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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되옵니다, 폐하 (4화)


“잠깐만요! 저 지금 자다 일어났는데요?!”
예화가 대장으로 보이는 상궁을 향해 황급히 말했다. 그러자 상궁은 여전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그 말이 끝이었다. 내관들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예화는 기가 막혀서 옆에 있는 내관을 향해 말했다.
“저기요 어, 그러니까…….”
뭐라 불러야 하더라. 분명히 명칭이 있을 텐데. 예화는 머릿속에서 ‘내관’, ‘고자’라는 단어부터 떠올랐고, 떠오르자마자 바로 지웠다. ‘저기요, 고자님.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라고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예화는 일단 명칭은 생략하고 불렀다.
“왜들 이렇게 급히 움직이는 건가요?”
발도 계속 꼬이는 마당에 뭐가 그리 다급한 일이 있다고. 그들 중 가장 어린 내관이 잠깐 옆 사람들 눈치를 보다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시간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속옷 바람으로 끌고 가는 게 어디 있냐고 따지려던 찰나였다. 내관들이 갑자기 어느 방으로 들어갔고, 예화는 제 앞에 있는 커다란 목욕용 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저게 무슨.”
“옷을 벗겨라.”
뒤에서 들려오는 상궁의 목소리와 함께 손들이 갑자기 다가왔다. 볼썽사나운 비명이 터졌다.
“꽥! 잠시만!”
기겁한 예화는 후다닥 앞으로 튀어나갔다. 궁녀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예화는 옷고름을 꽉 잡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제가 벗을 테니 나가 주시면…….”
“안 됩니다. 황명입니다.”
울컥한 예화가 상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럼 나보고 지금 당신들 앞에서 알몸으로 다니라는 겁니까?”
그것도 내 또래의 아가씨들 앞에서?! 예화는 욕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리고 상궁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치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상궁이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화는 식은땀이 났다.
“정말로…… 벗길 겁니까?”
“네.”
“제가 벗으면…….”
“안 됩니다.”
“저도 목욕할 줄 아는…….”
“얘들아, 뫼셔라.”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궁녀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방 안에서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화의 비명 소리였다. 찢어지는 고함에도 앞에 기다리고 있는 상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비틀거리며 나오는 예화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옷가지들을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시죠.”
예화가 파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는 파리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거나 해 달라는 손짓에 상궁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다음, 비단옷을 들고 있는 궁녀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예화가 ‘설마.’ 하고 말했다.
“옷만큼은 제가 입으면 안 되나요?”
“네. 안 됩니다.”
“아, 진짜. 제발요.”
예화가 거의 비는 목소리로 말했다.
“옷 정도는 제가 입을게요.”
“준비된 것은 평상시에 입는 옷이 아니라 혼자서 입기 힘든 겁니다.”
상궁은 칼같이 대꾸하며 ‘뭣들 하느냐.’라고 궁녀들을 재촉했다. 흰 옷을 꼭 쥐고 있던 예화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이번 반항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예화는 결국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시중을 받아야 했다.
죽고 싶다. 예화는 제 몸 곳곳을 만진 손길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쁘게 생긴 여자들이 우악스럽게 자신도 잘 안 만지는 곳들을 닦아 내릴 때, 예화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목욕하면서 온갖 수모를 당한 터라, 옷이 입혀질 때는 아예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예화는 한숨을 쉬려고 고개를 숙였다가 제 뒷덜미에 닿는 천을 느꼈다. 슬쩍 뒤를 만져 보니 머리카락이 비단 천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는 목덜미를 다 덮는 정도의 애매한 길이였는데, 그걸 또 용케 묶어 낸 모양이다. ‘쯧.’ 하고 혀를 찬 예화는 이번엔 제 옷을 보았다.
‘이걸 어떻게 입고 다녀.’
초는 예로부터 발을 보이지 않는 옷을 입을수록 높은 신분을 나타내었다. 예화는 아주 낮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원래 치렁치렁한 긴 옷들을 싫어하여 산속으로 올라가자마자 짧은 상의에 바지만 입고 다닌 남자였다. 그런 그가 간만에 길고 하늘하늘한 천을 입고 있으니 죽고 싶었다. 행여 발로 천을 밟을까 봐 조심스럽게 발을 내미는 자신이 어이없어서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 허허허…….”
