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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라 쓰고 Love라 읽는다
1화
chapter 1
불볕더위와 함께 여름이 시작되었다. 제 방 한구석, 모니터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한 마리 백조는 마우스를 손에 잡고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와! 이거 완전 딱 내 스타일인데, 얼마야?”
설탕물인 믹스 커피를 가득 타 놓고 아이쇼핑을 하던 순길은 맘에 드는 티셔츠를 발견하자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힉! 티셔츠 하나에 이만 원이 넘어? 아휴, 왜 이렇게 비싸.”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린 순길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 생활도 했었던 그녀지만 지금은 집 안에만 틀어박혀 백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옷을 입고 어디 내세울 때도, 나갈 때도 없었다. 늘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 시작한 아이쇼핑은 그녀에게 유일한 낙이었던 것이다.
나이 삼십에 옷 하나 사겠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민망했다.
그녀는 아쉬웠지만 일부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 한곳에만 오래 앉아 있으니 몸이 자꾸 들썩거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이었던 터라 열기가 가득한 컴퓨터 앞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으, 완전 맹물이잖아.”
순길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옆에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이쇼핑에 집중을 하다 커피를 깜빡했더니 얼음이 녹아 버린 커피는 그냥 맹물이었다.
다시 커피를 타러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잠잠했던 휴대폰이 울렸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한 순길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 왜?”
순길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 뭐 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수화기 너머에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길의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인 연희였다.
“그냥 있어.”
― 그냥은 무슨. 너 또 아이쇼핑했지?
순길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 또 시비야. 일 안 해?”
― 하지, 왜 안 해.
“아직 퇴근 안 했잖아. 농땡이냐?”
연희의 한숨이 순길의 귀를 자극했다.
― 후, 헛소리하지 말고. 이따가 회사 앞으로 나와라.
순길은 아예 침대에 누워 버렸다.
“아, 왜! 나 귀찮아. 할 말 있으면 집으로 와. 더워.”
― 너 후회할 텐데?
순길은 눈을 번뜩이며 몸을 일으켰다.
“뭔데? 클럽 가게? 쏘는 거냐?”
다시 연희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순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 클럽은 개뿔. 그것보다 더 좋은 거니까 예쁘게 하고 나와. 또 추리닝 바람이면 죽을 줄 알아.
순길은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누웠다.
“클럽 갈 것도 아닌데, 뭘 또 예쁘게 하고 나와. 귀찮다니까. 나 마땅히 입을 옷도 없어.”
― 야! 말 좀 들어. 좀!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너 손해 볼 거 없으니까 7시까지 회사 옆 카페로 나와.
“귀찮은데…….”
순길이 꼬리를 내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연희는 목소리 톤을 낮추며 말했다.
― 순아, 너 집에서 그러고 있는 거 이제 지겹지도 않냐? 안 심심해? 외롭지 않아?
“심심하지. 지겨워. 근데 만사가 다 귀찮아.”
― 하아…… 순아, 우리 조금만 달라지자. 너 맘만 먹으면 뭐든 다 잘했잖아.
순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옛날 일이지. 근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
― 너한테 아주 좋은 일. 우리 순이 어쩜 행복해질지도 모르고.
순길은 실소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 너희 회사 면접이라도 보게 하려는 거야? 그런 거면 싫…….”
― 그런 거 아니야. 나와 보면 알아.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돼. 7시까지 늦지 말고, 꼭 예쁘게 하고 나와. 알았지? 이따 보자.
“…….”
순길은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컴퓨터를 바라보니 아이쇼핑을 했던 쇼핑몰 웹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연희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던 터라 제 자신이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릴 적부터 연희는 순길과 비교 대상 일 순위였다. 싹싹하고 얼굴도 예쁘고, 늘 밝았던 아이라 그와 반대되는 순길은 한동네에 살고 있단 이유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순길은 연희를 질투하기도 했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해서 연희와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먼저 다가오는 연희를 모른 척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을 단짝 친구로 함께하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저를 걱정하는 연희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연희는 유일하게 순길의 본명을 잘 부르지 않는 친구였다.
장순길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워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때도 이상하게 생각하긴커녕 순이라는 별명을 지어 줄 정도로 배려심 깊은 친구였다.
순길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일곱 시까지라면 지금 준비를 해도 시간이 빠듯했다. 연희가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었을 땐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순길은 가슴을 크게 들었다 내리며 커피 잔을 들고 방을 나왔다.
