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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안에 애들 있어.”
희연이 밀실 문을 열려 하자 서준이 경고했다. 희연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그런 떨거지들까지 끌고 와서 나랑 뭘 어쩌자고?”
“뭐?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그러게 지하 카페 룸에서 조용히 보자고 메시지 보냈잖아.”
“그거 따지자고 파티장까지 직접 잡으러 왔니?”
짜증조차 숨기지 않는 희연의 목소리에 서준은 마음이 얼어붙었다. 애들 말처럼 정말 모른 체할까. 인생을 망치든가 말든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옳을까.
그러나 이름 붙이기 힘든 어떤 강렬한 감정이 그를 끄잡아 내렸다.
“네가 어떤 남자들을 만나든, 지금까진 상관한 적 없어.”
“내가 또 무슨 남자들을 그렇게 만나고 다녔다고!”
희연은 소리치다 말고 숨죽여 목소리를 낮췄다. 밀실의 벽이 두껍더라도 그건 희연의 본능이다. 빈 복도를 휘휘 둘러보며 확인하는 희연을 보니 입 안에서 쓴맛이 났다.
“적어도, 함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 녀석을 만나라고. 이도형은 아니잖아!”
“목소리 낮춰! 도형 씨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거짓말 마. 걔랑 너, 안 돼. 몰라? 너, 이용당하는 거야. 네가 제일 무서워하는 지저분한 가십거리만 되고 말아.”
“나 지금 행복해. 모든 게 잘되고 있어. 방해하지 마, 선을 넘지 마!”
서준의 입술에 실소가 머금어지고 뺨엔 자잘한 경련이 일었다.
“선? 무슨 선?”
“왜 이래? 넌 내 가장 좋은 친구야!”
“아니지! 거리 둘 때만 친구, 이용할 땐 애인이라고 해야지! 선을 넘은 건 너잖아!”
“웃기지 마, 조용히 해! 누가 들어!”
목소리는 낮았지만 희연의 표정은 절규에 가까웠다.
“넌 침대에서 친구에게 달려들어 키스……!”
희연은 몸을 빠르게 날려 그녀의 손바닥으로 서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어!”
서준도 강제로 희연의 흰 손을 입에서 떼고 옴짝달싹 못 하게 붙잡았다.
“너, 지금 나한테 이런 식으로 시위하니?”
“아냐! 그냥 실수할 뻔한 거야. 잊어. 너한텐 그렇게 큰일도 아니잖아. 그냥 너답게 살아!”
실수. 일상을 헝클고 신경을 이렇게 날카롭게 벼려 놓고서 실수, 큰일이 아니라! 서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나다운 거? 나다운 게 뭐지? 아아, ‘바람둥이 강서준’으로 사는 거.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신그룹 막내아들 이도형이 만들어 주신 그 잘난 타이틀!”
“그래!”
“그럼, 날 네 연애놀음에 끼우지 말았어야지. 이도형을 도발하기 위해 날 이용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희연의 가녀린 어깨를 힘으로 왈칵 밀어붙였다. “아악!” 소리가 흘렀지만 크게 지르지는 못했다. 꼼짝 못 하게 팔과 벽 사이에 가두었다. 희연의 시선이 올곧게 서준을 향했다.
한 뼘의 거리, 그 좁은 공간으로 희연은 서준의 숨결을 달게 마셨다. 좁혀진 거리는 둘에게 그날의 기억을 소환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가, 그날의 푹신했던 침대가 되었고, 강바람에 서로를 바라보던 그 끈끈함으로 되돌려졌다. 양팔에 갇혀 서준을 올려다보는 희연의 입술이 본능적으로 반쯤 열렸다.
“나랑 다정한 척, 연기하는 거로 이도형을 네 남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의 부드러운 입술 대신 날 선 질책이 돌아오자, 희연의 표정이 순간 앙칼지게 변했다. 그럼에도 서준은 빠르게 말을 계속 토했다.
“나와 이도형 사이를 오가면서 이게 무슨 짓이야! 그래, 바람둥이 강서준이란 별명을 어떻게 얻었는지, 직접 확인해 봐. 네 입술도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보자고. 넌 그날 내 입술을 훔쳤었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서준의 입술이 드디어 가까이 다가왔으나 희연의 주의는 이미 흐트러졌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들이 언제든지 둘을 볼 수 있는 복도! “고개 들어!” 하며 턱을 쥐고 다가오는 입술에 용기를 잃은 듯 희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흐흐흐흐흐흑, 빨리 놔, 이 나쁜 자식아!”
