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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날
1화
■ 정경’s story
프롤로그
버릇처럼 햇볕 아래 편편한 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시골집에 내려오면 으레 산책을 나오는 장소이다. 멀리 아래쪽에선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나오는 것인데 아이들은 이미 물놀이에 한창이었다. 하긴 뜨거운 한낮보다 아이들에겐 지금이 가장 재미있을 시간이겠다. 정경의 얼굴에 미소가 편안한 스민다.
예전엔 고향이란 것에 대한 의미를 몰랐다. 그냥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자란 곳이란 것 외엔 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곤 한다. 아무 때나 찾아와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른해지는 장소. 한숨 쉴 일이 떠오르지 않는 그런 곳.
정경이 눈을 감았다.
뜨거운 햇볕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아득해졌다.
평생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언니, 우리 내일이 회식이래.
“회식?”
―응. 오늘은 정시 퇴근, 내일만 좀 늦고 계속 정시 퇴근 할 거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조심해서 갔다 와.
동생 무경의 전화에 정경이 웃었다. 먼저 시골집에 내려가려는 자신의 걱정을 이미 아는 듯 무경은 미리 퇴근시간까지 알려주었다.
―언니는 그럼 언제 집에 내려가?
“미영이만 만나고 바로 가려고.”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아쉬움 가득한 무경의 말에 정경이 피식 웃었다.
“주말에 올 거잖아. 토요일 밤에 올 거지?”
―응.
정경은 미리 내려가 주말에 내려올 무경과 월요일에 함께 올라올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내려가는 거라 좀 오래 머물다 올 생각이었다.
―언니, 조심해서 내려가고. 미영 언니한테도 안부 전해 줘.
“어.”
―네. 갑니다. 언니, 이따가 전화할게.
무경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미소를 지은 정경이 가방에서 가져온 책을 꺼냈다. 아직 미영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소나기가 오려나. 하늘이 잔뜩 흐려지고 있었다. 흐린 건 싫은데……. 정경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많이 기다렸지.”
창밖을 바라보던 정경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미영은 머리를 노랗게 탈색을 하고 펌을 했는지 세련된 느낌과 함께 강한 인상을 풍겼다.
“예쁘다.”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미영이 피식 웃었다.
“아직 미용실 약 냄새 남아 있지? 열 받아서 변화 좀 줬어. 누구라도 걸리기만 해봐. 오늘 다들 죽는 날이니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비장한 표정의 그녀를 보고 정경이 픽 웃었다.
“그냥. 주위가 좀 그래.”
미영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돌린 채 다시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티 주세요. 얼음 가득 넣어서.”
씩씩하게 주문을 한 미영의 정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편해 보인다.”
“어.”
정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 미영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일 시작해야지.”
“어?”
일 이야기에 정경의 웃음이 지워졌다.
“1년 쉬었으면 됐어. 이제 먹고 살 준비를 해야지. 유산이 많아 평생 놀고 놀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돈 많은 남친이 있는 것도 아니면 이제 시작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감 떨어지는 거 순간이다.”
“…….”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네가 죄 졌냐? 그 연놈들이…….”
미영이 흥분을 가라앉히듯 말을 멈추고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경은 그녀가 들고 온 일거리를 가득 안은 노트북에 시선이 머물렀다.
정경은 드라마 작가다. 꾸준히 시청률이 꽤 잘 나온 드라마를 썼던, 이쪽에서는 나름 알아준다는 작가였다, 1년 전까지.
“……좀 더 있다가.”
“나정경!”
미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경은 무표정했다.
“…….”
“한정석 알지? ‘이별스타일’ 만든. 우리 학교 선배야. 이번에 케이블에서 반응이 괜찮아서 이쪽으로 올 모양이야. 너 뭐하고 지내는지 묻더라.”
“……아.”
‘이별 스타일’ TV에서 본 적이 있다.
“네 연락처 줬어. 며칠 내로 연락할 거야.”
“미영아.”
정경이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몰라. 거절을 하든, 일을 다시 시작하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나는 네 연락처 묻는 작가랑 PD들한테 무조건 네 연락처 뿌릴 거니까.”
각오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미영을 보며 정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미영의 마음을 안다. 자신 역시 이제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저축해 둔 돈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도, 돈을 떠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개인적인 감정 이런 것을 이유로 그렇게 원했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것인지도…….
머릿속은 다 알고 있는데, 막상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겁이 나기 시작한다.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펜을 들려면,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리면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서재에서, 누군가가 만들어준 자리에서 그것을 하기가 그녀에겐 아직 힘든 일이었다.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미영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술 한잔할래?”
미영의 뜬금없는 물음에 정경이 고개를 저었다.
“1시도 안됐어. 밥 먹어야지. 너 아침도 안 먹었다면서?”
정경이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시간이 뭐가 중요해.”
