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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1권 3화
Chapter 1-2 (2)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녀석, 오랜만에 만나는데 뭐 이렇게 담백해?”
블랑이 말한 것과 같이, 그를 만나는 것이 벌써 여섯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병사들의 감정을 치료해 주는 일을 맡고 있었고, 2주 정도의 휴가를 얻어 모처럼 황궁 신전에 돌아온 것이었다.
“더 주무시겠다고 하셔서 방해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여전히 애교 없는 녀석이로세. 모처럼의 휴가인데.”
사무적인 대답에 블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프레슐과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아직은 빛에 적응하지 않아, 가늘어졌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블랑은 바닥에 멋대로 떨어트려 놓은 옷을 챙겨 입었다. 블랑이 모두 옷을 갖추어 입었을 때, 프레슐은 컵에 물을 따라 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전쟁터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블랑 선배.”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후배의 예는 제대로 챙기는 것이 프레슐다웠다. 깍듯한 목소리, 정중한 표정. 반년 전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블랑은 밝게 미소 지으며 그가 건네주는 상냥한 인사를 받아들였다.
“오-냐! 내 하나뿐인 후배님.”
“자, 환영해 드렸으니 이제 다시 묻죠. 왜 제 방으로 오신 겁니까.”
깐깐한 자식. 정말 변한 것이 없다니까.
“먼 길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나밖에 없는 후배가 보고 싶은 것이 그렇게 죄야?”
“아뇨, 엄밀히 말하면 타인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 죄입니다.”
“타인이라니! 우리는 감정의 여신의 손길로 이어진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아닌가!”
“그러니까, 타인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블랑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아 프레슐을 노려보았다.
“진짜, 너 후배 생기고 나면 어떻게 될지 내가 지켜볼 거야.”
“평범하게 가르치고, 이끌 뿐입니다.”
어쩐지 그 말이 블랑의 애정과 집착이 과하다는 의미로 들려왔다.
“장담하는데!”
하지만 어찌 사람 뜻이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 옛날의 블랑도 후배가 생긴다면, 절대로 쓸데없는 애정을 쏟거나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프레슐의 선언이 의미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나보다 더! 걱정할 거다.”
“설마요.”
“너는 나보다 더! 더 참견하고, 더 집착하겠지.”
“저 그런 성격 아니라는 건 선배도 잘 아시잖습니까.”
이놈이,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 줄 아냐! 블랑은 불만은 꾹 삼켜 두고, 제멋대로의 예언을 계속했다.
“그리고 더 좋아하게 될 거다.”
“설마요.”
“확실해. 내 안에 있는 여신님이 지금 신탁을 내리셨어.”
“여신님은 감정술사에게 신탁 같은 건 안 내리십니다.”
프레슐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렇게 질겁해하는 모습도 블랑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블랑은 프레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
그리고 같은 시간 이른 아침부터 이루어진, 에모티오 신전의 대사제 회의는 근심으로 가득했다.
“마녀 판별을 의뢰하다니, 원래대로라면 치안대의 일이 아닙니까.”
“그쪽에서는 종교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모양입니다.”
감정의 신 에모티오 신전은 개인의 소중한 감정을 지키는 평화로운 곳이지, 결코 피와 징벌이라는 글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마녀 감별이라니, 결국 그들에게 마녀사냥의 칼을 쥐여 주고 휘두르라는 뜻이었다. 평화롭고 상냥한 성정을 타고난 사제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쩔 수 없네, 우리가 그들의 도움을 받는 한.”
황제는 깊은 신앙심을 보이며, 신전에 후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권력자의 신실한 모습에 사제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비밀리에 그의 후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태는 변했다. 사제들이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신전에 황제의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의 자금 없이는 운영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신전은 황제에 속한 ‘신의 군대’가 되었다.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 떨어지고 그들은 그것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이든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다시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니.”
