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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그를 사랑하지 마!
1화
프롤로그 방관의 죄
“박제 인형처럼 예쁜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야.”
제법 더운 바람이 부는 4월의 어느 날. 강서준은 클럽 하바나의 뒷문에서 친구 규만과 통화 중이었다.
“매력이 더 중요해. 당당하고 단정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사람을 끄는 매력.”
강서준이라는 이름 앞엔 늘 수식어가 따랐다. ‘바람둥이’ 강서준. 검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같이 매끈한 검은 피부, 진하고 고른 눈썹, 크고 옆으로도 긴 눈, 날카롭고 힘찬 콧날.
“예쁘기만 하면, 이도형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그리고 키스가 동하는 입술의 매력적인 곡선.
바람둥이 강서준은 여자를 찾고 있었다. 이도형과의 이 진흙탕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 줄 여자. 아니, 적어도 이도형의 손아귀에서 희연을 빼내 줄 여자.
“배우라는 애들이 그렇게 연기력이 형편없어 어떻게 데뷔를 한대?”
배우 지망생을 소개한다며 먼저 나서 설레발치던 규만은 시간만 질질 끌었다. 인형 같은 완벽한 외모의 여자들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참 나, 말하는 거나 짓는 표정이나. 드라마 오디션 봐? 너는 그런 애들 붙들고 가르치면서 사기 치니?”
휴대전화로 넘어오는 규만의 목소리에도 짜증이 어렸다. 사기라니, 그만하면 예쁘고 매력적인 애들을 왜 트집 잡아, 하며 반박하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니! 김희연을 버리고 택해야 할 여자라고. 싫은 소리 한 번 했다고 울면서 뛰쳐나가, 초면에 옷은 왜 벗으려 들고, 매력 어필해 보라니까 코맹맹이 소리를 내잖아! 심약하고 천박하고 매력 없는 게 문제라니까.”
규만은 더 이상 보여 줄 여자가 없다며 손을 들었다. 김희연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를 찾는 거라면 손들겠단다. 결국 이럴 거면서!
“그럼 어떡해? 희연이를 그냥 놔둬? 반칙은 녀석이 먼저 시작했어. 나한테 도덕 교육 할래?”
통화는 끝났다. 서준은 기가 막혀 기획사의 대표로 있는 친구 녀석의 전화번호를 찾아 누르려다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일이 너무 커진다. 규만이라면 믿을 수 있지만 친구들을 더 이상 동원하는 건 좋지 않다. 시작도 전부터 이도형에게 들킬 위험이 크다.
차라리 클럽 하바나의 사장 이연혜에게 일을 시작하기 전인 여자들을 소개받아 볼까. 이연혜는 고급 손님만을 은밀히 상대하는 여자들을 여럿 아니까.
인적 드문 클럽 하바나의 후문, 서준은 체념하듯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정문을 꺼리는 손님들이 은밀히 드나들도록 만들었지만, 겉보기엔 포근하고 아늑한 세 평 남짓 작은 정원이다.
알록달록 오그랑한 꽃잎들이 밝은 햇살을 반사했다. 그의 속만 황량할 뿐 사방이 화사하고 따사로웠다. 서준은 괜한 꽃잎에 화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방으로 퍼지는 연기가 꼭 한숨 같았다.
그때였다. 내일모레면 폐차를 바라보는 낡은 트럭이 일방통행의 좁은 도로로 후진을 해 들어왔다. 서준은 멀찌감치 떨어진 하바나의 주방 문이 열리는 걸 관심 없이 바라보았다.
“시간 한번 정확하네.”
하바나의 주방 막내가 트럭을 맞았다.
“당연하지! 하바나 배달인데.”
트럭 안에서 새까맣고 통통한 여자애가 톡 튀어나와 양배추, 양파, 파, 마늘, 상추 같은 것을 날래게 내렸다. 주방 막내는 체크해 주는 목록을 “어. 정확해.” 하고 받아 사인을 했다.
“봐 봐, 물건은 최상급이에요. 괜히 보관 잘못하고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요?”
“아, 저번엔 정말 미안.”
얼핏 봐도 20대 후반인 주방 막내는 저보다 예닐곱이나 어려 뵈는 쪼그만 어린 여자애에게 절절맸다. 괜히 냉장했다 다시 실온에 보관하는 바람에 야채에 습기가 차서 상한 거예요, 보관을 잘 해야죠, 제 주방 막내 부리듯 그녀는 또박또박 야단을 쳤다.
그 광경만으로도 제법 재미가 좋았지만 제대로 된 공연은 그다음이었다. 사실 서준은 이도형의 붉은 EHO7이 골목길로 들어설 때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담배를 끄고 자리를 뜨려 했다.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도형의 시야엔 이미 서준이 들어왔고, 이를 드러내며 EHO7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피할 기회는 놓쳤다. 그러면 제대로 상대를 해 줄 수밖에.
