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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 화장실 좀.”
연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순길을 따라 일어섰다.
“아! 신우 씨, 미안한데 저도 손 좀 씻고 올게요. 차 좀 주문해 주실래요?”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네? 뭐, 뭘로 할까요?”
“아무거나요. 갔다 올게요.”
연희는 다급하게 순길을 뒤따랐다.
신우는 그녀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주춤주춤 일어섰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선 그녀들은 거울로 서로를 흘겨보았다.
“야, 장순길. 너 진짜 이럴래? 눈치 없어? 이게 뭔지 몰라?”
연희의 다그침에 순길은 인상을 구겼다.
“너야말로 이게 뭐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소개팅 하고 싶댔어? 남자한테 관심 없다고 했잖아. 그리고 내 처지에 연애가 가당키나 하니? 너 나 놀려?”
연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그래, 내가 미리 말 안 한 건 진짜 잘못했다. 근데 인사 정도는 매너 있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왜.”
연희는 이를 악물고 볼륨을 높였다.
“야! 그냥 좀 좋게 생각하면 안 돼? 내가 설마 널 놀리고 싶어서 이러겠어? 좀 바꿔 보자고 했잖아. 언제까지 집에만 처박혀 있을 건데? 직장 없는 여자는 연애하면 안 돼? 네가 무슨 이팔청춘인 줄 알아?”
“…….”
순길은 연희를 노려보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연희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던 터였다.
괜히 비굴한 생각이 들어 순길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순아. 신우 씨 진짜 괜찮은 남자야. 성격도 좋고 저만하면 인물도 괜찮고, 매너 좋고 여자 스펙 재고 따지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러니까 좀 잘…….”
“그런 남자가 날 왜 만나냐? 안 그래?”
순길은 연희의 말을 막으며 제 자신을 비하했다.
연희는 가슴을 크게 들었다 내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어디가 어때서? 지금 안 해서 그렇지 너 한다면 하는 애잖아. 내가 널 몰라? 그러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이번 한 번만 나 믿고 잘해 보자. 응? 순아.”
“…….”
순길은 연희를 뚫어져라 바라만 보았다.
저를 걱정해 벌인 일이란 건 알겠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한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한 번쯤은 생활에 변화를 줘도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알았어.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근데 저쪽에서 별로라고 하면? 인사부터 내가 좀 심했잖아.”
연희는 그제야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 걱정하지 마. 신우 씨가 그런 거 이해 못 할 사람도 아니고, 일단 표정이 괜찮았어. 지금부터라도 조신하게 잘하면 돼. 이리 좀 와 봐. 립스틱이라도 다시 바르자.”
“아휴, 너도 참…….”
안심하며 좋아하는 연희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순길은 피식하고 미소 지으며 순순히 연희를 따랐다.
연애라, 내 처지에 정말 괜찮을까? 순길은 실소를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우 씨, 미안해요.”
연희의 말에 신우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 아니에요. 근데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그냥 제가 마시는 거로 통일했는데, 괜찮을까요?”
그는 순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연희는 얼른 순길을 자리에 앉히고 빙긋 미소 지었다.
“카페모카네요? 어머 신우 씨, 센스 있다. 카페모카 좋아요. 너도 괜찮지?”
순길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잘 마실게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왜 웃지? 내 표정이 이상했나? 순길은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저를 보며 미소 짓는 그가 아이러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날씨를 고려한 건지 시원한 아이스로 주문을 했다. 센스가 있다는 연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순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커피 안에 생크림이 왠지 맛있게 보였다. 신이 난 듯 어깨를 덩실거리던 순길은 늘 하던 대로 빨대를 들어 올리고 크림부터 먹었다.
“순아? 좀…….”
연희의 이를 악다문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만 추켜세우고 시선을 마주하니 연희는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후…….”
순길은 입술을 삐죽이며 빨대를 내려놓았다. 잔뜩 올랐던 흥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계집애. 되게 까다롭게 구네. 이게 뭐 어떻다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가라앉았던 순길의 얼굴은 금세 미소로 바뀌었다. 순길은 저 혼자 피식거리며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폈다 다양하게 표정을 변화시키며 끝내 큰소리로 웃어 보였다.
연희는 당황했다. 옆에 있던 신우의 눈치를 살피며 순길의 앞쪽 테이블을 두드렸다.
“순아? 뭐 하는데? 야!”
순길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일그러진 연희의 표정을 보니 괜히 민망해졌다.
“어? 아니, 그냥 귀여워서. 저 꼬마 우리 뭐 먹는지 궁금했나 봐. 큼.”
“하…….”
연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순길은 그의 눈치가 보여 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빨대를 들어 올렸다.
“푸훗.”
