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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의 제왕 1권(2화)
1. 진화의 시작(2)


종환은 무의식의 세계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은 심연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완전히 잠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을 흘러가는 무의식의 파도를 아무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종환이 지금 느끼는 것은 평온.
그렇게 종환은 평온의 바다 속을 고요히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영원히 평온의 바다를 떠돌 것 같던 종환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그의 자의가 아니었다.
우오오오오오!
멀리서 맹수가 울부짖는 괴성이 들려왔다.
신경을 자극하는 거슬리는 소리에 종환은 무의식중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이상 소음이 들려오지 않자 인상을 펴고 물결에 몸을 맡기며 유영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구오오오오오오오!!
다시 한 번 들려온 맹수의 울음소리.
이번에는 좀 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이었다.
소름끼치는 괴성에 종환의 몸이 몸서리를 치며 그의 의식이 무의식 속에서 서서히 위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오아아아아아아아!!
또 다시 들려온 맹수의 괴성 소리.
종환의 정신은 그 소리에 완전히 의식 세계로 떠올랐다.
그리고 눈을 떴다.
번쩍!
종환이 눈을 뜨자마자 목격한 것은 한 쌍의 거대한 눈동자!
크기가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눈동자는 핏빛 가득 머금은 채로 종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헉!’
종환은 예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살벌한 눈동자를 다시 마주하게 되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저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포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저 눈동자에서 등을 돌리고 싶은 것이 종환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거대한 눈동자 아래로 엄청난 크기의 동굴이 갑자기 생겨났다.
구오오오오오와아아아아!!
그리고 들려오는 괴수의 울음소리.
‘으아아아악!!’
종환은 영혼을 쥐어짜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소리를 질렀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의 눈꺼풀마저 그의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동굴의 아래위에 가득 자리한 집체만 한 창날들.
괴물의 이빨이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종환은 조금만 스쳐도 몸이 박살이 날 것 같은 괴물의 이빨에 겁을 먹고 몸을 떨었다.
종환이 더 이상의 공포심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심장이 멈추려는 순간.
사라락.
불현듯 눈앞의 괴물이 사라졌다.
엄청난 공포로 인해 죽어 가던 종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괴물이 사라지자 눈앞의 배경이 바뀌었다.
심연의 어둠은 사라지고 청록의 물결이 종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속에서 무리지어 헤엄치는 종환의 몇 백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물고기들과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플랑크톤들, 그리고 바다 속을 비추는 눈부신 햇살.
종환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아직 꿈을 꾸는 것인가?’
분명히 꿈과는 틀렸다.
종환은 바다 속을 바라보는 이 현재의 시간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다. 꿈이 아니야! 나는 실제로 바다 속에 있는 거야!’
피부에 닿는 물결, 물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헤엄치는 물고기들, 이것은 모두 종환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실제의 모습인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죽은 게 아니란 말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종환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주변을 살피다 보니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럴 수가!! 360도 방위를 전부 다 볼 수가 있다니!’
인간은 시야각은 좌, 우 약 170도.
그런데 지금 종환의 시야각은 360도!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앞과 양옆, 뒤쪽의 모든 전경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종환은 이 신기한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이게 뭐야!!’
그가 확인한 자신의 모습.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옷뿐만 아니라 살색 몸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색 투명한 젤 같은 몸뚱이가 물결에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게 뭐란 말이야?!’
종환의 모습은 마치 아메바나 박테리아처럼 단세포 생물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몸 안에서 흐르는 세포의 움직임도 확인할 정도로 투명한 모습.
‘단세포 생물… 내가 아메바가 된 것인가?!’
종환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잠시 황당한 심정이 되어 바다 속을 떠다니다 불현듯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런 빌어먹을! 죽었단 말인가? 내가 죽었어?’
종환은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있던 죽음에 대해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대형 트럭과 정면으로 추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대형 트럭, 부딪히는 순간 번개에 맞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눈에 번쩍하고 번개가 치더니 이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바뀌었다.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공에 날리다 이내 감각이 사라졌다.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종환이 내린 결론은.
‘즉사… 나는 제대로 치료도 해 보지 못하고 죽은 거야.’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보다도 죽음의 순간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삶이 시작될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이런 모습으로!’
