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감정술사 1권 4화
Chapter 1-3 (2)
“눈물을 흘려 보아라.”
“에?”
흐릿한 초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들어온 요구에 루나는 반문했다.
“역시 흘릴 수 없겠지, 네가 마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결론지었다. 루나는 마차에서 이미 흘릴 수 있는 눈물을 모두 흘려보냈다. 게다가 물을 마시지도 못했다. 몸에 남은 수분은 이미 바닥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사정 따위 알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항변하기에 루나는 너무나도 어렸다. 순진한 소녀는 그저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이 억울한 마음과 아비가 그리운 마음은 얼마든지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그녀의 눈가는 바싹 메말라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녀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의심했다.
나는 정말 마녀일지도 모른다.
마녀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쉽게 돌아왔다. 아까 친절한 목소리의 병사가 말해 주었다. ‘마녀가 아니라면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마녀라면? 무서운 일이 시작되는 걸까? 그것은 어떤 걸까? 죽는 걸까? 어떻게?
루나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틀간 마차 안에 방치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식사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17살 소녀는 최선을 다해서 버틴 것이다.
초점은 흐려졌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 버렸다.
쓰러진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루나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 앞에 묵묵히 서 있던 세 사람은 무언가를 종이에 휘갈겨 적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 앞을 떠났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그녀는 수프 냄새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이 파랗게 변했다. 이마가 차갑게 느껴졌다. 손과 발이 의지와 관계없이 파르르 떨렸다. 본능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치밀었다.
빵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수프는 따듯했다. 마녀라든가, 판별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모두 사라져 버렸고, 곧 아쉬워졌다.
더 먹고 싶다는 생각 뒤로 곧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깨어나 그녀를 괴롭혔다. 음식이 주는 힘이 그저 괴로운 생각으로만 이어진다면, 차라리 이대로 먹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르륵.
그래도 그녀의 배는 아우성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처지에 이제는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그녀의 더러운 옷자락을 충분하게 적시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흘렀다.
“누, 눈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꼭 닫혀 있는 문손잡이는 당연하게도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루나는 힘을 쥐어짜 문을 두드렸다.
“저, 눈물이 나요! 눈물이 흐르고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누가 봐 주세요! 눈물이 나온단 말이에요!”
애절함에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고, 주먹에 피가 맺히도록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것은 적막뿐이었다.
“제발, 열어 주세요! 봐 주세요! 이제야 겨우 눈물이…….”
이어지지 못하는 말은 결국 그녀의 마음에만 남아 있었다. 힘을 잃은 몸은 천천히 문을 쓸어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는 의식이 흐려진다는 감각을 그녀가 확실히 인지했다. 뺨을 때리면, 아니 이대로 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기만 한다면, 한 번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는 허기, 늦은 눈물, 자신에게만 들리는 애원.
도망가는 편이 나았다. 눈꺼풀의 무게가 유일한 구원이 되어 주었다.
∴
아무도 루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루나 역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소통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어 두었다.
무장을 갖춘 이가 다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손을 결박하고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의 보폭은 17살인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빨라서 끌려가는 도중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였다.
루나는 지정된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 주변으로 여러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고,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이어졌다. 그 누구와도 닿지 않기를 바라며, 루나는 그저 바로 서 있으려 애를 썼다.
펄럭이는 커다란 천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루나의 손을 감싸고 있는 줄이 그녀를 앞으로 당기기 시작하여 그녀는 그대로 몸의 중심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발걸음 소리는 천장 높이 둥글게 울려 퍼졌고, 뜨거운 기운을 가진 바람만이 실내를 메웠다. 평화로운 곳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쩐지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강해지는 열기 때문일까, 흡사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희들은 이미 앞선 마녀 판별에서 사악한 마녀 혹은 마술사라는 충분한 근거를 보였으나, 오늘은 에모티오 여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한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제들은 제일 앞에 서 있던 검은 머리 소녀의 눈가리개를 끌러 내었다. 소녀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나, 사제들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악마가 술수를 부려 뒤늦은 증명을 해 오는 것이고, 사제들을 홀리기 위한 것이라며, 결코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젊은 사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불구덩이에 쇠 집게를 집어넣어 붉게 녹아 가는 철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네가 정녕 사악한 마녀가 아니라면, 여신께서 네 손을 지켜 주실 것이다.”