서준은 올 테면 와 봐, 도발적으로 거만한 손짓을 보였다. 애완동물 부르듯 쪽쪽쪽, 혀를 차면서. 신경이 찌익, 긁힌 이도형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사운드가 전해지진 않으나 입 모양으로 추측건대 ‘개새끼’였다.
그러나 아파트 한 채 가격의, 주문 생산 된 수제 자동차 EHO7은 폐차 직전의 트럭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 대가 지나치기엔 좀 좁았던 것. 골목길 운전을 멋지게 할 리 없는 이도형이 순간 얼어붙었다.
서준은 피식 비웃었고, 그의 입술을 읽은 이도형은 더욱 기분이 상했다. 서준은 팔짱까지 끼고 기둥 뒤에 멀찌감치 앉아 구경하는 시늉을 했다. 이도형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결국 이도형의 화풀이는 검붉은 얼굴로 야채를 열심히 나르던 애꿎은 여자애에게 쏟아졌다.
“비켜! 일방통행에 왜 차를 대 놓고 지랄이야?”
“아, 아저씨. 물건 내리잖아요. 죄송해요. 금방 뺍니다! 급하시면 요렇게 좀 돌아가세요.”
곰같이 우락부락한 이도형이 얼굴 벌게져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녀는 성의 없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도형은 퉁퉁한 집게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
“됐거든? 내가 왜 비켜야 해? 빨리 빼지 못해?”
야채를 들이다 날벼락을 맞은 여자아이. 온순해 보이지 않는 그녀도 마주 소리를 지르려 입을 딱 열었다. 그러나 하바나의 주방 막내가 그녀를 툭 치고 소곤소곤했다. 아마도 하바나의 VVIP 고객인 이도형에게 대들었다간 물건 넣는 걸 그만둬야 한다는 경고쯤이겠지.
뭐 씹은 얼굴로 그녀는 “아이고, 얼른 빼 드려얍죠.” 막내가 바닥에 쌓인 박스를 안으로 들이는 걸 도왔다. 하지만 방금까지도 날랬던 동작엔 늑장이 좀 실려서, 차 위로 기어오르는 것도 느릿느릿, 막내에겐 고갯짓 인사까지 전했다. 딱히 흠잡을 순 없으나 그르렁그르렁 시동 소리조차 묘하게 길었다.
“아, 안 지나가고 뭐 해요?”
허름한 계집애에게 무시까지 당하는 꼴을 서준에게 노출한 이도형의 관심은 이제 모두 그녀에게 쏟아졌다. 이도형의 얼굴과 목에 새빨간 기가 올라왔다.
둘이 서로 비켜 움직여야 차를 빼기 좋은 각도. 그러나 곱게 협조하면 이도형이 아니었고, 실제로 차를 빼기 까다롭게 좁기도 했다.
“왜? 이제야 움직이고 싶어? 가고 싶으면 네가 후진으로 저 골목 끝까지 빼든가!”
이도형의 억지였다. 비켜 갈 자신이 없어 후진을 해도 이도형은 3m, 그녀는 30m 이상이다. 열이 끝까지 뻗친 이도형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가 매우 희고 덩치가 큰 이도형은 화가 나면 유난히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는데, 덕분에 그의 별명은 ‘빨간 소시지’였다.
“아, 차는 럭셔리, 운전 실력은 쪽팔리……. 알긴 아나? 차도 주인도 둘 다 뻐얼거네.”
노래하듯 느리게 말하는 검은 여자의 쪽 째진 눈이 가늘어졌다. 새카만 눈동자는 짐승처럼 반짝였고, 비웃음을 매단 입술은 살짝 비틀렸다. 잠깐 후진해 돌거나 조심해 비켜 가면 그만인데, 굳이 턱 받치고 기다리면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을 방해한 데 대한 분풀이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명백한 실수였다. 이도형의 자존심을 긁은 것, 그것은 서준이 한 번 잘못했다가 5년을 진흙탕 싸움을 벌인, 아니 벌이는 중인 원인이기도 했다. 이도형이 계집애에게, 그것도 길바닥에서 마주친, 짧고 똥똥하고 볼품없는 까만 계집애에게 이런 식으로 운전 실력을 평가받았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요.”
“아니, 그 실력 한번 봐야지!”
그것은 예상대로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가 솜씨 좋게 좁은 공간으로 아슬아슬 이도형의 붉은 EHO7을 비켜 갈 때 이도형은 전진 기어를 넣고 그녀의 트럭을 기세 좋게 들이받았다.
‘쿵!’, 그리고 트럭 모서리를 이용해 자신의 EHO7을 옆으로 길게 그었다. ‘기이이이익!’