“왜 그래?”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루 이틀 봐온 친구가 아니었기에 정경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
“책 냈더라.”
미영이 정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
“그년 말이야. 오전에 강은이랑 미용실 갔다가 기다리는 중에 보라고 하나 던져 주기에 봤더니……. 어쩌면 그렇게 가식적인지, 혼자 세상 모든 아픔 다 겪은 여자처럼……. 휴우. 내가 앞머리만 다듬으러 갔다가 그냥 확 탈색해 버렸어.”
말하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미영은 얼음이 가득 든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마셔 버리고는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담담하게 웃었지만 입 안이 쓰다. 노랗게 탈색된 그녀의 머리에 정경의 시선이 머물렀다.
“머리 예뻐.”
정경의 말에 미영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아무튼, 그년은 책 내고, 방송 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승승장구하는데 너만 왜 이러고 있어. 내가 요즘 답답해서 잠이 안 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인간말종도 그런 인간말종들이 없다.”
“곧 결혼식이면서 머리 색깔 괜찮겠어?”
대답을 피한 채 딴소리를 하며 정경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내 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사람들은 다들 다섯 살 어린 연하 남편하고 내 주름살 비교하고, 얼마나 어린 남자인지만 확인할 텐데, 뭐.”
정경이 웃었다.
미영은 곧 결혼을 한다. 절대로 결혼은 하지 않겠다며 독신주의를 선언했던 그녀가 다섯 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집안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얼마 후 그렇게 바라던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 준비는 잘돼?”
“준비는 무슨, 나 살던 집으로 몸만 오는 남자인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미영의 남자친구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얼마 전 취직을 했다며 결혼식 전에 직업이라도 생겨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래도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완벽하게 시작했던 자신보다 미영이 훨씬 행복해 보인다.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미영이 눈을 흘겼다.
“하나도 안 좋아. 명색이 신혼집인데 새 것이라고는 침대 하나밖에 없어. 만나던 남자라 남자도 헌거지, 뭐.”
말하고도 웃긴지 미영이 정경과 마주 보며 웃었다.
“어쨌든 말 돌리지 말고 일 시작해.”
정경이 대답을 피한 채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둔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겼던 정경이 눈을 떴다. 어제와 다르게 맑은 하늘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모!”
조카 준희의 우렁찬 목소리에 정경이 웃으며 일어섰다.
* * *
―얼른 올라와.
뜬금없는 미영의 전화에 정경이 잠시 미간을 모았다.
일 이야기는 그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어?”
―한 선배가 좀 보재.
“……나 아직 시골집이야.”
정경의 시선이 벽에 걸린 한의원 로고가 박힌 달력에 머물렀다.
―알아. 무경이가 그러더라, 너 아직 안 올라왔다고.
그러나 미영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전화를 끊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언제 올 거야?
“…….”
―내일 오전에 보기로 했으니까 새벽에 올라오면 되겠다.
“미영아.”
정경이 담담히 그녀를 불렀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미영도 알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 시작해. 너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다시 주저앉을 거야.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그런 줄 알고 한 선배한테 연락한다.
미영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부엌에서 허리를 필 사이도 없이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녀에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엄마에게, 언니들에게 자신이 이혼녀가 되었다는 것을, 짧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미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아무 일 없는 듯 감출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무거운 마음을 지우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경아, 밥 먹자.”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정경이 방에서 나와 거실에 앉았다. 엄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엄마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내 새끼 먹이는 것은 하나도 안 힘들다.”
두부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 급히 밭에서 따온 호박잎과 상추,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까지, 모두 정경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다경이도 금방 온다 했으니까, 너는 먼저 먹어. 식으면 맛없다.”
다경은 옆집에 살고 있는 셋째 언니다. 몇 년 전 귀농한 다경은 모친의 옆집에 터를 잡고 과수원을 시작했다. 엄마는 호박잎쌈을 정경의 밥 위에 쉴 새 없이 놓아주었다.
“엄마도 드세요.”
모친이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먼저 차려 드리고 먹어야지. 아침도 안 먹었는데 얼른 먹어. 그리고 난 새참 먹었다. 아침나절에 봉수아재네로 일 갔는데 빵이랑 우유를 주더라. 낮에는 뜨거워서 일을 못하니까 아침에 얼른 일 끝냈어.”
몇 년 전 자매들이 돈을 모아 시골에 새 집을 지어드렸는데도, 할머니는 예전 집이 편하다며 여전히 그 집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언니들의 ‘용돈을 많이 드리겠다’는 애교와 ‘우리 엄마 고생 좀 그만 시켜라’라는 잔소리에도 할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겨울이면 외풍도 심한 그 집에서 고집스럽게 생활하는 할머니 때문에 자매들은 엄마 일만 더 만든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속상해하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괜찮다며 딸들을 달래고는,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두부 먹어 봐. 너 온다고 해서 어제 만들었다.”