그녀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화장을 해 본 게 언제인지, 미용실은 또 언제 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푸석한 얼굴과 머리를 감았어도 윤기가 전혀 없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니 한숨만 새어 나왔다.
순길은 고개를 저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가볍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나로 동여맨 그녀는 스트라이프 무늬 민소매와 스키니진으로 간편하게 코디했다.
“뭐, 이 정도면 준수하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훑어본 순길은 자화자찬을 하며 집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운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괜히 불쾌해진 순길은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오늘은 더 더운 거 같네.”
순길은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타니 완전 천국이었다. 그나마 버스 안의 에어컨 바람이 그녀의 기분을 달래 주고 있었다.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시원해 꼼짝을 하기가 싫을 정도였다.
약속한 카페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다 되어 갔다.
연희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카페에도 에어컨이 나와 기다리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던 순길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보이고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아이 엄마들도 보이고, 연인으로 보이는 다정한 커플들이 즐비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좋을까. 다들 표정들이 좋네.”
순길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와는 상반되는 그들의 표정이 부럽기만 했던 것이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평범함도 안 되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던 터였다.
“괜히 나왔나. 그나저나 이 계집애는 일곱 시가 다 됐는데 왜 안 와.”
순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퇴근이 좀 늦어지는지 연희는 나타날 생각을 안 했다. 그녀는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려 하는 데 때마침 연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길은 콧방귀를 뀌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왜? 늦어?”
헐떡이는 연희의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아, 미안. 회의가 길어져서 좀 늦게 끝났어.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가지 마라. 알았지?
순길은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알았어. 근데 대체 뭐야?”
― 만나서 얘기해. 참! 너 예쁘게 하고 왔지?
순길은 창문으로 비치는 제 모습을 힐끔거리며 피식, 하고 웃었다.
“아, 몰라. 내가 꾸며 봤자지 뭐. 암튼 빨리 와.”
순길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 십 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쇼핑 앱을 실행시키고 이것저것 아이쇼핑을 했다.
“순아!”
한참 아이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길은 심드렁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왜 이제 와…….”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연희에게 투정을 부리려던 찰나 순길을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연희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아! 인사해. 여긴 나랑 같이 일하는 이신우 씨.”
순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이신우라고 합니다. 연희 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순길은 데면데면하게 말했다.
느닷없이 예쁘게 하고 나오라 하더니, 소개팅이었어? 내 주제에 이게 가당키나 해?
이게 지금 나를 놀리나.
순길의 머릿속은 전혀 곱지 않았다.
평소 쓸데없는 짓은 잘 하지 않는 연희였기에 무작정 믿고 나왔을 뿐인데, 뜬금없이 소개팅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일까?
괜히 짜증이 난 순길은 연희를 한없이 노려보았다.
“하하, 이름이라도 말을 해야지, 순아. 신우 씨 제가 사실은 오늘 이 자리, 순이한테 말을 안 했거든요. 그래서 얘가 좀 당황한 모양이에요. 신우 씨가 이해 좀 해 주세요.”
연희는 순길을 본체만체하며 난처한 듯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만하죠.”
“예, 하하하…….”
어색하게 웃던 연희는 순길을 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순길은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번뜩이며 입만 ‘뭐!’ 하고 뻥긋거렸다.
연희는 안절부절못하며 난감해했다. 순길의 표정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그녀가 한마디 말없이 휴대폰만 쳐다보는 것이 기가 막혀서였다.
연희는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표정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아, 저기 신우 씨, 순이가 낯가림이 좀 있어요. 친해지면 안 그러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신우는 빙긋 미소 지으며 순길을 바라보았다.
“저 이름이 순이…… 신가요?”
순길은 제 이름이 들리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정말 궁금하단 눈치였다.
“네, 뭐.”
연희의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순길은 개의치 않고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이런 만남, 이런 자리, 순길은 달갑지 않았다. 이 년을 백조로 집에 있으면서 남자라는 동물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던 터였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더 감흥이 없었다. 간만에 밥이나 얻어먹을까 해서 나온 자리에 남자라니, 순길은 영 시답지 않았다.
연희는 건조하기만 한 순길이 계속 거슬렸다.
물론 제대로 말하지 않은 잘못은 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를 봐서라도 좀 살갑게 굴면 안 되나?
연희의 속이 답답하게 꼬이고 있었다.
그때 순길이 벌떡 일어섰다.
“왜? 어디 가게?”
