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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목이 잘려 연인과 헤어진 그들이 불쌍해.’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와 함께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보다 귀한 가치는 어디에도 없다. 그를 보자마자 느슨하게 풀리는 입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마체르트를 떠올렸다. 아버지도 이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때로 마체르트는 마법사들이 불태웠던 집 안에서 쥬다를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했다. 정확히는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냐며 반발하는 카리나에게 도리어 울분을 터뜨리곤 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니. 넌 그럴 수 없는 애였잖느냐.’
그 말은 묻는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녀에게 호소하는 듯했다.
‘지금의 널 보렴. 네 할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쫓는 네가 정말 너란 말이냐? 넌 기본적으로 차가운 성정이야. 내 뒤를 잇기에 너만 한 적임자가 없단다. 나를 뛰어넘는 재능,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이성. 도대체 왜 포기하겠다는 거냐!’
‘바라지 않아요. 저는 이제 쥬다를 돕고 싶어요. 그 애 옆에 있고 싶어요. 아버지의 꿈이, 제 꿈은 아니잖아요.’
마체르트의 눈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내 딸아, 카리나. 네 모든 걸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거야? 그 맹목이 너를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정말 모르는 거냐?’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지 반년이 지났지만 그의 말은 아직도 불쑥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 일로 빚었던 마찰이 생각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신에게 걸었던 그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제가 했던 말 하나하나가 그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음을 이제 와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추억하는 일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산 자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카리나는 고개를 흔들고 표정이 좋지 않은 쥬다 쪽으로 걸어갔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나무 아래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아 무릎을 모아 그를 관찰했다.
한데 묶어 뒤로 늘어뜨린 남청색 머리칼이 등 뒤에서 빠르게 흔들렸다. 뭐가 잘 안 되는지 연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쥬다의 마음처럼 카리나의 속도 엉키어 갔다.
반년 전부터 아버지의 못 이룬 한마저 쥬다에게 더해진 것인지, 쥬다는 이전보다 더 강박적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카리나는 그의 모습에 좀처럼 걱정이 줄어들지를 않았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예사였고,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점점 더 초조해지는 그의 표정이었다.
카리나 역시 그를 돕고 싶었고, 그의 바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쥬다는 이상할 정도로 조급해했다. 인형술에 있어서 최정상의 대가였던 마체르트도 일생을 바쳤던 일인데. 카리나는 하루가 마치 10년인 것처럼 불안해하는 쥬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어긋남에 의한 자신의 불안도.
“뭐가 문제야?”
그녀의 물음에 쥬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얼굴엔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짜증이 가득했다. 평소 감정을 격발시키는 일이 드문 그였다. 그러나 요즘 그가 보이는 초조함은 그를 인내의 한계까지 몰고 가는 듯했다.
“……크기가, 아니, 질도!”
쥬다가 주먹을 꽉 쥐며 눈을 감았다.
“다 문제야. 이건 하급이야. 초급 술사도 만들 수 있을 만한 하급품이야!”
소형견만 한 크기의 인형을 집어 들고 땅으로 내리치려는 그를 품에 안아 등을 쓸어내렸다.
“쥬다, 진정해!”
진정해, 제발. 카리나의 속삭임에 쥬다의 급한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천천히 등을 어루만지다 한 발자국 물러섰다. 맥이 빠진 것처럼 비틀거린 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리나는 거칠게 팽개쳐진 인형을 들어 살폈다.
쥬다의 능력이 대단함을 안다. 그라면 이제 쓸 수 있는 사람이 자신들밖에 남지 않은 인형술을 다시 정점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쉽지가 않았다. 인형을 살피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설계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재료의 문제였다.
인형은 크기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가 크게 달라졌다. 한 가지를 제외한 다른 재료들은 구하기가 어려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 탑이 무너지기는 했으나 그 이전까지 인형사들은 마탑 중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부를 누렸다. 상당 부분 손실되긴 했으나 사도로 몰려 쫓기게 된 이후에도 돈으로 고생해 본 적은 없었다. 마체르트는 신분을 속이고, 모습을 바꾸어 여러 나라에서 자유 마법사로도 활동한 바 있어 귀족들과의 연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살아생전 재료가 부족한 적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인형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인 생명석은 그런 마체르트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노화를 되돌리고 경각에 달린 목숨도 살리는 영약인 생명석.
인형의 크기가 클수록,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인지 능력을 바랄수록 상등품의 생명석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지금 쥬다가 만들 수 있는 인형의 한계는 아직 설치류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마체르트가 죽기 전까지 바랐던 것은 인형으로써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고, 그건 지금 가진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꿈이다.
그런 목표에 비해 고작 소형견만 한 크기의 인형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절망을 주고 있는지, 카리나는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다.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고 쥬다의 옆에 앉았다. 쥬다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실핏줄이 터져 빨개진 눈과 카리나의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아파 와 카리나는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한동안 그녀에게 안겨 있던 쥬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그녀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내가 너무…… 못나게 굴었지.”
“아니, 아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당신이 그렇게 표현해 줘서 다행인걸.”
“배고프지 않아? 요 며칠 계속 같은 스튜만 먹었잖아. 오랜만에 마을로 내려가자. 신선한 빵도 사고, 고기도 사고. 맛있는 거 해 먹자.”
카리나의 얼굴이 쥬다가 눈치채지 못하게 어그러졌다. 차라리 그가 모든 감정을 터뜨렸으면 했다. 그녀가 걱정할까 봐 억누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미소가 반가웠지만 억지로 짓는 미소는 싫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자 쥬다는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 일어났다.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몸 상태 그대로 돈만 챙겨 내려가려는 기세에 그의 팔을 잡아채 그 품에 안겼다. 넓은 가슴에 볼을 대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배 안 고파. 당신이 그냥 일주일 정도 잠만 잤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만 잤으면 좋겠어.”
