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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리고 6개월.
그와 결혼을 했다. 누구도 그녀가 그렇게 빨리, 그것도 김재우 PD와 결혼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비밀 연애 같은 걸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보통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그리고 조용한 성격상 연애 역시 조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를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영의 말대로 재우는 사내에서 꽤나 인기가 있던 남자였나 보다.
게다가 그는 의외로 부유한 집안의 남자였다. 혼자 지내던 넓은 평수의 빌라, 그리고 시부모님께서 그녀에게 결혼선물로 주신 외제차까지 자신은 절대 속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빛을 따라다닌다고 놀리던 그가 그녀에게 해가 가장 오랫동안 잘 드는 곳에 마련해 준 서재, 가슴이 두근거렸다. 행복했다.
“아이는 싫어.”
의외였다. 부드러운 남자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동네 아이들이나 자신의 조카들에게도 굉장히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어?”
“우리 아이는 갖지 말자.”
지독히도 밝은 빛을 좋아하는 자신과 다르게 조금의 어둑함을 좋아하는 그녀의 책상 옆 그늘진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켠 채 자신의 일을 하곤 했었다. 뉴스기사를 읽던 그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부모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
시부모님께서 아이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것인가.
이미 결혼 전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된 부분이기는 했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결혼하게 되면, 가족이 생기면, 다들 변할 거란 주위사람들의 말처럼 누군가 변하겠지 했었다.
조금씩 아이를 원하게 되는 자신이든,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그이든.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그때는 괜찮았다. 나머지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웃으며 놀리듯 요리에 관심 없는 여자라 더 좋았다던 그의 말이나, 아이보다 그녀에게 집중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까지. 아이가 없다 해도 어쩌면 이대로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the story’에서 글을 쓰며 집중하고 있으면, 퇴근한 그는 조용히 옆에 앉아 그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그녀가 좋아하던 ‘라르’에 예약하고,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라르’는 그녀가 좋아하는 파스타집이었다. 처음에는 미영과 나중에는 재우와 함께 가던 그곳. 피곤하거나 글이 풀리지 않을 때 그곳에서 정경은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시며 쉬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옆에서 그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보다 지금이, 지금보다 나중이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무언가에 큰 욕심 같은 건 없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저 사람이 내 것이 아닌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 같은 것도 있었다. 꼭 평생을 함께한 사람처럼 편안했고, 저절로 미소가 스몄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행복하던 자신과 다르게 그는 종종 불안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자상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도 그대로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리감이, 흔들리는 그가 느껴졌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늘었고, 일이 바빠졌다는 이유로 새벽에 들어와 옷만 갈아입고 나가곤 했다. 그래도 PD라는 직업상, 어느 정도 그들의 패턴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새롭게 들어가는 드라마로 인해 조금 더 바빠지고 있었으니까.
* * *
“나 김재우 씨랑 만나고 있어요.”
자신을 양희진이라고 당당히 소개했다. 백화점에서 만난 그 여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인기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일터에서든, 어디서든, 항상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그였기에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네가 어디까지 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예쁘네요. 방송국에서 일한다고만 하면 작가라고는 생각 못하겠어요.”
“…….”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찬찬히 그녀를 훑어보던 여자의 시선이 정경이 산 아이 옷이 든 쇼핑백에 머물렀다.
“아이를 가졌어요?”
아이에 대해 묻는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답하지 않는 그녀에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재우 씨랑 나 10년 전에 만났어요.”
그게 뭐라고. 의기양양한 여자의 표정에도 그녀는 담담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의 아내라는 위치 때문에 자신에게 오만함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양희진이란 여자가 더 독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보다 내가 먼저 만났어요, 재우 씨.”
“…….”
“자랑스럽죠? 그런 대단한 집안 아들이라는 거. 욕심났겠죠? 그런 남자.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아무리 고고한 척 해도 결국은…….”
희진의 시선이 아이 옷이 담긴 쇼핑백에 머물렀다.
“…….”
