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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렇게 첨탑에 걸터앉아 있는 그의 시선에 흥미로운 장면이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가운데에 사람 하나를 가둬 두고 마구 린치를 가하고 있었다. 인간은 아주 약하기 때문에 저렇게 때리면 금세 숨이 끊어져 버린다. 보아하니 정말로 죽일 참으로 학대하고 있었다. 하티는 고개를 쭉 빼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사냥하지?’
아주 오랫동안 인간은 목숨이 되었든 다른 탐나는 무언가가 되었든― 타인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기 위해서 살인을 저질러 왔다. 자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영역 다툼이나 짝짓기 경쟁에서 패배한 쪽이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하듯이.
그렇다고는 해도 빼앗고 싶은 것 그 자체가 생명이라니, 마치 이쪽 괴물들의 세계 같지 않은가?
사실 하티는 잡아먹으려고 동족을 살해하는 인간들 역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식사를 위한 사냥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얻어맞던 사람의 숨이 끊어졌다. 멀리서도 느껴졌다. 린치에 참여했던 자들도 그걸 알아챘는지 우르르 흩어졌다.
“별일이군.”
모처럼 호기심이 들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인간의 일에 큰 관심이 없는 그가 시선을 멈춘 까닭은 방금 있었던 살인 사건의 피의자들이 고작해야 하티의 가슴에도 오지 않을 만큼 작은 꼬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첨탑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중력에 따라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그는 곧 아주 가벼워져 깃털처럼 무게감 없이 지면에 살포시 착지했다. 으스스한 밤거리가 그를 맞이했다. 하티는 건물 그림자 사이를 탁구공이 튀듯 달려 살해당한 인간에게로 다가갔다.
곁에서 본 피해자는 꽤나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칼에 찔린 후 수십 군데를 얻어맞아 신체 곳곳이 함몰되어 있었다. 자상은 깊지 않았다. 치명상이 아니다. 오히려 망치 같은 둔기로 얻어맞은 것이 훨씬 더 유효했다.
겉으로 봐선 증오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지만 정작 하티가 지켜본 봐, 그를 해한 어린 인간들은 그 일련의 과정들을 지루하게 끝마쳤을 뿐이었다. 절제된 감정과 익숙한 손놀림.
재미있는 일이었다.
흡혈귀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먹을 때만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피 냄새가 지천으로 떠돌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핥은 하티는 밤의 거리에 녹아드는 꼬마 하나를 표적 삼아 뒤쫓기 시작했다. 상대는 기껏해야 10살이나 되었을까? 방금 사람 하나를 쓱싹 해치운 것치고 금발에 반반하게 생긴 꼬마였다.
소년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리드미컬하게 걸었다. 한 가지 어색한 점이 있다면 지금 시각이 저런 꼬꼬마가 홀로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기엔 많이 늦었다는 점이었다. 다른 녀석은 열다섯 정도로 키는 제법 컸지만 얼굴은 아직 앳된 구석이 많이 남아 있었다. 녀석은 후드를 눌러 쓰고 스크린 세이버(휴대용 통신단말기)를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보고 있는 스크린 세이버에는 끊임없이 만화 컷이 올라가고 있었다. 어딜 보나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대 남자아이였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이 도시에선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공무원이 하루 일을 끝내듯 사람 하나를 죽이지 않았던가? 그걸 깨닫는 순간 하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어째서인지 입맛이 돌았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스스로를 먹어 치울 것 같은 허기짐이 시작되었다. 노도 같은 갈증이었다.
먹을까, 말까? 그는 이런 문제로 고민해 본 일이 지난 수천 년을 통틀어 거의 없었다. 허기가 지면 먹어 치웠다. 먹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그냥 먹었다. 섭식에 있어 고민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때로는 사냥에 실패하기도 하지만, 무릇 배고픈 맹수가 앉아서 고민만 하는 법은 없는 법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는 10살 남짓한 꼬마 뒤로 접근했다. 그렇게 몇 걸음 남겨 두지 않았을 때, 앞서가던 아이가 갑자기 휙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척 없이 다가섰음에도 소년은 몹시 날 선 반응이었다. 하티는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았다. 꼬마가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요!”
“나야말로.”
하티의 대꾸에 꼬마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딜 보나 맹랑한 10대의 얼굴이지만 재밌게도 찌릿찌릿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물론 그저 사자 앞에서 고양이가 털을 세워 대는 감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반응이 재밌긴 했다.
꼬마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하티도 배시시 웃었다. 진득하게 웃는 그 얼굴 위로 으스스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지만, 소년은 깨닫지 못했다. 하티가 후드를 뒤로 내리며 말했다.