“아악! 서, 서라고! 계속 움직이면 어떻게 해? 미쳤어? 아저씨, 차를 일부러 들이받은 거야, 지금? 자해한 거야, 지금?”
그녀는 트럭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나 승냥이처럼 으르렁거리는 그녀와 달리, 이도형의 얼굴에는 ‘고의’라고 쓰인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일부러 들이받다니? 좁은 공간에서 서로 비켜 가다 이렇게 된 거잖아?”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데, 일부러 움직였잖아! 그것도 일부러 핸들 틀어서 내 차 옆으로 긁었잖아!”
“어떻게 하니? 너 일방통행에서 역주행하다 사고 내면 네가 백 프로인 거 아시죠? 이 씹할 년아?”
이도형이 만족스럽게 놀려 댔다. 흥분한 그녀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거칠게 올리고 반대편 창문으로 잽싸게 기어 뛰쳐나왔다. 운전석 쪽 차 문은 이도형의 차에 가로막혀 있어서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차를 뒤로 빼고 나왔을 텐데. 완전히 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증거를 보존하는 동물적인 영리함을, 서준은 유심히 보았다.
“그래, 그 잘난 거 구경이나 하자, 이 새끼야!”
어찌나 재빠르고 서슬이 퍼렇던지, 어디 가서 성질 죽여 본 적 없는 이도형도 순간적으로 기가 질려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녀에게 이도형은 짧은 머리카락을 콱 잡혀 차 밖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까 봐, 이 새끼야. 그 씹할 고추 까 봐, 이 돼지 새끼야!”
그녀는 이도형의 허리춤에서 기어이 바지 버클을 풀러 내리려 했다. 허리춤을 잡힌 이도형은 덩칫값도 못 하고 속절없이 그녀에게 당했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중요 부위를 까이는 걸 막는 데 급급했다.
“아아, 아파, 이거 못 놔? 이거 안 놔!”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고, 한 손으로는 중요 부위를 공기 중에 노출하는 공격에 처한 이도형은 힘조차 쓰지 못하고 발버둥 치며 팬티가 내려가는 걸 막는 데만 급급했다. 들짐승 같은 계집애가 얼마나 암팡지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팬티를 내리려 하는지, 이도형은 이제 ‘빨간 소시지’에서 ‘누드 소시지’가 될 참이었다.
“이거 놔, 이거 놔! 아파, 아야야!”
아무리 인적 드문 하바나의 후문이지만 하나둘씩 구경꾼이 들어섰다. 골목 밖을 지나던 누군가가 길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들려 했다. 서준이 눈짓하자, 주방 막내는 기겁하며 행인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까지도 못할 그 잘난 거 가지고 뭐? 입 가졌다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해? 너 이거 사기야, 지가 자해해 놓고서 뭐, 백 프로를 물어내?”
서준은 바들바들 떨며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는 하바나의 주방 막내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괜한 이도형의 화풀이를 받은 그녀가 조금 안쓰러웠으나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완패할 것이다. 두 대의 차를 반짝 들어 180도 돌려놓지 않는 이상. 이도형이 고의로 저 정도 나올 땐 그녀를 철저히 밟으려는 속셈이다. 돈과 시간과 힘이 있는 상대와 싸우다 보면 ‘사실’ 같은 건 중요치 않아진다. 증거는 힘을 잃고, 목격은 왜곡될 것이다.
아마도 저 사건이 해결 날 즈음엔 ‘포악한 성질의 여성 트럭 운전자가 EHO7을 탄 선량한 이도형을 해코지할 목적으로 차를 긁었다, 그것도 역주행하면서.’ 정도로 포장될 것이다. 또 ‘선량한 이도형은 포악한 여자에게 성추행까지 당했다.’의 죄목이 추가될 수 있었다.
서준은 위기에 처한 승냥이를 그대로 방치하기로 했다. 굳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이를테면 ‘이도형이 일부러 그런 게 맞을걸요?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따위의 증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이도형의 EHO7은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가격이었다. 형편이 좋아 보이는 차림은 아닌데, 부디 좋은 보험에 들어 놓았기를.
“이 돼지 새끼야, 백 프로는 무슨 백 프로! 고의로 그런 거잖아. 이건 사기야, 사기!”
그녀의 절규가 처절했지만 서준은 몸을 반짝 일으켜 하바나의 후문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규만이가 보내 준 여자들 중 하나라도, 저런 똘기가 있었으면 당장 보수를 열 배로 올려 줬을 텐데, 하면서.
1. 희생양
클럽 하바나의 정문은 차들이 원활히 빠지도록 커다란 분수대를 따라 두 줄의 원형 도로를 놓았다. 말끔하게 정돈된 도심의 넓은 정원, 웬만한 호텔 입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밤의 풍경이 대단하다. 분주히 뛰어다니는 발렛 요원들 뒤로 거리에선 보기도 힘든 차종들이 길게 줄을 이뤘다.