‘그래서’ 그런 표정으로 정경은 묻고 있었다. 유치하지만 어쨌든 결혼은 자신과 했으니 그녀와는 끝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감 같은 건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대할수록 이런 상황이 왜 벌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과 나는 누가 끼어들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이해 못하겠지만 우린 그래요.”
우리? 누가?
“재우 씨랑 난 결혼을 했어요.”
정경이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진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순간 공기가 변하듯 조금 전과 상황이 다르게 우위에 선 것은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시선을 돌리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녀를 기다리던 무경의 당황한 눈과 마주쳤다. 휴대폰을 든 채 무경이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정경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된다는 표정에 동생이 불만스럽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결혼이라는 형식, 그게 다 같아요?”
그녀에겐 자신과 재우의 결혼이 그저 형식이란 이야기인가.
“그 사람이 말 안 했어요?”
“……?”
“우리 사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일까. 현재진행형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의기양양해진 그녀를 보고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재우 씨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어요.”
“네?”
“아.이.가 있었어요, 우.리.”
그는 많이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온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등을 돌린 채 그의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정경 역시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려다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정리할 시간 같은 게 왜 필요할까 싶었다. 그에게 물어보면 그만인데. 아니란 이야기만 들으면 되는데.
“양희진이란 여자 만났어.”
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지쳐 버린 정경이 문가에 기대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
“…….”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어?”
그런 거 없다고 말해주기를 빌었다. 그녀가 미친 거라고. 그런 여자 따위 알지 못한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
왜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아? 왜 내 눈을 보지 않아?
정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여자랑 만나고 있었어? 그 여자 때문에 요즘 그렇게 술을 마셨던 거야? 지금까지 야근한다고 한 게 그 여자랑 외박하고 다닌 거였어? ……이제 나랑 이야기하기도 싫어? 왜 갑자기 재우 씨 서재에서 일을 하는데? ……왜 내 날 쳐다보지 않는데?”
지난 한달 동안 나눈 말보다 더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한 번도 싸우지 않아서. 결혼한 지 8개월이 다 되었지만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웃기만 해서 오해가 생긴 걸지도 몰라. 이렇게 큰소리라도 치며 싸우기라도 하면, 이 답답하고 알 수 없는 벽 같은 거 사라지겠지.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던 그의 눈빛은 이제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문득 비어버린 그의 손가락에, 반지 자국만 남아 있는 손가락으로 시선이 갔다.
툭.
뭔가 어긋나고 있었다.
“……아이가 있었어?”
“……어.”
정경이 벽을 잡았다.
“우리 아이가 싫다는 거, ……혹시 그 때문이야?”
“……그래.”
“…….”
“…….”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봐.”
사과하지 않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에게 정경이 먼저 말했다. 목이 콱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작가라면서 왜 그렇게 감정표현을 못하냐고 놀리던 그에게서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 여자랑 살고 싶다.”
다리에 힘이 풀린 정경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혼은 쉬웠다. 이럴 바엔 그렇게 서둘러 혼인신고를 할 필요도 없었는데…….
다음 달이면 결혼한 지 일 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들은 동생에게 잘하는 착한 제부가 마음에 드는지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며 용돈을 좀 부쳤다고 했다.
결혼기념일이라……. 정작 결혼기념일 선물로 바라던 것이 있었다.
아이…….
먼저 아이를 갖자고 말해주기를 빌었다. 그즈음 어딜 가든 눈에 보이는 것은 아이였고, 아이 옷이었다. 백화점에 갈 때마다 몇 번을 만지작거리던 분홍색 아기 옷을 결국 사버렸다.
그리고 그날 양희진, 그녀를 만났다.
어둠도 적막함도 싫어, 온 집안에 불을 켜놓고 스탠드까지 켜둔 채, TV와 오디오도 함께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경이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간 것이 다행이었다.
문득 서랍 속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예쁘게 포장된 아기 옷상자가 눈에 띄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가만히 아기 옷을 쓰다듬어 보았다.
모든 것이 후회된다.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날을. 사귀자던 그의 말에 웃어버린 자신을.