희연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자, 서준은 맥이 탁 풀렸다. 코끝이 빨개지고 입술이 바들바들 떨린다. 차라리 누가 보잖아, 하며 밀쳐 버리지 거짓 눈물! 희연이는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저렇게 언제든지 거짓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싫다. 이럴 땐 희연이가 정말 진저리 난다!
“좋아, 가! 네 마음대로 해!”
그래, 그냥 놔둬. 이도형과 내 싸움에 끼어서 제 인생 망치든가 말든가. 또다시 이도형에게 버려지든가 말든가. 매정하게 뱉고 말았지만 몸의 일부를 도리는 것같이 아팠다.
혼자서 21호로 들어서려는 서준을 보며 희연은 “미안.” 하며 머뭇머뭇했다. 그러나 서준은 문고리에 손을 짚은 채 온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서준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구석진 곳, 콘솔 아래 무언가 시커먼 게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바나에 좀도둑이 어떻게 들었지?
쿵쿵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시커먼 물체를 관찰했다. 어둠 속에서 새까만 두 눈동자가 반짝, 하며 서준을 마주봤다. 분명하진 않지만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묶은 뭉치가 뒤통수에 달렸다. 여자인가.
무언가 미련이 가득한 희연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서준은 희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몸으로 인영을 가렸다.
어떻게 저런 데 숨을 생각을 했을까. 하긴 여태 눈치도 채지 못했었다. 작은 콘솔의 가느다란 네 다리 아래, 온몸을 구기고 거머리처럼 벽에 바싹 붙어 있는 여자아이.
쪽 째진 눈, 유리알같이 새카만 두 눈동자가 반들거리며 씨익, 겸연쩍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다니!
‘뭐야?’
희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서준은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좀도둑은 벽에 붙였던 두 손을 떼 부탁한다는 듯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며 쉿!
여유 있게 슬쩍 웃는 미소가 악동 같았다. 그러곤 다시 천연덕스럽게 두 손과 몸통을 벽에 바싹 붙이고 거머리 흉내를 냈다. 저러면 되돌려진다는 건가?
반들거리는 새카만 눈이 들짐승 같아 거슬렸다. 낯설지가 않았다.
“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희연이를 우선 돌려보내기로 했다.
“알았어. 가자, 데려다줄게.”
희연이 뒤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희연은 누가 볼세라 손을 떨어냈다.
“혼자 갈래. 도형 씨가 너랑 있는 거 보면 싫어할 거 알잖아.”
친구의 가면을 쓴 24년의 세월이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그래, 그럼!” 털어 내는 대로 손을 치워 주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미로처럼 꺾인 복도 끝에서 이도형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친 계집애 하나 잡는 게, 뭐가 어렵다고 이 난리야? 그러니까 내가 직접 잡는다잖아!”
몸을 돌려 서준에게로 돌아오는 희연의 입가에서 “허헉!” 바람이 새 나왔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다른 손님들 방은 함부로 뒤질 수 없습니다. 모든 입구를 통제해 놓았으니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우선 방으로 돌아가 계시면…….”
직원의 제지로 이도형의 움직임이 늦춰졌다. 희연은 새하얀 드레스에 구김이 가는 줄도 모르고 드레스 자락을 양손 가득 움켜쥐었다.
“서준아, 어떡해! 빨리 도와줘!”
백조공주 오데뜨는 발까지 동동거리며 진짜로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서준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우선은 희연의 안달하는 얼굴이 먼저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끝 21호, 꺾어지면 특별한 손님들이 나갈 때만 사용하는 출입문이 있었다.
그때 벽에 거머리처럼 붙었던 여자가 움찔거렸다. 스스슥, 바닥을 기어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제가 먼저 출구 쪽으로 도망치려는 속셈이다.
“아악!”
그러나 희연은 뒤를 돌다 엎드려 기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비켜!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잖아!”
이도형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고, 희연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서준의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도형이 잡으러 돌아다니는 건, 저 검은 계집애!
“네, 21호 쪽입니다.”
“왜 하필 강서준 새끼 방이야?”
서준은 자신이 머무는 21호의 문을 슬쩍 열면서, 벽에 붙었던 검은 여자의 도망치는 경로를 방해했다. 서준의 발끝에 걸린 여자는 짜증을 내며 21호 안으로 벽을 타고 숨어들었다. 서준은 출구 쪽 통로로 희연을 대신 밀어 넣었다.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잡기 싫어?”
“아, 아닙니다. 이쪽입니다.”
직원들과 이도형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희연은 꺾인 출구 쪽 통로로 나섰지만 동작이 너무 더뎠다. 밖으로 나설 타이밍은 놓쳤다.