엄마는 땀에 젖어 있으면서도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말을 꺼내야 하는데…….
내 맘 편하려면 그 말을 꺼내야 하는데……. 엄마의 거친 손을, 짧게 잘린 손톱을, 그리고 주름진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엄마.”
생선을 발라주던 엄마의 손길이 멈칫했다.
“…….”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정경을 보며 모친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냐?”
“……엄마, 내일 새벽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친의 표정에 서운함이 가득하다.
“왜? 며칠 있다 간다면서?”
“……일 다시 시작할 것 같아.”
굳었던 엄마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엄마가 보는 것은 새벽 농사일을 마치고 와서 보는 아침드라마 정도였다. 8시면 잠이 들던 엄마가 저녁을 먹고도 졸린 눈을 참아가며 정경의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다.
엄마에게는 분명 재미있지 않을 사랑 이야기도 집중해서 보고, 드라마 주인공이 자기 딸인 것마냥 마음 아파하고, 속상해하기도 했다. 말이 많지 않은 엄마가 정경의 드라마 이야기만 나오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며 언니들도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느 날 거실엔 커다란 TV가 놓였다. 본방송도 보고, 재방송도 보고, 누군가에게 컴퓨터로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버지와 전주까지 나가 노트북까지 사 와서 방송을 보시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에게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정경의 말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선 서운함이 사라지고, 뭔가 바쁜 표정이었다.
“그럼 밥 먹어라. 나 할머니 밥 차려 드리고 오께. 어쩐지 일 때문에 신경 써서 그런가, 얼굴이 말이 아니다 했어. 김 서방 오기 전에 보약 좀 해 먹일라 했더니만. 우선 서울 가서 먹을 것 만들어야겠다.”
정경이 고개를 숙인 채 붉어진 눈을 감추려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었다.
“정경아!”
그리고 엄마가 주방으로 가는 찰라 그때 다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더워라. 전기세 걱정 말고 에어컨 트시라니까.”
밉지 않게 잔소리를 한 다경이 에어컨을 틀고는 상 앞에 앉았다.
“엄마, 나도 밥.”
다경의 목소리에 모친은 밥을 한가득 퍼서 상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반찬통을 들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다경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내가 가서 차려 드린다고 해도 저렇게 고집을 피우시네. 할머니가 우리가 만날 잔소리하니까 불편해하신다고 본인이 직접 가셔야 한대. 진짜 미운 정인가 봐.”
예전 일이 떠오른 듯 다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다경이 동생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정경이 웃으며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은데. ……일 시작하려고 해서 그러나.”
결국 할 수 있는 건 일 핑계밖에 없었다.
“어? 일? 드라마 시작하는 거야?”
다경의 반색하는 목소리에 정경이 피식 웃었다.
“아직 몰라. 내일 만나봐야 해.”
“잘됐다, 잘됐어. 너 결혼하고 나서 드라마 한 편만 하고, 계속 쉬어서 진짜 속으로 서운했는데. 이런 소리 들으려고 했나 보다. 며칠 전에 뜬금없이 건이랑, 명이도 이모 드라마 언제 하냐고 물어보던데.”
정경이 웃었다.
“김 서방도 연수 간 지 1년이면 곧 돌아올 텐데. 김 서방 오고 나면, 너 바로 바빠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애기도 가져야 할 텐데. 참, 김 서방은 건강하대지?”
“……어.”
다경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김 서방은 아기 싫어해?”
다경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무거운 정경의 표정이 아마도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아이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 결혼 후에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한 것에 대해 언니들과 상의했었다. 그때, 언니들은 남자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며 결혼하면 달라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정경을 도닥였었다.
“……어? 어.”
정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 년이나 가족이랑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는 게 있었을 거야. 연수에서 돌아오면 달라질지도 모르지. 김 서방 오면 천천히 의논해 봐.”
위로하는 다경의 말에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무경이한테 전해 줘. 저기 윗동네에 장수댁 아줌마 조카가 전주서 농협 다닌대. 선 한번 보자고 하니까. 지난번에 봤는데 얼굴 잘생겼더라.”
형부 얼굴 보고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외모를 가장 많이 따지는 다경의 말에 정경이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 올라갈 거야?”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럼 며칠 있다가 언니들이랑 엄마 모시고 한 번 올라갈게. 네가 가져가는 반찬이랑 김치도 한계가 있으니까 우리가 좀 넉넉히 가져가야겠어.”
“응.”
결국 그녀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1 뜨거운 햇볕 아래 혼자
오랜만에 온 방송국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기에 정경은 담담했다.
“잠깐 기다려. 망할 전체 회의가 안 끝난다.”