사제들은 한마음으로 한숨 쉬었다. 마녀나 마술사 판별법이라는 것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불에서 막 꺼내 온 뜨거운 철심을 손에 쥐라 하거나, 몸을 결박해 물에 처박아야 했다.
죄인의 목을 베는 사형 집행인보다도 잔혹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끌려온 아이들을 보니 대부분이 20살도 채 되지 못한 소년과 소녀들뿐이었으니까.
어쨌든 황제의 명령이었다. 그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마녀 판별 시험을 시행해야 했다. 고위 사제들은 준비를 서둘렀다. 혹시 저 아이들 무리에 진짜 마녀나 마술사가 섞여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사악한 힘은 사람을 매혹하여, 모든 것을 그릇되게 만들 테니까.
도심에 있는 신전의 가장 넓은 메인 홀에서 판별식은 이루어졌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참관할 수 있었지만, 혹여 마녀의 저주라도 붙을까 구경하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겁을 집어먹은 몇 명의 고위 사제들과 프레슐, 그리고 블랑이 판별식을 참관했다.
시작을 알리는 기도가 끝나자, 곧 두꺼운 장갑을 낀 사제 4명이 사람마저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뜨거운 청동화로를 홀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나오는 화기가 실내의 온도를 한껏 뜨겁게 만들었다. 춤을 추듯 흔들리는 화마의 심장에는 한층 더 붉게 빛나고 있는 거대한 철심이 보였다. 프레슐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저걸로…….”
“가장 확실하다고 전해지는 판별법입니다. 정말 마녀가 아니라면, 저것을 손에 쥐어도 신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결코 화상을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손에 붕대를 감아 두고 이틀 뒤에 화상 여부를 판단할 것입니다.”
곁에 앉아 있던 사제는 간단히 프레슐에게 설명을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화상을 입으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마녀임이 증명되었으니, 화형을 당하겠지요.”
“그게, 무슨……!”
불합리했다. 뜨거운 것을 손에 쥐고 화상을 입지 않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프레슐이 아는 한 신이란, 고작 그런 실험에서 인간을 지켜 줄 정도로 한가한 위인은 아니었다. 한심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참관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그의 옷깃을 잡은 것은 블랑이었다.
“앉아라.”
블랑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 그 역시 프레슐과 같은 생각인 듯했다.
“선배, 이건.”
“알아.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봐 둘 의무가 있어.”
그들의 시선은 한동안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곧 프레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부정.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없는 무력함을 마음에 담아 두라는 의미일까.
화로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사제들은 기도를 올렸다. 부디 신을 대신하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바란다는 내용에 이어서, 끌려온 피고인 중에 억울한 이가 있다면 신의 이름으로 보호해 달라는 기도가 이어졌다.
그들을 죽이고 있으면서, 보호를 바라는 기도를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프레슐이 신이었다면 저 우매한 사제들부터 벌했을 것이다.
의미 없는 기도가 끝나니, 젊은 사제들이 곧 5명의 소년 소녀들을 이끌고 홀로 들어섰다. 어른의 가슴 즈음을 조금 넘어설까? 아직 작은 아이들이었다. 하얀색 로브로 몸을 감싼 그 아이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더욱 작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오랫동안 씻지도 못하고, 음식 또한 제대로 받지를 못했는지 무척이나 꾀죄죄한 몰골에 비쩍 마른 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아직 어린아이들 아닙니까?”
프레슐의 중얼거림에 가까이에 있던 고위 사제들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불쾌하게 바라보았으나, 굳이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도 어딘가 마음의 찜찜함을 안고 있었던 탓이다.
곧 모든 아이가 화로 앞에 일렬로 멈추어 섰다. 아이들을 통솔한 젊은 사제들은 얼른 그들로부터 몸을 피해, 다른 사제들의 무리로 도망가듯 몸을 피했다.