뭐 까짓 거 좋게 생각하자. 언제 미인들에게 시중을 받아 보고 언제 이런 비싼 옷을 입어 보겠나. 비록 시중보다는 빨랫감이 된 기분이었고, 옷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 좋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암. 예화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예화의 웃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는 우두커니 멈춰선 채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호위하던 내관들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다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진 화공을 보았다. 꼭 아픈 사람처럼 식은땀까지 송글송글 맺혀 있는 걸 보고 약간 놀라 불렀다.
“화공님?”
그러나 예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속으로…….
‘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으아, 으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러 댔기 때문이다. 괴성에 가까운 소리는 다행히 목 언저리에서 끝났다. 궁궐이라서 소리를 지르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그런 이성도 없었다. 단지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입 바깥으로 내뱉지 못한 것이었다.
화창한 봄 하늘 아래, 금색의 지붕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경탄할 수 있는 훌륭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예화를 경악시킨 건, 바로 그 우아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었다. 정확하게는 기둥에 걸린 그림들이었다.
그것은 예화가 그렸던, 전에 하율이 보여 주었던 그림들이었는데, 기둥마다 비단 천을 덧대고 그 위에 그림을 걸어 놓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림들이 걸린 기둥들을 가운데 두고 좌, 우로 악공들이 연주까지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시이이바아아알!’
지랄이다! 예화는 속으로 비명과 함께 욕을 뱉었다.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어!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일이야?! 경악하는 예화의 발치에는 꽃잎들이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꽃잎들은 그림이 있는 맞은편까지 쭉 뿌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길이었다. 갑자기 예화는 숨 쉬기가 곤란해졌다.
“어서 오시지요, 예화 선생.”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그제야 예화는 숨을 쉬었다.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는 다가오는 황제를 보았다. 너무 놀라서 절조차 하지 못했다.
하율은 어차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발그레한 얼굴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예화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예화는 ‘어버버’ 입만 우물거리며 말도 못 했다. 하율은 아름다운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 어떻게 모셔야 할지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이거라는 것이다. 예화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다시 기둥에 걸린 그림들을 보았다. 그중 열여섯 살 때 그렸던, 그의 잊고자 하는 기억이 떡하니 걸려 있는 걸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참혹한 광경을 보았다는 얼굴이었다. 정작 이런 짓을 벌인 하율은 몹시 뿌듯해했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화공을 끌고 가며 앞장섰다.
“자, 짐이 보여 주는 환영회입니다. 내 다음부터는 더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도록 하죠.”
그때까지 뒤에 있던 호위 무사 진록은 저도 모르게 동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화공이 죽고 싶다는 얼굴을 한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록은 뒤에 있었고, 예화가 보는 건 화사하게 웃는 황제와 무표정한 악공들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예화는 자신이 실성한 건지, 황제가 제정신이 아닌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예화를 향해 하율은 미소 지었다.
“참, 준비한 게 하나 더 있어요.”
그 말에 예화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잠시 뒤, 황금 자수로 윤예화 석자가 새겨진 깃발을 보았을 때, 예화는 그를 더 이상 황제 폐하로 인식하지 않기로 했다. 미친놈. 이 새끼는 돌았다. 황제 폐하고 뭐고 사람이 기분 나쁘다는데 왜 자꾸 일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예화는 옆을 보았다. 하율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마치 ‘좋지?’ 하고 묻는 듯해 더욱 기가 막혔다. 정녕 이게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예화는 뒤에서 깃발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습니까. 어서 드세요.”
하율이 앞에 있는 음식들을 건네었다. 온갖 진수성찬들로 가득했지만 예화는 그것들을 싹 다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도통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며 하율이 눈썹을 찌푸렸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요.”
그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흠, 수라간 아이들을 다 바꿔야 하는 걸까…….”