회의 도중 잠깐 나온 미영은 회의가 맘에 안 들었는지 거친 한숨을 내쉬며 조금만 기다리라며 급하게 들어갔다. 정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PD와 선배작가의 커피와 잔심부름, 거기다 연예인 매니저의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며 더럽고 치사하다고 이를 갈던 미영은 이제 후배작가를 거느린 어엿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 혹시나 회의시간에 자신의 의견을 물을까 조마조마 하던, ‘네 의견은 어때?’ 물음에 어물거리며 말도 꺼내지 못했던 그녀는 아마도 지금 전체 회의를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전문대를 졸업하기 전부터 시작한 작가 일만 이제 10년차인 그녀에겐 프로의 노련함과 일에 대한 지루한 허무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당당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경의 얼굴에 미소가 스몄다.
의자에 앉아 미영을 기다리던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답답한 방송국보다는 근처 공원에서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공원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연락해.]
[그래. 미안.]
미영의 답장을 확인한 정경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오후였다. 더운 날씨에 거리는 한가했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을 찾아 벤치에 앉으니, 불쑥 예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에서 씁쓸함이 보였다.
그날.
그날도 정경은 뜨거운 햇볕 아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미영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미영과 점심을 먹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반지하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조금 뜨겁긴 해도 내리쬐는 햇볕을 떠나기 싫다.
예전부터 작은 작업실이 하나 있었으면 했었다. 아무래도 집에선 긴장감이 덜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학교 선배가 결혼을 하며 집 안에 작업실을 꾸미게 되어 자신이 쓰던 작업실이 비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을 정경에게 쓸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겨우 초보를 면한, 이제 단막극에서 벗어나 첫 미니를 들어가는 그녀에겐 부러우면서도 부담스러운 조건이었다.
반지하라는 것만 빼면 위치도 좋고, 선배의 작품이나 그녀의 성격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또 그곳에서 줄줄이 좋은 작품만 나왔다는 선배의 말에 솔깃하기도 했다.
그것에 대해 집에 놀러온 미영과 상의한 적이 있다. 아마 그것을 무경이 들었나 보다. 며칠 후 동생은 미영에게 물어 작업실을 혼자 계약을 해버렸다. 어린아인 줄만 알았는데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언니에 대한 투자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았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한 그녀에게 한없이 베풀어주는 동생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운 때문인지 그곳에서 쓴 첫 미니시리즈가 괜찮은 시청률을 내고 제법 인기를 얻자 빛을 좋아하던 정경도 계속 그 작업실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빛이 그립긴 하다. 정경이 햇볕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니 한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놀이터를 목표로 삼은 것인지 그곳만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이 익숙지 않은 듯 아슬아슬하게 걷는 작은 아이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아이의 아빠가 멀리 있는 것 같긴 한데…….
결국, 아이가 모래밭에서 넘어질 것 같은 순간 정경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넘어지기 직전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번쩍 안았다. 정경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무심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아이 좋아해요?”
공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경 옆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맛있는 점심을 먹자며 미영이 데려간 방송국 앞 식당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미영의 프로 김재우 PD.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선한 인상의 그가 정경을 향해 웃고 있었다.
자신의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며 환하게 웃는 그와 조금은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식당을 나오면서 미영이 시원한 커피를 사오겠다며 나설 때, 그 역시 같이 일어나기에 간 줄 알았는데.
“……별로 안 좋아해요.”
“…….”
재우는 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무심하게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말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그의 표정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이 딸만 다섯이거든요. 내가 넷째. 그런데 막냇동생 낳을 때 할머니가 매일 절에 다니시면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셨대요. 할머니는 엄마가 막내를 임신하셨을 때 아들이라고 장담하셨나 봐요. 그렇게 기대하셨는데. 결국 딸이었어요. 나도 어려서 잘 기억 안 나는데 큰언니 말로는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그렇게 초상집 같은 분위긴 처음이었다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게 시선을 집중하던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이의 아빠가 아이의 손을 잡자 정경의 표정도 다시 무덤덤해졌다.
“그런데 그즈음 고모가 연년생으로 아이를 가지셨는데 아들 쌍둥이였어요. 고모가 연년생 아들만 둘이었는데, 막내는 또 쌍둥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해요. 그런데 할머니가 그 쌍둥이를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요. 엄마는 우리 막냇동생 돌볼 시간에 그 쌍둥이들 돌보느라 우리 막냇동생은 젖도 부엌에서 몰래 주고 했대요.”
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긴 아닌데…….
“아무튼 그때부터 아이를 싫어했던 것 같아요. 사촌 남동생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좀 미웠다고 해야 하나. 엄마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 애들이, 정작 돌봐야 할 막내는 언니들 품에 있어야 하니까 어린 마음에도 심술이 났나 봐요, 그때부터인가 봐. 아기가 싫다기보다 조금 겁이 나요.”
