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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되옵니다, 폐하 (2화)
“저…….”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씨, 따라하지 말라고 새……!
욕을 할 뻔한 예화는 가까스로 그가 황제라는 걸 다시 인지했다.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을 할 뻔했네. 그래, 이분은 황제님이시다. 그것도 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가장 고귀하신 분. 그런 분이 호의를 베풀어 주겠다는데 화공 따위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예화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걸 본 하율이 ‘흐응.’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올라간 눈꼬리에 또렷한 검은 동공, 그리고 사나운 표정만 보면 예화는 기가 아주 센 청년 같았다. 그런 남자가 쩔쩔매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모습은…….
‘음. 이거 그림만 취향인 줄 알았는데…….’
하율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명백히 성욕을 드러내는 질척한 동작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예화는 시선을 아래로 두느라 보지 못했고, 하율 역시 곧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자신이 예전부터 흠모했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어찌 선생님에게 시커먼 마음을 품겠는가. ‘정신 차려야지.’ 하고 홀로 중얼거리다 하율은 손을 놓았다.
“그럼 짐은 이만 정무가 있으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머지는 불러들인 동자들이 소개해 줄 거예요.”
소개라니 무얼요? 예화는 눈으로 물었고, 얼굴에 맞지 않게 순진한 눈빛을 본 하율은 그만 다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뺨을 가볍게 ‘톡 톡’ 쳤다. 깜짝 놀란 예화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았다.
하율은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기겁했을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하율이 말했다.
“정무 끝나고 다시 올게요. 부디 여기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어우우우…….”
하율이 나가자마자, 예화는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빠져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는 신음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림들이 보였고, 예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저, 좆같은 것들 좀 치워 좀. 제발! 특히, 저것 좀! 십 대 때 그렸던 그림을 보며 예화는 얼굴을 가렸다.
“낯 팔려 뒈지겠다, 진짜.”
마음 같아선 큰 소리로 욕하고 싶은데 바깥에 누가 들을까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는 지끈거리는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뱉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지랄 같은 일들이…….”
우선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들부터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 나라의 황제님께서 자신의 하찮은 그림을 수집하셨단다. 유명한 선생님들을 제치고 선택된 예화는 그러나 그 사실을 몰랐고, 결국 산으로 잠적하게 되었다. 그러자 황제님은 그를 궁궐로 데려왔고, 또 은둔을 할까 봐 아예 궁에 자신을 두겠다는 소리를 하셨다.
‘황제 폐하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라고?’
황송이니 영광이니 허울 좋은 소리들을 집어치우고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처음에 드는 감정은 거부감이었다.
“야한 걸 못 그리잖아, 야한 걸. 아니지…… 시발, 그 폐하도 남자이신데 의외로 좋아하는 거 아냐?”
황제이기 이전에 같은 남자잖아. 그것도 혈기왕성한 청년이시니 좋아할지도 모른다. 예화는 ‘흐으음.’ 하고 신음을 뱉다 고개를 저었다.
“미친 소리하고 앉아 있네. 폐하가 어디 보통 사람이냐.”
가장 고귀한 혈통이라는 황족, 거기다 그들 중 제일 높은 황제님께서 야한 그림을 보며 히히덕 웃는다고? 예화는 상상 자체가 불경이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 일어났다. 그때, 문 바깥에서 누군가 불렀다.
“예화 선생님?”
종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안에 계시나요오?”
“네, 계십니다아.”
예화가 말투를 따라하며 문을 열려고 하니, 상대 쪽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예화는 눈을 깜빡거리다 곧 투덜거렸다.
“어이고, 깜짝이야. 먼저 열 거면서 왜 불렀대?”
소년들은 동시에 ‘히이.’ 웃어 보였다. 열세네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들은 서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댕그란 눈에, 발그레한 뺨 위로 콕콕 딸기 씨 같은 주근깨들이 박혀 있는 것까지. 예화는 좌, 우를 번갈아 보다 ‘아.’ 하고 말했다.
“쌍둥이?”
“네, 그렇습니다!”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드니 옆에 있는 아이도 같이 손을 든다. 그러곤 동시에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예화는 하마터면 귀를 막을 뻔했다. 그는 괜히 민망하여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소리 지르나요. 바로 앞에 있는데.”
두 아이들이 눈을 댕그랗게 뜬다.
“엇? 존댓말 쓰셨어요? 왜요, 왜요? 말 놓으세요.”