옆에 앉아 있던 예화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방금 먹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다 내쫓는다고? 예화의 얼굴을 보고 하율이 언제 눈살을 찡그렸냐는 듯 미소 지었다.
“당연히 농이죠. 하하하.”
“하…… 하…….”
“드시죠?”
“……네.”
그렇게 억지로 든 젓가락이 덜덜 떨렸다. 가까이에 있는 고기를 들어 급히 갓 지은 쌀밥에 얹었다. 쉽게 맛볼 수 없는 고기와 하얀 쌀밥이지만 예화의 표정은 침울하기만 했다. 계속 연주하고 있는 악공들과 수많은 내관, 궁녀들 앞에서 밥을 먹으려니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제 옆에서 빙글빙글 웃는 황제 때문에 먹기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예화는 음식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맛있어요?”
아직 제대로 씹지도 않았다, 새꺄……라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이것도 먹어 봐요.”
젓가락으로 집어 밥 위에 조기를 구운 생선 살을 올려 준다. 예화는 하율이 뜯어낸 생선이 담긴 접시를 보았다. 파란빛의 물고기는 예화가 처음 보는 물고기였다. 시퍼런 색깔을 하고 있는 생선은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있어 오히려 입맛이 뚝 떨어지게 했다. 영 내키지 않아 예화는 잠깐 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황제가 준 것이니 참고 먹는 수밖에 없었다.
예화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안에 생선살을 넣었다. 다행히 밥과 함께 씹는 짭조름한 맛은 고소하고 맛있었다. 앞에 보이는 풍경 때문에 영 더부룩한 게 문제였지만. 예화는 대충 꿀꺽 삼키고는 옆을 힐끗 보았다.
“폐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우리 선생님만 봐도 배불러서요.”
예화는 ‘시발.’ 하고 욕을 뱉을 뻔했다. 늘 새로운 언어와 행동으로 사람을 부담스러워 죽이려 든다. 별 신선한 살해 방법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예화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말에 하율이 눈웃음을 쳤다.
“선생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아,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다. 예화는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침부터 소동 피운 주동자가 샐샐 웃으니 곱게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예화의 마음도 모른 채 하율은 즐겁게 웃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참.’ 하고 말한다.
“나 그거 좋아하는데.”
예화가 눈살을 찡그렸다.
“네?”
“선생 왼쪽에 있는 고기 말하는 거예요. 제 쪽에선 닿지 않으니까.”
‘아.’
예화가 젓가락을 집어 들어 고기를 집었다. 그리고 잠깐 고민했다. 황제의 밥그릇에다 얹는 것도 불경한 걸까. 좌우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하율이 빙그레 웃는다.
“여기다가 넣으시면 돼요.”
“네, 그…….”
예화는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율이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망해졌다. 왜 저래. 설마 저기다가 넣으라는 건 아니겠지? 고기를 쥐고 있는 젓가락이 떨렸다.
그러자 하율이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목을 감쌌다. ‘엇.’ 하고 당황하던 찰나, 하율의 입술이 젓가락을 물었다. 그러곤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온다. 고기는 이미 하율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허…….’
예화는 이 제멋대로인 사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속으로 헛웃음만 짓는데 불쑥 젓가락이 앞으로 다가왔다.
“자아.”
하율이 웃었다.
“선생님도 아∼”
뭐요?! 예화는 반대로 얼굴을 구겼다.
“네?”
“아야, 팔 떨어지겠다∼”
깜짝 놀란 예화가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자 하율이 먼저 가까이 몸을 숙였다. 어느새 젓가락은 예화의 입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
상큼한 목소리에 예화는 젓가락을 집어던지는 상상을 했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지랄해서 기분도 잡쳤건만 지금 사람들 앞에서 하하 호호 입으로 음식을 받아먹…….
“선생님, 아∼”
……까라면 까야지. 예화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 내어 받아먹었다. 분명히 맛은 기가 막힌데 영 삼켜지지 않는다. 돌이라도 씹은 얼굴을 뒤에서 본 진록은 안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하율. 분명히 잘 대해 줄 거라면서…….’