연희는 눈을 크게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
1화
chapter 1
불볕더위와 함께 여름이 시작되었다. 제 방 한구석, 모니터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한 마리 백조는 마우스를 손에 잡고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와! 이거 완전 딱 내 스타일인데, 얼마야?”
설탕물인 믹스 커피를 가득 타 놓고 아이쇼핑을 하던 순길은 맘에 드는 티셔츠를 발견하자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힉! 티셔츠 하나에 이만 원이 넘어? 아휴, 왜 이렇게 비싸.”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린 순길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 생활도 했었던 그녀지만 지금은 집 안에만 틀어박혀 백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옷을 입고 어디 내세울 때도, 나갈 때도 없었다. 늘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 시작한 아이쇼핑은 그녀에게 유일한 낙이었던 것이다.
나이 삼십에 옷 하나 사겠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민망했다.
그녀는 아쉬웠지만 일부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 한곳에만 오래 앉아 있으니 몸이 자꾸 들썩거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이었던 터라 열기가 가득한 컴퓨터 앞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으, 완전 맹물이잖아.”
순길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옆에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이쇼핑에 집중을 하다 커피를 깜빡했더니 얼음이 녹아 버린 커피는 그냥 맹물이었다.
다시 커피를 타러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잠잠했던 휴대폰이 울렸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한 순길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 왜?”
순길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 뭐 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수화기 너머에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길의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인 연희였다.
“그냥 있어.”
― 그냥은 무슨. 너 또 아이쇼핑했지?
순길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 또 시비야. 일 안 해?”
― 하지, 왜 안 해.
“아직 퇴근 안 했잖아. 농땡이냐?”
연희의 한숨이 순길의 귀를 자극했다.
― 후, 헛소리하지 말고. 이따가 회사 앞으로 나와라.
순길은 아예 침대에 누워 버렸다.
“아, 왜! 나 귀찮아. 할 말 있으면 집으로 와. 더워.”
― 너 후회할 텐데?
순길은 눈을 번뜩이며 몸을 일으켰다.
“뭔데? 클럽 가게? 쏘는 거냐?”
다시 연희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순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 클럽은 개뿔. 그것보다 더 좋은 거니까 예쁘게 하고 나와. 또 추리닝 바람이면 죽을 줄 알아.
순길은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누웠다.
“클럽 갈 것도 아닌데, 뭘 또 예쁘게 하고 나와. 귀찮다니까. 나 마땅히 입을 옷도 없어.”
― 야! 말 좀 들어. 좀!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너 손해 볼 거 없으니까 7시까지 회사 옆 카페로 나와.
“귀찮은데…….”
순길이 꼬리를 내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연희는 목소리 톤을 낮추며 말했다.
― 순아, 너 집에서 그러고 있는 거 이제 지겹지도 않냐? 안 심심해? 외롭지 않아?
“심심하지. 지겨워. 근데 만사가 다 귀찮아.”
― 하아…… 순아, 우리 조금만 달라지자. 너 맘만 먹으면 뭐든 다 잘했잖아.
순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옛날 일이지. 근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
― 너한테 아주 좋은 일. 우리 순이 어쩜 행복해질지도 모르고.
순길은 실소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 너희 회사 면접이라도 보게 하려는 거야? 그런 거면 싫…….”
― 그런 거 아니야. 나와 보면 알아.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돼. 7시까지 늦지 말고, 꼭 예쁘게 하고 나와. 알았지? 이따 보자.
“…….”
순길은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컴퓨터를 바라보니 아이쇼핑을 했던 쇼핑몰 웹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연희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던 터라 제 자신이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릴 적부터 연희는 순길과 비교 대상 일 순위였다. 싹싹하고 얼굴도 예쁘고, 늘 밝았던 아이라 그와 반대되는 순길은 한동네에 살고 있단 이유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순길은 연희를 질투하기도 했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해서 연희와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먼저 다가오는 연희를 모른 척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을 단짝 친구로 함께하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저를 걱정하는 연희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연희는 유일하게 순길의 본명을 잘 부르지 않는 친구였다.
장순길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워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때도 이상하게 생각하긴커녕 순이라는 별명을 지어 줄 정도로 배려심 깊은 친구였다.
순길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일곱 시까지라면 지금 준비를 해도 시간이 빠듯했다. 연희가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었을 땐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순길은 가슴을 크게 들었다 내리며 커피 잔을 들고 방을 나왔다.
