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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날카로운 단검 세 자루, 짧지 않은 시간을 버티게 해 줄 건량과 마른 빵들. 짐승의 날카로운 이도 뚫지 못할 동방의 장갑과 약초를 흠집 없이 채취할 호미와 망태기 따위였다. 제 몸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빻은 독초는 제일 정성 들여 살폈다.
몇 가지의 독초를 배합하여 만든 가루는 콧속으로 흘러 들어가면 열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온몸이 마비되는 마비독이다. 그뿐 아니라 암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만든, 그야말로 희대의 독이라고 불릴 만한 약도 조심스럽게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만 팔아도 몇 년은 거뜬할 거금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의 품질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막상 떠나려 하니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걸린다. 약병이 있는 옷자락을 꾹 잡고 있다가 다시 빼내었다. 극히 조심해서 뚜껑을 열고 잡초에 한 방울 흘리고 기다렸다. 이슬이 맺힌 것처럼 물방울이 잎에 닿자마자 숫자를 세었다.
‘1, 2, 3, 4, 5…….’
10초가 되기 무섭게 잡초의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센 숫자가 10을 넘어갔을 때, 마치 잎에만 시간이 몇 배로 빨리 작용한 것처럼 바짝 말랐다. 발로 건들자 바스락 소리와 함께 부스러졌다. 카리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약병을 갈무리했다.
기관지가 없는 식물에도 이 정도 속도라면, 동물이나 사람은 훨씬 빠르게 독성이 돌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몇 초만 늦어도 맹수의 발톱 아래, 생사의 기로에 놓일 수 있는 곳으로 갈 예정인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짐승을 만날 때, 혹시나 모를 사람을 만날 때 등등. 어떤 상황이든 몸은 빼 올 수 있을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카리나는 긴장될지언정 불안한 마음은 갖지 않았다.
‘성공할 거야.’
그를 떠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얼굴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엔글레지가 아무리 악명 높다고 해도, 사람의 절실함과 어리석음은 그를 능가했다. 엔글레지를 올라가는 사람은 매년 일정한 수를 기록했다. 해마다 잃는 목숨은 100명 남짓으로, 오르는 사람의 수를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였다.
산행에 오르는 사람의 삼분지 이가 목숨을 잃는다. 가족의 숨이 경각에 달아 우회하지 못하는 사람, 호기심에 오르는 사람, 그리고 제 실력을 과신하는 사람 등. 산은 눈이 없어 남녀노소, 부와 빈을 가리지 않았다.
카리나는 비교적 이 악명 높은 산에 익숙했다. 외곽이라고는 하나 일단은 엔글레지의 영역에 속해 있는 곳에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산행에 나선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 머리가 뾰족한 뱀의 맹독을 조심하렴. 미물에 불과하나 그 독은 덩치 큰 사내의 숨도 앗아 갈 수 있단다. 엔글레지는 메마른 산이다. 계곡이 드물어 물을 구하기 힘드니 무겁더라도 꼭 챙기려무나. 무엇보다도, 중앙의 산맥엔 발을 들여놓지 말거라.’
혼자서 엔글레지의 깊은 곳까지 가본 적은 없었다. 카리나는 긴장했다.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아 당부를 어기다니, 생전에도 사랑스러운 딸은 아니었겠지만. 카리나는 웃었다. 웃음은 금방 잦아들었다.
엔글레지에 무지한 사람들은 소문만 듣고 엔글레지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고는 한다. 적어도 그런 이들보다는 엔글레지 산행이 익숙한 그녀가 유리했다. 비록 그녀 역시 중앙의 산맥엔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나 산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되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 익숙함과 중앙 산맥에서의 안전은 별개라는 것이다.
그녀가 중앙 산맥에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 주일이 지나서였다.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챙긴 망태기 안에는 목표했던 약초가 생기를 머금고 놓여 있는 채였다. 카리나는 뿌듯해졌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파…….”
드디어 익숙한 집의 지붕이 시야에 들어오자 잠시 발을 멈추었다. 신음을 삼키던 잇새로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붕대로 둘둘 감은 손에서 간헐적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스스로 마비독을 사용하여 감각을 둔화시켰는데도 아팠다. 집이 가까워지니 사그라진 줄 알았던 통증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카리나는 지친 발에 힘을 주어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쥬다는 그녀가 애용하던 흔들의자에 앉아 시선을 먼 곳에 두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잘 챙겨 먹지 않았던지 이 주 전보다 홀쭉해진 볼에 카리나는 제 상태도 잊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서둘러 그에게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그의 표정이 자세히 드러날수록 조금씩 느려졌다. 얼굴 가득한 고민과 번민의 흔적이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연구가 잘 진척되지 않은 것이다.
망태기를 단단히 부여잡고, 곧 쥬다가 지을 웃음을 생각했다. 그의 웃음은 늘 그런 것처럼 그녀의 원동력이었다. 그를 웃게 해 주고 싶다는 강한 일념이 그녀를 살아 돌아오게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그만을 생각하고 참아 냈다.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쥬다.”
카리나를 발견한 그가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강하게 움직였던지 흔들의자가 멀찍이 밀려날 정도였다. 한달음에 달려 내려온 그가 카리나의 팔목을 붙들었다. 으윽. 아물지 않은 상처 탓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흠칫한 쥬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피로 얼룩진 붕대를 확인한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카리나가 서둘러 손을 빼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이게, 별거 아니야?”
아직까지도 피가 흘러나오는 손의 붕대를 가리키며 쥬다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앞에서 본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핼쑥했다. 쥬다의 큰소리에 놀라면서도 카리나는 초췌한 쥬다의 볼을 살폈다. 거스러미가 일어나 까칠해진 그의 입술에 시선이 갔다.