종환은 전후좌우가 한눈에 들어오는 넓어진 시야로 주변을 부유하는 다른 플랑크톤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단세포 생물이 되었다고 인지하자 왠지 모르게 머리가 둔해지고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어떠한 판단도 들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의구심을 가진 채 한참을 어두운 바다를 부유하던 종환은 이내 감각을 일깨우는 전율적인 격정에 휩싸였다.
‘또, 나에게 무슨 일이?’
단세포 생물로 바다를 부유하던 짧은 시간 동안 종환은 인간으로의 지성과 감성을 대부분 잃어 갔다.
그러나 지금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생소한 느낌은 무너져 버린 종환의 지성으로도 감지할 수가 있는 엄청난 격동의 순간인 것이다.
부르르르르.
종환은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이성과 지성이 극대화된 인간으로서는 느낄 수가 없는, 오히려 본능과 생존에 더욱 민감한 영향을 받게 되는 단세포 생물이기에 감지해 낸 것이리라.
부르르르르.
종환은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해수가 미세하게나마 진동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종환만이 느낀 것이 아닌지 주변을 부유하던 다른 플랑크톤들이 거리를 두고 멀어져 갔다.
‘지금 나에게 변화가,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지을 커다란 변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종환은 둔해져 버린 머리를 굴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스팟.
그사이 변화는 더욱 영향력을 확대했다.
종환이 주위 기압이 높아지고 그의 몸이 조금씩 찢기기 시작했다.
종환은 위기를 직감했다.
‘이대로는 또다시 죽게 된다! 나는 선택해야만 해!’
스팟, 찌지직!
종환은 몸 전체로 확산되어 가는 균열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란 말인가!’
종환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스팟, 쩌저적!
종환의 몸이 완전히 파괴되고 있었다.
종환의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에 저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것은 해수면을 뚫고 전달된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바다 속을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는 한 마리의 물고기였다.
‘그런 것인가! 나는 선택하겠다!’
종환의 시야에서 빛나던 물고기의 모습이 사라지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암흑뿐.
종환의 몸이 완전히 흩어지기 직전, 그의 의식이 크게 소리쳤다.
‘내가 결정한 것은 바로……!’
종환의 의식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응? 어떻게 된 일이지?’
종환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햇빛을 반사해 녹색이나 붉은 빛을 띠는 여러 종류의 플랑크톤들이었다.
여전히 그의 시야각은 360도.
종환은 시야를 메운 플랑크톤과 각종 어류들을 한참 동안 멍하니 보고 있었다.
‘무언가 내 몸속에서 빠져나간 느낌이다. 너무 허전해, 이건 마치.’
멍청해진 느낌.
종환은 지금 멍청해진 느낌을 받고 있었다. 너무나도 멍청해져 바보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일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한 판단도 들지 않았고 도대체 뭘 해야 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흐르는 해류에 몸을 맡기고 주변을 가득 채운 다른 플랑크톤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멍…….
한참을 해류 속에서 멍을 때리던 종환은 갑자기 무의식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기억의 편린에 깜짝 놀랐다.
‘선택, 나는 무엇인가를 선택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분명 자신은 엄청 급박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급박한 상황이란 무엇이었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의 기억력은 마치 단세포 생물처럼 보잘 것 없이 바뀌어 버렸다.
종환은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의 편린을 떨쳐 버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황토색과 붉은색으로 섞여 있는 자신의 몸뚱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고프다. 먹어야 한다.’
종환은 변화한 자신의 몸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먹잇감을 찾아 이동할 뿐이었다.
스르르륵.
그의 몸이 주변에 부유하고 있는 다른 플랑크톤들을 향해 서서히 이동해 나갔다.
단세포 생물에서 동물성 플랑크톤으로 진화를 이룩한 종환.
그가 진화의 순간에 선택한 것은 동물의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끄르르륵!
종환은 몸을 크게 부풀리고 얼마 전까지는 동족이었던 플랑크톤을 집어삼켰다.
새로 태어난 종환, 그 최초의 육식행위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구오오오.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는 존재가 있었다.
촤아아악.
그가 지나가는 경로에 머물던 작은 생명체들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그의 존재감에 화들짝 놀라 몸을 피했다.
그 존재의 이름은 포이사르돈.
단세포 생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종환에게 붙여진 새 이름이었다.
종환은 다섯 번째 진화를 이룩한 순간 이전의 진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가 인간이었을 때의 지능, 기억, 감정, 모든 것들이 돌아온 것이다.
‘됐다! 진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