“21호, 강서준 님 들어가십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기다란 계단을 내려가면 클럽 하바나의 별세계가 시작된다. 눈을 가득 메우는 찬란한 자줏빛에 익숙해질 즈음 어둡고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여자의 입술이 클로즈업된 화면 앞, 금빛 옷을 입은 여가수가 애절히 노래했다.
“아스라이 흐려지는 널 잡을 순 없어. 염치없지만 용서를 바랄게.”
남아메리카 출신의 3인조 밴드와 사람 좋아 보이는 흑인의 허스키한 코러스가 귀에 감겼다. 술에 취하고 아름다운 노래에 취하고 하바나의 숨 막히는 화려함에 취하는 밤. 그것은 ‘특권층’이라고 불러도 좋을, 주머니 두둑한 하바나의 회원들만이 누리는 여유였다.
“친구분들이 기다리십니다.”
밀실 21호에 든 서준은 친구들의 수다를 흘려들으며 끈기 있게 희연을 기다렸다. 문자도, 부재중 전화도 충분히 남겼다. 속이 홧홧했다.
“서준이 왜 저래?”
친구 중 하나가 알아챘다.
“오늘 희연이 약혼 발표 한다잖아. 이도형 생일 파티 겸, 친구들 다 모인 앞에서 둘이 결혼하기로 한 거 깜짝 발표한대.”
규만이 못마땅하게 입을 열었다. 서준이 살기를 실어 규만을 째려봤으나 규만은 “어차피 다 알려진 것.” 덧붙였다. 그러자 친구들 셋이 깜짝 놀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미쳤네. 시집은 다 갔다.”
“왜? 이도형하고 결혼하신다잖냐.”
“퍽이나 그 집안 회장님, 사모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겠다. 보나 마나 놀다가 버려질걸? 소문만 지저분해지고 나면 진짜로 웬만한 집 선 자리는 물 건너갈 텐데.”
왜 한 발짝만 떨어지면 이렇게 선명한 것들을 당사자만 모를까. 서준은 남의 말 뱉듯 하는 친구들의 말에 “그만해.” 나무랐다.
“바보야, 지금 그게 문제야? 이도형이 서준이 골탕 먹이려고 희연이 작정하고 데리고 놀려는 거잖아.”
“뭐? 서준아, 너 아직도 이도형이랑 계속 그래?”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희연이 걔가 너한테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서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만들 좀 해!”
“희연이 걔 차라리 그냥 놔둬, 제 인생 제가 망치겠다는데!”
친구들의 잔소리를 흘려듣고 서준은 21호 밖을 나섰다.
생일을 맞은 이도형은 하바나의 옥상과 바, 댄스 홀 그리고 애용하는 밀실 1호를 빌렸다. 하바나의 20여 개 밀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몽땅 독차지하는 바람에 다른 회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서준은 시끌벅적한 홀의 인파 속에서 이도형의 친구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희연을 붙잡았다.
“이런 식으로 나, 계속 피할래?”
“어머, 안녕? 너도 왔어?”
특유의 기운 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희연은 서준의 등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뒤 이도형의 친구들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였다.
“방해하지 마!”
사방이 이도형의 손님들로 넘쳤다. 희연은 눈에 뜨이는 미인이다. 흰 피부, 알맞게 살이 오른 볼, 숱 많은 속눈썹, 도톰한 입술, 타고난 황금비의 몸매까지.
“조용히 얘기하기 싫으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의논하든가!”
하지만 그쪽으론 서준이 오히려 더했다. 다시 빚을 수도 없는 완벽한 이마, 정성으로 심은 듯 진하고 고른 눈썹, 외까풀의 큰 눈, 힘찬 콧대, 트레이드마크인 ‘키스를 부르는 입술’.
둘의 조합만으로도 주변이 술렁였다. 오늘따라 희연의 흰 드레스가 눈부시다. 별명인 백조공주답게. 머리의 깃털 장식 위엔 작은 왕관도 올렸다. 희연이 곧 오데뜨였다.
“짧게 얘기해. 도형 씨, 차에 또 무슨 문제 생겨서 잠깐 자리 비운 거니까.”
강서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하자, 주변 시선에 예민한 희연은 자연스럽게 서준의 등을 밀고 걸음걸이를 옮기며 속삭였다.
밀실의 입구로 들어서자 둘 앞엔 자줏빛 끝없는 미로가 펼쳐졌다. 처음 온 웨이터들은 종종 길을 잃기도 했는데, 회원들은 반드시 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직원들은 코너마다 아름다운 콘솔이나 벽거울을 장식처럼 설치하여 손님끼리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서비스했다.
하지만 희연과 서준은 익숙하게 그 미로를 돌아 21호 앞에 다다랐다.