추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몸놀림을 마지막으로 하여,
붉은 불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Chapter 1-3 (1)
치안대의 대원들은 그녀를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며, 마녀라는 죄목이 씌워지자 친절했던 이웃은 어린 소녀에게 침을 뱉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누군가는 장담하듯 말했다. 특별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은 그 증언을 소중하게 옮겨 적어 두었다.
소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가장 더럽고 어두운 장소에 갇혔다. 팔과 다리 이곳저곳에서 피가 흘렀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도리어 그녀의 피가 닿는 곳이 저주받을까 혀를 끌끌 차며 가까이하지 않을 뿐이었다.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가능한 한 몸을 작게 만들고 싶었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일어나라.”
하룻밤이 지나자, 누군가가 그녀를 다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어떤 설명도 배려도 없었다. 그들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작은 마차에 그녀를 던지듯 집어넣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아이 같은데?”
“조심해. 보통 마녀가 아닌 모양이야. 제 아비를 찔러 죽여 의식을 완성했다고 하지 뭐야? 손으로 초록색의 가루를 뿌려서 저주를 내린대.”
“어휴, 끔찍하구먼.”
소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들의 대화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에요!”
“시끄러워! 이 마녀!”
쿵!
바깥에서부터 마차를 주먹으로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소녀는 소리치는 것을 멈추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덕분에 어두운 마차 안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무엇이 있는지 헤아려 볼 마음 따위 들지 않았다.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머리를 묻었다. 눈물이,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마차는 그녀의 절망에 개의치 않고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는 몇 번이나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으나 그녀는 그저 울고 소리 지르며 절망할 뿐이었다.
소녀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마차에서 꼬박 이틀 동안 갇혀 있었다. 식사라고 할 것도 없는 식량덩어리들이 마차 안에 있었지만, 소녀는 울거나 쓰러지듯 잠들어 있는 쪽을 택했다.
흐린 의식은 시간을 흘려보내 주었다. 마차에는 빛도 바람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갇힌 공기가 때때로 손끝에 걸려 왔지만, 곧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왔다.
어떻게 되는 걸까?
17년간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 있었다. 그의 눈길,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홀로 있어 본 기억이 없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차의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았다. 사람이 몰고 있는 마차는 맞는 걸까. 무서운 귀신이 그녀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차는 분명 인간이 만든 길을 따라서 가고 있었다. 가끔 덜컹거리는 마차가 그것을 증명했다. 승차감이 나쁜 마차의 내부가 뒤집힐 정도로 들썩일 때마다, 소녀는 오물통이 엎어질까 그것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그래도 마차의 안에서는 지린내가 진동했다.
마차가 멈추었다. 소녀가 당황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고, 무섭게 생긴 병사 한 명이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곧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부끄러웠다.
그는 까끌까끌한 어두운 천으로 소녀의 눈을 가렸고, 두꺼운 밧줄로 손목을 단단히 결박했다.
“너무 나쁘게 생각 마라.”
마녀의 저주라도 내릴까 두려웠던 걸까,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끌고 가며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여기 기대 서 있어라. 눈을 가리고 서 있는 일은 어렵지.”
그의 말대로 소녀는 조심스럽게 벽에 몸을 기대었다. 차가운 감촉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새삼스럽게 살아나는 감각에 주변에 머물러 있는 습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네가 마녀가 아니라면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희망이 없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건네는 허울 좋은 말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녀는 그것에 미래를 걸어야 했다.
곧 더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민해진 청각에 낯선 이들의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녀 판별을 시작한다. 이 의식은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나, 신께서 굽어보시니 한 치의 억울함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네 이름은?”
소녀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바람 빠지는 소리만 겨우 나올 뿐이었다.
“다시 묻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
“…….”
“악마에게 이름마저 팔아 버렸는가?!”
“루나. 루나예요.”
악마라는 말에 루나는 턱을 덜덜 떨며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너는 마녀인가?”
“아, 아니에요.”
“모두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지.”