“형, 수상한 사람 아니야.”
후드가 벗겨지고 하얀 머리카락이 올올이 나부끼며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새끼 양 같은 얼굴이었다. 순간 그 새하얀 얼굴에 홀려 버린 꼬마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금세 다시 털을 세웠다. 본인조차 한순간이나마 경계를 풀어 버린 것을 섬뜩해하는 눈치였다.
‘귀찮고 재밌는 녀석이네.’
하티가 말했다.
“집이 근처야? 여긴 너 같은 애가 혼자 다니기 위험한데.”
“뭐 딱히 그쪽도 안전해 보이진 않는데?”
“난 이 동네 살아. 근데 근처에서 널 본 적이 없어.”
그러자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대꾸했다.
“여기 안 살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까?”
“신경 꺼.”
되바라진 10대의 성가셔하는 반응이었지만, 물론 하티는 눈치 없는 척 따라붙었다. 꼬마에게 말을 걸자 은연중에 이쪽을 주시하는 다른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런 밤거리에 혼자 돌아다니는 꼬마들이 이토록 많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티는 속으로 웃으며 먹잇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지 말고― 형이 데려다줄게.”
“아, 됐다니까!”
몸에 손이 닿자마자 꼬마는 거의 밀치듯 하티를 밀어냈다.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아이쿠!” 하고 과장되게 그 손에 밀려났다. 커다래진 눈으로 꼬마의 얼굴을 보았더니 한순간 꼬마의 얼굴에서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꼬마는 더 매서워진 눈으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소리 지를 거야.”
그 말에 하티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꼬마를 앞서 질러 걸어갔다. 뒤쪽에서 잠시 멈춰 있던 발소리가 곧 다시 움직이는 게 들렸다. 하티가 가는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그들 간의 제법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지켜보던 시선들도 하나둘 하티에게서 떨어졌다.
그렇구만. 그제야 하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꼬마들은 훈련된 인간 암살자들이었다. 일종의 인간을 잡아먹는 인간이란 말이지. 사냥꾼을 사냥할 생각에 하티의 배 속은 꾸르륵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꼬마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따라갔다. 작고 보송보송하지만 살의로 가득 찬 소년이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 꼬마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먼동이 트기 전에 사람 하나를 더 죽였다.
작은 인간은 조그마한 배낭 속에서 망치를 꺼내 길을 가던 양복쟁이 남자의 척추를 거리낌 없이 후려갈겼다. 억! 하고 고꾸라지는 성인 남자의 후두부에 두 번째 망치질을 한 건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왈칵왈칵 입에서 피를 토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꼬마는 확인 사살처럼 오른손의 망치를 힘껏 이마를 향해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망치를 잘 닦아 다시 가방 속에 넣었다.
지천으로 피 냄새가 떠돌았다. 어둠을 틈타 피 냄새를 쫓아다니는 악마들이 금세라도 몰려들 것만 같았다. 슬금슬금 끓어오르는 재미보다― 웅크린 채 눈만 빛내고 있는 호기심보다―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허기짐이 더 커졌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하티는 하품을 참으며 꼬마 앞에 나타났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둘 중 누구도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던 하티는 거울로 보이는 꼬마의 얼굴을 보며 눈을 접고 웃었다. 하룻밤 새 두 명의 동족을 죽인 꼬마에게서 달큼한 피 냄새가 풍겼다. 꼬마는 표정 변화도 없이 다가왔다.
“어라? 아직 집에 안 가고 돌아다니고 있어?”
“당신 뭐야?”
“응?”
“왜 따라다녀?”
하티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빙글 돌아 꼬마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웃었다.
“그야 네가 자꾸 사람을 죽이니까―”
그 순간 탁구공처럼 바닥을 튕긴 꼬마는 날렵하게 하티를 향해 쏘아들었다. 소년의 손에는 어느샌가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주머니칼이 쥐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맹수의 이빨처럼 하티의 멱을 따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소년은 꼬챙이에 꽂힌 짐승처럼 그 자리에 붙박이고 말았다. 순한 양처럼 웃던 하티의 입이 벌어지자 소년은 온몸이 얼어붙는 한기에 얼어 버렸다.
하티는 허기진 야수가 이미 앞발에 걸려든 가련한 먹이를 바라보듯 꼬마를 응시했다.