그러나 그녀는 짐승같이 재빨랐다. 서준도 검은 여자와 동시에 21호 안으로 간신히 들어섰다, 웬 소란이냐며 방금 고개를 내밀었다는 듯이.
“아아, 시끄럽네! 왜? 생일 파티 초대하려고 왔어? 축하주라도 같이해 줘?”
마음의 준비를 먼저 했던 강서준이 이도형과 세 명의 직원을 보며 입을 뗐다. 이도형의 얼굴이 심술궂게 일그러졌다. 큰 키, 건장한 체격, 붉은빛이 도는 흰 피부, 진한 쌍꺼풀의 둥그렇고 큰 얼굴. 무게감 있고 심술궂게 보이는 건 그의 성정과 닮아서일까.
“꺼져. 오늘은 너한테 볼일 없어.”
“볼일이 없는데 굳이 여길 왜 오셨나? 내 방인 거 잘 아실 텐데?”
서준의 고르고 진한 눈썹이 장난기 있게 올랐다, 내려졌다. 이도형은 저 매끈한 턱의 모서리를 주먹으로 한 대 콱 치고 싶었다. 그동안 강서준 새끼에게 빼앗긴 여자들은 저 쓸데없는 외모에 현혹된 것이다. 나보다 2cm나 작은 주제에!
신체의 황금 비율은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한다. 도형은 자신이 더 작아 보인다는 사실이 굉장한 불만이었다. 버릇처럼 걷어 올린 서준의 팔 근육이 도드라졌다. 부지런한 사육사의 손에서 체계적으로 성장한 종마 같았다.
‘흥! 계집애 같은 게 근육 자랑은!’
한때 트레이너 탓을 하며 서준이 다니는 헬스클럽으로 잠깐 옮긴 적이 있었다. 녀석처럼 슬림하면서도 잘 발달된 자잘한 근육을 만들고 싶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처참했다. 도형의 근육은 부피가 지나치도록 쉽게 커지며 모양이 좋지 않았다. 열심히 운동했는데, 결국 욕심 많은 푸줏간 주인 같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도형은 트레이너에게 크게 난리를 피우고 또 헬스클럽을 옮겼다.
“저, 이쪽이 아닐까요?”
직원 하나가 둘 사이의 불편한 눈싸움을 방해하며 비밀 출구 쪽으로 도형을 안내했다. 열 걸음만 걸어 꺾어지면 희연이 있다. 서준은 침을 삼키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볼일이 있을 텐……!”
갑자기 다리가 강하게 당겨지는 느낌! 서준은 문 안을 슬쩍 돌아보았다.
문 옆 안쪽 벽에 붙어 있던 검은 여자가 ‘이러기야?’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서준이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려니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비는 시늉도 했다. 통통하고 가무잡잡한 게 밉지 않았다.
“뭔가를 찾나 봐?”
그렇더라도 이 녀석은 희연이를 위해 잡아 놓은 희생양이다. 어린애가 보채듯 다리를 당기는 손이 다급해졌다. 슬쩍 돌아봐 주자 주먹을 불끈 쥐며 협박을 했다. 손가락으로 가슴, 눈, 귀를 가리키며,
‘나, 다 보고, 들었어!’
입 앞에 손바닥을 펴 흔들어 보이며,
‘다 떠들어 버릴 거야!’
입 모양으로 비장하게 전달했다. 넓어진 콧방울과 과장되게 벌어진 입에 담긴 그 강렬한 의지의 표정이,
“흡!”
순간 너무 귀여워 서준은 숨을 꾹 참았다. 쪽 째진 눈, 크고 또렷한 검은자위가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게 짜릿하게 우스워 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크크크!”
마주보던 도형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관심 있어?”
그러나 웃음을 멈춘 서준이 턱짓으로 문 안을 가리키자, 도형은 순식간에 문을 밀고 들어왔다. 동시에 “야앗!” 하는 여자의 괴성이 울리며 검은 것이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들짐승 같았다.
하지만 복도는 좁았고, 그녀를 잡으러 온 남자가 무려 넷이었다. 채 몇 발자국을 도망치기도 전에 직원에게 붙잡혔다.
“놔! 이거 놔!”
여자의 음성은 약간 허스키하고 가늘었다. 꼭 사내의 것처럼 탁할 것같이 생겨 가지곤.
“갚는다고! 돈 주면 될 거 아냐? 이 돼지 새끼야!”
아아! 그제야 서준은 깨달았다. 좀도둑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어 생각지 못했다. 이도형과 얼마 전 한판 붙었던 계집애, 그 검은 승냥이.