그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고 나니 스스로도 이상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
처음보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아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기분 좋은 햇볕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고민하던 표정의 무언가 결심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정경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정경이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
1화
■ 정경’s story
프롤로그
버릇처럼 햇볕 아래 편편한 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시골집에 내려오면 으레 산책을 나오는 장소이다. 멀리 아래쪽에선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나오는 것인데 아이들은 이미 물놀이에 한창이었다. 하긴 뜨거운 한낮보다 아이들에겐 지금이 가장 재미있을 시간이겠다. 정경의 얼굴에 미소가 편안한 스민다.
예전엔 고향이란 것에 대한 의미를 몰랐다. 그냥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자란 곳이란 것 외엔 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곤 한다. 아무 때나 찾아와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른해지는 장소. 한숨 쉴 일이 떠오르지 않는 그런 곳.
정경이 눈을 감았다.
뜨거운 햇볕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아득해졌다.
평생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언니, 우리 내일이 회식이래.
“회식?”
―응. 오늘은 정시 퇴근, 내일만 좀 늦고 계속 정시 퇴근 할 거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조심해서 갔다 와.
동생 무경의 전화에 정경이 웃었다. 먼저 시골집에 내려가려는 자신의 걱정을 이미 아는 듯 무경은 미리 퇴근시간까지 알려주었다.
―언니는 그럼 언제 집에 내려가?
“미영이만 만나고 바로 가려고.”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아쉬움 가득한 무경의 말에 정경이 피식 웃었다.
“주말에 올 거잖아. 토요일 밤에 올 거지?”
―응.
정경은 미리 내려가 주말에 내려올 무경과 월요일에 함께 올라올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내려가는 거라 좀 오래 머물다 올 생각이었다.
―언니, 조심해서 내려가고. 미영 언니한테도 안부 전해 줘.
“어.”
―네. 갑니다. 언니, 이따가 전화할게.
무경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미소를 지은 정경이 가방에서 가져온 책을 꺼냈다. 아직 미영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소나기가 오려나. 하늘이 잔뜩 흐려지고 있었다. 흐린 건 싫은데……. 정경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많이 기다렸지.”
창밖을 바라보던 정경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미영은 머리를 노랗게 탈색을 하고 펌을 했는지 세련된 느낌과 함께 강한 인상을 풍겼다.
“예쁘다.”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미영이 피식 웃었다.
“아직 미용실 약 냄새 남아 있지? 열 받아서 변화 좀 줬어. 누구라도 걸리기만 해봐. 오늘 다들 죽는 날이니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비장한 표정의 그녀를 보고 정경이 픽 웃었다.
“그냥. 주위가 좀 그래.”
미영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돌린 채 다시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티 주세요. 얼음 가득 넣어서.”
씩씩하게 주문을 한 미영의 정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편해 보인다.”
“어.”
정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 미영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일 시작해야지.”
“어?”
일 이야기에 정경의 웃음이 지워졌다.
“1년 쉬었으면 됐어. 이제 먹고 살 준비를 해야지. 유산이 많아 평생 놀고 놀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돈 많은 남친이 있는 것도 아니면 이제 시작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감 떨어지는 거 순간이다.”
“…….”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네가 죄 졌냐? 그 연놈들이…….”
미영이 흥분을 가라앉히듯 말을 멈추고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경은 그녀가 들고 온 일거리를 가득 안은 노트북에 시선이 머물렀다.
정경은 드라마 작가다. 꾸준히 시청률이 꽤 잘 나온 드라마를 썼던, 이쪽에서는 나름 알아준다는 작가였다, 1년 전까지.
“……좀 더 있다가.”
“나정경!”
미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경은 무표정했다.
“…….”
“한정석 알지? ‘이별스타일’ 만든. 우리 학교 선배야. 이번에 케이블에서 반응이 괜찮아서 이쪽으로 올 모양이야. 너 뭐하고 지내는지 묻더라.”
“……아.”
‘이별 스타일’ TV에서 본 적이 있다.
“네 연락처 줬어. 며칠 내로 연락할 거야.”
“미영아.”
정경이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몰라. 거절을 하든, 일을 다시 시작하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나는 네 연락처 묻는 작가랑 PD들한테 무조건 네 연락처 뿌릴 거니까.”
각오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미영을 보며 정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미영의 마음을 안다. 자신 역시 이제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저축해 둔 돈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도, 돈을 떠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개인적인 감정 이런 것을 이유로 그렇게 원했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것인지도…….
머릿속은 다 알고 있는데, 막상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겁이 나기 시작한다.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펜을 들려면,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리면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서재에서, 누군가가 만들어준 자리에서 그것을 하기가 그녀에겐 아직 힘든 일이었다.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미영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술 한잔할래?”
미영의 뜬금없는 물음에 정경이 고개를 저었다.
“1시도 안됐어. 밥 먹어야지. 너 아침도 안 먹었다면서?”
정경이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시간이 뭐가 중요해.”