“초면이니까…….”
“아니에요! 편하게 부르세요.”
예화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느릿하게 말했다.
“큼…… 너희들이 그럼 그 동자들이냐?”
“네, 맞아요!”
그중 한 아이가 환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 이름은 기로와이고, 얘 이름은 기로운이에요. 보다시피 형제고요.”
똑같이 웃는 모습을 보며 예화는 자신이 둘을 과연 구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저희들은 도화원의 학생들입니다! 선생님.”
“도화원?”
“궁에서 화공들이 지내는 곳이죠. 저희같이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도 있고, 궁중 행사 때 그림을 그리시는 높은 선생님들도 계셔요. 저흰 아직 한참 부족한 학생들이지만요. 그래두 선생님께서 그림을 그리실 때 도움을 드릴 수 있게 선택되었어요.”
열심히 설명하던 로와가 막 숨을 헐떡거리자, 옆에 있던 로운이 말을 이었다.
“여기는 황제 폐하께서 선생님의 그림을 전시한 방이고요, 선생님께서 지내실 곳은 따로 있어요.”
예화가 눈을 크게 떴다.
“따로?”
“네, 저희들이 미리 둘러보았는데요…….”
두 아이는 서로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좋아하실 거예요!”
자신감에 찬 목소리에 예화는 얼떨떨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들은 똑같은 웃음을 보이더니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손짓을 하며 같이 나가자고 재잘거렸다.
예화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예전에 그렸던 그림들이 예화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닭살이 오도도 솟고, 손이 자꾸만 주먹을 쥐게 되었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들을 따라나섰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예화는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햇빛에 진녹색 잎사귀들이 반짝였다. 버드나무가 기다란 팔을 흔들 때면, 작은 잎들이 우두두 떨어져 연못을 덮었다. 그러자 금색 잉어들이 수면 위로 올라가 나뭇잎을 갖고 장난질을 쳤다.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예화는 콧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보았다. 궁에 있는 아이들이라 그런지 위압감을 전혀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있잖아요, 선생님!”
로와가 소매를 죽죽 잡아당겼다. 방금 만난 사이답지 않게 대하는 투가 친근했다.
“폐하께서 선생님 그림 엄청나게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몰랐는데 방금 알게 되었지.”
“여기 궁궐 사람들은 다 알아요. 폐하께서 매일 그 그림들이 전시된 방에 들르시거든요. 우리 같은 화공들조차 알게 될 정도로 꼬박꼬박 보셔요.”
예화는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나름대로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최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춘화로 길을 바꾼 이유도, 수많은 천재들의 그림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화는 도대체 하율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는지 이해 가지 않았다. 멋쩍어진 기분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 있길래 이리 한참 걷는 거야? 끝도 없다.”
“도화원은 궁의 가장 끝 쪽에 위치해 있어요. 사실 담벼락만 넘으면 바로 민가들이 있어서, 궁이라고도 뭐한 곳이에요.”
예화가 눈을 크게 떴다.
“아, 화원에 가는 거였냐?”
“선생님 처소가 그 근처거든요. 화원은 다음에 모시고 갈게요. 어, 곧 다 와 가요, 저기 지붕 보이시죠?”
과연 푸른 소나무들 너머로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커다란 궁에 비해 작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궁에 비교해서였다. 반짝이는 붉은 기와와 비싼 오동나무 기둥으로 만든 집을 보았을 때, 예화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양쪽에서 아이들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예화는 결국 얼떨결에 집 안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집 안은, 예화를 두 번 놀라게 만들었다.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돌아보던 예화는 그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
두 아이는 동시에 돌아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 얼굴에 ‘거 봐요,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예화는 좋다기보다 너무 놀라서 기절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눈앞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재료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화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몇 발자국 들어갔다.
오른편에는 널찍한 방이 있었다. 그곳에는 침대와 탁자 등 깨끗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는데, 제법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화의 눈길에 닿지도 않았다. 예화가 정말로 놀란 까닭은 이 넓은 집의 대부분을 차지한 다른 방이었다.
그 방에는 새하얀 화선지들과 여러 종류의 붓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예화가 다녔던 화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앞에 놓인 벼루들은 무려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평범한 돌로 된 벼루도 귀하게 들고 다녔던 예화가 보기에 그것들은 전부 기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예화는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아 눈을 깜빡거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구석구석 둘러보던 예화는 무언가를 보고 소리 질렀다.
