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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 그 여자랑 살고 싶다



지난번 무경에게 선물받은 원피스를 꺼냈다. 미용실에도 들렀다. 실연당하면 머리를 자르는 여자들을 보며 그게 무슨 위로가 될까 싶었는데, 머리를 자르고 보니 달라진 머리만큼 기분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무경과 ‘라르’에 가기로 했다.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항상 웃고는 있지만 자신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동생을 알고 있었다. 회사 일로도 피곤할 텐데 집에 들어오면 어디든 함께 가자고 말해주는, 자신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무경이었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 괜찮다는 것을.
자신은 회사에서 바로 오겠다며 무경은 자신의 차 키를 그녀에게 주었다.
“언니.”
“무경아.”
무경이 라르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 있지.”
“아니야. 언니 오면 같이 들어가려고. 괜찮아?”
아마도 자신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바로 나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경이 웃으며 먼저 문을 열었다. 이미 예약을 했기에 ‘라르’의 사장 석규가 그녀를 금세 알아보았다.
미영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1년 전까지만 해도 자주 오던 곳이었기에 정경의 얼굴에도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잠깐, 내가 안내할게.”
예약한 룸으로 안내하려던 종업원 대신 석규가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정경 씨. 미영이도 뜸하고.”
정경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오늘은 드디어 같이 오셨네요.”
“……?”
정경이 무경과 눈을 마주쳤다. 둘이 같이 온 것을 이야기하나. 그러나 무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쪽이에요.”
그를 따라 예약한 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누군가 먼저 와 창가에 서 있었다.
“형…….”
놀란 무경이 입을 다물었다.
“…….”
그 역시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저희 따로 예약했는데요.”
석규에게 이야기하는 무경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그러세요?”
아마도 석규는 정경과 재우가 당연히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황한 그가 허둥대며 예약을 다시 확인하겠다며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1년 만이었다. 자신의 짐을 옮기겠다며 남의 집에 오는 손님처럼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들어섰던, 시선조차 주지 않던……. 그리고 그렇게 돌아섰던 전남편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참으로 이상한 우연이다.
“괜찮다면 같이 앉지.”
재우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무경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다는 듯 정경이 무경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정경의 얼굴엔 미소가 사라졌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 다정한 그의 말에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괜찮아.”
“그래.”
정경의 담담한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우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앞에서 기다릴게.”
무경은 자신이 피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팔을 놓고 조용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녀 역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재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경을 따라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일 다시 시작했다며?”
재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는다.
“…….”
“괜찮아?”
뭘 묻는 걸까.
“갈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괜찮아졌지만 아직 그를 향해 웃어줄 수는 없었다.
“정경아, 진짜 잘 지내는 거야?”
“…….”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 발을 내딛으려 할 때 갑자기 걸어온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경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정경.”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
정경이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차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어? ‘the story’도 안 가고, 여기도 안 오더라.”
낮은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정경이 미간을 모았다. ‘the story’는 정경이 일을 할 때면 자주 찾던 곳이다. 가끔 조용한 곳보다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을 때면 정경은 동네에 있던 ‘the story’란 카페에 가곤 했다. 그리고 오늘처럼 ‘라르’ 역시 자주 왔었다.
“일행 있는 거 아니었어?”
조금은 차가운 그녀의 말에 그가 멈칫했다. 그 일행이라고 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도 정경의 의도를 알 것이다. 그녀가 조용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정경아.”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언니, 그냥 나갈까?”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무경에게 정경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재우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신처럼 그 역시 서로에게 연관된 곳은 피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피한 것이 아니다. 겁이 났을 뿐이다.
그를 만날까 봐. 웃고 있는 그를 만나게 될까 봐. 자신을 향해 웃던 것처럼, 다른 여자를 보며 웃고 있을 그를 보게 볼까 두려웠다.
잘 추스르고 있다고 생각한 감정이 겁이 날 정도로 터져 버리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미친 것처럼 그가 기다려 주던 ‘the story’ 앞을, 그와 함께 가던 ‘라르’ 주위를, 그리고 그와 만났던 공원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른 모습의 그를 마주할까 봐. 그래서 담담하다 느꼈던 모든 것이 허물어질까 봐.
그런데 결국 이렇게 마주쳤다.