“왜 그래?”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루 이틀 봐온 친구가 아니었기에 정경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
“책 냈더라.”
미영이 정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
“그년 말이야. 오전에 강은이랑 미용실 갔다가 기다리는 중에 보라고 하나 던져 주기에 봤더니……. 어쩌면 그렇게 가식적인지, 혼자 세상 모든 아픔 다 겪은 여자처럼……. 휴우. 내가 앞머리만 다듬으러 갔다가 그냥 확 탈색해 버렸어.”
말하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미영은 얼음이 가득 든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마셔 버리고는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담담하게 웃었지만 입 안이 쓰다. 노랗게 탈색된 그녀의 머리에 정경의 시선이 머물렀다.
“머리 예뻐.”
정경의 말에 미영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아무튼, 그년은 책 내고, 방송 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승승장구하는데 너만 왜 이러고 있어. 내가 요즘 답답해서 잠이 안 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인간말종도 그런 인간말종들이 없다.”
“곧 결혼식이면서 머리 색깔 괜찮겠어?”
대답을 피한 채 딴소리를 하며 정경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내 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사람들은 다들 다섯 살 어린 연하 남편하고 내 주름살 비교하고, 얼마나 어린 남자인지만 확인할 텐데, 뭐.”
정경이 웃었다.
미영은 곧 결혼을 한다. 절대로 결혼은 하지 않겠다며 독신주의를 선언했던 그녀가 다섯 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집안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얼마 후 그렇게 바라던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 준비는 잘돼?”
“준비는 무슨, 나 살던 집으로 몸만 오는 남자인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미영의 남자친구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얼마 전 취직을 했다며 결혼식 전에 직업이라도 생겨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래도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완벽하게 시작했던 자신보다 미영이 훨씬 행복해 보인다.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미영이 눈을 흘겼다.
“하나도 안 좋아. 명색이 신혼집인데 새 것이라고는 침대 하나밖에 없어. 만나던 남자라 남자도 헌거지, 뭐.”
말하고도 웃긴지 미영이 정경과 마주 보며 웃었다.
“어쨌든 말 돌리지 말고 일 시작해.”
정경이 대답을 피한 채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둔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겼던 정경이 눈을 떴다. 어제와 다르게 맑은 하늘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모!”
조카 준희의 우렁찬 목소리에 정경이 웃으며 일어섰다.
* * *
―얼른 올라와.
뜬금없는 미영의 전화에 정경이 잠시 미간을 모았다.
일 이야기는 그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어?”
―한 선배가 좀 보재.
“……나 아직 시골집이야.”
정경의 시선이 벽에 걸린 한의원 로고가 박힌 달력에 머물렀다.
―알아. 무경이가 그러더라, 너 아직 안 올라왔다고.
그러나 미영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전화를 끊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언제 올 거야?
“…….”
―내일 오전에 보기로 했으니까 새벽에 올라오면 되겠다.
“미영아.”
정경이 담담히 그녀를 불렀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미영도 알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 시작해. 너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다시 주저앉을 거야.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그런 줄 알고 한 선배한테 연락한다.
미영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부엌에서 허리를 필 사이도 없이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녀에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엄마에게, 언니들에게 자신이 이혼녀가 되었다는 것을, 짧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미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아무 일 없는 듯 감출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무거운 마음을 지우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경아, 밥 먹자.”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정경이 방에서 나와 거실에 앉았다. 엄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엄마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내 새끼 먹이는 것은 하나도 안 힘들다.”
두부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 급히 밭에서 따온 호박잎과 상추,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까지, 모두 정경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다경이도 금방 온다 했으니까, 너는 먼저 먹어. 식으면 맛없다.”
다경은 옆집에 살고 있는 셋째 언니다. 몇 년 전 귀농한 다경은 모친의 옆집에 터를 잡고 과수원을 시작했다. 엄마는 호박잎쌈을 정경의 밥 위에 쉴 새 없이 놓아주었다.
“엄마도 드세요.”
모친이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먼저 차려 드리고 먹어야지. 아침도 안 먹었는데 얼른 먹어. 그리고 난 새참 먹었다. 아침나절에 봉수아재네로 일 갔는데 빵이랑 우유를 주더라. 낮에는 뜨거워서 일을 못하니까 아침에 얼른 일 끝냈어.”
몇 년 전 자매들이 돈을 모아 시골에 새 집을 지어드렸는데도, 할머니는 예전 집이 편하다며 여전히 그 집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언니들의 ‘용돈을 많이 드리겠다’는 애교와 ‘우리 엄마 고생 좀 그만 시켜라’라는 잔소리에도 할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겨울이면 외풍도 심한 그 집에서 고집스럽게 생활하는 할머니 때문에 자매들은 엄마 일만 더 만든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속상해하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괜찮다며 딸들을 달래고는,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두부 먹어 봐. 너 온다고 해서 어제 만들었다.”