어렴풋이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그도 저의 행동을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배시시 웃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순길은 창피해졌다. 곧바로 시선을 피해 버린 그녀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 생크림 좋아하시나 봐요. 괜찮으시면 이거 덜어 드릴까요?”
그는 제 커피 잔에 있는 생크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뜬금없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거절을 하면 분위기가 더 어색해질 것만 같아 순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세요.”
신우는 빙긋 웃으며 생크림을 넘겨주었다.
연희는 그를 당황스럽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나쁘지 않은 분위기 탓이었는지 금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표정이 참 밝았다.
소개팅으로 나온 상대가 데면데면하면 보통은 그 분위기에 동요가 될 텐데. 원래 잘 웃는 편인 건지, 아니면 연희에게 미안할 것 같아 억지로 웃는 건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내 생글거리며 웃었다. 참 특이한 남자네. 순길은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속뜻은 알 수 없어도 웃는 그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씩 호기심이 생겼다. 순길은 신우가 건넨 생크림을 먹으며 그를 힐끔거렸다.
그때 연희에게 전화가 왔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녀의 애인인 것 같았다.
“잠깐 실례할게요. 어, 석현 씨. 어디야? 거의 다 왔어? 아, 알았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타이밍 한번 기막히네. 분명 사전에 계획했던 거겠지. 아휴, 계집애. 나 혼자 어쩌라고. 어색해 죽겠는데.
순길은 입술을 삐죽이며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신우 씨. 저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중요한 약속이 있었거든요. 괜찮죠?”
연희의 말에 그는 자리까지 일어서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그럼요. 괜찮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뭘 저렇게까지 해? 순길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계속 주시했다.
“미안해요. 아! 순아, 나 먼저 갈게. 미안.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간다.”
순길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희는 순길의 난처해하는 표정을 읽은 듯했지만 눈동자를 그에게 돌리며 눈짓을 하고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렸다. 아마 잘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
순길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셨다. 연희가 가고 나니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잠깐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희 말고 누군가를 단독으로 만나 본 적이 없어,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이 어색한 분위기가 난감했던 모양이다. 연희와 있을 때는 커피도 잘 마시지 않더니 창밖을 내다보며 내내 커피만 마셨다.
하긴 나라도 뻘쭘하겠어. 아휴, 이제 어쩌지? 집에 가자고 해야 하려나? 순길은 이도 저도 못 해 눈치만 살폈다. 표정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도 말을 쉽게 하지 못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커피만 들이켰다. 어색하고 썰렁한 분위기는 마음까지 조급하게 만들었다.
“저…….”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순길은 눈을 크게 뜨고 신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요.”
“아…….”
그래. 아까 물어봤을 때 제대로 말을 못 했지. 순길은 잠시 고민했다. 장순길이란 본명을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탓이었다. 순길이나 순이나 따지고 보면 둘 다 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한데 순길보단 순이가 조금은 더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순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 예. 순이 씨.”
그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데 침묵도 함께 동반되었다.
순길은 더 안절부절못했다. 대화를 이어 가든 아님 각자 집으로 헤어지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순길은 가슴을 크게 들었다 내렸다. 그리고 신우를 넌지시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지루하시죠? 이만 일어날까요?”
순길의 말에 그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시선을 마주했다.
“커피는 다 드신 건가요?”
순길은 다 마시지 못했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는 다시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럼 나갈까요?”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연애냐. 순길은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나가서 식사해요. 우리.”
“……!”
집에 가자는 게 아니었어? 순길은 예상 밖의 말이라 잠시 멈춰 섰다.
그는 당황한 듯 말을 이었다.
“왜, 왜요? 무슨 문제라도…….”
순길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나가요.”
“네…….”
신우는 순길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다시 걸음을 옮기고 카페를 나왔다.
그들은 카페를 나와 나란히 멈춰 섰다. 일단 나오긴 했지만 다음 장소를 전혀 공유하지 못했던 터였다.
순길은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는 어색함이 익숙해졌는지 순길을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드실래요?”
그녀는 난처한 듯 웃었다. 질문을 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댔다. 그러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삼겹살과 소주.
집에선 염치가 없어 고기 한 번을 먹자 말하지 못했던 순길은 간만에 삼겹살이 당겼던 것이다. 말을 할까 말까를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순길이 고민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순이 씨 드시고 싶은 걸로 할게요.”
순길은 그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어차피 오늘 한 번뿐일 인연. 체면이고 뭐고 먹고 싶었던 거라도 마음껏 먹어 보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 그럼 삼겹살에 소주는 어떨지…….”
“…….”
순길은 겨우 대답했다.
삼겹살에 소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그의 표정이 조금은 당황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