엄숙한 기도가 끝난 후에는 소녀의 맨손 위로 그 철심을 올려놓았다.
“아악! 아악!”
괴로운 비명과 연기 그리고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는 순식간에 실내를 메웠다. 참관하고 있던 프레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쥐고 있는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붕대로 감아라! 2일 뒤에 화상 자국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소녀의 손에서 뜨거운 것이 떨어져 나갔다. 다른 사제가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몸을 겨우 잡아 두었고, 다른 사제는 얼기설기 붕대를 감았다. 그녀의 몸부림에 몇 번인가 붕대는 다시 볼품없이 풀어져 나갔다.
같은 말과 비명이 차례로 이어졌다. 루나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 앞에 몇 명의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니,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몸을 감쌌다.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음에도 손끝이 떨려 왔다. 그것 때문에 혹시라도 누군가 그녀에게 해를 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떨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손끝에 집중해야 했다. 제발, 제발 그만 떨어 줘. 부탁이야.
다행이었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본능에 가까운 감정에 그것은 결코 해롭지 않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조금은 묵직하게 다가오는 그것은 조금씩 그녀의 떨림을 대신 가져가 주었다.
프레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아이의 손끝에서 초록색의 감응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설마?”
커다란 불길이 앞에 있어서 그의 눈이 가져온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루나의 차례가 되었다. 체격이 큰 사제가 루나의 눈에 걸린 더러운 천을 끄집어 내리는 동안 프레슐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의 불안을 눈치챈 블랑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오며 물었다.
“왜 그래?”
역시 잘못 본 것이었나. 저 아이와 공기와의 감응이 정말 일어났다면, 블랑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 아닙니다. 그저.”
하지만 이미 고정된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사제가 아이의 로브를 친절하지 않은 손길로 거칠게 걷어 내었다. 고개를 숙인 아이는 주변을 확인하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금발, 새하얗게 질려 버린 얼굴.
그리고 곧 프레슐과 시선이 바로 이어졌다.
보라색, 시리도록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였다. 아이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체념이 프레슐에게 그대로 비쳤다.
“네가 정녕 마녀가 아니라면.”
매번 같은 기도. 한 문장밖에 되지 않는 여유. 짧은 순간에도 프레슐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계산이 흘러갔다.
아까 본 감응이 진짜라면, 저 아이가 블랑 선배가 말했던 그가 지키고 돌봐 주어야 하는 후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눈이 가져온 착각일지도 몰랐다. 정당하지 않은 심판의 희생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프레슐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신께서 네 손을 지켜 주실 것이다.”
짧은 기도는 끝났다.
Chapter 1-4 (1)
여러 번 반복된 잔인한 의식에, 이제 기도문이 끝날 때마다 모두가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아무리 마녀 심판이라도 어린아이의 괴로운 비명은 듣기 불편했다.
“여신께서 네 손을 지켜 주실 것이다.”
루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펴고 눈을 꼭 감았다. 떨지 않기 위해 손에 잡아 두었던 공기들마저 그녀의 두려운 감정에 감응하여 멀리 달아나 버려서, 그녀는 혼자 이 공포를 견디어야 했다.
감겨 있는 눈의 작은 틈새에서 늦은 눈물이 사르륵사르륵 끊임없이 흘러나와 그녀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실눈을 뜨고 살짝 앞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얼룩져 흐린 시야. 그러나 붉어진 철심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분명히 보였다. 그것에서는 그저 뜨거운 기운만이 느껴졌다. 아! ‘마녀가 아니면 뜨겁지 아니하고 화상을 입지 않게 여신께서 돌보신다.’하였던 사제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더욱 가깝다. 그저 뜨겁다.
나는 마녀일까? 역시 그랬던 걸까?
루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펄럭.
바람이 닿았다. 몸이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고 더는 뜨거운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루나는 여신의 은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로브였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하는 건가! 신성한 의식에 끼어들다니!”
기도문을 읊던 사제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었고,
“착각이 있던 것 같습니다.”