“석채(石彩)?!”
예화같이 평범하고 젊은 화공은 꿈도 못 꿀 것들이 투명한 유리병들 안에 담겨 있었다. 석채는 탱화를 그리거나 색을 칠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절구로 돌을 곱게 갈아 만든다. 활용하는 방법이 까다로울뿐더러, 무엇보다 엄청나게 비싼 재료였다.
“아!”
아이들이 옆으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유리병 하나를 들었다.
“안 그래도 이거 설명드리려고 다 외워 놨어요!”
예화는 여전히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채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것들을 만든 재료가 평범한 돌이 아니라서요!”
병을 든 로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로와가 말했다.
“로운이가 들고 있는 건 금이에요!”
“……응?”
예화는 잘못 들었나 싶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로운이 자세히 보라면서 병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노랗고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곱게 담겨 있었다. 그것을 찬찬히 보던 예화는 별안간 ‘헉.’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들이 신이 나 말한다.
“황금을 다 갈아 만든 거래요! 그리고, 그리고 이거 군청색은 남동광!”
“자색은 자수정! 이건 오에서 들여온 공작석으로 만든 거래요.”
“그리고 저건…….”
“아, 저건…….”
분홍빛이 도는 하얀 가루를 보며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값비싼 보석들을 갈아 만든 것이라고 이야기한 사람답지 않은 순진무구한 표정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하얗게 질린 예화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아, 기억났다!”
로와, 로운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
예화는 듣다못해 둘의 뒷덜미를 잡았다. 때마침 산호가루를 들고 있던 아이들이 ‘어어.’ 하고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아 예화는 기겁하며 병을 빼앗아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살포시 둔 다음, 아이들을 잡고 뒤로 질질 끌었다.
“선생님, 선생님! 산호가 뭐냐면요, 바다에서만 나는 건데…….”
“그게 좆같이 비싼 거라는 건 나도 아니까 그만해라.”
“으잉…… 욕 쓰셨어…….”
두 아이가 구석으로 끌려가 아랫입술을 내민다. 예화는 기가 찬 눈으로 보다 말했다.
“니들 대체 몇 살이냐?”
“열세 살이요!”
“그 정도면 먹을 만큼 다 먹었는데…….”
짤랑거리는 게 왜 이렇게 열 살 아가들 같냐고 타박을 주려다 관두었다. 미더운 구석은 없었지만 현재 아무것도 모르는 예화가 의지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화는 한숨을 쉬다 탁자에 놓인 작은 화선지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구김 없이 반듯하였고, 옆에는 언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마어마한 재료에 경악하기만 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니 작은 설렘이 느껴졌다. 예화는 화공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꿈꿀 만한 장소에 있으니 어찌 들뜨지 않을까. 다만 예화는 그것을 내색하고 싶지 않아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한 장만…… 그려 볼까.’
붓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눈길을 주었다. 가볍게 손을 풀만 한 용도로 어떤 것이 좋을까 보는 사이, 문득 예화는 아이들이 퍽 조용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금세 아이 한 명이 없어졌다. 다른 아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물을 뜨러 갔어요.”
“……?”
“그리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예화는 조금 놀랐다. 되도록 티를 안 낸다고 한 건데도 금방 알아차렸나 보다. 심지어 아이는 옆으로 다가오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럼 제가 먹을 갈아도 될까요, 선생님?”
먹을 가는 거만 계속 배우고 있어서. 아이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예화는 생각보다 아이들이 눈치가 빠르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좀 더 누그러진 음색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전 기로운이에요. 물 뜨러 간 애가 기로와.”
“……많이는 갈지 말고. 조금만 그릴 테니까.”
“네! 그럼 이거 어때요?”
아이는 먹이 있는 곳을 금방 찾아내었다.
“송연묵이에요. 홍에서 나는 소나무로 만든 묵이라던데요? 그 나라라는 온통 산이라서 좋은 나무들이 많대요.”
“너희는 그걸 어떻게 다 아냐?”
“다 배워 놨어요. 선생님을 잘 모시라고 계속 언질을 주셨거든요. 스승님께서는 영 못마땅하신 눈치셨지만…….”
로운은 금방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예화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 때문에 재료들을 외우느라 고생하는 제자들이 보기 좋았을 리 만무하다.
“그 스승님도 화원에 계시는 거냐?”
“그렇죠! 저희 스승님은요…….”