“아무 생각도?”
“……내 생각만 꿈으로 하고.”
머리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결 편안해진 음성에 안심이 되었다. 쥬다가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로 맞닿아 나누는 체온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사로웠다. 카리나는 그녀가 느끼는 이 평온을 쥬다 역시 느끼기를 바랐다.
쥬다가 인형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와 그녀만을 생각하기를. 그러나 그녀는 또한 쥬다를 알았다. 결코 완전히 잊지 못할 그를 알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그를 돕는 것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방법을 찾자, 쥬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의지 가득한 목소리에 쥬다가 카리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카리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밀고 들어오는 쥬다에게 열렬히 반응했다.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내가 못 할 일은 없어.”
당신이 있으면.
키스의 열기가 남은 눈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 * *
쥬다는 카리나의 진심을 기쁘게만 받아들였다. 매일같이 마체르트의 묘를 찾았던 카리나의 발걸음은 점차 뜸해졌다. 그녀는 대신 쥬다가 연구실에서 인형을 만드는 동안 동굴을 찾아다녔다.
산세가 험하기는 하나 그리 위험한 생물은 없는 곳까지가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카리나는 등에 불을 켜며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잠시 후면 식사 시간이다. 쥬다는 식사 시간인지도 모르고 집중하고 있을 테니 그녀가 챙기지 않으면 끼니를 거를 것이다. 한 시간 안에 나오고 싶었으나 동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확신할 수가 없다. 카리나는 모래시계를 허리춤에 차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기는 하나 미끄럽지는 않았다. 넘어질 위험은 없겠지만 카리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생명석은 물기가 많은 동굴에서 주로 발견이 된다. 산과 동굴의 정기로 이뤄진 맑은 물로 생성된다고 추측되는 생명석은 사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자주 발견되었다. 깨끗한 동굴에서는 잘 생성되었으니까. 그러나 생명석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웬만한 동굴은 사람들에 의해 헤집어져 지금은 엔글레지 산이 아니면 생명석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졌다. 하급품이라도 인형에 쓰일 정도의 생명석은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므로, 지금에 이르러선 값비싼 물건이 되고 만 것이다.
카리나는 위험하더라도 동굴이 미끄럽기를 바랐다. 잠시 고민하다가 조금만 더 가 보자 싶어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다가 짐승의 배설물로 추정되는 것이 있어 손으로 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육식 동물의 변 냄새는 아니었다. 맹수가 사는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한 카리나의 걸음이 좀 더 대담해졌다.
동굴 벽을 더듬거리며 걷다가 어느 지점이 되자 물기가 급격하게 많아졌다. 금을 그어 놓은 것처럼 변화가 극심하여 발이 주욱 미끄러졌다.
“아악!”
동굴 바닥은 미끄러운 데다가 경사가 심하게 져 있었다. 카리나는 미끄러진 그대로 동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혹여 종유석 같은 데 몸이 부딪힐까 싶어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고 충격을 견뎠다. 수 초간 구르던 카리나가 평평한 바닥에 떨어졌을 때 튀어나온 돌 조각에 등이 찍혔다.
“읏.”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등을 감쌌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찍힌 등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카리나는 겨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통증은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가 문제다. 카리나는 다리와 팔을 접어 보고 움직이기에 문제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만 꽤 심하게 찍혔는지 등을 만진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랜턴을 잃어버려 사위를 분간할 수가 없다. 카리나는 신중히 몸을 굽혀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매끄러운 바닥의 차가운 물기가 묻어 나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차갑고 맑은 공기가 코로 흘러들어 왔다.
카리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생명석이 있을 것이다. 주변을 훑었지만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지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모래시계도 확인할 수가 없다. 오두막까지 돌아가는 시간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보면 쥬다의 식사를 챙길 시간이어서 계속 동굴을 돌아보기가 여의치가 않았다. 내일 다시 오는 게 좋겠어. 카리나는 아쉬운 눈으로 어둠을 더듬었다.
“쥬다. 저녁 먹자.”
카리나는 아픈 기색 없이 멀쩡한 얼굴로 쥬다를 불렀다. 어느 정도의 크기를 벗어나면 실패한다는 문제점을 인식한 쥬다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기존에 안 된다고, 안 될 거라고 여겨지는 방법도 하나하나 시도하면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쉽지 않은 탓에 쥬다는 카리나의 부름도 듣지 않고 복잡한 수식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카리나는 쥬다에게 가까이 다가가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소나무를 닮은 서늘한 향기가 가득 맡아지자 카리나는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의 통증을 한순간에 잊어버렸다.
“카리나.”
쥬다가 수식에서 시선을 떼고 카리나의 손등을 감쌌다.
“배 안 고파?”
“벌써 밥 먹을 시간이야?”
“으응.”
카리나는 쥬다의 목에 코를 박고 살냄새를 들이마셨다.
“카리나. 너 요즘 무리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
눈을 감고 웅얼대는 카리나를 돌아본 쥬다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자 카리나가 씨익 웃어 보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난 당신 자꾸 식사 거르는 게 더 걱정된다.”
그녀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쥬다가 시선을 피하더니 나가자며 말을 돌렸다.
쥬다를 식탁에 앉히고 팬에 올려 둔 팬케이크를 접시에 옮기며 쥬다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이상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