그냥 혼자 신났을 뿐인데? 받는 예화도 지켜보는 진록도 거북해하는데 정작 하율은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너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 예화 앞에서는 완전히 앞뒤 안 가리는 성격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진록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예화를 보았다.
‘저런…….’
진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불쌍한 화공 선생은 단단히 체할 게 분명하다. 그만 먹는 게 좋겠으나, 황제 앞에서 자리를 무를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유일하게 그만 먹으라고 말해 줄 상대는 정작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이 흠모하는 선생님이 먹는 모습이 좋아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진록은 예화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

진록의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비칠비칠 집으로 걸어간 예화는 바로 바닥에 대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걸 본 로와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렸다.
“욱, 우웩, 욱! 아냐 두드리지 마! 토할 거 같아.”
“토하셔야죠. 완전 얹히신 거 같은데요?”
“그럼 이건 누가 치워. 안 돼, 놔둬. 우욱!”
헉헉 숨을 쉬는 예화를 보며 쌍둥이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아침에 있었던 소동을 이미 들은 상황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다가 로운이 로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내가 잘하잖아. ‘그거’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알았어. 그럼 내가…….”
속닥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예화가 뒤를 보았다. 붉어진 눈을 보고 로운이 얼른 말했다.
“통 가져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잽싸게 뛰쳐나가는 로운을 보다 예화는 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선생니임. 물이라도 드세요.”
남은 로와가 갖고 온 표주박을 내밀었다. 예화는 창백한 얼굴로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주저앉아서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고개 숙인 예화에게서 울음 섞인 신음이 나왔다.
“진짜 미친 새끼이…… 망할 새끼……. 흑……. 아 시발……. 나 이제 어떻게 살아…….”
예화는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욕을 했다. 이번 생에는 틀렸고, 다음 생에라도 흠씬 두들길 것이다. 내가 훠어얼씬 높은 신분의 사람이 되어서 아주 수치스럽게 만들어 줄 거야! 굴욕감에 잠도 못 자게 늘 부들부들 떨도록 괴롭혀 주지. 잠시나마 정신으로 승리하던 예화는 다시 울상을 지었다.
‘시발,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지금 생이 중요하지.’
상상이나 했는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림들이 궁궐 한가운데 붙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토기가 올라와 ‘욱…….’ 하고 입을 막았다. 그걸 빤히 보던 로와가 말했다.
“많이 아프세요? 얼굴색이 이상해요.”
“욱…… 어떤데.”
“엄…… 하얗게 분칠한 거 같아요오…….”
“그 정도냐? 아 미치겠네.”
지켜보던 로와가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선생니임…… 그래도 폐하 욕하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큰일 나요…….”
그 말에 예화도 아차 했다. 어린애 앞에서 미친 새끼니 뭐니 지껄이는 건 아니었는데. 예화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폐하께 한 말이 아냐. 그러니까, 어, 음……. 그냥 누구를 지칭한 게 아니라 내가 원체 욕을 잘 써서, 그러니까 음……. 나 뭐라냐?”
“그래도 좋으신 분 같던데요…… 잉.”
얼씨구. 울컥한 예화가 아프지 않게 볼을 잡았다 떼었다.
“잉은 무슨 잉이냐, 인마. 괴롭히려고 불러들인 게 틀림없어. 모시니 잘한다니 그거 다 거짓부렁이라고.”
로와가 얼얼한 뺨을 문지르다 말했다.
“으우으…… 선생님 그림을 얼마큼 모았는지 보여 드리려고 한 것 아닐까요?”
“…….”
예화는 할 말이 없었다. 하긴, 하율이 어찌 숨기고자 하는 화공의 마음을 알겠는가. 하율은 수집가일 뿐인 걸. 그에게 있어 예화의 그림은 그저 자랑하고 싶은 물건들이겠지. ‘아, 그래도 열 받는 건 열 받아.’ 예화가 얼굴을 구겼다.
‘열 받고 낯 팔려 뒈지겠다고.’
“선생님, 여기 통 가져왔어요!”