모르는 이의 손길이 루나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으나, 곧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가리개가 풀려 나간 것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니 자신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Chapter 1-2 (2)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녀석, 오랜만에 만나는데 뭐 이렇게 담백해?”
블랑이 말한 것과 같이, 그를 만나는 것이 벌써 여섯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병사들의 감정을 치료해 주는 일을 맡고 있었고, 2주 정도의 휴가를 얻어 모처럼 황궁 신전에 돌아온 것이었다.
“더 주무시겠다고 하셔서 방해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여전히 애교 없는 녀석이로세. 모처럼의 휴가인데.”
사무적인 대답에 블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프레슐과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아직은 빛에 적응하지 않아, 가늘어졌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블랑은 바닥에 멋대로 떨어트려 놓은 옷을 챙겨 입었다. 블랑이 모두 옷을 갖추어 입었을 때, 프레슐은 컵에 물을 따라 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전쟁터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블랑 선배.”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후배의 예는 제대로 챙기는 것이 프레슐다웠다. 깍듯한 목소리, 정중한 표정. 반년 전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블랑은 밝게 미소 지으며 그가 건네주는 상냥한 인사를 받아들였다.
“오-냐! 내 하나뿐인 후배님.”
“자, 환영해 드렸으니 이제 다시 묻죠. 왜 제 방으로 오신 겁니까.”
깐깐한 자식. 정말 변한 것이 없다니까.
“먼 길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나밖에 없는 후배가 보고 싶은 것이 그렇게 죄야?”
“아뇨, 엄밀히 말하면 타인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 죄입니다.”
“타인이라니! 우리는 감정의 여신의 손길로 이어진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아닌가!”
“그러니까, 타인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블랑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아 프레슐을 노려보았다.
“진짜, 너 후배 생기고 나면 어떻게 될지 내가 지켜볼 거야.”
“평범하게 가르치고, 이끌 뿐입니다.”
어쩐지 그 말이 블랑의 애정과 집착이 과하다는 의미로 들려왔다.
“장담하는데!”
하지만 어찌 사람 뜻이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 옛날의 블랑도 후배가 생긴다면, 절대로 쓸데없는 애정을 쏟거나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프레슐의 선언이 의미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나보다 더! 걱정할 거다.”
“설마요.”
“너는 나보다 더! 더 참견하고, 더 집착하겠지.”
“저 그런 성격 아니라는 건 선배도 잘 아시잖습니까.”
이놈이,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 줄 아냐! 블랑은 불만은 꾹 삼켜 두고, 제멋대로의 예언을 계속했다.
“그리고 더 좋아하게 될 거다.”
“설마요.”
“확실해. 내 안에 있는 여신님이 지금 신탁을 내리셨어.”
“여신님은 감정술사에게 신탁 같은 건 안 내리십니다.”
프레슐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렇게 질겁해하는 모습도 블랑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블랑은 프레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
그리고 같은 시간 이른 아침부터 이루어진, 에모티오 신전의 대사제 회의는 근심으로 가득했다.
“마녀 판별을 의뢰하다니, 원래대로라면 치안대의 일이 아닙니까.”
“그쪽에서는 종교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모양입니다.”
감정의 신 에모티오 신전은 개인의 소중한 감정을 지키는 평화로운 곳이지, 결코 피와 징벌이라는 글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마녀 감별이라니, 결국 그들에게 마녀사냥의 칼을 쥐여 주고 휘두르라는 뜻이었다. 평화롭고 상냥한 성정을 타고난 사제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쩔 수 없네, 우리가 그들의 도움을 받는 한.”
황제는 깊은 신앙심을 보이며, 신전에 후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권력자의 신실한 모습에 사제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비밀리에 그의 후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태는 변했다. 사제들이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신전에 황제의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의 자금 없이는 운영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신전은 황제에 속한 ‘신의 군대’가 되었다.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 떨어지고 그들은 그것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이든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다시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니.”