“네가……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일주일이면 온다고 했잖아.”
“도중에 길을 잃어서…….”
카리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쥬다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가 연구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것이었나 싶어 가슴이 덜컥한다. 쥬다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신없어 뵈는 얼굴에 카리나가 한 손을 쥬다의 볼에 올려 쓰다듬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근데 지도가 없었어.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카리나를 보는 쥬다의 눈은 매우 어두웠다. 그녀가 늦어지는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서 드러났다. 카리나는 그가 걱정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심각한 반응에 당황했다.
“……쥬다.”
“왜 어디로 가는지 말해 주지 않았지?”
“…….”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야. 생명석을 대체할 수 있는 약초가 아무 데서나 날 리가 없잖아. 카리나.”
“쥬다, 그게.”
“중앙으로 간 거지?”
카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다 멈추었다.
“걱정할까 봐 그랬어. 걱정하는 게 싫어서.”
하, 헛웃음을 터뜨린 쥬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을, 네가 왜 하니.”
“뭐?”
“내가 할 일을 네가 왜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카리나가 답답하다는 듯 내뱉은 그 말은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쥬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주 많이, 후회했어.”
마체르트의 사후 쥬다는 켜켜이 쌓였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왜 너를 내 일에 끼어들게 한 건지.”
“쥬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일이 어디 있어. 네 일이 내 일이잖아.”
“왜 너를 말리지 않았는지.”
“…….”
“아닌 척하면서 너한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건가? 환멸이 들었어.”
카리나가 안절부절못하고 손을 떨었다. 자신의 붕대를 벗기고 있는 쥬다를 말려야 하는 것인지, 저 말에 반박을 해야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쥬다의 말이 틀리다는 것을 반박해야 하는데 붕대를 푸는 손에 신경이 쓰여 그러지를 못 했다.
“카리나. 우리,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닐까?”
“쥬다!”
그녀는 진심으로 경악하여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어떻게, 그가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자신에게 쥬다라는 인간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그가 어떻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있는가. 마체르트와 쥬다 두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에 이제는 그 혼자만 있음을 모를 그가 아닌데.
눈물이 흘렀다. 독을 뿜던 기괴한 뱀을 만나 겪었던 격통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상황에 지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나 싶어서. 가슴이 저리듯 아파 왔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애초에 스승님은 나를 여기로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쥬다의 목소리가 카리나의 것 못지않게 흔들렸다.
‘그 아이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마체르트의 목소리가 떨리는 쥬다의 음성 위로 겹쳐졌다. 화륵, 소름이 끼쳤다. 쥬다의 입을 막고 싶었다. 카리나의 손이 쥬다의 뺨을 쳤다. 그 얼굴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나는 금세 새파랗게 질려서 더듬거리며 쥬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눈빛과 마주한 카리나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그의 감정이 자신의 마음으로 밀려들어 왔다. 먹먹하고 어지러웠다.
“……그는 나를 너와 만나게 하면 안 됐어.”
핏물에 젖은 붕대를 다 풀고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린 쥬다의 눈에서 카리나처럼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눈이 못 박힌 듯 그녀의 손에 박혔다. 새끼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뭉툭하게 잘린 손끝은 아물지 못하고 피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의 손을 바라본 쥬다의 입에서 곧이어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리나가 급히 고개를 젓고 그를 끌어안았다. 너무 놀라서 손이 떨렸다.
“쥬다. 고작 손가락일 뿐이야. 이게 없다고 내 생활이 힘들어질까? 당신이 있는데? 쥬다. 울지 마. 울지 마.”
떨리는 어깨가 늘 의연한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웃게 해 주고 싶었는데, 왜 우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그를 웃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 그래. 아버지가 말한 약초를 가져왔어. 혹시 짐승이 먹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있더라고. 캐내는 와중에 그걸 지키고 있는 뱀을 못 봐서. 독이 퍼지기 전에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목숨은 건졌잖아. 손가락 하나로 약초랑 맞바꾼 것, 싸게 먹히는 거잖아. 당신도 알잖아.”
“왜 중앙 산맥으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알았다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거야.”
“……그래도.”
“왜 내 일에 네가 이렇게 다쳐야 해? 왜 이, 이걸…….”
음성이 떨려 나왔다. 쥬다가 힘을 주어 입을 다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잃어야 했냐고.”
“네 일이란 말 하지 마. 내 일이기도 해!”
“내 일이야.”
그 말이 왜 선고하듯이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카리나는 기겁하여 쥬다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음성은 여전히 온기 없이 차가웠다.
“너한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아. 인형술의 정점에 오르는 건, 오직 내 바람일 뿐이야.”
그러면 안 되지만 순간적으로 쥬다에게 너무나 서운한 마음이 들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뱀의 작지만 날카로운 독니가 손가락을 파고들던 느낌이 떠올랐다. 그녀를 뒤흔드는 고통에 앞서 쥬다를 두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눌 수 없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쩌면 쥬다가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일을 이룰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죽은 것도 아니고, 쥬다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그가 기뻐서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애초에 차가운 성정이야.’
아버지……. 어떻게 해야 하죠?
처음 겪는 쥬다의 싸늘함이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만의 바람일 뿐이라는 말에 반박해도 지금의 쥬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것처럼 완고했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간절하게 말했다. 그와 자신을 한데 묶을 수 있던 말.
“쥬다, 쥬다.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그는 그 고백에 화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 더 다친 곳은 없는지 그녀의 몸을 살필 뿐이었다. 초췌해진 그를 보면서 그녀는 불안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그도 양립 못 할 가치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닐까.
이뤄야 할 꿈과 그녀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