로운이 머리에 나무통을 이고 들어왔다. 통을 내려놓자마자 두 소년이 바로 허리를 숙이게 했다. 숙이자마자 올라오는 토기에 예화는 기겁했다.
“야, 나 토할 것 같, 우웨에엑!”
말리려 했지만 등을 거세게 두드리는 손을 막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좀 신이 나서 암팡지게 등을 두드렸고, 참지 못한 예화는 결국 통에 대고 토악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하게 토를 하면서도 혹여 냄새가 퍼질까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가. 나가 있어!”
그런데 별안간 손이 잡힌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마지막 침을 뱉어야 했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대신 어쩐지 사뭇 진지한 로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제가 도와 드릴게요. 딱, 숫자 다섯만 세 주세요.”
처음 들어 보는 진지한 목소리에 예화는 덜컥 불안해졌다. 그래서 쥐고 있던 천으로 급하게 얼굴을 문지른 뒤, 아이들을 홱 올려다보았다. 예화의 눈이 확대되었다. 그의 경악한 눈에 날카롭게 반짝이는 바늘이 보였던 것이다.
“너……!”
“아이코.”
옆에 있던 로와가 혀를 찬다. 그러더니 어깨를 조물조물 안마해 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로운이 지이인짜 잘 따요.”
못 믿는다. 열세 살짜리가 대체 뭘 알고 손을 딴단 말인가. 급하게 손목을 빼려고 하니 무려 네 개의 손이 잡아챘다. 그중 바늘을 들고 있는 손의 주인이 말했다.
“진짜예요. 달구기까지 했는걸요?”
“차라리 내가 딴다! 비켜!”
팔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아이들의 몸도 좌우로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로운이 비장하게 말했다.
“로와야, 실!”
“응!”
로운은 건네받은 실로 엄지를 꽁꽁 묶어 버렸다. 예화가 기겁하여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 쌍둥이들이 당당하게 외쳤다.
“참으세요!”
예화도 크게 맞받아쳤다.
“싫어!”
“후에에엥…….”
“귀여운 척도 소용없어. 안 나가?!”
쌍둥이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아주 결연한 얼굴로 예화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예화 역시 괜히 손을 내주었다가 온 손이 구멍투성이로 변하는 참사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른 한 명과 아이 두 명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쾅!!
갑자기 문이 부서질 기세로 세차게 열렸다. 긴장 상태로 대치하고 있던 세 사람이 놀라 흠칫했다. 그중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 쌍둥이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끄악?!”
처음 보는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고, 무사인가 싶을 정도로 체구가 좋았다. 그런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는데, 예화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눈썹을 찡그렸다. 쏘아보던 남자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니들!”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재빨리 예화 뒤로 숨었다. 오른쪽, 왼쪽으로 옷가지를 부여잡고 파들파들 떤다.
“스, 스스승니이임…….”
“아하하, 스승이라 카긴 카네? 내는 이제 니들 스승 안 할라 캤는데?”
‘스승?’
예화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는 예화는 안중에도 없는지 아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앙?! 야, 이 정신 나간 노무 시키들! 고 쬐만한 대갈빡에 뭔 생각을 했는지 니들이 예뭐시기 돕겠다고 지원할 때부터 알아봤다. 콱 다 머리 쥐 뜯어 불었어야 캤는데.”
로와가 겁먹은 얼굴로 머리통을 부여잡는다.
“돕는 것도 다 공부 아니겠나 주위에 하도 뭐라 캐서 냅 둔기지. 아아니 그라믄 하루에 한 번이라도 와서 공부를 해야지. 이놈의 얼라들이 도대체가 일주일 내리 안 겨오는 게 말이 되나? 앙?”
“선…….”
“말해 본나! 기로우니!”
천둥 같은 고함에 로운은 오히려 아무 말 못 했다. 그저 쩔쩔매다가 ‘선생니임…….’ 하고 예화를 올려다보았다. 도와 달라는 눈빛이었지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상 예화라고 별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씩씩거리던 남자는 홀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만…….’ 하고 중얼거린다.
