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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CH. 03
어느 동방의 나라에는 여자에게 미쳐 나라를 말아먹었던 왕이 있다고 한다. 한낱 여자의 외모에 미혹되어 그릇된 판단을 하지 말라는 교훈을 전하기 위해 그 일은 책에서 자주 언급되곤 했다. 그 행동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얘기겠지만, 왕 개인으로 보자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던 일은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왕에게는 그 여자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 마음속에 방을 만들어 놓는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방의 개수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수백 개의 방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아주 적은 수의 방을 가진다.
마음의 방은 사람에게 쉼터와 같지 않을까? 인간은 절친한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고는 하니까. 그러니 세기의 미인에게 홀렸다는 그 왕에게는 다른 도피처가 없었던 셈이다. 마음의 방이 하나라서 모든 위로와 사랑과 애정을 그 여인에게서만 느꼈을 테니.
평생 80명 이상의 연인을 한 번에 사귀었다는 어떤 남자는 자신에겐 여러 개의 방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방에는 에밀리, 두 번째 방에는 프란세스, 세 번째 방에는 제시. 슬픈 일이 있을 땐 에밀리에게로, 기쁜 일이 있을 땐 프란세스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는 세기의 바람둥이로 칭해지지만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을까? 물론 그와 만났던 여자들의 생각은 예외이다.
카리나의 마음속 방은 두 개였다.
그녀는 가끔씩 자신이 쫓기는 삶에 놓이지 않았으면, 마체르트에게서 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도시에서 태어났다면, 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경우라도 쥬다를 만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지기는 했다. 하루 종일 쥬다의 생각밖에 하지 않는 지금처럼.
‘괜찮다니까, 쥬다. 화내지 마.’
‘별거 아니라는 소리 좀 그만해! 네 손가락이 다시 나기라도 해? 다시 붙일 수 있어? 넌 영원히 네 신체를 잃은 거라고. 왜 심각하게 생각하질 못하니?’
멍하니 앉아 대화를 복기하는 카리나의 얼굴엔 수심이 깊었다.
쥬다는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그리 풍부하지 못한 만큼 다른 사람의 표정에도 민감하질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없어진 손가락을 보는 쥬다의 표정에선 꺼림칙함을 느꼈다. 저건 슬픔일까, 분노일까? ……설마 자신에게 질린 것일까?
물론 그가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이 다쳤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그가 사랑스러웠지만, 생각 이상으로 격하게 화를 내는 쥬다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왔는데. 화가 나더라도 먼저 반가워해 주고, 기뻐해 주면 안 되나?
그녀의 서운함이 겉으로 표출되었는지, 카리나가 돌아온 그날 밤 쥬다는 그녀를 끌어안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네 손가락만 남은 손이 어디 부딪히진 않을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다음 날은 또 냉랭해져서 눈치를 보며 던지던 카리나의 모든 물음에 싸늘하게 답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다정하지만. 카리나는 요즘 들어 변칙적인 쥬다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곧잘 웃더라도 없어진 손가락 자리에 시선이 닿을 때면 무표정해진다.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 할까. 완전히 아물기 전까진 자극을 가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카리나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어쨌건 이번 일로 교훈을 얻었다. 쥬다를 위한 일로 다쳤을 때, 알리지 말고 숨길 것. 쥬다가 이 정도로 자신에게 화낸 일은 처음이었고 그가 뱉은 말에 카리나는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심한 말을 했다고 사과는 했지만, 쏟아진 물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 뱉어진 말도 뇌리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이번처럼 쥬다와 오래 떨어진 것도 처음이었다. 카리나는 말하자면 마체르트와 쥬다에게 온실의 꽃과 같아서 그들이 위험한 일을 할 때 숲 속에서 집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기껏해야 산 아래 마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자주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 자신도 그다지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과의 접촉은 적은 편이었다.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은 마체르트와 책에서 이어진 것이어서 간혹 죽은 지식을 생생히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기는 했으나 강렬하진 않았다.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막연한 불안감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싸우기는 했으나 카리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쥬다에게 말한 그대로 손가락 하나와 영초를 맞바꾼 것은 합리적으로 아주 수지맞는 장사였다. 천운으로 위험한 맹수와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목숨까지도 걸 작정이었는데 고작 새끼손가락 하나인걸. 컵 같은 물건을 쥘 때 악력이 약간 떨어진 것 같기는 했으나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구해 온 것으로 연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것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더는 생명석에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생명석 이외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영초 말고도 다른 대체재로 시도해 봐도 되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쥬다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큰 기쁨이었다.
