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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되옵니다, 폐하 (3화)
그는 방실방실 웃으며 보고 있었는데, 예화는 사람이 웃는 것이 이리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안 그래도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또르르 뺨 위를 타고 내려갔다.
“일단 진상품에서 받은 것들을 추려 되는대로 모아 두었어요. 혹시 부족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지 않은가. 평생 동안 돈을 벌어도 못 살 것들인데. 하지만 예화는 입술이 떨려서 감사의 인사를 표하지 못했다. 그사이 하율이 웃으면서 다가오려 했다.
“헉!”
예화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그림을 ‘꽉’ 구겨 버렸다. 황갈색 눈동자가 손으로 향한다.
“그것은……?”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덜덜 떨리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예화는 그것을 급히 등 뒤로 숨겼다. 그것을 의아하게 보던 하율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심상치 않은 얼굴이었다.
“있잖아요.”
하율이 앞으로 걸어갔다. 우아한 걸음걸이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부드러운 발소리에 예화는 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금비녀 끝에 걸려 있던 홍실이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렸다. 이윽고 손이 가슴팍까지 들어 올려졌다. 예화를 향해 손바닥을 펼친 황제는 더 짙게 미소 지었다.
“그런 얼굴로 더듬거리면 더 수상한 법이잖아요. 그렇죠?”
하율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했다.
“그거, 보여 줘요.”
손바닥에서 나온 땀이 종이를 적셨다. 예화는 차라리 그림이 뭉개졌기를 바라며 있는 힘껏 쥐었다. 하얗게 질린 예화를 보며 하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실까.”
“그, 저기, 그게, 어.”
“그림 아닌가요?”
뭐라도 말하려 했던 예화는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언이 곧 긍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율은 모른 척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래요?”
그거야 내가 잠깐 정신 놓고 그린 춘화니까요!
예화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윤예화, 이 등신 새끼야! 어떻게 여기서 춘화를 그리냐. 내가 미쳤지.’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예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 미흡한 그림이라……. 감히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음. 난 괜찮은데?”
으아악! 예화는 속으로 소리 질렀다.
‘내가 안 괜찮아요!’
“난 그냥 선생의 그림이 보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어떤 그림이든 전혀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하율의 뺨이 발그레했다. 기대감 어린 눈이 반짝거렸다.
“궁에서 처음 그린 그림이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뭔 썩을 놈의 의미! 의미라고 하자면 오늘이 제삿날이라는 것 정도다. 그것도 ‘황제 폐하께 춘화가 들켜서’. 예화는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사납게 생긴 눈매가 일그러지자 하율이 눈을 크게 떴다.
‘……흐응.’
또 저 표정이다. 얼굴과 맞지 않은 약한 표정. 날이 섰던 눈빛이 살려 달라며 애달프게 변하자 하율의 손이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뺨을 쓰다듬을 뻔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송구하옵니다!”
“……?!”
갑자기 예화가 입안으로 종이를 쑤셔 넣었다. 관찰하고 있던 하율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어…….”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을 본 예화는 이제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음란죄로 죽으나, 명령 불복종으로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수치심이라도 없는 후자가 낫다.
입안으로 들어온 텁텁한 감촉이 불쾌하다고 여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눈을 크게 뜬 채 보고 있던 하율이 별안간 미소를 지웠다.
“이런.”
“……!”
툭 건네진 목소리는 낮고 싸늘했다. 지금까지 사근사근했던 음색과 전혀 다르다. 그 차이에 예화는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하율은 갑자기 왼손으로 어깨를 잡아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빠르게 예화의 입안을 쑤셨다. 예화의 어깨가 곤두세워졌다.
“웁!”
차가운 손가락이 거침없이 혀를 눌렀다. 미끈한 혀가 급히 빠져나오려 했으나 강한 힘이 방해했다. 엄지가 혀를 꾹 누른 채로 목젖 앞까지 넣었던 종이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저절로 입이 닫혔고, 치아가 검지와 중지를 건드렸다. 그걸 보며 하율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깨물게?”
헉. 예화는 송곳니로 내리찍으려다 정신을 차렸다. 그 바람에 입술만 오므리다 다시 벌어졌다. 두려움이 섞인 눈을 보며 하율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더 과감하게 손가락을 놀렸다.
예화의 몸이 흔들리자 하율이 어깨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예화는 어떻게든 뒷걸음질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종이 빼앗는 걸 실패한 하율은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렸다. 성격이 나빠 보이는 험악한 웃음이었다. 그는 예화를 벽 쪽으로 밀어 버렸다.