그때, 로와가 물을 들고 왔다. 나무통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며 바닥을 조금 적셨다. 히히 웃는 제 형제를 보며 로운은 말하던 것을 까먹고 달려갔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뭐가 좋은지 다시 웃는다. 동갑내기 쌍둥이라 그런지 사이가 퍽 좋아 보인다. 형제가 없는 예화는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먹을 갈도록 할게요.”
“그래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화는 창을 보며 기다렸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예화는 눈살을 살짝 찡그리며 로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바와 달리, 먹을 갈기 시작한 아이는 한참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는데…….”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예화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가볍게만 그린다고 말했잖아.”
그 말에 옆에서 턱을 괸 채 발만 구르고 있던 로와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도 예화 선생님께서 그리실 그림인데 어떻게 그래요.”
그러는 너야말로 지루해 난리도 아니지 않냐고 예화는 생각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먹 향을 맡으며 예화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먹을 움켜쥔 손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갈려 나가는 먹 소리는 묵직하고 부드럽다. 먹을 갈고 있는 로운은 온 집중을 그곳에 쏟고 있었는데, 주근깨 위로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너무 열심히 하는 모습에 예화는 난감함을 느꼈다.
물론 수묵화에 있어 먹을 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힘을 빼고 조급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면서도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력이 흩어져서도 안 된다. 그래야 좋은 먹빛으로 그림을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로운이의 자세는 어린 소년답지 않게 아주 진지했으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 맞았다. 문제는 지금 예화가 그릴 그림은 그렇게 공들여 만든 먹색으로 그릴 정도로 대단치 않다는 것이다.
예화는 그만하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보니까 먹 가는 것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화공에게 있어 중히 여기는 것은 집중력이다. 함부로 깨뜨려서는 안 된다. 결국 예화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로운은 그제야 웃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먹을 묻힌 손으로 볼을 닦으며 말했다.
“다 했어요, 선생님.”
예화는 손으로 밤톨 같은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래 보이네, 까망아.”
“엇, 제가 왜 까망이예요?”
“까만색이니까. 가서 씻고 와라.”
그 말에 로와가 보더니 ‘푸하하.’ 웃는다. 로운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둘 다 나갔다 와.”
예화가 제 머리를 풀며 말했다. 먹처럼 까만 머리카락이 목을 덮는다. 그는 애매하게 긴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림 그릴 때 누가 있는 거 부담스러워.”
그 말에 아이들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이 있으면 안 되겠냐고 땡깡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역시나 눈치가 빠르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 중 저 아이들 보고 자신을 도와주라 한 건가.
예화는 그럼 이따가 다시 오겠다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평생 꿈도 꿔 본 적 없는 재료들이 그의 옆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예화의 입술이 저절로 달싹거렸다.
“도대체 왜.”
왜 폐하는 내 그림을 좋아하는 거지? 그토록 높은 분이 어떻게 내 그림을 본 거야. 그리고 여러 궁금증 중 가장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질문을 꺼낸다.
‘내 그림의 무엇을 보고?’
***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짧은 정무가 끝나자마자 하율이 대뜸 말했다. 그러곤 발길을 돌리더니 궁 바깥쪽으로 걸어갔다. 옆에서 걷던 진록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말입니까?”
“잠깐 선생 좀 뵈러. 모셔 놓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하율이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내저었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궁녀와 내관들이 서둘러 사라졌다.
이 간단한 명령은 몇십 년 전만 해도 불가했던 것이었다. 신변상의 문제로 황제가 어디로 가든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아무리 믿음직한 내관을 뽑아도 황제의 은밀한 정보는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역대 황제들은 자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제 뒤를 쫓아오는 사람들에게서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했다.
하율은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들을 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남들에게 보이는 인형 같은 웃음이 아니었다.
“날파리들이 사라졌군.”
자신을 모시는 사람들을 향해 가차 없이 날리는 ‘날파리’라는 표현에 진록이 눈썹을 살포시 찡그렸다.
“아직 남았는데.”
진록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쪽은 가라 해도 안 가는 끈질긴 사람이지.”
진록은 묵묵하게 가만히 있었다. 눈썹을 찡그리긴 했으나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하율은 슬쩍 그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말없이 있던 황제는 다른 미소를 보였다. 이번에는 보다 편안한 웃음이었다.
“그럼 편하게 이야기나 해 볼까. 선생 말이야, 스물일곱 살이래.”
“우리보다 어리네.”