1화
프롤로그 방관의 죄
“박제 인형처럼 예쁜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야.”
제법 더운 바람이 부는 4월의 어느 날. 강서준은 클럽 하바나의 뒷문에서 친구 규만과 통화 중이었다.
“매력이 더 중요해. 당당하고 단정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사람을 끄는 매력.”
강서준이라는 이름 앞엔 늘 수식어가 따랐다. ‘바람둥이’ 강서준. 검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같이 매끈한 검은 피부, 진하고 고른 눈썹, 크고 옆으로도 긴 눈, 날카롭고 힘찬 콧날.
“예쁘기만 하면, 이도형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그리고 키스가 동하는 입술의 매력적인 곡선.
바람둥이 강서준은 여자를 찾고 있었다. 이도형과의 이 진흙탕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 줄 여자. 아니, 적어도 이도형의 손아귀에서 희연을 빼내 줄 여자.
“배우라는 애들이 그렇게 연기력이 형편없어 어떻게 데뷔를 한대?”
배우 지망생을 소개한다며 먼저 나서 설레발치던 규만은 시간만 질질 끌었다. 인형 같은 완벽한 외모의 여자들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참 나, 말하는 거나 짓는 표정이나. 드라마 오디션 봐? 너는 그런 애들 붙들고 가르치면서 사기 치니?”
휴대전화로 넘어오는 규만의 목소리에도 짜증이 어렸다. 사기라니, 그만하면 예쁘고 매력적인 애들을 왜 트집 잡아, 하며 반박하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니! 김희연을 버리고 택해야 할 여자라고. 싫은 소리 한 번 했다고 울면서 뛰쳐나가, 초면에 옷은 왜 벗으려 들고, 매력 어필해 보라니까 코맹맹이 소리를 내잖아! 심약하고 천박하고 매력 없는 게 문제라니까.”
규만은 더 이상 보여 줄 여자가 없다며 손을 들었다. 김희연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를 찾는 거라면 손들겠단다. 결국 이럴 거면서!
“그럼 어떡해? 희연이를 그냥 놔둬? 반칙은 녀석이 먼저 시작했어. 나한테 도덕 교육 할래?”
통화는 끝났다. 서준은 기가 막혀 기획사의 대표로 있는 친구 녀석의 전화번호를 찾아 누르려다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일이 너무 커진다. 규만이라면 믿을 수 있지만 친구들을 더 이상 동원하는 건 좋지 않다. 시작도 전부터 이도형에게 들킬 위험이 크다.
차라리 클럽 하바나의 사장 이연혜에게 일을 시작하기 전인 여자들을 소개받아 볼까. 이연혜는 고급 손님만을 은밀히 상대하는 여자들을 여럿 아니까.
인적 드문 클럽 하바나의 후문, 서준은 체념하듯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정문을 꺼리는 손님들이 은밀히 드나들도록 만들었지만, 겉보기엔 포근하고 아늑한 세 평 남짓 작은 정원이다.
알록달록 오그랑한 꽃잎들이 밝은 햇살을 반사했다. 그의 속만 황량할 뿐 사방이 화사하고 따사로웠다. 서준은 괜한 꽃잎에 화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방으로 퍼지는 연기가 꼭 한숨 같았다.
그때였다. 내일모레면 폐차를 바라보는 낡은 트럭이 일방통행의 좁은 도로로 후진을 해 들어왔다. 서준은 멀찌감치 떨어진 하바나의 주방 문이 열리는 걸 관심 없이 바라보았다.
“시간 한번 정확하네.”
하바나의 주방 막내가 트럭을 맞았다.
“당연하지! 하바나 배달인데.”
트럭 안에서 새까맣고 통통한 여자애가 톡 튀어나와 양배추, 양파, 파, 마늘, 상추 같은 것을 날래게 내렸다. 주방 막내는 체크해 주는 목록을 “어. 정확해.” 하고 받아 사인을 했다.
“봐 봐, 물건은 최상급이에요. 괜히 보관 잘못하고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요?”
“아, 저번엔 정말 미안.”
얼핏 봐도 20대 후반인 주방 막내는 저보다 예닐곱이나 어려 뵈는 쪼그만 어린 여자애에게 절절맸다. 괜히 냉장했다 다시 실온에 보관하는 바람에 야채에 습기가 차서 상한 거예요, 보관을 잘 해야죠, 제 주방 막내 부리듯 그녀는 또박또박 야단을 쳤다.
그 광경만으로도 제법 재미가 좋았지만 제대로 된 공연은 그다음이었다. 사실 서준은 이도형의 붉은 EHO7이 골목길로 들어설 때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담배를 끄고 자리를 뜨려 했다.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도형의 시야엔 이미 서준이 들어왔고, 이를 드러내며 EHO7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피할 기회는 놓쳤다. 그러면 제대로 상대를 해 줄 수밖에.