“먹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소년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얼어붙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까지 덜덜 떨렸다. 호흡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양의 탈을 쓴 남자가 먹어 치울 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섬뜩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소년은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동료가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소년 소녀가 저런 괴물의 먹이가 되어 죽어 갔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흡혈귀들에게 팔리는 한낱 식용 인간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살아남았다. 그래. 자신은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사, 살려.”
영혼까지 한기에 침식당한 꼬마는 간신히 거기까지 말했다. 하티를 그런 꼬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 안 있어 동틀 무렵이 될 것이다. 한 손으로 꼬마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자 소년은 하티의 살기에 잔뜩 얼어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멱을 드러냈다.
하티는 잠깐 보송보송한 뺨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기가 가득 차오른 꼬마의 눈동자는 삶에 대한 열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맞추고 하티는 아가리를 벌렸다.
만찬이다.
으드득! 그대로 멱을 뜯긴 꼬마는 끄르륵 끓는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하티는 꼬마의 목에 입을 박고 흠뻑― 흠뻑 빨아들였다. 남김없이 마셨다. 새파랗게 질린 꼬마의 몸이 툭, 떨어져 화장실 바닥에 버려질 때까지 먹어 치웠다. 생명을 갈취하여 오늘의 삶을 이어 간다. 살해하여 먹음으로 불멸을 손에 넣는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하티는 숨결에서 묻어나는 뜨거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배는 가득 채워지고 온몸은 활력으로 넘쳐났다. 괴로울 정도의 허기짐은 잠시나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더불어 환희와 전율에 도취되어 몸의 근육마저 경직될 지경이었다. 그는 남은 시간을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꼬마의 팔을 잡아 들었다. 축 처진 몸이 힘없이 끌렸다. 그는 꼬마의 옷을 찢어 등의 날갯죽지를 확인했다. 과연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은 아니었다. 인두로 지진 자국이었다. 그가 아는 한 이런 짓을 할 해괴한 놈들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인간 농장의 식용 노예로 사육하거나 말 잘 듣는 노예, 암살자, 흑마법사로 키우는 놈들.
“사원인가?”
시체에게서 흥미가 떨어진 그는 세면대에서 대충 얼굴을 씻어 냈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왔다. 곧 날이 밝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지하철로 향했다. 저택까지 돌아갈 여유는 없었다. 다행히 이 도시는 햇빛을 두려워하는 괴물들이 숨어서 밤을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중 지하철로 도시 곳곳을 연결하고 있는 지하 터널은 최고의 선택지였다.

***

얼마 후 소년 소녀들이 화장실에 나타나 차갑게 식은 소년의 시체를 거두어 갔다.

그리고 뉴욕 평의회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뱀파이어 사회에게 양질의 고기를 제공하는 사원寺院이 공식적으로 커뮤니티에 항의를 넣은 것이다. 판매하지 않는 재산을 값을 치르지 않고 먹어 치웠으니 중대한 협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보상을 해 주고, 재산에 손해를 끼친 당사자를 처벌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내용에 평의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뉴욕 평의회 의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배상에 대한 내용보다는 사고를 친 뱀파이어 정체를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고를 친 주인공은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골머리를 썩여 온 괴물이었다.
“더 이상 그 노망난 괴물이 제멋대로 설치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
“카스파르 경에게 요청하십쇼. 당장 영지를 버리고 이사하든가 그 잘난 영주를 땅에다 묻어 버리라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지금껏 이룩한 균형을 단숨에 무너뜨릴 거요. 단언컨대 그자는 그리되더라도 눈 한 번 깜박하지도 않겠지.”
“하지만 그의 혈족이라 하더라도 그를 통제할 수 있을 리가?”
“그게 안 되었으니, 이 지경이 된 게지.”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연금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지만 누가 하티를 가둬 둘 수 있단 말인가? 99년 동안 하티를 땅속에 묻어 둘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막대한 피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친 괴물이었던 하티는 자신의 영토에 있던 다른 흡혈귀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혼자서 먹이사슬의 최고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라 불렸다. 인간에게서도 동족에게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통제할 수 없는 하티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국 당시 동부에 터를 잡은 클랜들은 결사단을 만들어 일주일 밤낮으로 괴물을 지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괴물이 아침이 되어 지쳐 동굴에 기어들어가 곯아떨어지자 인간들을 매수하여 동굴을 무너뜨렸다. 그 잔해 속에서 지치고 굶어 힘이 빠진 그를 끄집어냈다.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로 많은 피를 대가로 흘려야만 했다. 원래 7인의 평의회였으나 그날을 기점으로 하나의 혈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형제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오늘 모인 평의회의 결정권자들 중 몇몇은 하티를 땅속 깊이 파묻는 장면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 불타오르며 비명을 지르는 괴물을 관 속에 밀어 넣었던 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으슬으슬 소름이 끼쳐 오는 기억이었다.