그리고 TV 화면에 그 여자가 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여자였다.
요리연구가 양희진이 TV에서 웃고 있었다.
삶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즐거웠던 어제와 다른 끔찍한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수도 없이 겪었을 텐데…….
이것이 처음인 것처럼, 마치 처음 당해본 사람처럼 자신이 너무 낯설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생각에 잠겼던 정경이 담담히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햇볕이 그녈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괜찮다.
#2 시작, 그리고 재회
일을 시작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내년 봄에 맞추어 기획에 들어갔고, 회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남 일에 무관심하고, 모든 일에 유난스럽지 않은 한정석 PD를 만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갑자기 바빠진 일상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은 미영의 결혼식이다. 들러리를 서달라는 그녀의 말에 정경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괜찮을까 망설였지만, ‘네가 안 오면 다시는 안 보겠다’고 엄포를 놓는 그녀에게 정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경이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조촐하게 치르겠다는 미영의 말처럼, 그녀의 집 근처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을 올린다고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차는 막히지 않았다. 결혼식장 안에는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의 가족들과 미영과 친하게 지내던 몇몇의 방송국 사람들이 보였다. 재우와 일을 했던, 정경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미영과 친하게 지내는 연예인들도 보였다. 그러나 방송국 사람들에겐 연예인보다 더 호기심 어린 눈빛의 대상이 되는 자신을 느끼며 정경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때 분위기를 풀듯 한정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한정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웃은 정경이 미영을 찾았다. 식장이 아니었기에 신부대기실이 따로 없어 미영은 레스토랑 한쪽에 드레스를 입은 채 앉아 가족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꼭 와. 김재우는 초대도 안 했어. 그리고 지가 사람이면 얼굴 들고 내 결혼식에 올 수 있겠어. 우리 서창이가 다른 건 몰라도, 단순해서 힘은 세잖아. 내가 그놈 얼굴 보이면 바로 주먹 날리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쁘게 입고 결혼식 참석할 생각이나 해.”
결혼준비를 하면서 미영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단호한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부러는 아니라도 재우와 정경의 첫 만남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영은 정경에게 내내 미안해했다. 그녀의 탓이 아니라고 해도 미영은 여전히 죄책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미영은 재우를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직장 동료와 가장 친한 친구가 만났다며 진심으로 기뻐하던 그녀였다. 아마 그만큼 그들의 결과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해 실망도 컸을 것이다. 생각을 지운 정경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영아, 너무 예쁘다. 축하해.”
노란 머리에 하얀 탑 드레스를 입은 미영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정경과 함께 고른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고마워, 예쁘단 이야긴 오늘 너한테 처음 듣는다. 결혼도 유난스럽게 하더니, 머리까지 유난 떤다고 엄마가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
옆에 계신 부모님이 들으실까 봐 미영이 작게 소곤거렸다.
“근데 좀 괜찮지? 내 남편. 정장 입으려면 살 좀 빼라고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고 하더니 저 옷이 며칠 새에 좀 작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귀엽다. 큭큭큭.”
정장 차림으로 입구에 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서창을 바라보는 미영의 눈은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정경이 웃었다.
‘옷이 작다’, ‘드레스가 답답하다’는 둥 입을 삐죽거리며 불평은 하고 있어도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잘하는 거지, 나?”
“어. 너무 잘하고 있어, 미영아. 아마 네가 한 선택 중 가장 잘한 선택일 거야. 서창 씨도 그렇고.”
식이 가까워질수록 절대 긴장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이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정경이 고개를 웃으며 끄덕였다.
결혼을 결심하고 미영은 말했다. 술을 잘 못하는 그녀가 다음날 숙취로 몸부림치며 변기를 붙잡고 있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술잔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도 안다고 했다. 이 결혼을 하게 되면 분명 어느 순간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은 죽고 못 사는 어린 남편을 분명 꼴도 보기 싫어 내쫓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내 집, 내 물건, 내 거 사이에서 네 짐만 골라 나가라고 소리칠 날이 분명 있을 거라고.