서준은 올 테면 와 봐, 도발적으로 거만한 손짓을 보였다. 애완동물 부르듯 쪽쪽쪽, 혀를 차면서. 신경이 찌익, 긁힌 이도형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사운드가 전해지진 않으나 입 모양으로 추측건대 ‘개새끼’였다.
그러나 아파트 한 채 가격의, 주문 생산 된 수제 자동차 EHO7은 폐차 직전의 트럭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 대가 지나치기엔 좀 좁았던 것. 골목길 운전을 멋지게 할 리 없는 이도형이 순간 얼어붙었다.
서준은 피식 비웃었고, 그의 입술을 읽은 이도형은 더욱 기분이 상했다. 서준은 팔짱까지 끼고 기둥 뒤에 멀찌감치 앉아 구경하는 시늉을 했다. 이도형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결국 이도형의 화풀이는 검붉은 얼굴로 야채를 열심히 나르던 애꿎은 여자애에게 쏟아졌다.
“비켜! 일방통행에 왜 차를 대 놓고 지랄이야?”
“아, 아저씨. 물건 내리잖아요. 죄송해요. 금방 뺍니다! 급하시면 요렇게 좀 돌아가세요.”
곰같이 우락부락한 이도형이 얼굴 벌게져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녀는 성의 없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도형은 퉁퉁한 집게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
“됐거든? 내가 왜 비켜야 해? 빨리 빼지 못해?”
야채를 들이다 날벼락을 맞은 여자아이. 온순해 보이지 않는 그녀도 마주 소리를 지르려 입을 딱 열었다. 그러나 하바나의 주방 막내가 그녀를 툭 치고 소곤소곤했다. 아마도 하바나의 VVIP 고객인 이도형에게 대들었다간 물건 넣는 걸 그만둬야 한다는 경고쯤이겠지.
뭐 씹은 얼굴로 그녀는 “아이고, 얼른 빼 드려얍죠.” 막내가 바닥에 쌓인 박스를 안으로 들이는 걸 도왔다. 하지만 방금까지도 날랬던 동작엔 늑장이 좀 실려서, 차 위로 기어오르는 것도 느릿느릿, 막내에겐 고갯짓 인사까지 전했다. 딱히 흠잡을 순 없으나 그르렁그르렁 시동 소리조차 묘하게 길었다.
“아, 안 지나가고 뭐 해요?”
허름한 계집애에게 무시까지 당하는 꼴을 서준에게 노출한 이도형의 관심은 이제 모두 그녀에게 쏟아졌다. 이도형의 얼굴과 목에 새빨간 기가 올라왔다.
둘이 서로 비켜 움직여야 차를 빼기 좋은 각도. 그러나 곱게 협조하면 이도형이 아니었고, 실제로 차를 빼기 까다롭게 좁기도 했다.
“왜? 이제야 움직이고 싶어? 가고 싶으면 네가 후진으로 저 골목 끝까지 빼든가!”
이도형의 억지였다. 비켜 갈 자신이 없어 후진을 해도 이도형은 3m, 그녀는 30m 이상이다. 열이 끝까지 뻗친 이도형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가 매우 희고 덩치가 큰 이도형은 화가 나면 유난히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는데, 덕분에 그의 별명은 ‘빨간 소시지’였다.
“아, 차는 럭셔리, 운전 실력은 쪽팔리……. 알긴 아나? 차도 주인도 둘 다 뻐얼거네.”
노래하듯 느리게 말하는 검은 여자의 쪽 째진 눈이 가늘어졌다. 새카만 눈동자는 짐승처럼 반짝였고, 비웃음을 매단 입술은 살짝 비틀렸다. 잠깐 후진해 돌거나 조심해 비켜 가면 그만인데, 굳이 턱 받치고 기다리면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을 방해한 데 대한 분풀이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명백한 실수였다. 이도형의 자존심을 긁은 것, 그것은 서준이 한 번 잘못했다가 5년을 진흙탕 싸움을 벌인, 아니 벌이는 중인 원인이기도 했다. 이도형이 계집애에게, 그것도 길바닥에서 마주친, 짧고 똥똥하고 볼품없는 까만 계집애에게 이런 식으로 운전 실력을 평가받았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요.”
“아니, 그 실력 한번 봐야지!”
그것은 예상대로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가 솜씨 좋게 좁은 공간으로 아슬아슬 이도형의 붉은 EHO7을 비켜 갈 때 이도형은 전진 기어를 넣고 그녀의 트럭을 기세 좋게 들이받았다.
‘쿵!’, 그리고 트럭 모서리를 이용해 자신의 EHO7을 옆으로 길게 그었다. ‘기이이이익!’
