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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되옵니다, 폐하 1권




아니 되옵니다, 폐하 (1화)
서장(序章)


예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해 주는 최고의 영역. 사람들은 동물처럼 생존에만 의존하다가도 소리의 흥겨운 자락에, 혹은 그림 한 장에 발길을 멈춘다. 밥을 먹지 못해 배는 곯더라도, 혹은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침침한 와중에도 쉬이 발을 움직이지 못한다. 예술은 때로 생존보다도 더 중해질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 예술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주는 존재이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나고 자라고, 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번 소설 봤냐? 아, 선생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하…… 이것이야말로 걸작이야. 내 아낌없이 뒤에서 받쳐 줄 테니 재능을 펼쳐 주시게, 선생.”
그네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는 얼굴을 뵙지 않아도 절로 ‘선생님’ 소리가 나온다. 선생님이라는 명칭 안에는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예술가라는 족속 중에는 특이한 인사들이 많은데, 이들은 돌연 자취를 감추고는 한다. 갑자기 산속으로 들어간다든가, 난데없이 하던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다.
이럴 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분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나타나 주시겠지 하는 소망을 접지 못한다. ‘농사에 재미가 들리셔서 세책가에 책 대신 과일을 보낸다더라.’, ‘놀이에 빠지셔 가지곤 발가락에 붓 끼워서 그린다더라.’ 온갖 소문들은 피를 말리게 하고 때로는 욱한 마음을 들게 하여…….
‘확 가둬 놓고 돈 줄 테니 일하라고 채찍질하고 싶다.’
하는 생각까지 가능하게 한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그친다. 첫째로 가두는 건 범죄 행위이며, 둘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럴 만한 재력이 없다. 내가 돈 많은 사람이면 후원을 빵빵하게 하여 내 님들을 먹여 살릴 거라는 슬픈 농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여기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남자가 있었다.
“예…… 예화를 끌고 오라고요?”
누군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빙긋 웃는다.
“선생.”
“……예?”
“예화 선생이라고 똑바로 말하세요. 그리고 끌고 오라는 게 아니라 모셔 오라는 겁니다.”
웃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에서는 살얼음이 뚝뚝 떨어졌다. 질겁하여 고개를 숙인 사람을 보며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비단 옷이 ‘스르륵’ 밑으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가며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
“일 년 전부터 산이 좋다며 자취를 감춘 사람입니다. 마지막 그림이 나온 지 벌써 삼백팔십구 일이 지났다 이겁니다.”
정확한 날짜에 고개 숙인 사람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모셔 오세요.”
남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황제의 명입니다.”
황제 초하율. 그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권력과 강력한 재력을 가진 남자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삼 개월이 되는 날, 하율은 당신이 수집하던 그림으로 모자라 화공을 끌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황제가 사랑하는 예술가 한 명 데리고 오라는 것이 무엇이 힘들겠는가. 이 정도의 권력은 응당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신하가 물러난 뒤, 하율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러나 ‘후후’ 하고 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드디어.”
“하율.”
뒤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율은 화사하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병풍 뒤에서 또래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 역시 하율처럼 키가 큰 무사였다.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하율을 응시했는데, 눈만큼은 황당하다는 걸 숨기지 못했다. 그걸 본 하율은 예쁜 눈웃음을 쳤다.
“왜 그런 눈이야?”
“예화를 찾기 위해…….”
“예화 선. 생.”
하율은 ‘선생이라고 불러야지∼’ 하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거린다. 진록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다시 말했다.
“예화 선생을 찾기 위해 전국으로 군대를 풀겠다고?”
“응.”
하율은 제 호위무사이자 친구를 보며 말했다.
“황제가 되면 꼭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호위무사 진록은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상대의 소망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윤예화. 그는 황자 시절부터 하율이 좋아했던 화공이다. 어느 정도냐는 물음에 답하려면 끝도 없다. 차근차근 예화의 그림들을 사들여, 현재 그의 그림은 모두 하율이 갖고 있을 정도였다. 황제가 된 이후로는 아예 궁 한구석에 예화의 그림만이 전시된 방까지 만들었다. 참으로 지극한 사랑이다.
진록은 그림 볼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잘 그렸나 보다’에서 그쳤지만, 하율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그림을 넘어 사람까지 납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하자.’
여기 황제님의 예화에 대한 사랑이 유별난 거야 알았으니 더는 말하지 말기로 한다.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정도로 하율은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니었다. 대신 진록은 다른 걸 물었다.