엄마는 땀에 젖어 있으면서도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말을 꺼내야 하는데…….
내 맘 편하려면 그 말을 꺼내야 하는데……. 엄마의 거친 손을, 짧게 잘린 손톱을, 그리고 주름진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엄마.”
생선을 발라주던 엄마의 손길이 멈칫했다.
“…….”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정경을 보며 모친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냐?”
“……엄마, 내일 새벽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친의 표정에 서운함이 가득하다.
“왜? 며칠 있다 간다면서?”
“……일 다시 시작할 것 같아.”
굳었던 엄마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엄마가 보는 것은 새벽 농사일을 마치고 와서 보는 아침드라마 정도였다. 8시면 잠이 들던 엄마가 저녁을 먹고도 졸린 눈을 참아가며 정경의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다.
엄마에게는 분명 재미있지 않을 사랑 이야기도 집중해서 보고, 드라마 주인공이 자기 딸인 것마냥 마음 아파하고, 속상해하기도 했다. 말이 많지 않은 엄마가 정경의 드라마 이야기만 나오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며 언니들도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느 날 거실엔 커다란 TV가 놓였다. 본방송도 보고, 재방송도 보고, 누군가에게 컴퓨터로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버지와 전주까지 나가 노트북까지 사 와서 방송을 보시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에게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정경의 말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선 서운함이 사라지고, 뭔가 바쁜 표정이었다.
“그럼 밥 먹어라. 나 할머니 밥 차려 드리고 오께. 어쩐지 일 때문에 신경 써서 그런가, 얼굴이 말이 아니다 했어. 김 서방 오기 전에 보약 좀 해 먹일라 했더니만. 우선 서울 가서 먹을 것 만들어야겠다.”
정경이 고개를 숙인 채 붉어진 눈을 감추려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었다.
“정경아!”
그리고 엄마가 주방으로 가는 찰라 그때 다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더워라. 전기세 걱정 말고 에어컨 트시라니까.”
밉지 않게 잔소리를 한 다경이 에어컨을 틀고는 상 앞에 앉았다.
“엄마, 나도 밥.”
다경의 목소리에 모친은 밥을 한가득 퍼서 상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반찬통을 들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다경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내가 가서 차려 드린다고 해도 저렇게 고집을 피우시네. 할머니가 우리가 만날 잔소리하니까 불편해하신다고 본인이 직접 가셔야 한대. 진짜 미운 정인가 봐.”
예전 일이 떠오른 듯 다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다경이 동생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정경이 웃으며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은데. ……일 시작하려고 해서 그러나.”
결국 할 수 있는 건 일 핑계밖에 없었다.
“어? 일? 드라마 시작하는 거야?”
다경의 반색하는 목소리에 정경이 피식 웃었다.
“아직 몰라. 내일 만나봐야 해.”
“잘됐다, 잘됐어. 너 결혼하고 나서 드라마 한 편만 하고, 계속 쉬어서 진짜 속으로 서운했는데. 이런 소리 들으려고 했나 보다. 며칠 전에 뜬금없이 건이랑, 명이도 이모 드라마 언제 하냐고 물어보던데.”
정경이 웃었다.
“김 서방도 연수 간 지 1년이면 곧 돌아올 텐데. 김 서방 오고 나면, 너 바로 바빠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애기도 가져야 할 텐데. 참, 김 서방은 건강하대지?”
“……어.”
다경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김 서방은 아기 싫어해?”
다경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무거운 정경의 표정이 아마도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아이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 결혼 후에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한 것에 대해 언니들과 상의했었다. 그때, 언니들은 남자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며 결혼하면 달라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정경을 도닥였었다.
“……어? 어.”
정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 년이나 가족이랑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는 게 있었을 거야. 연수에서 돌아오면 달라질지도 모르지. 김 서방 오면 천천히 의논해 봐.”
위로하는 다경의 말에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무경이한테 전해 줘. 저기 윗동네에 장수댁 아줌마 조카가 전주서 농협 다닌대. 선 한번 보자고 하니까. 지난번에 봤는데 얼굴 잘생겼더라.”
형부 얼굴 보고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외모를 가장 많이 따지는 다경의 말에 정경이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 올라갈 거야?”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럼 며칠 있다가 언니들이랑 엄마 모시고 한 번 올라갈게. 네가 가져가는 반찬이랑 김치도 한계가 있으니까 우리가 좀 넉넉히 가져가야겠어.”
“응.”
결국 그녀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1 뜨거운 햇볕 아래 혼자
오랜만에 온 방송국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기에 정경은 담담했다.
“잠깐 기다려. 망할 전체 회의가 안 끝난다.”