“읏……. 잠시만 지금……. 우욱!”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예화의 입안으로 다시 손가락이 들어왔다.
혀와 손가락이 서로 비벼지고 부딪친다. 그사이 벌써 종이는 진득하게 녹아 있었다.
“아, 이런.”
하율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천장에 붙어 버렸어요.”
“읍, 우웁……!”
둥근 손톱이 입천장을 긁었다. 종이가 묻은 여린 천장을 살살 긁자, 별안간 예화의 몸이 튕겨 올랐다. 마치 물가에 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뒤척였으나, 하율은 봐주지 않았다. 잔해 조각을 긁어내기 위해 느릿하게 만졌다. 그러자 까만 눈동자 밑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웁, 욱…….”
그 신음 소리에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던 하율이 멈칫했다. 제 앞에서 그림을 먹어 버리는 행동에 이성을 잃었다가 이제서 예화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예화는 두 손으로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손톱으로 옷자락을 긁었지만 감히 옥체를 상하게 할 수 없어 연거푸 미끄러졌다.
하율은 손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입안에 있던 손가락을 살짝 빼내 줬다. 그러자 찔걱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에 고였던 타액이 턱으로 떨어졌다.
‘웁.’ 하며 황급히 입술을 우물거리는 예화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맺혀 있는 그것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그걸 보는 순간 하율은 난폭한 충동이 올라왔다.
“욱!”
그래서 막 빼내려던 검지를 다시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종이와 혀를 한데 묶어 비벼 댔다. 손가락이 따뜻하고 질척한 입안을 희롱하자 찌걱거리며 물소리가 났다. 숨을 쉴 수 없게 된 예화의 얼굴이 붉어지고, 마침내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하율은 그제야 손을 빼내 주었다.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욱…….”
기침을 하다가 종이가 튀어나올까 예화는 입을 다문다. 하율이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마주했다.
“그게 그렇게 보여 주기 싫어요?”
“…….”
“응?”
“……네.”
작은 목소리에 하율은 미소 지었다. 나른하고 포만감 어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느긋한 미소와 달리 눈빛은 여전히 예사롭지 않다. 하율은 다정한 어조로 달래듯이 말했다.
“좀 심했죠? 승부욕이 강해서……. 갑자기 그 모습을 보니 자극을 받아 버렸네요.”
예화는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입안을 쑤시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안에 있는 종이가 나올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율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둘 다 잘못했으니 우리 무승부로 해요.”
“……?”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하자는 거예요.”
예화의 얼굴이 밝아진다. 냉큼 입안에 든 것을 뱉어 버리려던 찰나였다.
“잠깐만.”
하율이 웃었다.
“아무리 뭉개졌거니 그게 입 바깥으로 나오면 흔적이 남는 거잖아요.”
예화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율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삼키세요. 꿀꺽.”
“어어…….”
“두 눈으로 그것이 사라져서 가져가지 못한다는 걸 봐야겠습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왜 또 삼키라고 난리야. 예화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자신을 책망했다. 이 나라의 황제가 미쳤다면 나라 꼴이 벌써 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나랏님께 실성했냐는 생각은 조금 심했다. 거기다 자신은 방금 눈앞에서 종이를 입에 넣는 불충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용서해 주신단다.
‘까라면 까야지, 시발.’
예화는 목을 잡고 눈을 감았다. ‘꿀꺽’ 하고 종이를 넘겨 본다. 영 개운치 못한 감촉에 눈썹을 찡그렸다. 목이 막혀 몸이 긴장되었으나 가까스로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가만히 기다리던 하율이 입술을 본다.
“삼켰어요?”
그래, 새꺄…… 아 또. 예화는 자꾸만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밉상이었기에 좋게 봐주기가 힘들었다. 예화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정말?”
예화는 그만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이제야 느꼈는데 하율은 자꾸 대답하기 싫은 걸 확실하게 묻는 구석이 있었다. 울컥 감정이 올라왔지만 참아 내었다.
‘황제 폐하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황제 폐하…….’
참자, 참자. 성질을 부릴 때가 아니다. 황제 폐하 앞에서 종이를 먹은 이 미천한 것이 죄인이다. 달게 받아야 한다. 참아라. 주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황제 폐하를 속으로 웅얼거린다. 예화는 기운이 점차 빠져 가는 걸 느꼈다.
“다 삼켰습니다.”
“아, 그래요? 입 벌려 봐요.”
이제 예화는 대체 왜 이러시냐고 반항할 힘도 없었다. 까라면 까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되씹으며 입을 벌려 주었다. 내려다보는 하율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위로 올렸다. 몸이 다시 긴장되는 걸 느끼며 로와가 떠온 물로 헹구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잘했어요.”