루나의 바로 옆에서 침착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루나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뜨거운 철심이 닿기 전에 이 사람이 그녀를 높이 안아 올려 주었다. 어째서? 루나는 그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착각? 그 아이야말로 분명한 악이다. 그 불경한 손으로 제 아비의 목숨을 끊어 의식을 완성하고, 초록색의 마법 가루를 만들어 내었지.”
그 말에 프레슐은 피식 웃었다.
“초록색의 마법 가루라. 이런 것 말씀입니까?”
프레슐은 가까이에 있는 공기를 손끝으로 집어내어 약간의 마력을 주입했다. 간단한 감정술이었다. 루나의 손끝에서 펼쳐진 것과 같은 색과 모양으로, 공기는 예쁜 초록색으로 빛났다.
“그, 그건…….”
사제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만두시오! 그 아이는 제 아비를 살해한 악마가 틀림없소!”
프레슐은 아이를 고쳐 안아 그 눈동자를 정면에서 마주했다.
“네가 그랬나?”
아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에 거짓 하나 없음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라는군요. 그럼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아이를 한쪽 팔로 들어 올린 그대로 돌아섰다. 함께 참관하던 고위 사제 몇 명이 프레슐의 무례에 대해 호통치기 시작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저런! 신성한 신전을 뭘로 보고! 이래서 술사들이란.”
그 사제는 잠시 옆에 앉아 있는 블랑의 존재를 잊고 중얼거렸다. 곧 블랑이 가까이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닫아야 했지만.
“에모티오의 사제가 여신의 손길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모자라, 그 귀한 손 위에 끔찍한 것을 얹으려 했단 말이죠.”
“아니, 그게 폐하의 요청이…….”
“그렇군요. 여신의 손길을 찾아내서 지키는 일보다는 권력의 명령을 지키는 일을 택하신 거군요.”
“…….”
“이번 일은 루베르 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명색이 고위 사제인 당신들이 기본적인 감응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마녀로 처형하려 했다고 말이죠.”
블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후배와 그 아이는 이미 홀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까지 말해 두었으니 사제들은 그 둘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아이들의 고통까지 그가 어찌해 줄 수는 없었다. 홀을 떠나며 그는 속죄의 기도를,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간절하게 올렸다. 그러나 과연 여신께서 굽어보심이 분명한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Chapter 1-3 (2)
“눈물을 흘려 보아라.”
“에?”
흐릿한 초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들어온 요구에 루나는 반문했다.
“역시 흘릴 수 없겠지, 네가 마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결론지었다. 루나는 마차에서 이미 흘릴 수 있는 눈물을 모두 흘려보냈다. 게다가 물을 마시지도 못했다. 몸에 남은 수분은 이미 바닥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사정 따위 알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항변하기에 루나는 너무나도 어렸다. 순진한 소녀는 그저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이 억울한 마음과 아비가 그리운 마음은 얼마든지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그녀의 눈가는 바싹 메말라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녀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의심했다.
나는 정말 마녀일지도 모른다.
마녀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쉽게 돌아왔다. 아까 친절한 목소리의 병사가 말해 주었다. ‘마녀가 아니라면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마녀라면? 무서운 일이 시작되는 걸까? 그것은 어떤 걸까? 죽는 걸까? 어떻게?
루나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틀간 마차 안에 방치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식사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17살 소녀는 최선을 다해서 버틴 것이다.
초점은 흐려졌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 버렸다.
쓰러진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루나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 앞에 묵묵히 서 있던 세 사람은 무언가를 종이에 휘갈겨 적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 앞을 떠났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그녀는 수프 냄새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이 파랗게 변했다. 이마가 차갑게 느껴졌다. 손과 발이 의지와 관계없이 파르르 떨렸다. 본능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치밀었다.
빵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수프는 따듯했다. 마녀라든가, 판별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모두 사라져 버렸고, 곧 아쉬워졌다.
더 먹고 싶다는 생각 뒤로 곧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깨어나 그녀를 괴롭혔다. 음식이 주는 힘이 그저 괴로운 생각으로만 이어진다면, 차라리 이대로 먹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르륵.
그래도 그녀의 배는 아우성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처지에 이제는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그녀의 더러운 옷자락을 충분하게 적시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흘렀다.
“누, 눈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꼭 닫혀 있는 문손잡이는 당연하게도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루나는 힘을 쥐어짜 문을 두드렸다.