진저리를 친 평의원 중 하나가 말했다.
“또다시 그런 피해가 있더라도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변했어요.”
“순진한 소리!”
99년의 연금 끝에 관에서 나온 하티는 예전의 포악하기만 하던 괴물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포식하긴 하지만 하룻밤 새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을 만큼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또 나름 흉흉한 기세가 사라져 겉보기엔 오히려 제법 유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잘만 말하면 들을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이 함정이었다.
평의원 존 몽고메리가 말했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안을 의논해 봅시다. 영주 하티를 또다시 연금시키려거든 그의 폭주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대참사가 벌어질 거요. 도시 괴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소란을 바라는 건 아닐 테니 그를 달래는 수밖에. 적어도 사원의 재산을 먹어 치우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그가 먹이를 가리는 걸 누가 본 적이 있습니까?”
하티를 죽일 수 있었다면 이미 동족들은 오래전에 그를 죽였을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굳이 관속에 넣어 땅속에 파묻지도 않았겠지. 불에 태워도 심장에 못을 박아도 머리를 잘라 내도 죽지 않는 괴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티야말로 불멸자라는 호칭에 더없이 적절한 괴물이었다.
“문제는 그가 또다시 사원의 재산을 먹어 치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단 건데. 보상을 어떻게 한다?”
“정말 골칫거리입니다.”
하티를 미 동부에서 내쫓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된 뉴욕 평의회였지만 참 쉽지가 않았다.

***

카스파르는 귀가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다. 평의회의 압박은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그딴 시시껄렁한 불평불만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은 아버지의 행방이었다. 아버지의 행방불명이야말로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행여나 어디서 배곯고 있지는 않을지, 햇빛을 못 피한 건 아닐지― 염려되는 마음에 그는 통 아침잠에 들 수가 없었다.
저택을 방문한 사업 파트너, 호메르는 그런 카스파르를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엔 카스파르가 하고 있는 걱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어련히 잘 알아서 하고 있겠지. 어차피 죽지도 않는 양반인데― 차라리 다른 혈족들 걱정이나 해. 어쩔 거야? 평의회에서 저리도 난리인데.”
“아버진 사원이라면 질색을 하신단 말이다. 으으으― 어디서 붙들려서 곤란한 일이라도 겪고 계신 건 아닌지―”
“로드 하티가?”
하티와 사원 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호메르는 찬찬히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 그토록 오래 존재해 온 것치고 로드 하티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의 흡혈귀 커뮤니티에서는 하티가 괴담이나 전설에 나오는 허구쯤으로 취급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때 혈족 중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 흡혈귀 한 명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왔다. 바들바들 떠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호메르는 대체 이 뱀파이어가 왜 이러나 싶어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으흐흐흑, 아버지, 어디서 굶고 있으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배고픈 건 절대로 못 참는 양반인데!”
카스파르는 울고 있는 뱀파이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명령했다.
“도시락이라도 데리고 마중 나가도록 해.”
영주 하티가 귀가하지 않으면 이 성에서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건가? 편집증 환자들이 따로 없었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풍경이다. 고작 영주님이 하루 귀가하지 않았다고 벌어진 일로 보기엔 정도가 심하다. 어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역전된 것 같지 않은가? 혈족들에게 하티는 애지중지, 행여나 깨질까 싶은 보옥과 같았다. 그의 실체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정작 혈족 전체를 불안증에 시달리게 한 하티는 어디선가 태평하게 쿨쿨 잠들어 있을 게 분명하건만. 호메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은커녕 폐만 되는 아버진데 뭐가 그렇게 좋냐?”
세상에, 그것도 모르냐? 하는 얼굴로 카스파르는 그를 돌아봤다. 그건 주위에 있는 다른 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저런 질문을? 호메르 씨는 좀 멍청한가 봐.
“잘 들어라, 이 아둔한 인간.”
카스파르는 흔들림 없이 호메르를 직시하며 대답했다.
“예뻐.”
“뭐?”
“눈부시도록 아름답다고.”
지나가던 하티의 혈족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씩 보탰다.
“심지어 잘 먹죠.”
“귀엽기까지 해.”
“자비심이라곤 없어.”
“난해할 정도로 사회성 없는 게 사랑스러워.”
답 없는 추종자들을 상대로 대체 무슨 질문을 한 거람? 문득 자괴감이 든 호메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