하율이 어린아이에게 칭찬하듯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입술에 묻은 타액과 종이 찌꺼기를 옷소매로 닦아 내렸다.
꼼꼼하게 아랫입술을 문지르는 행동에 예화는 어째 부끄러움을 느꼈다. 거기다 아무리 같은 남자라 해도 절세미인인 사람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민망하고 난처하다.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며 하율은 미소 지었다. 예화가 미처 보지 못한 웃음에는 끈적함이 있었다.
‘아, 정말…….’
오싹오싹하게 만드네, 우리 선생님. 하율은 이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괴롭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건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궁으로 모셔 오면 정중하게 대접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이렇게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율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입에 닿던 부드러운 비단 천이 떨어지자 예화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직도 목 안에 남아 있는 껄끄러운 맛이 감돌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께 너무 함부로 군 것 같아서요.”
그러자 오히려 예화가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속으로 욕을 질펀하게 했던 터라, 차마 자기 잘못인데 무얼 그러시냐고 말하지는 못했다. 하율은 피식 웃고는 뒤를 돌았다.
“잠깐 자리에 앉을까요?”
하율은 먼저 자리에 앉고는 옆에 있던 의자를 뒤로 끌었다.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으려 했던 예화는 난처함을 느꼈으나, 별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는데 마침 하율이 물고기가 그려진 그림을 봤다. 하얀 손가락이 저절로 그림을 향했다가 멈췄다.
“봐도 돼요?”
“아, 네?! ……네, 보세요…….”
화들짝 놀랐던 예화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율은 화선지 끄트머리만 잡은 채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눈으로 말없이 감상했다.
침묵이 돌자, 예화는 괜히 멋쩍어서 창 쪽을 보았다. 이제 보니 창풍지에 사람 그림자가 서 있었다. 황제 폐하가 혼자 오셨을 리는 없을 테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대체 왜 또 온 거지? 예화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림이네요.”
약간 잠긴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낮게 깔린 음색에 예화는 옆을 보았다. 하율은 그 말만 뱉고 여전히 그림을 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잘게 흔들렸다.
‘어.’
예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찬찬히 보았다.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와 본래도 밝았던 눈동자가 금색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 위아래로 훑을 때마다 같은 금빛이 또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관찰하던 예화의 손이 움찔거렸다.
계속 달라지는 색채와 움직임, 그러나 동공 안에 담긴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는다. 한번 움찔거리기 시작한 손이 계속해서 움츠려 들었다. 마치 길고 매끈한 무언가를 쥐기 소망하는 것처럼 움찔, 움찔.
“아, 그런데 선생.”
“웍!”
갑자기 갈색 동공이 예화 쪽으로 향했다. 예화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가 본인이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하율이 눈을 깜빡거리다 웃는다.
“하하하.”
“소, 송구…….”
“미안할 게 뭐 있나요. 갑자기 불러서 그런 건데.”
하율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이거 가져가도 되나요?”
“어, 그것은…….”
예화가 우물거렸다.
“정말 간단하게 그린 거라서 드리기가…….”
“선생께는 그럴지 몰라도 한참 기다렸던 누군가에게는 값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하율의 눈빛이 퍽 진지했다. 예화는 어차피 말려도 그가 듣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율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하얀 피부에 옅은 분홍 물이 들고,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가며 진주색 치아가 도드라졌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응시하던 눈빛이 한순간에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그걸 보며 예화는 아까 뒤란에서 보았던 꽃들 중 하나가 떠올랐다.
‘모란.’
꽃송이가 풍성하고 그 빛깔이 고우면서도 화려하여 어떠한 꽃들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꽃. 그러면서도 경박하지 않다. 커다란 꽃잎들을 품고 있는 자태는 화려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태를 뽐냈다.
하율의 웃음은 모란을 닮았다. 화사하면서도 남이 얕볼 수 없는 미소. 예화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집중할 때 나오는 눈빛이었다.
“선생?”
예화는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폐하.”
그 음색이 몽롱하다. 아까 전에 곤두세웠던 경계와 긴장감이 없어져 있었다.
‘음?’
하율이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한순간 술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노곤해진 모습이 신기했다. 뺨이라도 두드려 자신을 보게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예화의 까만 눈동자가 붓을 향해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선은 정확하게 화선지와 붓에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솔직한 눈빛이었다. 하율은 소리 없이 웃었다.
‘원래는 담소나 나누고자 했지만…… 저렇게 그림 그리고 싶다는 티를 내는데 어찌 방해할 수 있겠나.’