“아악! 서, 서라고! 계속 움직이면 어떻게 해? 미쳤어? 아저씨, 차를 일부러 들이받은 거야, 지금? 자해한 거야, 지금?”
그녀는 트럭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나 승냥이처럼 으르렁거리는 그녀와 달리, 이도형의 얼굴에는 ‘고의’라고 쓰인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일부러 들이받다니? 좁은 공간에서 서로 비켜 가다 이렇게 된 거잖아?”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데, 일부러 움직였잖아! 그것도 일부러 핸들 틀어서 내 차 옆으로 긁었잖아!”
“어떻게 하니? 너 일방통행에서 역주행하다 사고 내면 네가 백 프로인 거 아시죠? 이 씹할 년아?”
이도형이 만족스럽게 놀려 댔다. 흥분한 그녀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거칠게 올리고 반대편 창문으로 잽싸게 기어 뛰쳐나왔다. 운전석 쪽 차 문은 이도형의 차에 가로막혀 있어서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차를 뒤로 빼고 나왔을 텐데. 완전히 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증거를 보존하는 동물적인 영리함을, 서준은 유심히 보았다.
“그래, 그 잘난 거 구경이나 하자, 이 새끼야!”
어찌나 재빠르고 서슬이 퍼렇던지, 어디 가서 성질 죽여 본 적 없는 이도형도 순간적으로 기가 질려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녀에게 이도형은 짧은 머리카락을 콱 잡혀 차 밖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까 봐, 이 새끼야. 그 씹할 고추 까 봐, 이 돼지 새끼야!”
그녀는 이도형의 허리춤에서 기어이 바지 버클을 풀러 내리려 했다. 허리춤을 잡힌 이도형은 덩칫값도 못 하고 속절없이 그녀에게 당했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중요 부위를 까이는 걸 막는 데 급급했다.
“아아, 아파, 이거 못 놔? 이거 안 놔!”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고, 한 손으로는 중요 부위를 공기 중에 노출하는 공격에 처한 이도형은 힘조차 쓰지 못하고 발버둥 치며 팬티가 내려가는 걸 막는 데만 급급했다. 들짐승 같은 계집애가 얼마나 암팡지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팬티를 내리려 하는지, 이도형은 이제 ‘빨간 소시지’에서 ‘누드 소시지’가 될 참이었다.
“이거 놔, 이거 놔! 아파, 아야야!”
아무리 인적 드문 하바나의 후문이지만 하나둘씩 구경꾼이 들어섰다. 골목 밖을 지나던 누군가가 길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들려 했다. 서준이 눈짓하자, 주방 막내는 기겁하며 행인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까지도 못할 그 잘난 거 가지고 뭐? 입 가졌다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해? 너 이거 사기야, 지가 자해해 놓고서 뭐, 백 프로를 물어내?”
서준은 바들바들 떨며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는 하바나의 주방 막내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괜한 이도형의 화풀이를 받은 그녀가 조금 안쓰러웠으나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완패할 것이다. 두 대의 차를 반짝 들어 180도 돌려놓지 않는 이상. 이도형이 고의로 저 정도 나올 땐 그녀를 철저히 밟으려는 속셈이다. 돈과 시간과 힘이 있는 상대와 싸우다 보면 ‘사실’ 같은 건 중요치 않아진다. 증거는 힘을 잃고, 목격은 왜곡될 것이다.
아마도 저 사건이 해결 날 즈음엔 ‘포악한 성질의 여성 트럭 운전자가 EHO7을 탄 선량한 이도형을 해코지할 목적으로 차를 긁었다, 그것도 역주행하면서.’ 정도로 포장될 것이다. 또 ‘선량한 이도형은 포악한 여자에게 성추행까지 당했다.’의 죄목이 추가될 수 있었다.
서준은 위기에 처한 승냥이를 그대로 방치하기로 했다. 굳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이를테면 ‘이도형이 일부러 그런 게 맞을걸요?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따위의 증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이도형의 EHO7은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가격이었다. 형편이 좋아 보이는 차림은 아닌데, 부디 좋은 보험에 들어 놓았기를.
“이 돼지 새끼야, 백 프로는 무슨 백 프로! 고의로 그런 거잖아. 이건 사기야, 사기!”
그녀의 절규가 처절했지만 서준은 몸을 반짝 일으켜 하바나의 후문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규만이가 보내 준 여자들 중 하나라도, 저런 똘기가 있었으면 당장 보수를 열 배로 올려 줬을 텐데, 하면서.
1. 희생양
클럽 하바나의 정문은 차들이 원활히 빠지도록 커다란 분수대를 따라 두 줄의 원형 도로를 놓았다. 말끔하게 정돈된 도심의 넓은 정원, 웬만한 호텔 입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밤의 풍경이 대단하다. 분주히 뛰어다니는 발렛 요원들 뒤로 거리에선 보기도 힘든 차종들이 길게 줄을 이뤘다.