회의 도중 잠깐 나온 미영은 회의가 맘에 안 들었는지 거친 한숨을 내쉬며 조금만 기다리라며 급하게 들어갔다. 정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PD와 선배작가의 커피와 잔심부름, 거기다 연예인 매니저의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며 더럽고 치사하다고 이를 갈던 미영은 이제 후배작가를 거느린 어엿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 혹시나 회의시간에 자신의 의견을 물을까 조마조마 하던, ‘네 의견은 어때?’ 물음에 어물거리며 말도 꺼내지 못했던 그녀는 아마도 지금 전체 회의를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전문대를 졸업하기 전부터 시작한 작가 일만 이제 10년차인 그녀에겐 프로의 노련함과 일에 대한 지루한 허무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당당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경의 얼굴에 미소가 스몄다.
의자에 앉아 미영을 기다리던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답답한 방송국보다는 근처 공원에서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공원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연락해.]
[그래. 미안.]
미영의 답장을 확인한 정경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오후였다. 더운 날씨에 거리는 한가했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을 찾아 벤치에 앉으니, 불쑥 예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에서 씁쓸함이 보였다.
그날.
그날도 정경은 뜨거운 햇볕 아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미영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미영과 점심을 먹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반지하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조금 뜨겁긴 해도 내리쬐는 햇볕을 떠나기 싫다.
예전부터 작은 작업실이 하나 있었으면 했었다. 아무래도 집에선 긴장감이 덜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학교 선배가 결혼을 하며 집 안에 작업실을 꾸미게 되어 자신이 쓰던 작업실이 비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을 정경에게 쓸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겨우 초보를 면한, 이제 단막극에서 벗어나 첫 미니를 들어가는 그녀에겐 부러우면서도 부담스러운 조건이었다.
반지하라는 것만 빼면 위치도 좋고, 선배의 작품이나 그녀의 성격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또 그곳에서 줄줄이 좋은 작품만 나왔다는 선배의 말에 솔깃하기도 했다.
그것에 대해 집에 놀러온 미영과 상의한 적이 있다. 아마 그것을 무경이 들었나 보다. 며칠 후 동생은 미영에게 물어 작업실을 혼자 계약을 해버렸다. 어린아인 줄만 알았는데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언니에 대한 투자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았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한 그녀에게 한없이 베풀어주는 동생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운 때문인지 그곳에서 쓴 첫 미니시리즈가 괜찮은 시청률을 내고 제법 인기를 얻자 빛을 좋아하던 정경도 계속 그 작업실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빛이 그립긴 하다. 정경이 햇볕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니 한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놀이터를 목표로 삼은 것인지 그곳만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이 익숙지 않은 듯 아슬아슬하게 걷는 작은 아이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아이의 아빠가 멀리 있는 것 같긴 한데…….
결국, 아이가 모래밭에서 넘어질 것 같은 순간 정경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넘어지기 직전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번쩍 안았다. 정경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무심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아이 좋아해요?”
공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경 옆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맛있는 점심을 먹자며 미영이 데려간 방송국 앞 식당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미영의 프로 김재우 PD.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선한 인상의 그가 정경을 향해 웃고 있었다.
자신의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며 환하게 웃는 그와 조금은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식당을 나오면서 미영이 시원한 커피를 사오겠다며 나설 때, 그 역시 같이 일어나기에 간 줄 알았는데.
“……별로 안 좋아해요.”
“…….”
재우는 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무심하게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말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그의 표정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이 딸만 다섯이거든요. 내가 넷째. 그런데 막냇동생 낳을 때 할머니가 매일 절에 다니시면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셨대요. 할머니는 엄마가 막내를 임신하셨을 때 아들이라고 장담하셨나 봐요. 그렇게 기대하셨는데. 결국 딸이었어요. 나도 어려서 잘 기억 안 나는데 큰언니 말로는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그렇게 초상집 같은 분위긴 처음이었다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게 시선을 집중하던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이의 아빠가 아이의 손을 잡자 정경의 표정도 다시 무덤덤해졌다.
“그런데 그즈음 고모가 연년생으로 아이를 가지셨는데 아들 쌍둥이였어요. 고모가 연년생 아들만 둘이었는데, 막내는 또 쌍둥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해요. 그런데 할머니가 그 쌍둥이를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요. 엄마는 우리 막냇동생 돌볼 시간에 그 쌍둥이들 돌보느라 우리 막냇동생은 젖도 부엌에서 몰래 주고 했대요.”
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긴 아닌데…….
“아무튼 그때부터 아이를 싫어했던 것 같아요. 사촌 남동생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좀 미웠다고 해야 하나. 엄마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 애들이, 정작 돌봐야 할 막내는 언니들 품에 있어야 하니까 어린 마음에도 심술이 났나 봐요, 그때부터인가 봐. 아기가 싫다기보다 조금 겁이 나요.”
그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고 나니 스스로도 이상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
처음보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아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기분 좋은 햇볕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고민하던 표정의 무언가 결심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정경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정경이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