사제들은 한마음으로 한숨 쉬었다. 마녀나 마술사 판별법이라는 것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불에서 막 꺼내 온 뜨거운 철심을 손에 쥐라 하거나, 몸을 결박해 물에 처박아야 했다.
죄인의 목을 베는 사형 집행인보다도 잔혹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끌려온 아이들을 보니 대부분이 20살도 채 되지 못한 소년과 소녀들뿐이었으니까.
어쨌든 황제의 명령이었다. 그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마녀 판별 시험을 시행해야 했다. 고위 사제들은 준비를 서둘렀다. 혹시 저 아이들 무리에 진짜 마녀나 마술사가 섞여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사악한 힘은 사람을 매혹하여, 모든 것을 그릇되게 만들 테니까.
도심에 있는 신전의 가장 넓은 메인 홀에서 판별식은 이루어졌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참관할 수 있었지만, 혹여 마녀의 저주라도 붙을까 구경하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겁을 집어먹은 몇 명의 고위 사제들과 프레슐, 그리고 블랑이 판별식을 참관했다.
시작을 알리는 기도가 끝나자, 곧 두꺼운 장갑을 낀 사제 4명이 사람마저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뜨거운 청동화로를 홀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나오는 화기가 실내의 온도를 한껏 뜨겁게 만들었다. 춤을 추듯 흔들리는 화마의 심장에는 한층 더 붉게 빛나고 있는 거대한 철심이 보였다. 프레슐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저걸로…….”
“가장 확실하다고 전해지는 판별법입니다. 정말 마녀가 아니라면, 저것을 손에 쥐어도 신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결코 화상을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손에 붕대를 감아 두고 이틀 뒤에 화상 여부를 판단할 것입니다.”
곁에 앉아 있던 사제는 간단히 프레슐에게 설명을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화상을 입으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마녀임이 증명되었으니, 화형을 당하겠지요.”
“그게, 무슨……!”
불합리했다. 뜨거운 것을 손에 쥐고 화상을 입지 않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프레슐이 아는 한 신이란, 고작 그런 실험에서 인간을 지켜 줄 정도로 한가한 위인은 아니었다. 한심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참관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그의 옷깃을 잡은 것은 블랑이었다.
“앉아라.”
블랑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 그 역시 프레슐과 같은 생각인 듯했다.
“선배, 이건.”
“알아.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봐 둘 의무가 있어.”
그들의 시선은 한동안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곧 프레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부정.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없는 무력함을 마음에 담아 두라는 의미일까.
화로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사제들은 기도를 올렸다. 부디 신을 대신하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바란다는 내용에 이어서, 끌려온 피고인 중에 억울한 이가 있다면 신의 이름으로 보호해 달라는 기도가 이어졌다.
그들을 죽이고 있으면서, 보호를 바라는 기도를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프레슐이 신이었다면 저 우매한 사제들부터 벌했을 것이다.
의미 없는 기도가 끝나니, 젊은 사제들이 곧 5명의 소년 소녀들을 이끌고 홀로 들어섰다. 어른의 가슴 즈음을 조금 넘어설까? 아직 작은 아이들이었다. 하얀색 로브로 몸을 감싼 그 아이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더욱 작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오랫동안 씻지도 못하고, 음식 또한 제대로 받지를 못했는지 무척이나 꾀죄죄한 몰골에 비쩍 마른 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아직 어린아이들 아닙니까?”
프레슐의 중얼거림에 가까이에 있던 고위 사제들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불쾌하게 바라보았으나, 굳이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도 어딘가 마음의 찜찜함을 안고 있었던 탓이다.
곧 모든 아이가 화로 앞에 일렬로 멈추어 섰다. 아이들을 통솔한 젊은 사제들은 얼른 그들로부터 몸을 피해, 다른 사제들의 무리로 도망가듯 몸을 피했다.