“21호, 강서준 님 들어가십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기다란 계단을 내려가면 클럽 하바나의 별세계가 시작된다. 눈을 가득 메우는 찬란한 자줏빛에 익숙해질 즈음 어둡고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여자의 입술이 클로즈업된 화면 앞, 금빛 옷을 입은 여가수가 애절히 노래했다.
“아스라이 흐려지는 널 잡을 순 없어. 염치없지만 용서를 바랄게.”
남아메리카 출신의 3인조 밴드와 사람 좋아 보이는 흑인의 허스키한 코러스가 귀에 감겼다. 술에 취하고 아름다운 노래에 취하고 하바나의 숨 막히는 화려함에 취하는 밤. 그것은 ‘특권층’이라고 불러도 좋을, 주머니 두둑한 하바나의 회원들만이 누리는 여유였다.
“친구분들이 기다리십니다.”
밀실 21호에 든 서준은 친구들의 수다를 흘려들으며 끈기 있게 희연을 기다렸다. 문자도, 부재중 전화도 충분히 남겼다. 속이 홧홧했다.
“서준이 왜 저래?”
친구 중 하나가 알아챘다.
“오늘 희연이 약혼 발표 한다잖아. 이도형 생일 파티 겸, 친구들 다 모인 앞에서 둘이 결혼하기로 한 거 깜짝 발표한대.”
규만이 못마땅하게 입을 열었다. 서준이 살기를 실어 규만을 째려봤으나 규만은 “어차피 다 알려진 것.” 덧붙였다. 그러자 친구들 셋이 깜짝 놀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미쳤네. 시집은 다 갔다.”
“왜? 이도형하고 결혼하신다잖냐.”
“퍽이나 그 집안 회장님, 사모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겠다. 보나 마나 놀다가 버려질걸? 소문만 지저분해지고 나면 진짜로 웬만한 집 선 자리는 물 건너갈 텐데.”
왜 한 발짝만 떨어지면 이렇게 선명한 것들을 당사자만 모를까. 서준은 남의 말 뱉듯 하는 친구들의 말에 “그만해.” 나무랐다.
“바보야, 지금 그게 문제야? 이도형이 서준이 골탕 먹이려고 희연이 작정하고 데리고 놀려는 거잖아.”
“뭐? 서준아, 너 아직도 이도형이랑 계속 그래?”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희연이 걔가 너한테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서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만들 좀 해!”
“희연이 걔 차라리 그냥 놔둬, 제 인생 제가 망치겠다는데!”
친구들의 잔소리를 흘려듣고 서준은 21호 밖을 나섰다.
생일을 맞은 이도형은 하바나의 옥상과 바, 댄스 홀 그리고 애용하는 밀실 1호를 빌렸다. 하바나의 20여 개 밀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몽땅 독차지하는 바람에 다른 회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서준은 시끌벅적한 홀의 인파 속에서 이도형의 친구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희연을 붙잡았다.
“이런 식으로 나, 계속 피할래?”
“어머, 안녕? 너도 왔어?”
특유의 기운 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희연은 서준의 등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뒤 이도형의 친구들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였다.
“방해하지 마!”
사방이 이도형의 손님들로 넘쳤다. 희연은 눈에 뜨이는 미인이다. 흰 피부, 알맞게 살이 오른 볼, 숱 많은 속눈썹, 도톰한 입술, 타고난 황금비의 몸매까지.
“조용히 얘기하기 싫으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의논하든가!”
하지만 그쪽으론 서준이 오히려 더했다. 다시 빚을 수도 없는 완벽한 이마, 정성으로 심은 듯 진하고 고른 눈썹, 외까풀의 큰 눈, 힘찬 콧대, 트레이드마크인 ‘키스를 부르는 입술’.
둘의 조합만으로도 주변이 술렁였다. 오늘따라 희연의 흰 드레스가 눈부시다. 별명인 백조공주답게. 머리의 깃털 장식 위엔 작은 왕관도 올렸다. 희연이 곧 오데뜨였다.
“짧게 얘기해. 도형 씨, 차에 또 무슨 문제 생겨서 잠깐 자리 비운 거니까.”
강서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하자, 주변 시선에 예민한 희연은 자연스럽게 서준의 등을 밀고 걸음걸이를 옮기며 속삭였다.
밀실의 입구로 들어서자 둘 앞엔 자줏빛 끝없는 미로가 펼쳐졌다. 처음 온 웨이터들은 종종 길을 잃기도 했는데, 회원들은 반드시 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직원들은 코너마다 아름다운 콘솔이나 벽거울을 장식처럼 설치하여 손님끼리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서비스했다.
하지만 희연과 서준은 익숙하게 그 미로를 돌아 21호 앞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