그래도 그 결혼하고 싶다고. 미영은 그렇게 웃었다.
결혼해서 이 남자랑 살아보고 싶다고. 지독한 독신주의자였던 그녀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 자유로움이 아닌, 결혼이라는 굴레로 들어가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 살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그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그저 미치도록 그가 좋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가 정경은 부러웠다. 사람들의 기준에선 많은 것이 부족해 보이지만 정경이 보기엔 가장 완벽한 결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영에겐 후회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정경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완벽해 보이는 결혼을 했다. 반짝거렸다. 연예인들 결혼식만 가봐서 눈만 높아진다고 미영과 불평을 했었는데, 그만큼 그녀의 결혼식은 화려하고 빛이 났다. 재우의 눈길은 언제나처럼 자신을 향해 있었다. 모두가 예민해진다는 결혼준비 기간에도 사소한 말다툼조차 하지 않아서, 그저 행복만 남아 있을 줄 알았다. 사랑을 잘 안다고,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분명 사랑일 거라고 어리석게도 그렇게 믿었었다. 그런 날도 있었는데…….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언니.”
미영의 결혼식에 꼭 참석하겠다는 무경이다. 조퇴를 하고 오겠다고 하더니 급하게 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미영 언니는?”
이미 부친의 손을 잡고 예쁘게 걷고 있는 미영의 모습에 정경도, 무경도 아련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항상 당당하던 미영도 오늘만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신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림 섞인 야유에도 미영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와, 미영 언니 너무 예쁘다. 꼭 외국사람 같아.”
진지한 무경의 말에 정경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미영에게서 떠난 누군가의 손에 들린 고운 부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웃음 가득한 행복한 결혼식이 끝났다.
이렇게 꾸미고 나왔는데 집에 그냥 들어가기 아쉽다는 무경의 말에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원래는 잘 사지 않는데 원피스를 사고, 청바지를 사고,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던 하얀색 샌들도 샀다.
그녀의 쇼핑에 정작 신이 난 것은 무경이었다. 아마 쇼핑도, 무엇도 귀찮아하던 정경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무경은 보너스달이라며 정경에게 샌들을 선물하고, 곧 돌아올 가경 언니의 아들인 예민한 중3 조카 준희의 생일선물도 골랐다. 무경은 요즘 아이들의 유행을 알아야 한다며 잠시 휴대폰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정경은 천천히 백화점을 돌았다. 이제는 유아복 코너를 지나고, 예쁜 분홍색 아기 옷을 보아도,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 신발을 보아도, 장난감 코너를 도는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을 보며 정경이 쓰게 웃었다.
“오래 걸었더니 배고프다. 우리 밥 먹고 들어갈까?”
무경의 말에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의 외식이었다. 요즘은 거의 외식할 일이 없었다. 대신 자신이 등록한 요리클래스에서 배운 요리를 다시 한 번 실습하고, 무경의 평가를 들었다. 처음에는 뭐라 평가할 말을 찾지 못하고, 괜찮다는 말만 하던 무경도 이제는 그녀가 한 요리가 진짜로 맛있다며 좋아하면서도 신기해했다. 원래 정경은 요리에는 젬병이었으니까.
정경이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자는 무경의 말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이 맛집 카페에서 알아냈다는 집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깔끔하고 조용했다.
“여기보다 ‘라르’가 나은 것 같다. 다음엔 ‘라르’로 가자.”
파스타를 먹던 정경의 말에 무경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곳의 파스타를 좋아했지만,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했다는 것을 무경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무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의 의미가 뭐라고 했지? 라일락 뭐에 줄임말이라고 안 했어? 난 거기 마음에 안 들어. 차라리 ‘라르’ 말고 다른 곳에 가볼까. 있잖아. 지난번에 수영이가 남편이랑 갔던 곳이라고 알려주긴 했는데 좀 멀긴 하지만 예약하고 가면 괜찮을 텐데. 굳이 거길 갈 필요 없잖아. 더 맛있는 곳을 찾으면 되는데…….”