“데려오면 어쩌려고.”
“어쩌기는.”
하율이 활짝 웃었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단 모셔 와서 얼굴도 보고…….”
‘황제가 모셔 온다는 표현을…….’
친구의 기가 차다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하율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림을 그리지 않나 물어봐야겠지?”
“끝이야?”
“그럴 리가.”
하율은 농담도 잘한다며 말했다. 그러다니 별안간 웃음이 싹 사라졌다. 지나칠 정도로 밝던 미소가 없어지자 삽시간에 인상이 바뀌었다. 하율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낮아져 있었다.
“평생 동안 모셔야지.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줄 테니 나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라고 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진록은 벌써부터 얼굴도 보지 않은 화공이 불쌍해졌다.

***

“에이 취!”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남자가 재채기를 했다. 그 바람에 동그란 색안경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화선지 바깥으로 비껴 나가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얼룩을 만들 뻔했다. 남자는 붓을 내려놓고 그림을 확인했다.
“이놈의 꽃가루가 정신 사납게 하네.”
남자는 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흑발을 뒤로 묶어 두었다. 꽁지머리에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나와 뺨을 간질였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림을 보았다. 거기에는 남녀가 엉켜 정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세세하게 그려 누가 보아도 얼굴을 붉힐 외설적인 춘화였다.
“이 체위 좋네.”
그가 그린 건 후배위였다. 노골적인 자세에도 남자는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덤덤하게 ‘이게 더 야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번 집중하기 시작한 남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황제가 자신을 잡아 가둘 계획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였다.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윤예화는 남몰래 춘화만 열심히 그릴 뿐이었다.



1. 호분(胡紛) 바닷가 모래사장에 있는 풍화된 조개껍질을 빻아 만든 흰색


윤예화.
아리따운 아가씨를 떠올리게 하는 고운 이름이지만 엄연한 스물일곱 살 청년이다. 그는 약 일 년 전부터 그림들을 팔아 장만한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제 먹을 정도로만 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유유자적한 삶. 예화는 이 생활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 많은 그림들 중에서 유난히 종류가 다른 것이 있었으니, 이른바 춘화였다. 예화가 처음 춘화집을 내놓았을 때, 세책가 주인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끙끙’ 앓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 옆에서 예화는 책을 팔랑팔랑 넘기며 말했다.
“죽이지?”
벌떡벌떡 치솟은 아랫도리를 감추던 주인은 그 말에 흥분했다.
“당장 팝시다!”
“에헤이…… 이거…….”
예화는 웃으면서 못 들은 척했다.
“팔려고 온 거 아니오?!”
“흐음, 음, 음, 흠. 그렇기는 한데.”
예화는 색안경을 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값부터 한번 들어 보고.”
잠시 후, 예화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짤랑거리는 돈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길이다! 이 길이 내 길이야!’
산수화? 인물도? 이미 그쪽에는 이름난 사람들이 많다. 예화는 그들을 뛰어넘을 의욕조차 없었다. 스스로가 느꼈다. 범인으로 태어난 자신은 천재들을 꺾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이미 질투, 열등감은 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그림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그림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었으니까.
대신 예화는 그 이후로 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름은 감추었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아도 제 이름이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진지라, 그 윤예화가 음란한 그림을 그린다더라는 놀림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예화의 그림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 선생님이 언제 돌아오시나 안절부절 마음만 졸였다.
안타깝게도, 예화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춘화 그리는 데에 완전히 맛이 들렸기 때문이다. 성행위를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거기다 예화는 장난기도 있는 남자였다. 자신이 그린 춘화를 본 사람들이 얼굴이 벌겋게 올라서는 헉헉거리는 모습이 즐거웠다. 자신이 그리지 않은 척 옆에서 슬쩍 곁눈질하며 속으로 킬킬 웃는 것이 예화의 은밀한 재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마에 집어넣어져 어디론가 끌려갈 때, 예화는 음란죄로 처벌 받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시발.”
예화는 마른세수를 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처럼 상추를 뜯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추를 쥔 채 뒤를 돌았던 예화는 ‘엥?’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흙투성이의 예화 앞에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예화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시발. 저승사자여 뭐여.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예화가 본 것은 뒤에 있던 가마, 그리고 난데없는 자루였다. 그게 뭐냐고 물으려던 찰나, 자루가 머리부터 씌워져 버렸다.