이틀 전에 영초를 사용해서 만들 인형의 설계를 끝냈고, 쥬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인형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성공할 것이다. 물론 영초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이것저것 같은 효과를 낼 만한 재료를 더 쓰기는 해서 좀 불안하기는 했지만……. 재료가 더 들어갈수록 변수도 많아지고 실패의 위험도 높아서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성공할 확률이 60%나 됐다. 그 정도면 아주 높은 수치다. 옛 기록에 의하면 생명석을 처음 사용할 때의 성공 확률은 40%에 불과했다.
쥬다는 침식도 잊은 채 연구실에서만 지냈고 카리나는 그런 그에게 먹이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데 요즘 모든 시간을 쓰고 있었다. 마을에서 산 빵과, 고기로 만든 스튜. 그리고 산에서 잡은 새를 꼬챙이에 꽂아 구이를 만들었다. 달큼하고 고소한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에 쥬다가 한창 연구에 매진할 때는 나와서 식사를 하라는 카리나의 말도 듣지 못하곤 했으나 요즘은 식사 시간마다 꼬박 나와 마음이 놓였다.
사과나 산딸기 같은 열매를 바구니에 쌓아 올리다가 비어 버린 손가락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이겠지. 카리나는 벌써 잊어 가고 있는데 쥬다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또 화를 내긴 하겠지만 다정한 쥬다는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다른 쪽 새끼손가락도 내놓으라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같은 일이 또 있다면 아무래도 몸을 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쥬다가 화내는 것은 너무 무서워서 그럴 일이 없기만을 바라지만.
“쥬다?”
준비가 다 되어 그를 부르기 위해 작게 노크했지만 반응이 없다. 집중하고 있을 때는 웬만한 소리가 나지 않는 이상 듣지 못하는 그를 알기에 카리나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쥬다였고 그의 앞에서 파란빛을 뿜는 통이었다. 파란색 약물로 가득 채워진 유리통에 인형이 둥둥 떠다녔다. 외양은 지난번에 실패한 소형견의 모습이지만 털이 하나도 없어 정말로 개와 같지는 않다. 영초가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실험작이기 때문에 모양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개인 것도 같고 다른 동물인 것도 같은 조금 기괴한 모양새다.
모든 인형사들이 바라던 것은 이지를 가진 인형을 만드는 것이다. 그 바람에 신의 권능을 탐했다고 대륙에서 외면받았지만 성공한다면 대륙의 판도는 그들의 손으로 바뀔 것이다. 다만 그 일은 궁극이라고 할 만큼 아직 요원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직까진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인형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소형견보다 작은 크기의 인형에겐 지금도 가능한 일이다. 그보다 크기가 더 커지면 그제야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고군분투해 왔다.
쥬다는 신중한 표정으로 새파란 보석 가루를 통 안에 흘려 넣고 있었다. 물약과 섞이며 그 안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보석 가루는 인형 제작의 마지막 단계였다. 새로운 실험은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더는 그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조용하던 가슴의 고동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마치 귀에 들리는 것 같아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마침내 모든 보석 가루가 터져서 물약은 원래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제야 카리나가 쥬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물약을 아래로 흘려보내고 장갑을 낀 손으로 인형을 꺼냈다.
“나갈까?”
쥬다의 목소리는 의연했다.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가 단단하게 굳은 입매와 가라앉은 눈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가 표정을 통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다가 마당의 흙바닥에 인형을 놓고 카리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거스러미가 올라온 입술에 피곤에 절은 눈동자였지만 웃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카리나는 그동안의 날 선 긴장이 그 웃음 하나에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명령을 내렸으면 좋겠어?”
쥬다는 약간 신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으음, 카리나가 생각에 골몰하더니 곧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산열매 하나를 꺼냈다.
“간단하게 이거 주워 오기로.”
