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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카리나의 얼떨떨한 얼굴에 쥬다의 표정이 굳어진다.
“네 등.”
카리나가 등을 향해 손을 더듬거렸다. 나름대로 붕대로 감는다고 감았는데 피가 배어 나온 모양이었다. 쥬다의 눈치를 살피자 호락호락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다.
“동굴을 좀 살피다가.”
“뭐?”
상황을 파악한 쥬다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곧 화가 나 굳어지는 얼굴에 카리나가 시선을 피하자 쥬다는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대로 치료는 한 거야?”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쥬다는 심각한 표정으로 등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약을 바르지도 않았잖아.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밥 안 챙겨 줘도 되니까, 네 몸이나 좀 챙겨.”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카리나를 보며 쥬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제 몸을 돌보지 않을 것을 안다. 쥬다가 복잡한 얼굴로 카리나의 손목을 붙잡아 방으로 들어갔다.
“약부터 제대로 바르자. 뭐 발라야 해?”
“내가 할게.”
집 안의 모든 약은 카리나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카리나는 자연스럽게 서랍에서 고약을 꺼냈다. 그녀의 손에서 약을 가로챈 쥬다가 무뚝뚝한 손길로 카리나의 등을 돌렸다. 화가 난 것 같아……. 카리나는 쥬다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때까지 숨을 죽였다. 붕대가 꼼꼼히 감겼는지 확인한 쥬다가 카리나의 시무룩한 얼굴을 흘끗 보았다.
“내일부턴 같이 가.”
“어딜?”
“동굴이든, 어디든. 너 생명석 찾으러 가는 거 아니야.”
“…….”
“그걸 왜 너 혼자 가.”
카리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쥬다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카리나가 쥬다와 함께 산을 오르지 않은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쥬다!”
자신이 미끄러졌던 곳에서 쥬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자 카리나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손을 뻗을 틈도 없이 쥬다가 어두운 동굴 아래로 떨어져 카리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그녀마저 아래로 미끄러진다면 빛도 없이 더 위험할 것이다. 이성은 침착하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카리나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했다.
“카리나! 나 괜찮아.”
동굴 벽을 짚고 내려가는 그녀에게 쥬다가 재빨리 소리쳤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자신의 등을 뚫었던 날카로운 조각이 생각나자 카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린 시야로 걷기가 힘들어지자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급하게 움직인 탓에 동굴 벽에 손바닥이 길게 찢겼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으나 카리나는 내려가는 것에 급급해 손을 돌보지 않았다.
“쥬다! 괜찮아?”
“괜찮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쥬다는 침착하게 서 있었다. 카리나가 등을 가지고 내려오자 쥬다는 카리나가 짚고 있는 동굴 벽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지나온 곳엔 가는 핏줄기가 흔적처럼 이어져 있었다.
“괜찮다고 했잖아! 천천히 내려오지, 이게 뭐야.”
쥬다가 카리나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손바닥은 꽤 많이 찢겨져 있었다. 카리나는 능숙하게 붕대를 꺼내 손을 둘둘 말고 쥬다를 올려다봤다.
“정말 다친 데 없어?”
쥬다는 다행히도 장갑을 끼지 않은 손등에 생채기 정도만 났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에 있는 상처가 훨씬 심한데도 자신을 걱정하는 카리나를 바라보는 쥬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한 카리나가 등을 들어 올리더니 동굴을 비추었다.
“생명석이 있을 거야. 어서 찾자.”
말을 돌리는 것이 분명한 그녀의 뒷모습에 쥬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동굴에서는 꽤 급이 높은 생명석을 얻을 수가 있었다. 다만 크게 다칠 뻔했던 위험에 비하면 그 양이 많지 않았다.
카리나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기분이 상한 듯한 쥬다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쥬다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고, 카리나는 안도하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찌 됐건 큰일 날 뻔했잖아. 역시 혼자 가는 게 낫겠어.’
그녀는 내심 결심했다.
CH. 02
카리나의 일과는 쥬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았다. 정순한 산의 깊은 동굴에서 생명석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마체르트의 연구 기록을 살펴보는 한편, 생명석을 대체할 만한 게 뭐가 있을지를 생각했다. 이제까지 해 온 것처럼 생명석을 찾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덕분에 대체재에 대한 연구까지 하느라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거기다 쥬다의 식사를 챙기는 것도 빼놓을 수가 없어서 독서가 하루의 계획에서 빠진 지도 꽤 되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지금 당장 상등품의 생명석이 없어 인형술의 발전이 더딘 것이 계기였지만 안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긴 했다. 마체르트가 모아 온 생명석의 개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석을 더 모으든, 다른 대체물을 찾든 빠른 시일 안에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이제까지 이뤄 온 인형에 대한 연구는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의 결집이었다. 그런 그들이 찾은 가장 최적의 방법이 바로 생명석이다. 그 대체물을 찾는 것은 아무리 카리나와 쥬다가 밤을 새며 노력한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희망을 놓치는 않았다. 아직은 요원한 일일지언정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라고 카리나는 확신했다. 다만 그 성공 시일을 최대한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실마리만 잡은 이 시점에서 필요한 시간이 적어도 10년……. 쥬다는 그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 쥬다가 걱정하고 있는 건 숙원을 평생 이루지 못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희망을 얘기하는 반면 쥬다는 불가능을 기저에 둔다. 그의 어둔 표정은 그에 기인하고 있음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끼리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쥬다를 웃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산더미같이 쌓인 마체르트의 연구 일지를 살피는 카리나의 표정은 오늘도 밝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해.’