자루가 다시 벗겨졌을 때 그는 가마 안에 있었고, 창을 열어 보니 사람들은 묵묵하게 걷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걸 보며 예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야이씨, 망했다…….”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나라에서 떠돌고 있는 음탕한 그림의 주인을 고발해 버린 것이다. 예화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아주 낯 뜨거워 죽겠다. 춘화를 그린 죄로 죽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예화는 가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계속 욕을 했다.
“이 개새끼들. 그림 좀 그릴 수 있지, 수도로 올라가야 할 정도로 중죄인인 거냐고 내가……. 시발 다들 잘 봐 놓고서는…….”
어, 아주 히죽히죽 웃으면서 봤을 텐데 다 봐 놓곤 누가 일러바친 게 틀림없다. 골이 아프다. 수도에는 예화를 아는 사람들이 많다. 잠적한 화공이 춘화집을 그리다 끌려왔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러려고 몸을 숨겼냐며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삭막한 수도에 큰 웃음 하나 던지고 가겠군. 예화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좆같은 인생. 별일이 다 있네.”
하여간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춘화는 분명 신분을 막론하고 대중들이 즐겨 찾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내가 춘화를 그린다고 당당하게 말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야한 그림을 보는 것도 골방 깊숙한 곳에 몰래 보는 세상이다. 향유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니 화가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그림이 발각되는 것을 큰 굴욕이라고 생각했다.
예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춘화를 그리는 건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지만 떳떳할 수는 없었다. 이제 곧 마차 바깥으로 쏟아질 비웃음을 생각하려니 기분이 한순간에 나빠졌다. 예화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마차에 기댔다.
그러나 예화의 예상은 틀렸다. 몇 시간 후, 마차는 속력을 멈추더니 이윽고 예화를 내리게 했다. 바깥으로 나온 예화는 ‘응?’ 하고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여 눈만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다 그는 점차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일이 다 있……네?’
본래 수도에 살았던 그지만 궁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예화는 거대한 크기와 화려함에 입을 벌렸다. 앞에는 커다란 궁문이 서 있었다. 붉은 칠을 한 기둥들이 당당하게 지붕을 받쳤고, 그 위에 있는 지붕들은 꽃무늬가 새겨진 기와로 촘촘하게 덮여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돌계단을 올라가야 했는데, 계단의 양옆에는 사자상이 이를 드러낸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살아서 튀어나올 것같이 생생한 사자를 보며 예화는 침을 삼켰다. 그다음, 문 안쪽을 살펴보았다. 열려진 궁문 안으로는 크고 화려한 궁궐이 펼쳐져 있었다. 본래 수도에 살았던 그지만 궁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궁궐이 주는 위압감에 예화가 숨을 잠깐 멈추었을 때였다.
“곧 오실 것이다.”
옆에 있던 장수가 말했다. 온다니, 누가 오는데? 예화가 눈썹을 찡그렸다.
“네?”
“그럼 바로 절을 해야 할 것이야. 눈도 마주치지 말고 무조건 이마를 땅에 대고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온다는 사람이 누군데요?”
예화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장수는 도리어 ‘왜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화가 얼굴을 구겼다.
“안 가르쳐 줬어요.”
장수는 당황했다.
“뭐? 그럴 리가. 말해 주지 않았느냐.”
“아니라고요. 누구 만나는데요? 아씨, 그런 줄도 모르고 어디 뒈지러 가는 줄 알았잖아요.”
장수는 약간 당황했는지 뒤에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병사들도 서로를 쿡쿡 찌르며 ‘안 알려 줬냐?’ 하고 묻기 바쁘다. 술렁거림 속에서 예화는 한숨을 쉬었다.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저게 내가 내는 돈으로 먹고 자는 나으리들이라니.
어디선가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꽁한 마음으로 보던 예화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미남이 바쁘게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도 얼굴이거니와, 화려한 복식도 굉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금색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금관과, 펄럭거리는 황금색 비단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그런 남자가 자신 쪽으로 점점 가까워져 가자 예화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예화는 보다 못해 장수에게 누구시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 순간, 뛰어온 청년이 냅다 예화의 손을 잡아챘다. 예화는 제 손을 꼭 잡은 청년을 보고 질겁했다.
‘어우, 시발!’
