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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회귀
1화
프롤로그


생물인 이상 누구나 죽는다. 카리나가 봐 왔던 동물들은 그녀보다 수명이 짧았고, 그녀는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많은 죽음을 지켜봐 왔다. 그녀에게 죽음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명제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을 수 있어도, 그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죽었다. 인형의 주인, 이름 올릴 인형사, 나의 아버지, 마체르트가 죽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활발히 대화하고, 밥 먹고, 연구하던 사람이 다음 날 보니 잠든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용한 죽음이었다. 위대한 천재도 자기 죽을 날은 알지 못했는가. 카리나에겐 그야말로 예고 없이 닥친 사고와 같았다.
단지 체온이 낮은 것과 생명이 빠져나간 몸의 온도는 너무나 다르다. 열을 식히기 위해 내내 붙들고 다녔던 손은 오늘 아침 섬뜩한 무기질처럼 열 오른 그녀의 뺨을 스쳤다. 불경하게도 쓰레기를 버리듯이 팽개쳤던 것이 미안하여 울었다. 그럼에도 다시 잡고 싶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그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마치 그가 평생에 거쳐 몰두해 온 인형 같은…… 단백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를 지하에 묻을 때마저 카리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더듬는 것은 그가 남긴 말이었다.
‘사랑하는 카리나. 내 말한 바 모두 너를 위한 것이니, 부디 잊지 말아다오.’
아버지. 잊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 말 역시 온도를 잃겠죠. 평생을 함께해 온 유일한 혈육. 당신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나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생전의 그에게 감정에 무디다는 평을 받았어도, 평생을 함께한 혈육의 죽음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차오르는 슬픔에 잠식되었다. 쥬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으스러질 듯 가해진 악력에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흥건히 젖은 볼을 쓸었다. 그러나 젖은 볼은 계속 젖기만 해서, 이윽고 닿아 오는 손가락마저 젖게 만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희게 빛나는 손끝의 물기를 응시했다.
따뜻한 숨이 이마에 닿아 오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콧방울에 키스했다.
“……쥬다.”
“울지 마.”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아버지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그가 어떻게 죽을 수 있어. 나를 내버려 두고 어떻게 가실 수가 있어? ……원망스러워.”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두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흘렀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감정을 숨기지 못한 눈동자가 충혈된 채 흔들린다.
쥬다는 마체르트가 그녀에게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짐작하기에 말없이 그녀의 눈을 감겼다. 눈을 감는 것조차 잊고 계속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쥬다의 마음에도 착잡한 슬픔이 스며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나 역시 스승님이 이렇게 가신 것이 믿어지지 않아.”
카리나가 눈을 감고서야 쥬다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여태껏 아버지와 함께한 카리나에 비할 바는 아닐지언정, 그 역시 10살에 폐허에서 마체르트에게 구원받은 이후 인형술에 관한 모든 믿음을 그에게 주고 따랐다. 추구하는 것이 같지 않아도 마체르트는 이 세상에 그가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정한 이였다.
그런 스승이 역시 평생을 바쳐 사랑한, 숙원마저 뒤로할 정도로 위했던 카리나. 마체르트가 쥬다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이 필연이었다면 셋 뿐인 숲에서 그녀를 품는 것 역시 필연이었으리라. 그런 그녀는 지금 전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이렇게 가시면 안 돼…….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어떻게 하고? 우리를 사도로 몰아 핍박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나타나 줄 거라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가시면…….”
“내가 할 거야, 카리나. 스승님이 바라셨던 것. 나는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원해. 그러니 그건 스승님이 아니라 내가 해낼 거야. 네 어머니를 죽게 하고, 스승님을 연구에 미치게 하고, 내 가족을 학살한 그들에게 보여 줄 거야. 그런 인형은…… 내가 만들 거야.”
억누른 음성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지난 세월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던, 마체르트와 쥬다의 평생의 숙원. 밤마다 입으로 곱씹고 가슴으로 새겼던 그의 숙원은 이 순간 그를 뜨겁게 만들었다. 맞닿아 있는 카리나의 눈은 그를 감지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안 돼, 쥬다. 난 무엇보다도 이제 네가 중요해. 평생, 제발, 평생 나를 떠나지 말아 줘.”
쥬다는 고개를 숙여 열이 올라 발갛게 물든 카리나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애정이 깃든 키스에 카리나는 마음으로부터 슬픔을 몰아냈다.
애초에 카리나에게 쥬다는 제 생명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10살의 그때, 모든 것을 다 잃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부터.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그 외양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부터. 단단하게 아래를 떠받쳐 주던 아버지가 곁에서 사라져 버린 지금, 그녀에게는 정말 쥬다뿐이었다.