인형술에 대한 자료는 마체르트의 연구 이상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것이다. 그 이상의 자료는 앞으로 그들이 손수 기록하면서 정리해야 한다.
카리나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인형술이 아니라 광범위한 분야의 자료였다. 인형술은 단지 인형에 국한한 분야가 아니다. 생명과 공학을 동시에 다루는 작업이기 때문에 과학 분야에서 이론을 다루는 인문 분야까지 모든 것을 아울러야 했다.
카리나는 바로 거기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왕의 서고. 또는 영주의 서고. 온갖 귀한 장서로 풍부한 도서관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도시로 나가야 하는 것일까?
필요성은 알겠지만 썩 내키지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익숙하지가 않다. 마체르트는 비정기적으로 숲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지만 카리나가 커다란 도시로 나가는 것은 반대했다.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나마 마을이라도 나갈 수 있는 것은 이 나라가 다른 곳보다 마법에 대한 감시가 약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마체르트가 카리나와 함께 자리 잡은 이 숲이 위치한 나라는 마법사들의 사도 심판관 소셀런스의 감시망이 가장 약해서, 이곳에 정착한 이후에야 마체르트는 불면증을 고칠 수 있었다. 카리나는 사람에 대한 마체르트의 병적일 정도의 경계를 바로 코앞에서 보아 왔다.
‘도시, 도시……. 아, 그러기는 싫은데.’
깃펜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아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록에 의하면 생명석과 같은 효능을 낼 수 있는 약초가 있다 하였다. 그 약초가 그나마 곧잘 발견되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 산에 정착했다고도 하니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카리나는 아버지의 기록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오두막이 있는 산은 나라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산맥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외진 곳이었다. 산과 이어진 다른 산들의 면적이 나라의 사분지 일에 해당할 정도였기 때문에 며칠 부지런히 타고 다녔다 해도 그리 많은 곳을 다닐 수는 없었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아버지의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역시 그녀가 한 번도 발 들이지 못한 곳이었다.
카리나는 그런 확신으로 산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조심스럽게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쥬다가 보였다. 평소라면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그이건만. 저번의 실패 이후 어쩐지 의욕을 잃은 쥬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상심한 모습에서 풍기는 처연함은 카리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감싸 안아 위로하고 싶다가도 그저 이렇게 보고만 있고 싶기도 한 것이다.
소리 내지 않고 걸어가 그 앞의 책상에 걸터앉아 쥬다를 바라보았다. 흰 피부가 창백해져 파르라니 빛나는 것 같았다.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높게 뻗은 코를 쓰는 것처럼, 밤하늘을 숨긴 눈을 더듬는 것처럼 움찔거리다가 반듯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그 접촉이 그를 깨운 듯 눈썹이 꿈틀했다.
“……카리나?”
잠긴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울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카리나가 발그레 물든 볼을 하고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화답하듯 그가 입술에 키스했다.
“잘 잤어?”
“응.”
쥬다가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카리나를 살피다가 그녀의 차림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가?”
그녀가 별것 아니라 가까운 곳에 갈 거라고 설명하자 납득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힌다. 섬세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카리나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꾸욱 누르자 쥬다가 붙잡아 내렸다.
“별것 아닌데 그렇게 입었다고? 같이 가. 위험하게 어딜 또 혼자 간다는 거야?”
사실은 이것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먼젓번 것들과는 달리 긴 산행이 될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산이 위험하다고?”
평생을 산에서 살아왔다시피 한 그녀다. 자신만만한 말에도 쥬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몸 지킬 만한 건 다 챙겨 가니까 걱정 마.”
카리나가 풀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여 약초든 독초든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쥬다 역시 알고 있었다. 카리나는 준비한 꾸러미들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쥬다는 그래도 못마땅한 눈치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 혼자 간다는 건.”
“쥬다. 걱정 말라니까. 이렇게 지쳐 있으면서. 같이 가면 내가 불안해.”
카리나의 만류에 쥬다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었다. 실제로 산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카리나가 더 잘 아니, 딱히 그녀를 말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반박하지 못하는 그의 뺨에 뺨을 맞댔다.
“꼭 찾아올게. 아버지가 예전에 어린 약초를 발견한 곳을 표시해 놓으셨어. 지도를 따라서 거기만 찾아가면 돼. 금방 올게. 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이런 건 나한테 맡겨.”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 숨겨야 할 것은 말하지 않은 채로 믿음직한 얼굴만을 내보이자 쥬다는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발갛게 얼굴을 붉힌 채 헐떡이는 카리나를 끌어안았다.
“조심해.”
귓가에 속삭이는 나직한 목소리에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 건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했으나 엔글레지는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위험하지 않기는커녕 대륙인들에게는 오히려 악명 높은 산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가장 높은 산의 산세가 매우 험한 탓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엔글레지는 여왕의 나라 루지에나에 속해 있었다. 엔글레지가 왕국을 가로지르는 탓에 지역의 상권이 약해지는 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산 중앙을 안전하게 가로지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엔글레지를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중앙이 아닌 맨 양쪽의 낮은 산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리나가 말하지 않아 쥬다가 착각한 것도 그것이었다. 그는 카리나가 산의 외곽만 찾아갈 줄 알았지 중앙 산맥을 가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마체르트가 지도에 표시한 곳은 엔글레지의 가장 깊숙한 중앙의 산속이었다. 쥬다를 돕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카리나도 긴장이 되었다. 강박적으로 몸을 더듬거려 준비물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