청년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손을 보다 다시 예화를 봤다. 잘생긴 얼굴에 모란같이 화려한 미소가 피어 올라왔다. 심지어 뺨까지 붉히는 모습에 예화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딱 봐도 귀한 분이라 손을 떨치지는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었다. ‘미친놈아, 징그럽게 뭐하는 거냐.’ 하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때, 이 미남자가 말했다.
“예화 선생입니까?”
“예?”
저도 모르게 되물은 예화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하다는 걸 느꼈다. 어느새 모든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어.’ 예화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장수 나리가 만나자마자 절을 하라고 했는데…….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데 손이 잡아당겨졌다. 얼떨결에 예화는 몸이 앞으로 기울여졌다.
잠시 후, 예화의 머리털이 치솟았다. 얼굴까지 붉히던 남자가 별안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고급 비단옷은 매우 부드러웠고 그에게서 나는 꽃향기도 달았다. 하지만 예화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히익!’
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가, 그것도 처음 보는 남정네가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포옹을 하다니. 예화는 벌레라도 닿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귀에 대고 말하지 마!’
예화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젖혔다가 다른 광경을 보았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수많은 궁녀와 내관들이 줄지어 있었다. 당황한 예화는 눈동자를 굴렸다. 거기에는 유난히 키가 크고 장대한 체구의 무사도 서 있었다. 그는 무표정이었으나 예화는 어쩐지 그가 자신을 측은해한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 인간이 설마…….’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예화는 설마설마하는 얼굴로 슬쩍 말해 보았다.
“화, 화, 황제……?”
“네.”
미친! 예화는 욕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황제 얼굴에 대고 욕할 뻔했다. 뻣뻣하게 굳은 예화에게서 몸을 떼며 황제, 하율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저를, 아, 아니 소인을 말, 말이옵니까?”
왜, 왜요? 예화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리고 이 손도 좀 놓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황제는 예화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말했다.
“일단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잠시만요. 저 일단 생각 좀 정리하고.”
그러나 예화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뜬 황제가 손목을 잡고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끌려가며 예화는 급하게 사람들을 찾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누가 설명 좀 해 줘! 그때, 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예화 선생.”
“예?”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예화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스물일곱 살……입니다만.”
그 말에 황제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침묵하던 그는 곧 빙긋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군요.”
예화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보았다.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둘을 보고 있었다. 특히나 예화는 잡힌 손부분에 이목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이건 춘화 그리다 걸리는 것보다 황당한 일이다. 황제가 나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끌어안질 않나, 이제는 손까지 잡고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예화가 어떤 상황인지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율이 데려간 방에 자신의 그림이 사방으로 붙여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뜨악하는 예화의 어깨를 잡으며 하율이 빙긋 웃었다.
“우리 천천히 대화해 볼까요, 예화 선생?”

***

둥근 창문에는 살구색 천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리쬐는 여름 햇살에 그림의 색이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천을 뚫고 들어온 햇빛은 가늘고 희미했다. 대낮임에도 어둑어둑한 방을 보며 예화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에서 마주한 그의 그림들 때문이었다.
저건 산속 들어가기 전 마지막 그림, 저것은 밤 꼬박 새어 가며 그렸던 것. 아, 아니 시발 저건 뭐야. 심지어 열여섯 살 때 낙서처럼 그렸던 그림까지 있었다. 예화의 얼굴이 수치감으로 벌겋게 변했다.
‘이 미친! 저것들 다 어디서 얻어 낸 거야?’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니 미심쩍은 부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그림들이 신분불명의 사람에 의해 계속 팔려 나갔었다.
원래는 중간에서 거래 역할을 해 주는 상인이 누구에게 갔는지 이야기를 해 준다. 제 그림들이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는 화공의 마음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중개 상인이 도통 그림을 사들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려 하지 않았다. 예화가 알고 있는 거라곤 계속 한 사람이 그의 그림만 사들인다는 점과, 그가 높은 신분이라는 것 정도였다.
사실 그때쯤, 예화는 이미 산골로 들어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에게는 새 집과 땅을 장만할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림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인지 퍽 궁금하기는 했지만, 다른 누구보다 묵직하게 돈을 얹어 주는 걸 보고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내 그림을 함부로 할 것 같지도 않고, 또 무엇보다 돈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되었지.’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예화는 산으로 들어갔고 그때의 일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마 그 사람이 황제 폐하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냐고.’