“먼저 가 볼게요. 그러고 보니 이따 해야 할 게 있어서…….”
하율은 놀라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그리고 오늘은 경황이 없어서 준비를 못 한 거예요. 내일부터 제대로 모실게요.”
‘제대로’라는 말에 예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불길한 단어는 그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그사이 언제 일어났는지 하율은 몸을 돌려 나갔다. 혼자 서 있게 된 예화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예화가 넋을 놓은 사이, 하율은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창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록이 하율의 앞에 섰다. 그곳엔 진록뿐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있었다. 서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이었다. 진록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얌전히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하율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따로 상을 내리마. 그러니 보다 성심껏 선생을 모셔야 할 것이야. 알겠지?”
그중 한 아이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으려 했으나 옆에 있는 형제가 황급히 옷소매를 붙들었다. 더욱 깊이 조아리는 형제를 보며 하율은 작게 웃고는 지나쳐 걸었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뜰을 지나 다리를 건너는 동안 진록도 묵묵하게 뒤를 따랐다.
조용한 공터에서 하율은 ‘하.’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안 되겠다.”
하율이 고개만 돌려 말했다.
“별궁으로.”
진록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낮부터?”
“낮이고 밤이고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하고 싶다는데.”
잠깐 동안 말이 없던 진록이 입을 떼었다.
“하지만 이따가 만나기로 한 남…….”
“장군.”
나직하게 부르는 하율은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달려들 것같이 잔뜩 흥분한 얼굴이다. 진록은 의아했다. 온화한 미소로 화공을 보러 갔으면서 왜 정욕이 들끓는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 걸까? 무엇을 보았기에.
진록이 의아해하는 동안 하율은 날카로운 웃음을 보였다.
“별궁으로 간다 했습니다.”
존대로 바뀌었다는 건, 황제가 내리는 명이라는 뜻이다. 진록은 이것저것 묻는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순순히 호위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진록이 더 이상 항의하지 않을 것임을 안 하율은 표정을 풀었다.
“자, 이거.”
이 와중에도 하율이 소중하게 들고 있던 그림이었다. 하율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준 선물입니다. 가서 내관에게 주면 알아서 보관해 줄 겁니다. 물론 짐이 꼭 조심히 다루라고 말했다고 덧붙여 주세요.”
“그럼 호위는…….”
“뭐, 궁이 얼마나 걸린다고. 갔다 오세요.”
진록은 반대하려 했으나, 하율은 이미 싱글싱글 웃으며 걸어가 버린 후였다. 뒤쫓지 말라는 기세에 진록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별궁은 진록이 떠난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서쪽에 위치한 그곳은 커다란 나무들에 가려져 음습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곳으로 걸어가며 하율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선하게 생긴 얼굴에는 아까보다 더 선명한 성욕이 드러나 있었다.
‘단지 욕구 불만이라 그런 거겠지.’
하율은 부드러운 입술을 핥았다. 아까 전 예화의 입안을 희롱할 때부터 느낀 쾌감이 더 짜릿하게 올라왔다. 하율은 요 근래 성행위를 하지 못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안 그러면 고작 입에 손가락을 넣은 것 가지고 이렇게 흥분할 리가 없다. 그래…… 요즘 욕구를 풀지 않아 그런 거야. 그런 것일 게야.
폐궁이 되었으나 지금은 은밀하게 계속 사용하고 있는 작고 어두운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하율은 입꼬리를 올리며 뇌까렸다.
“정말…… 얼굴까지 취향일 건 없으셨는데…….”
***
늦게야 정신을 차린 예화는 물로 계속해서 입을 헹구었다. 텁텁한 잔해들이 혀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찬물을 입에 한 움큼 넣은 다음 땅바닥에 뱉어 버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에 줄줄 흘러나오는 물을 거칠게 닦았다.
“아, 시발 후, 진짜 내가 다시는 그딴 거 그리나 보자.”
예화는 물 섞인 침을 ‘탁’ 뱉었다. 그걸 본 쌍둥이 소년들이 ‘오오.’ 하고 감탄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왜.”
“궁에서 침 뱉는 거 처음 봤어요.”
머쓱해진 예화는 슬쩍 신발로 흙을 끌어다 덮었다. 흙 위를 ‘꾹꾹’ 밟아 주고 다시 쌍둥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희들, 도화원의 학생들이라 하지 않았냐? 수업은 어떻게 하고 벌써 돌아온 거야.”
로와와 로운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 하고 동생이 입을 떼는데 갑자기 로와가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러더니 생글생글 웃는다.
“황명이 먼저지요, 헤헤헤.”