“젊은 화공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보다 어린 나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그림들을 그려 내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하율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담겨 있었다. 황갈색 눈동자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고, 미소는 봄 햇살처럼 따스하다.
진록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언제부터인가 하율이 그의 그림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는 건 가장 가까운 벗인 진록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율이 그 그림과 화공에게 흠모를 품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멋대로 끌고 들어와 가두어 놓는 것이 올바른 표현은 아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발 밑에 있는 하율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최선이겠지만.
“도화원 사람들처럼 할 생각인가?”
그 말에 웃던 하율이 고개를 기울인다.
“무슨 말이야?”
“궁에서 일하되, 외출이 자유로운 사람들 말이다.”
“음. 글쎄…… 그건 생각 안 했는데.”
그렇다면 정말 이 안에만 둘 생각이었나? 진록이 과격한 방법에 놀라는 사이 하율이 말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다.”
“아니. 말해 봐.”
“……장수는 전쟁에서 가장 빛나듯이 화공은 바깥 풍경들을 눈으로 받아들여야 가장 빛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나.”
하율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약간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너는, 전쟁이 아니라 내 옆에 있기에 빛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보네?”
진록은 당황했다.
“그건 아냐. 난 황제 폐하를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어.”
하율은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진록은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주변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다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를 보며 하율이 입을 열었다.
“예화 선생도 너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되면 빛나실 거야.”
“……뭐?”
“나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자부심으로 살게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지.”
하율의 음색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진록은 어디서부터 반박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견해였다. 진록은 새장 속 새를 자유롭게 놓아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 새가 주인을 사랑해 새장 바깥으로 나갈 필요를 없게 만들면 되지 않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기적이다. 그러나 정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황제이기 때문이다.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라는 황제의 말이 어찌 틀렸는가. 결국 진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본 하율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앞장서 걸었다.
***
붓이 부드럽게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연못에서 보았던 작은 금붕어 한 마리였다. 꽃잎 같은 꼬리를 기억해 내며 예화는 붓을 움직였다. 그러자 선이 살아나며 활력이 불어넣어졌다.
처음에는 정말로 선만 그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운이 갈아 준 먹색이 무척 좋았으며 붓 역시 예화와 잘 맞았다. 예화는 어느새 푹 집중하며 그림을 그려 내려갔다. 마침내 물속에서 살랑거리던 꼬리까지 완성했을 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문질러 닦았다. 더운 숨이 저절로 나왔다.
“후우!”
사람 그리는 데 빠져서 다른 것들은 붓질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얼마 만에 그려 보는 동물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그려 보니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예화는 붓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잠깐 동안 제 그림을 보다 옆으로 치웠다.
그림 하나를 그리자 긴장했던 몸이 차츰 풀려 간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익숙한 먹 향을 맡고 있으니 잠깐 동안 산속의 집에 있는 기분이었다. 예화는 턱을 괸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계속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그제야 펴졌다.
‘한 장만 더…….’
그래서였다. 긴장이 좀 풀리니 그림이 더 그려 보고 싶었다. 예화는 보다 작은 붓을 찾아냈다. 세밀한 부분을 그릴 때 쓰는 붓으로 다른 화선지에 곡선을 긋는다. 넓은 부분은 두고 구석에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심상치 않다. 과연 예화는 여인 한 명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러다 치마를 그려야 하는 부분에서 손이 멈칫했다.
잠깐 동안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발이 ‘탁탁’ 하고 빠르게 바닥을 두드렸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머릿속에 있는 장면은 따로 있는데 이걸 담아내도 되나.
“아, 뭐 어때. 그리자마자 찢으면 되지.”
‘그래, 시발. 여기가 내 집이라며.’
멍하니 생각하며 붓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러자 치마를 그려야 하는 자리에 맨다리가 생겨났다. 둥근 엉덩이 밑살이 오른 다리를 보며 예화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잠깐 보다 결국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건 안 되겠다.’
아무리 자신의 거처라지만 그 전에 이곳은 궁궐이다.
‘어휴 미친 새끼. 그사이를 못 참고……!’
예화는 스스로를 욕하며 급하게 벼루 위에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종이 귀퉁이를 찢으려고 손을 갖다 댄 순간이었다.
“그림 그려요?”
부욱. 손이 저절로 힘이 들어가 화선지를 찢어 냈다. 예화는 뒤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하.’ 하는 작은 웃음소리를 듣곤 기겁하여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문가에 하율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