“저, 눈물이 나요! 눈물이 흐르고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누가 봐 주세요! 눈물이 나온단 말이에요!”
애절함에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고, 주먹에 피가 맺히도록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것은 적막뿐이었다.
“제발, 열어 주세요! 봐 주세요! 이제야 겨우 눈물이…….”
이어지지 못하는 말은 결국 그녀의 마음에만 남아 있었다. 힘을 잃은 몸은 천천히 문을 쓸어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는 의식이 흐려진다는 감각을 그녀가 확실히 인지했다. 뺨을 때리면, 아니 이대로 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기만 한다면, 한 번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는 허기, 늦은 눈물, 자신에게만 들리는 애원.
도망가는 편이 나았다. 눈꺼풀의 무게가 유일한 구원이 되어 주었다.
∴
아무도 루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루나 역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소통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어 두었다.
무장을 갖춘 이가 다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손을 결박하고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의 보폭은 17살인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빨라서 끌려가는 도중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였다.
루나는 지정된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 주변으로 여러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고,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이어졌다. 그 누구와도 닿지 않기를 바라며, 루나는 그저 바로 서 있으려 애를 썼다.
펄럭이는 커다란 천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루나의 손을 감싸고 있는 줄이 그녀를 앞으로 당기기 시작하여 그녀는 그대로 몸의 중심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발걸음 소리는 천장 높이 둥글게 울려 퍼졌고, 뜨거운 기운을 가진 바람만이 실내를 메웠다. 평화로운 곳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쩐지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강해지는 열기 때문일까, 흡사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희들은 이미 앞선 마녀 판별에서 사악한 마녀 혹은 마술사라는 충분한 근거를 보였으나, 오늘은 에모티오 여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한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제들은 제일 앞에 서 있던 검은 머리 소녀의 눈가리개를 끌러 내었다. 소녀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나, 사제들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악마가 술수를 부려 뒤늦은 증명을 해 오는 것이고, 사제들을 홀리기 위한 것이라며, 결코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젊은 사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불구덩이에 쇠 집게를 집어넣어 붉게 녹아 가는 철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네가 정녕 사악한 마녀가 아니라면, 여신께서 네 손을 지켜 주실 것이다.”
엄숙한 기도가 끝난 후에는 소녀의 맨손 위로 그 철심을 올려놓았다.
“아악! 아악!”
괴로운 비명과 연기 그리고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는 순식간에 실내를 메웠다. 참관하고 있던 프레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쥐고 있는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붕대로 감아라! 2일 뒤에 화상 자국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소녀의 손에서 뜨거운 것이 떨어져 나갔다. 다른 사제가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몸을 겨우 잡아 두었고, 다른 사제는 얼기설기 붕대를 감았다. 그녀의 몸부림에 몇 번인가 붕대는 다시 볼품없이 풀어져 나갔다.
같은 말과 비명이 차례로 이어졌다. 루나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 앞에 몇 명의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니,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몸을 감쌌다.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음에도 손끝이 떨려 왔다. 그것 때문에 혹시라도 누군가 그녀에게 해를 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떨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손끝에 집중해야 했다. 제발, 제발 그만 떨어 줘. 부탁이야.
다행이었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본능에 가까운 감정에 그것은 결코 해롭지 않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조금은 묵직하게 다가오는 그것은 조금씩 그녀의 떨림을 대신 가져가 주었다.
프레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아이의 손끝에서 초록색의 감응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설마?”
커다란 불길이 앞에 있어서 그의 눈이 가져온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루나의 차례가 되었다. 체격이 큰 사제가 루나의 눈에 걸린 더러운 천을 끄집어 내리는 동안 프레슐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의 불안을 눈치챈 블랑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오며 물었다.
“왜 그래?”
역시 잘못 본 것이었나. 저 아이와 공기와의 감응이 정말 일어났다면, 블랑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 아닙니다. 그저.”
하지만 이미 고정된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사제가 아이의 로브를 친절하지 않은 손길로 거칠게 걷어 내었다. 고개를 숙인 아이는 주변을 확인하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금발, 새하얗게 질려 버린 얼굴.
그리고 곧 프레슐과 시선이 바로 이어졌다.
보라색, 시리도록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였다. 아이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체념이 프레슐에게 그대로 비쳤다.