‘앗.’ 로운이가 눈을 댕그랗게 뜨더니 형을 따라 배시시 웃어 보였다. 딱 봐도 수상한 웃음에 예화가 눈가를 찡그렸다. 이 녀석들 무슨 꿍꿍이야. 저렇게 의심스러워 보이는 웃음 짓기도 힘들겠다.
“그럼 수업 안 들어도 되는 거야?”
“뒤에서 선생님 하시는 걸 보는 게 곧 배움 아니겠어요?”
넉살 좋은 로와의 말을 들은 로운이가 ‘와.’ 하고 감탄한다.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하지만 예화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계속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니까. 낯설기 그지없는 이 궁궐에서 사람 냄새 나는 건 이 작은 소년들밖에 없었다.
“그렇다면야 나야 좋지.”
“하하하.”
“헤헤헤.”
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예화는 바깥을 보았다. 뒤란에 꽃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특히나 커다란 모란꽃들이 일품이었는데, 화려한 꽃의 미모에 다른 꽃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예화는 그걸 보니 다시 황제 폐하가 떠올랐다. 아름다우며 품위 있고, 온화한 것 같지만 위압감을 주던 사내.
‘그런데 약간 상태가 미친 아니, 음……. 독특하신 분.’
승부욕을 자극한다면서 남의 입에 손가락을 넣는 사람이 어디 있담. 예화는 팔짱을 낀 채 그 기이한 행동을 회상했다.
‘뭐, 다시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는 제국의 주인이다. 초 제국. 드넓은 대륙은 모두 초의 것이다. 비록 동서남북으로 나라들이 있지만 그들은 오랑캐이거나 소국의 왕이었다. 그런 나라들을 억누르고 지배해야 하는 남자이니 그에게 있어 져 준다는 개념은 애당초 없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용케 목이 떨어지지 않은 게 신기하다. 그림을 보여 주기 싫다고 황제 앞에서 종이를 씹어 삼킨 화공이라니. 세상에 그런 겁 없는 인간이 어디 있냔 말이냐. 예화는 제 자신을 꾸짖으며 생각했다.
‘좋은 교훈이다. 다음부터는 개기지 말아야지.’
앞으로 볼 일도 없을 것 같지만. 그런 고귀한 분이 무엇 하러 또 오겠어. 아마 자신을 불러들인 것도 황제 폐하께서 누리는 수많은 수집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곧 흥미를 잃고 잊어버릴 게 틀림없다.
예화는 제 생각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리고 뒤란으로 걸어갔다. 붉은색, 자색의 꽃들 속에서 그는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렸던 형상을 찾았다. 쌍둥이들이 좌우로 서서 물었다.
“뭐 찾으세요?”
“아.”
예화는 잘됐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보았다.
“혹시 노란색 모란 보이냐.”
“노란색이요?”
로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란 색깔도 있어요?”
“흔하지 않아서 그렇지, 있긴 하거든. 한번 찾아볼까 하는데…….”
‘제가 찾을래요.’, ‘제일 먼저 찾아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꽃밭으로 몸을 던졌다. 우악스럽게 꽃들을 밀치는 걸 보며 예화는 ‘망가뜨리지 말고.’ 하며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 노란 꽃을 찾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노란색이요, 선생님?”
“이왕이면 큰 걸로.”
“기로운, 저거 노란색 같지!”
그때까지도 예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하율이 남기고 갔던 말을 더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제대로 모시겠다는 하율의 선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예화는 계속 뒤란을 돌아다녔다.
2. 약엽(箬葉) ‘잎과 같은’이라는 뜻으로 막 돋아나는 새싹 같은 연두색
“흐억!”
다음 날 아침, 예화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벽에 바짝 붙었다. 그는 얇은 흰옷을 저도 모르게 꼭 부여잡은 채로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의 앞에는 커다란 덩치의 상궁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 뒤로 더 나이 어린 궁녀들과 내관들이 줄지어 있었다. 예화는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자신의 잠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 분명 그는 단잠을 자고 있었다. 예민한 성격은 되지 못하여, 보드라운 비단 침대에 눕자마자 여기가 궁이라는 것조차 잊고 금방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민한 성격이 아니라 해도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을 보면 잠이 확 달아나 버리기 마련이다. 예화는 기겁한 시선으로 주위를 보았고, 그중 유난히 엄격해 보이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모시라는 명령이옵니다.”
딱딱한 어조에 예화는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황제 폐하의 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예화가 ‘모시라니……. 어디로?’ 하고 중얼거리는 동안 상궁은 뒤를 힐끗 보았다. 그러자 내관들이 그를 일으켜 세워 끌고 가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