그녀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화장을 해 본 게 언제인지, 미용실은 또 언제 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푸석한 얼굴과 머리를 감았어도 윤기가 전혀 없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니 한숨만 새어 나왔다.
순길은 고개를 저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가볍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나로 동여맨 그녀는 스트라이프 무늬 민소매와 스키니진으로 간편하게 코디했다.
“뭐, 이 정도면 준수하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훑어본 순길은 자화자찬을 하며 집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운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괜히 불쾌해진 순길은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오늘은 더 더운 거 같네.”
순길은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타니 완전 천국이었다. 그나마 버스 안의 에어컨 바람이 그녀의 기분을 달래 주고 있었다.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시원해 꼼짝을 하기가 싫을 정도였다.
약속한 카페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다 되어 갔다.
연희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카페에도 에어컨이 나와 기다리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던 순길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보이고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아이 엄마들도 보이고, 연인으로 보이는 다정한 커플들이 즐비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좋을까. 다들 표정들이 좋네.”
순길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와는 상반되는 그들의 표정이 부럽기만 했던 것이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평범함도 안 되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던 터였다.
“괜히 나왔나. 그나저나 이 계집애는 일곱 시가 다 됐는데 왜 안 와.”
순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퇴근이 좀 늦어지는지 연희는 나타날 생각을 안 했다. 그녀는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려 하는 데 때마침 연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길은 콧방귀를 뀌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왜? 늦어?”
헐떡이는 연희의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아, 미안. 회의가 길어져서 좀 늦게 끝났어.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가지 마라. 알았지?
순길은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알았어. 근데 대체 뭐야?”
― 만나서 얘기해. 참! 너 예쁘게 하고 왔지?
순길은 창문으로 비치는 제 모습을 힐끔거리며 피식, 하고 웃었다.
“아, 몰라. 내가 꾸며 봤자지 뭐. 암튼 빨리 와.”
순길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 십 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쇼핑 앱을 실행시키고 이것저것 아이쇼핑을 했다.
“순아!”
한참 아이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길은 심드렁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왜 이제 와…….”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연희에게 투정을 부리려던 찰나 순길을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연희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아! 인사해. 여긴 나랑 같이 일하는 이신우 씨.”
순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이신우라고 합니다. 연희 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순길은 데면데면하게 말했다.
느닷없이 예쁘게 하고 나오라 하더니, 소개팅이었어? 내 주제에 이게 가당키나 해?
이게 지금 나를 놀리나.
순길의 머릿속은 전혀 곱지 않았다.
평소 쓸데없는 짓은 잘 하지 않는 연희였기에 무작정 믿고 나왔을 뿐인데, 뜬금없이 소개팅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일까?
괜히 짜증이 난 순길은 연희를 한없이 노려보았다.
“하하, 이름이라도 말을 해야지, 순아. 신우 씨 제가 사실은 오늘 이 자리, 순이한테 말을 안 했거든요. 그래서 얘가 좀 당황한 모양이에요. 신우 씨가 이해 좀 해 주세요.”
연희는 순길을 본체만체하며 난처한 듯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만하죠.”
“예, 하하하…….”
어색하게 웃던 연희는 순길을 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순길은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번뜩이며 입만 ‘뭐!’ 하고 뻥긋거렸다.
연희는 안절부절못하며 난감해했다. 순길의 표정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그녀가 한마디 말없이 휴대폰만 쳐다보는 것이 기가 막혀서였다.
연희는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표정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아, 저기 신우 씨, 순이가 낯가림이 좀 있어요. 친해지면 안 그러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신우는 빙긋 미소 지으며 순길을 바라보았다.
“저 이름이 순이…… 신가요?”
순길은 제 이름이 들리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정말 궁금하단 눈치였다.
“네, 뭐.”
연희의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순길은 개의치 않고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이런 만남, 이런 자리, 순길은 달갑지 않았다. 이 년을 백조로 집에 있으면서 남자라는 동물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던 터였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더 감흥이 없었다. 간만에 밥이나 얻어먹을까 해서 나온 자리에 남자라니, 순길은 영 시답지 않았다.
연희는 건조하기만 한 순길이 계속 거슬렸다.
물론 제대로 말하지 않은 잘못은 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를 봐서라도 좀 살갑게 굴면 안 되나?
연희의 속이 답답하게 꼬이고 있었다.
그때 순길이 벌떡 일어섰다.
“왜? 어디 가게?”
연희는 눈을 크게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