“계속 그렇게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도형은 성큼성큼 다가가 여자의 멱살을 쥐고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탁, 내리쳤다. 말릴 틈도 없이 ‘퍽’ 하는 소리와 “아얏!” 하는 비명이 복도를 덮었다. 서준의 입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무슨 일인데?”
이도형의 일은 절대 끼어들지 말란 이성의 경고가 짓눌렸다.
“상관 말고 넌 빠져.”
도형은 두툼한 검지를 들이밀며 강하게 경고했다. 서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곧 숨을 참았다. 꺾어진 복도 끝에서 흰 드레스 자락이 숨을 들썩였다. 희연을 잊었었다.
서준은 그를 따르던 직원 중 형준을 발견하고 눈짓을 보냈다. 형준은 고개를 작게 숙여 답했다. 그리고 길에서 주운 검은 승냥이는 희연이를 위한 제물로 팔기로 했다.
“알겠다고! 내 발로 가겠다고! 이 새끼들아, 이거 놔!”
어찌나 거세게 반항하며 몸부림을 치던지, 여자는 두 다리와 팔 하나와 몸뚱이를 잡힌 채로 세 남자에게 물건처럼 거꾸로 들려 갔다. 세 남자는 작은 체구 하나가 펄떡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쩔쩔맸다.
“이 개새끼, 언젠간 죽여 버릴 거야!”
그녀는 사력을 다해 얼굴을 돌려 강서준을 원망스레 째려보았다, 쪽 째진 눈으로 검은 눈동자를 반들거리며. 그리고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 팔을 들어 올려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힘차게 쭉 뻗었다.
“이게, 돌았나!”
안타깝게도 도형은 자신을 향해 욕을 한다 생각하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다시 후려쳤다. “악!” 소리와 함께 복도 끝으로 그녀의 절규가 이어졌다.
“너도! 너도 죽여 버릴 거야!”

* * *

잠깐의 소란이 소나기처럼 지나가고 밀실 21호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술과 음악이 가득했다. 20여 평의 룸 안은 클럽 안의 작은 클럽이다.
한쪽 벽면은 작지만 아름다운 바가 자리했고, 최고급 위스키, 코냑, 보드카, 와인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반대쪽엔 간이 무대와 각종 음향 시설, 간단한 악기들과 아날로그식 턴테이블이 갖추어졌다. 시원하게 넓은 중앙엔 커다란 소파가 위치했다.
“아까 걘 뭐야?”
친구들의 잡담도 다시 찾아들었다. 규만의 물음에 서준이 착잡한 표정으로 술잔만 기울이자 다른 녀석이 끼었다.
“얼마 전에 이도형이랑 한판 뜬 여자애일걸? 이도형 크큭, 사람들 앞에서 까였대. 크흐흐흐!”
“뭐, 뭘?”
녀석은 웃느라 혼을 빼며 배를 쥐고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저, 정말?”
웃느라 정신없는 가운데도 손가락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키는 걸 보고 모두들 뜨악했다. 서준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까 보라며 난리를 치던 검은 승냥이는 자신의 경고를 실천에 옮겼다.
“아니, 그래 봤자 여자애 하나가 힘이 세야 얼마나 세다고.”
“맞아. 혁대 풀리고 팬티 내려갈 때까지 이도형은 두 손 놓고 뭐 했대?”
다른 짓을 하던 녀석들까지 달려들어 캐물었다.
“크큭, 제 머리채 잡힌 거 빼내고 여자애 머리채 잡으려고 하다가 한 방에 그냥! 크흐, 당했대. 흐흐흐!”
녀석이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말을 잇자, 규만도 신기해하며 끼어들었다.
“머리카락도 짧은데, 잡을 데가 어디 있다고?”
“몰라. 아까 일부러 생일 축하한다고 인사하러 갔다 왔는데, 머리 위쪽이 울긋불긋하고 휑하더라. 크하하하!”
이도형의 머리칼을 암팡지게 뜯던 그녀의 손아귀를 생각하곤 서준도 훗,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꽤 집요하고 또 재빨랐다.
“야아, 천하의 이도형이 계집애랑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니!”
“대단하다, 그 여자애! 아까 얼굴이나 좀 잘 봐 둘걸.”
“왜 그랬대?”
“그러니까, 걔가 원래 하바나에 야채 배달 하는 애인데, 이도형이랑 접촉 사고가…….”
소식을 물어다 준 녀석은 자신이 목격하기라도 했듯 승냥이의 무용담을 풀었다. 승냥이 계집애는 조금 과장된 채 못돼 먹은 이도형을 엄벌한 여전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