추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몸놀림을 마지막으로 하여,
붉은 불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Chapter 1-3 (1)
치안대의 대원들은 그녀를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며, 마녀라는 죄목이 씌워지자 친절했던 이웃은 어린 소녀에게 침을 뱉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누군가는 장담하듯 말했다. 특별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은 그 증언을 소중하게 옮겨 적어 두었다.
소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가장 더럽고 어두운 장소에 갇혔다. 팔과 다리 이곳저곳에서 피가 흘렀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도리어 그녀의 피가 닿는 곳이 저주받을까 혀를 끌끌 차며 가까이하지 않을 뿐이었다.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가능한 한 몸을 작게 만들고 싶었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일어나라.”
하룻밤이 지나자, 누군가가 그녀를 다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어떤 설명도 배려도 없었다. 그들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작은 마차에 그녀를 던지듯 집어넣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아이 같은데?”
“조심해. 보통 마녀가 아닌 모양이야. 제 아비를 찔러 죽여 의식을 완성했다고 하지 뭐야? 손으로 초록색의 가루를 뿌려서 저주를 내린대.”
“어휴, 끔찍하구먼.”
소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들의 대화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에요!”
“시끄러워! 이 마녀!”
쿵!
바깥에서부터 마차를 주먹으로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소녀는 소리치는 것을 멈추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덕분에 어두운 마차 안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무엇이 있는지 헤아려 볼 마음 따위 들지 않았다.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머리를 묻었다. 눈물이,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마차는 그녀의 절망에 개의치 않고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는 몇 번이나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으나 그녀는 그저 울고 소리 지르며 절망할 뿐이었다.
소녀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마차에서 꼬박 이틀 동안 갇혀 있었다. 식사라고 할 것도 없는 식량덩어리들이 마차 안에 있었지만, 소녀는 울거나 쓰러지듯 잠들어 있는 쪽을 택했다.
흐린 의식은 시간을 흘려보내 주었다. 마차에는 빛도 바람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갇힌 공기가 때때로 손끝에 걸려 왔지만, 곧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왔다.
어떻게 되는 걸까?
17년간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 있었다. 그의 눈길,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홀로 있어 본 기억이 없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차의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았다. 사람이 몰고 있는 마차는 맞는 걸까. 무서운 귀신이 그녀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차는 분명 인간이 만든 길을 따라서 가고 있었다. 가끔 덜컹거리는 마차가 그것을 증명했다. 승차감이 나쁜 마차의 내부가 뒤집힐 정도로 들썩일 때마다, 소녀는 오물통이 엎어질까 그것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그래도 마차의 안에서는 지린내가 진동했다.
마차가 멈추었다. 소녀가 당황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고, 무섭게 생긴 병사 한 명이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곧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부끄러웠다.
그는 까끌까끌한 어두운 천으로 소녀의 눈을 가렸고, 두꺼운 밧줄로 손목을 단단히 결박했다.
“너무 나쁘게 생각 마라.”
마녀의 저주라도 내릴까 두려웠던 걸까,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끌고 가며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여기 기대 서 있어라. 눈을 가리고 서 있는 일은 어렵지.”
그의 말대로 소녀는 조심스럽게 벽에 몸을 기대었다. 차가운 감촉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새삼스럽게 살아나는 감각에 주변에 머물러 있는 습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네가 마녀가 아니라면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희망이 없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건네는 허울 좋은 말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녀는 그것에 미래를 걸어야 했다.
곧 더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민해진 청각에 낯선 이들의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녀 판별을 시작한다. 이 의식은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나, 신께서 굽어보시니 한 치의 억울함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네 이름은?”
소녀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바람 빠지는 소리만 겨우 나올 뿐이었다.
“다시 묻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
“…….”
“악마에게 이름마저 팔아 버렸는가?!”
“루나. 루나예요.”
악마라는 말에 루나는 턱을 덜덜 떨며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너는 마녀인가?”
“아, 아니에요.”
“모두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지.”
모르는 이의 손길이 루나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으나, 곧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가리개가 풀려 나간 것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니 자신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