“네가 정녕 마녀가 아니라면.”
매번 같은 기도. 한 문장밖에 되지 않는 여유. 짧은 순간에도 프레슐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계산이 흘러갔다.
아까 본 감응이 진짜라면, 저 아이가 블랑 선배가 말했던 그가 지키고 돌봐 주어야 하는 후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눈이 가져온 착각일지도 몰랐다. 정당하지 않은 심판의 희생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프레슐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신께서 네 손을 지켜 주실 것이다.”
짧은 기도는 끝났다.
Chapter 1-4 (1)
여러 번 반복된 잔인한 의식에, 이제 기도문이 끝날 때마다 모두가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아무리 마녀 심판이라도 어린아이의 괴로운 비명은 듣기 불편했다.
“여신께서 네 손을 지켜 주실 것이다.”
루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펴고 눈을 꼭 감았다. 떨지 않기 위해 손에 잡아 두었던 공기들마저 그녀의 두려운 감정에 감응하여 멀리 달아나 버려서, 그녀는 혼자 이 공포를 견디어야 했다.
감겨 있는 눈의 작은 틈새에서 늦은 눈물이 사르륵사르륵 끊임없이 흘러나와 그녀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실눈을 뜨고 살짝 앞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얼룩져 흐린 시야. 그러나 붉어진 철심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분명히 보였다. 그것에서는 그저 뜨거운 기운만이 느껴졌다. 아! ‘마녀가 아니면 뜨겁지 아니하고 화상을 입지 않게 여신께서 돌보신다.’하였던 사제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더욱 가깝다. 그저 뜨겁다.
나는 마녀일까? 역시 그랬던 걸까?
루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펄럭.
바람이 닿았다. 몸이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고 더는 뜨거운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루나는 여신의 은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로브였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하는 건가! 신성한 의식에 끼어들다니!”
기도문을 읊던 사제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었고,
“착각이 있던 것 같습니다.”
루나의 바로 옆에서 침착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루나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뜨거운 철심이 닿기 전에 이 사람이 그녀를 높이 안아 올려 주었다. 어째서? 루나는 그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착각? 그 아이야말로 분명한 악이다. 그 불경한 손으로 제 아비의 목숨을 끊어 의식을 완성하고, 초록색의 마법 가루를 만들어 내었지.”
그 말에 프레슐은 피식 웃었다.
“초록색의 마법 가루라. 이런 것 말씀입니까?”
프레슐은 가까이에 있는 공기를 손끝으로 집어내어 약간의 마력을 주입했다. 간단한 감정술이었다. 루나의 손끝에서 펼쳐진 것과 같은 색과 모양으로, 공기는 예쁜 초록색으로 빛났다.
“그, 그건…….”
사제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만두시오! 그 아이는 제 아비를 살해한 악마가 틀림없소!”
프레슐은 아이를 고쳐 안아 그 눈동자를 정면에서 마주했다.
“네가 그랬나?”
아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에 거짓 하나 없음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라는군요. 그럼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아이를 한쪽 팔로 들어 올린 그대로 돌아섰다. 함께 참관하던 고위 사제 몇 명이 프레슐의 무례에 대해 호통치기 시작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저런! 신성한 신전을 뭘로 보고! 이래서 술사들이란.”
그 사제는 잠시 옆에 앉아 있는 블랑의 존재를 잊고 중얼거렸다. 곧 블랑이 가까이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닫아야 했지만.
“에모티오의 사제가 여신의 손길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모자라, 그 귀한 손 위에 끔찍한 것을 얹으려 했단 말이죠.”
“아니, 그게 폐하의 요청이…….”
“그렇군요. 여신의 손길을 찾아내서 지키는 일보다는 권력의 명령을 지키는 일을 택하신 거군요.”
“…….”
“이번 일은 루베르 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명색이 고위 사제인 당신들이 기본적인 감응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마녀로 처형하려 했다고 말이죠.”
블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후배와 그 아이는 이미 홀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까지 말해 두었으니 사제들은 그 둘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아이들의 고통까지 그가 어찌해 줄 수는 없었다. 홀을 떠나며 그는 속죄의 기도를,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간절하게 올렸다. 그러나 과연 여신께서 굽어보심이 분명한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