무경이 왜 그곳을 꺼리는지 알고 있다. 괜찮은지 묻고 있는 무경의 표정에 정경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아득해졌다.
“이제 괜찮아.”
“어?”
“나 괜찮아, 무경아.”
“언니.”
정경이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그녀의 말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 무경이 따라 웃었다.
저녁을 먹고 집에 오니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경이 택배 앞에 쪼그려 앉아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난 내가 주문한 블라우스인 줄 알았는데……. 엄마가 보냈나 봐. 무거운 게 김치랑 반찬인 거 같은데?”
아, 집에 내려갔을 때 혼자 들고 가기 무겁다고 나중에 보내준다고 했던 반찬들인 모양이다. 그때 정경의 전화벨이 울렸다.
―정경아, 나. 택배는 받았어?
다경이다.
“어. 언니.”
다경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엄마, 잘 도착했대.
엄마가 옆에 있는지 다경의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거 네 약이야. 아기 잘 들어서는 약이래. 엄마가 너 며칠 집에 있으면 그때 직접 달여 먹이려고 했는데 갑자기 올라가는 바람에 팩으로 만들어서 보낸다고. 그리고 하나는 우리 포도즙이야. 그건 무경이랑 나눠먹고, 한약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꾸준히 먹어. 김 서방 오기 전에 한 제 먹고, 다 먹으면 김 서방 거랑 같이 해서 한 제 더 지어 보낸다고 하시더라.
정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딸만 다섯 나은 엄마에겐 또 다른 부담이 있었다. 혹여, 엄마 닮아 딸만 낳았다는 이야기라도 들을까 봐, 그래서 시집 식구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책이라도 잡힐까 봐, 자신 때문에 딸이 안 들어도 될 이야기까지 듣게 될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셨다. 그래서 결혼한 딸들이 낳은 손자, 손녀에, 특히 손자에게 신경을 많이 쓰셨다.
그게 말이 되냐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언니들이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엄마는 걱정을 놓지 못하셨다.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셨겠지.
“…….”
―정경아, 듣고 있어?
“……어.”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잊지 말고 정성스럽게 먹어. 아버지랑 엄마랑 일부러 멀리까지 버스 타고 전주까지 다녀오신 것 같더라. 주말에 우리랑 같이 가자고 해도 김 서방 오기 전에 한 제는 먹여야 한다고 마음이 급하셨나 봐.
정경이 ‘나정경’이란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 있는 한약 상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참, 아버진 오늘 기분 좋으신지 동네 아저씨들하고 약주 드시고 계시더라. 너 드라마 시작했다고 엄마가 말씀드렸나 봐. 넷째 사위가 보내준 양주 드신다고 그거 가지고 나가셨어. 우리가 볼 땐 술 드실 핑계거리만 하나 더 만드신 것 같은데……. 아무튼 많이들 좋아하셔.
“……어.”
―요즘 우리 집에서 제일 효잔 넷째 사위하고 나정경 같아.
다경의 농담 섞인 말에도 정경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애들 오나 보다. 엄마 지금 할머니 주무실 준비 해드린다고 할머니 집 가셨으니까, 이따가 밤에 엄마한테 따로 전화해 봐. 그리고 약 잘 챙겨 먹어. 무경이도 피곤하니까 포도즙 챙겨 먹으라고 하고. 이번에 포도가 잘됐어.
조카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경이 동생들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무경이 조심스레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약이래? 혹시……?”
무경 역시 예상은 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약 상자를 바라보았다.
“흠…….”
“우선 냉장고에 넣어두자.”
정경의 말에 무경이 두 개의 상자를 모두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도 정경과 무경은 주방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언니, 커피 마실래?”
“그럴까?”
정경의 가벼운 대답에 무경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무경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정경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집에 내려갔을 때 말했어야 했나 보다. 그랬다면, 이런 수고로움은 없었을 텐데.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저 약을 지어 보냈을지 알기에 정경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냉장고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