인형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술사의 명령이 필요하다. 쥬다가 열매를 받아 들고 무릎을 굽혀 인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는 급한 기색 없이 나긋했다. 디자이너에 따라 완성되는 옷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인형 역시 그 성격이 만드는 사람별로 다르다. 쥬다의 손에서 탄생하는 인형들은 노란색 계열에서 풍기는 느낌과 같이 산뜻하고 부드러웠다. 카리나는 그의 영혼 조각을 받아 태어난 것 같은 인형들 역시 사랑했다.
인형이 그의 명령에 생기를 얻은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쥬다가 손에 든 열매를 던졌다. 움직이는 게 조금 느리다 싶더니 곧 열매가 던져진 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에 카리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소리를 들었던지 쥬다가 돌아보았다.
“걱정 많이 했지?”
“아니. 당신이라면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어.”
방금의 한숨 소리는 잘못 들은 것이었다는 양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대답은 쥬다의 웃음을 자아냈다.
“네 덕분이야.”
설계의 많은 부분에 카리나가 관여했었고, 실제로 걱정하던 부분이 풀리자 새로운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제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쥬다의 진심 어린 말에 기쁜 얼굴을 하던 카리나는 쥬다의 얼굴이 슬쩍 굳자 미소를 거뒀다.
이상하다. 인형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느리다. 설계대로라면 실제 동물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여야 하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인형에 걱정이 피어올랐다.
둘은 말없이 인형이 달려 나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잠시 후, 걱정이 무색하게 인형은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주둥이엔 쥬다가 던진 열매가 물려져 있었다. 인형이 가까이 다가오자 쥬다는 침착하게 무릎을 굽혔다. 인형이 쥬다의 내밀어진 손에 열매를 뱉기 위해 고개를 뺐다. 카리나가 섣불리 반색하고 쥬다를 돌아봤다.
‘성공?’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일렀음인가. 카리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쥬다의 손에 놓인 열매를 바라보았다. 잘 익어 탐스러운 붉음을 자랑하던 열매는 마치 익지 않은 것처럼 시퍼랬다. 열매에만 시간이 역행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매에서 파란 물이 뚝뚝 흘러 쥬다의 손을 적셨다. 인형의 피였다. 아직 벌어진 인형의 주둥이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체온처럼 뜨거운 온도를 유지하는 파란 피가 줄줄 흐르는 덩어리였다. 인형의 혀가 떨어진 것이다.
“쥬다!”
카리나는 본능적으로 쥬다의 팔을 잡아끌어 인형과 거리를 벌렸다. 쥬다는 파란 물로 얼룩덜룩한 자신의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뒷걸음치는 데 주력했다.
인형을 설계할 때 세웠던 가설 중의 하나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생명석이 인형 제작의 필수 재료인 것은 세상 모든 것과 문제없이 융합할 수 있어서이다. 융화도가 낮은 대체물은 재료의 어우러짐에서 실패할 수 있다. 녹아내릴 수 있으며 폭발의 가능성도 농후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한 카리나의 안색이 인형의 핏물처럼 푸르죽죽해졌다.
인형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것이 변하는 과정을 눈에 담았다. 갈색 몸체에 파란 선이 생기더니 곧이어 온몸을 파란 실선이 둘러쌌다. 갈색과 파란색이 섞여 얼룩덜룩한 형상이 괴기스럽다. 인간의 핏줄처럼 인형의 피가 흐르는 관이 피부를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몸속에서부터 붕괴가 시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카리나는 집으로 들어가 소멸액을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쥬다가 걱정되어 그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것이 실패한 것도 문제지만 그녀는 현재 쥬다의 상태가 가장 걱정되었다.
‘이번은 성공일 줄 알았는데! 도대체 왜. 또 왜?’
자신이 느끼는 자괴감도 이토록 괴로울진대.
하는 수 없이 쥬다와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인형의 상태를 살폈다. 인형의 네 발 아래에 파란 피가 고였다. 이미 인식된 명령이 속에서 혼란을 일으키는지 머리를 흔든다. 그르륵, 끓는 소리와 함께 파란 잔거품이 흘러내렸다. 인형의 두꺼운 다리가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