밤새 쥬다를 끌어안고 아버지 없는 하루를 보낸 카리나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저를 달래느라 늦게 잠들었던 탓에 쥬다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곤히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체르트를 잃고도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것은 다 이 사람 덕분이다.
10년간 함께하여 더없이 익숙한 얼굴이지만 어느 한순간도 질린 적이 없는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허리에 얹어진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쥬다의 가슴에 손을 올려 주고 이불로 덮은 뒤 카리나는 소리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향한 곳은 마체르트를 묻은 곳이었다. 한줄기 햇살이 비석을 덮고 있었다. 카리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 비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믿음직스러운 시선 대신 차가운 비석이 그녀를 마주했다. 천천히 실감이 들었다.
“아버지, 정말 죽었구나.”
셋에서 둘이 되어 버렸다. 사라진 하나. 그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이번에도 오랫동안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요?”
카리나가 읊조렸다. 답이 없는 것이 당연한데, 응답하지 않은 상대에게 중얼거리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다리를 끌어모았다.
“그럼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 아니에요.”
인형의 탑을 재건하고자 이곳저곳으로 떠돌았던 아버지. 그 덕에 정작 그녀의 곁을 지킨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은 원망보다 안도가 들었다. 마지막은 숲이었고 그녀의 곁이었다. 앞으로도 숲일 것이다.
없을 때조차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존재였다. 마음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으나 허전하고 허탈하여 그녀는 멍하니 매끄러운 비석을 바라보았다.
“춥다.”
어깨에 따뜻한 옷이 걸쳐졌다. 고개를 돌리자 쥬다가 졸린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언제 나온 거야?”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방금……. 조금 더 자지 그랬어? 피곤해 보여.”
“너도 어제 늦게 잤잖아.”
쥬다가 카리나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한 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품 안에서 카리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찬바람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쥬다.”
“응?”
“이제 우리 둘뿐이야.”
“그렇네.”
평이한 어조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만 쥬다의 팔을 붙잡은 카리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서워?”
카리나가 고개를 들어 쥬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검푸른 눈동자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체르트가 없는 앞으로가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그들에게는 놓지 못하는 목표가 있었고, 한 축이 사라졌으니 모든 부담은 남은 이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카리나는 살짝 웃었다.
“아니. 당신이 있잖아.”
온전한 그녀의 진심이었다.

* * *

어린 그녀의 뒤에는 늘 위험한 불길이 치솟아 따라왔다. 욕설과 고함 소리를 뒤로하고 아버지의 큰 손을 붙잡고 뛰던 다급한 순간들. 걸음마다 쫓아오는 악의의 그림자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를 위협했다.
‘죽여!’
‘저 더러운 것들을 죽여!’
‘감히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마법과 맞서는 저들을 죽여!’
‘삿된 것을 만드는 손을 자르고, 권위를 탐하는 눈을 뽑고, 우리의 귀를 어지럽히는 혀를 뽑아!’
주변은 하루가 멀다 하고 피가 튀겼다.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 왔던 수많은 인형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파괴되었다.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피,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했던 사람들의 몸에서 솟구치던 붉은 피.
그녀는 시야를 물들이는 피에 굴복하는 대신, 그들의 어두운 그림자와 비명이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마음을 닫았다.
‘카리나. 이제는 괜찮단다. 그 어떤 것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
아비가 지켜 줄 테니.
그러나 그 말을 지키기에 그는 너무 바빴다. 한순간에 무너진 탑의 부흥을 바라는 이들이 그를 찾는 서신이 오두막에 쌓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떤 가능성을 찾고자, 생사를 같이했던 이들을 구하고자 오두막을 떠나 있는 날이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날보다 많았다.
‘안녕.’
점차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 갈 때쯤 아버지와 같이 나타난 소년은 눈이 부셨다. 세상의 모든 신이 손수 빚은 것 같은 절대적인 아름다움, 그 눈 속에서 증오와 분노로 타오르던 영혼은 그녀의 눈을 가리던 진득한 핏자국을 거둬 냈다. 붉고 푸른 피의 바닷속을 떠돌던 그녀를 건져 냈다.
‘무슨 인형을 만들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마저 태워 버릴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싱긋 웃으며 인사하던 소년. 그는 영혼마저 매료시키는 소년이었다.



CH. 01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다가온 봄은 늘 그랬듯이 따스했으며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카리나는 햇빛을 피해 그늘 아래서 책장을 넘겼다. 파릇한 풀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등을 대고 앉은 흔들의자는 딱딱했으나 쥬다의 솜씨로 못 하나 모나게 튀어나온 곳이 없었다. 물건 그 자체보다는 의자에 앉을 때마다 느껴지는 그의 정성. 그녀에게 이것보다 좋은 의자는 없었다.
미소 띤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눈에 띄는 문구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책이 던진 화두는 잔잔했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름다움. 아름다움……. 카리나는 어딘지 낯선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아름답다, 라.”
그녀의 좁은 세상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빈번하게 쓰이지 않아 입에 설었다. 비단 이런 단어만은 아니었다. 소위 세련됐다고 하는 단어들 모두가 익숙하지 않았다. 아버지 마체르트가 장로로 있던 인형의 탑이 사도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은 탓에 줄곧 숲 속에서만 지내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그 과정에서 잃고, 쫓기던 시간은 길고 길었다. 평생을 숲 속을 떠돌며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기억엔 마체르트와 쥬다가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름다움이란 낯선 도시의 사람보다는 숲 속의 자연물을 칭하는 것이었다.
한낮에 반짝이는 계곡물, 새벽 동안 나뭇잎에 맺힌 이슬,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어미 새의 모습과 푸르게 빛나는 초록 숲의 물결……. 그 외 다른 아름다운 것들은 무지의 영역에 있었다. 그렇기에 커 갈수록 찬란해지는 쥬다에게 빠지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그녀의 미는 아름다움보단 재앙이다. 왕과 영주의 넋을 빼놓고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모는 외모를 아름다움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경험을 동반하지 않은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고 했다. 카리나는 책의 구절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하게 윤곽은 잡혔다. 재앙이라는 것은 모르겠으나 넋을 빼는 경험은 적지 않았다. 카리나의 눈이 빠르게 활자를 훑었다. 색에 홀렸다고 폄하당한 왕들은 신하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어떻게 한낱 사람에 빠져 대의를 잊을 수 있냐고 반문한다. 카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는 쥬다만 있으면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다. 왕과 영주란 자들이 뭘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족하는 것이다. 그만 자신의 곁에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돈도, 보석도, 명예도. 카리나는 그것들에게서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흙바닥에서 작업 중인 쥬다를 바라보았다. 열중하는 코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것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