“설마 금마가 하도 부려 묵어서 못 나온 기가?”
쌍둥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네?”
“거 예뭐시기가 니들 달달 볶아 가지고 여기 계속 갇힌냐 이 말이다.”
보다 못한 예화가 입을 열었다.
“제가 뭘 볶습니까. 어제 막 왔는데.”
“음마야!”
쌍둥이의 스승이 화들짝 놀란다. 덩치는 산만 한데 눈이 댕그랗게 변해 놀라는 얼굴이 어울리지 않다. 그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은제 사람이 있었노?”
“스승님, 이쪽이 예화 선생님이에요.”
“뭐라코?”
놀란 얼굴 위로 분기가 가득 찬다. 그는 예화 바로 앞으로 가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니가 금마라꼬?”
“예?”
“니가 아들 수업도 못 댕기게 만든 금마냐 캤다.”
아이씨. 예화는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이 스승이라는 사람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자신은 아이들을 가두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들이 자기들 입으로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좋게 대화로 풀 수도 있는 상황이어지만, 배도 아프겠다, 아침 일도 있겠다, 예화는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어이, 이보쇼.”
“어이? 이∼보오쇼오?!”
“그래, 이보쇼! 날 언제 봤다고 초면부터 반말입니까?”
예화가 얼굴을 구긴 채로 말했다.
“남이 사는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는 무슨 행패냐 이겁니다.”
그 말에 남자는 잠깐 동안 움찔하다 곧 같이 얼굴을 찡그렸다.
“낯짝 한번 두껍다! 니는 야들이 뭐라코 생각하노? 암―만 지들이 한다고 했더라도 수업은 보내 줘야 할 것 아이가?!”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의 예화를 향해 외쳤다.
“그라믄 열 받쳐 뒈지겠구만, 굽신굽신 들어와 갖고 니한테 싹싹 빌어야 하나?! 암만 니가 폐하께 예쁨 좀 받는다고 아이고∼ 선생님 하고 아부할 줄 알았나?”
“그런 뜻이 아니라……!”
“내 우영목이!”
남자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생전 아부라고는 ‘아’ 자도 모르는 사나이다, 이기야. 알았나?”
“……!”
“알겄…… 야 갑자기 얼굴이 와 이렇노?”
남자의 말대로 예화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숨도 쉬지 못하는 얼굴에 남자가 더 기겁하여 아이들을 본다.
“아, 선생님 오늘 아프세요.”
“와? 어디가? 야, 야 야야 숨 쉬라 야!”
예화는 가슴팍을 움켜쥔 채 굳어 있었다. 넓은 손바닥이 등을 마구 두드리자 그제서 눈동자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쩌렁쩌렁하게 화를 내놓곤, 걱정과 당황이 담긴 얼굴이었다.
“뭐꼬, 대체. 괘안나?”
그 얼굴을 보며, 예화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지, 진짜……?”
“엉?”
“진짜로. 정말로. 진심으로…… 우영목 선생님이시라고요?”
남자, 우영목은 고개를 기울였다.
“내 아나?”
다음 순간 예화는 ‘크헉.’ 하고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또 아픈 줄 알고 남자가 놀라 ‘야야?’ 하고 부르자, 예화는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몇 번이고 헉헉 반복하다 소리 질렀다.
“선생님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우영목 선생님 그림을 모르는 화공도 있습니까?”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영목은 당황했다. 그런 영목을 향해 예화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제가 선생님 얼굴이라도 한번 뵈려고 얼마나 쫓아다녔는데요!”
그러나 영목은 방방 곳곳 돌아다니는 사내라, 아무리 소문을 찾아 쫓아가도 항상 이미 먼저 사라져 버린 후였다. 모두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직 어렸던 예화는 그 그림을 살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저 술렁거리는 인파들 속에 간신히 껴서 보았던 그림들이었다.
우영목. 그는 예화에게 있어 닮고 싶은 사람이었고, 까마득하게 높은 존재였다. 그랬던 분이! 어떻게! 왜! 여기에! 예화는 감동 받은 얼굴을 했다.
“와…… 진짜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