시쯤에 재우세요.”
민준은 채경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설명해 주는 그의 목소리는 연인에게 말하듯 달콤하고 자상했다.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전날부터 채경은 민준이 말을 할 때마다 내내 궁금하던 참이었다.
“집안일은 오후에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오십니다. 시키실 것이 있으면 시키시면 됩니다. 궁금한 것도 물으시면 되고요.”
얼핏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그런지 채경의 귀에는 달콤하게 들렸다.
“저도 입주 교사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네요.”
민준은 말을 한 뒤 채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조금 꾸미고 거리에 나가면 눈에 띌 정도의 미모는 되었다. 게다가 나이까지 젊으니 민준의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좋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민준의 말에 채경은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저도 처음이라…….”
원래 내숭이란 건 채경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는데 채경은 저도 모르게 내숭을 떨고 있었다. 채경은 그런 스스로를 증오하고 싶었다.
“2층에 방이 있습니다. 어제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깔끔하게 청소를 해 놓아서 깨끗할 겁니다. 제가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앞으로 우리 지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채경은 그때서야 민준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혹시 ‘2시의 음악 사냥’ 맞죠?”
채경의 말에 민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방에서 하는 방송이다 보니 듣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채경이 알아보자 민준은 신기하기도 한 것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민준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채경은 신기한 듯 그를 보았다.
“와, 신기하다. 제가 열혈 애청자거든요.”
어제 게시판에 실연을 당해서 ‘총 맞은 것처럼’을 신청한 귀염천사가 채경 자신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채경의 말에 민준은 무심한 듯 대답했다.
“네에.”
사실 민준은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픈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비주의가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었어요.”
“네에.”
민준의 짧은 단답형 대답에 채경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데 다행히도 지후가 욕실에서 세안을 마치고 나왔다.
혼자서 머리까지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나온 지후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렸다.
“지후야, 어제 아빠가 말했었지?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선생님이셔. 인사해야지.”
지후는 채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한 번 까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