그리고 내 평생 그림들이 궁궐에 걸려 있을 거라곤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고. 질겁한 눈으로 보다 예화는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급하게 그림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만에 하나 그가 산에서 그린 춘화가 있을까 봐 부지런히 살폈다. 만약 그랬다간…… 그건 저 열여섯 살 적에 처음으로 팔았던 초기 그림보다도 수치스러운 것이다. 예화는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이곳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마음먹으면 다 알아내시는 거 아냐?’
“멋지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예화는 화들짝 놀랐다. 그림들의 존재에 기겁한 나머지, 그만 옆에 있는 사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율은 손을 들어 그림들을 가리켰다.
“짐이 지금까지 모아 둔 겁니다.”
왜요? 예화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하율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황자 시절부터 선생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께 부담 주기 싫어서 황자라는 걸 숨기고 사들인 겁니다.”
“화, 황송하옵니다…….”
예화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가려진 그의 얼굴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부담 주기 싫다는 인간이 가마 태워서 궁궐에 데려오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율은 고개 숙인 화공을 보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잠적만 하지 않으셨어도 이러진 않았을 겁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예화는 한 번 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황제의 손가락이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은 뺨에 닿았다 턱으로 내려왔다. 검을 잡는 손이라 굳은살이 박인 촉감이 턱을 간지럽혔다. 하율은 턱을 잡아 올리며 웃었다.
“고개를 드세요. 무엇이 그리 죄입니까?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런데 왜 입만 웃고,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냐고 예화는 묻고 싶었다. 하율은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한데 정말 왜 갑자기 산으로 가신 겁니까? 가서 무얼 하신 겁니까?”
야한 그림 그렸어요. 예화는 속으로만 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지 못한 하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좀 섭섭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염없이 기다려도 오지를 않으시니 말입니다.”
“송……구하옵니다.”
“흐응, 되었어요. 다 옛일이 되었잖아요?”
‘그래, 맞아 옛일이지.’ 하율은 중얼거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약간 쳐진 눈매가 미소로 예쁘게 올라갔다.
그걸 본 예화는 긴장한 와중에도 더럽게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저 눈웃음은 여자들이 보면 여럿 기절하고도 남을 터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움찔할 정도로 강렬한 매력인데 말이야. 예화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네?”
하율은 웃기만 했고, 예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예……. 예…… 그렇사옵니다……. 예…….”
그러자 하율의 볼에 붉은 꽃물이 들었다. 예화는 하마터면 얼굴을 구길 뻔했다. 암만 잘생겼다 해도 그렇지 같은 사내가 자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건 보기 좀 그렇다. 만약 상대가 황제 폐하만 아니라면 왜 그딴 표정 짓는 거냐고 한 대 갈겼을 것이다. 다행히, 예화는 제 목숨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화는 하율의 말을 들으면서도 용케 주먹을 올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내 옆에만 있어 주세요.”
예화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네?”
“옛일이라면서요.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삶을 만드실 때가 된 것이죠.”
새로운 삶이라니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걱정 마세요, 선생.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선생께서는…….”
턱을 잡았던 손이 내려와 예화의 두 손을 붙잡는다. 하율이 눈을 반짝거렸다.
“나를 위한 그림만 그려 주시면 됩니다.”
“폐…….”
예화는 혼란스러워서 다시 하율이 한 말을 반복했다.
“폐하를 위한?”
“네.”
“어디에서…….”
“어디긴요. 제가 무엇하러 선생을 이곳으로 모셔 왔겠습니까?”
“그, 그렇다면 궁궐에서 살게 된다, 이 말씀이옵니까?”
하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빠르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예화는 그 칭찬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손목까지 붙든 악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얼굴은 단아한 미인상이면서 힘은 무척 세다. 예화는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저…… 황명이십니까?”
하율이 짐짓 눈을 크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왜요. 부탁이라고 하면 거절할 겁니까?”
당연하죠. 예화는 숨이 턱 막히는 이곳이 부담스러웠다. 밭을 갈며 나오는 것들로 배를 채우며 아무 방해 없이 살아갔던 지금까지의 생활이 훨씬 좋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는 춘화를 그리지 못한다. 절대로. 그 생각이 미친 예화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율의 말이 더 빨랐다.
“거절할 것 같으니 명령으로 할래요.”
“앗! 저기!”
일 났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대답할 시간을 뺏겨 버렸다. 예화가 뭐라도 이야기하려는 순간, 하율이 빙그레 웃었다.
“황명입니다. 이곳에 있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