석규가 사과를 하고 돌아가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농담처럼 배가 고파 2인분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그녀는 아직 접시를 반도 비우지 못했다.
“괜찮아?”
무경이 걱정스레 묻자 미안함이 앞섰다.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버린 동생은 언니가 되어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무경이 갑자기 주인집에서 전세 값을 터무니없이 올렸다며 같이 살게 해달라고 했을 때,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함께 살게 되면서 무경이 대신해 주는 일이 많아졌다. 대신 말해주고, 대신 변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른 척 동생 뒤에 숨어버렸다. 그래도 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었다. 손을 크게 벌려 그녀를 깊이 숨겨주었다.
“무경아.”
“응?”
“이제 엄마한테 말하려고, 언니들한테도.”
“사실대로?”
진짜 이혼 사유까지? 그렇게 묻는 표정의 무경에게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나 언니들한테 매번 그 사람 안부를 전해야 하니까…… 그 사람 대신 선물을 사고, 그 사람이 함께 있는 것처럼 웃어야 하니까 나도 가끔 헛갈려. 내가 진짜 이혼을 했는지.”
그랬다.
건강하게 잘 지낸대. 선물 보내왔어. 못 찾아뵈어서 죄송하대. 감사하다고 전해달래. 안부를 묻는 가족에게 항상 괜찮다는 말을 했다. 무공해 쌀이라며, 포도농사가 잘되었다며, 언니들에게 그랬듯 사돈까지 챙기는 부모님과 언니들에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안부를 전하다 보면 여전히 그와 가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어느 순간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언니들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정경이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큰언니는 이해해 주겠지만, 나경 언니랑 다경 언니는 성격상 가만있지 않을 텐데.”
맏이답게 신중하고 너그러운 가경과 달리 둘째와 셋째인 나경과 다경은 좀 달랐다. 할머니를 닮았다는 그 성격은 다혈질에 불같은 면이 있어 동생의 이혼 사유를 아는 즉시 서울로, 아니, 바로 재우에게 쫓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큰언니한테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까.”
무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
포크는 계속 접시 위를 맴돌았다.
“속상해.”
“어?”
한숨 같은 무경의 말에 정경이 물었다.
“오늘 같은 날, 내가 아니라 멋진 남자가, 잘생기고 몸도 좋고, 형부, 아니, 저 사람보다 열배, 백배는 나은 남자가 언니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같이 온 사람이 나라니,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멋진 남자가 있어야 했는데.”
“…….”
“……미안, 나 아직도 철이 없나 봐.”
울컥하는 기분을 참듯 눈에 힘을 주는 무경을 보며 정경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해. 다시 만날 때는 백배쯤은 섹시해지고, 천 배쯤 예뻐져야 하는데, 만 배는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정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먹자, 우리. 배고프다.”
“응. 나도 배고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더 이상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후식을 주문했다. 무경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인상을 썼다.
“난 여기 싫어.”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콧잔등을 찡그린 무경의 말에 정경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여기 너무 지루해. 커피도 쓰고, 그냥 여기가 싫어.”
무경의 투정 같은 말에 정경이 피식 웃었다.
“언니는?”
“난 괜찮아. 새로운 곳 가는 것보다 익숙한 게 낫기도 하고.”
무경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바꾸기 어려운 그녀의 성격은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정경이 피식 웃었다.
“언니?”
“어?”
“……언닌 왜 형부한테 화내지 않아? 왜 분해하지 않아?”
동생이 처음으로 물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 그건 무경에겐 꺼내기 힘든 말이었고, 자신에겐 아픔을 헤집는 것이었기에 서로 이야기를 피해왔다. 백화점에서 양희진을 같이 만났지만 동생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알린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내가 굳이 화내지 않아도 내 말 한마디면 달려올 언니, 동생이 있어서 그랬나 봐. 그 남자 머리나 다 안 뽑혀야 하는데. 큭.”
그녀가 가볍게 웃었지만 무경은 웃지 않았다.
“……화를 내서 뭐하나 싶었어. 내가 물었을 때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단 한 마디 말고는 다른 변명조차 하지 않았어.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잖아. ……이제 괜찮아.”
무언가를 익숙한 것을 바꾸는 것에 버거워하는 그녀조차 그 남자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랑 살고 싶다.”

단 한 마디.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이가 있었어요, 우리.”

아이까지 있었다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양희진을 백화점에서 만났던 그날, 그렇게 말하는 여자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라니.
먼저 든 생각은 재우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죠? 나도 그래요.”
정경이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진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다. 그러나 이 여자 앞에서 그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학 때 만났어요, 우리. 난 우리가 결혼할 줄 알았어요. 처음엔 재우 씨가 그렇게 대단한 집, 아니, 그렇게 교양 있는 집 아들인 줄 몰랐어요.”
재우의 집안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비틀림, 아니, 원망이 보였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어요. 난 알코올중독 아버지에, 이혼을 세 번이나 한 술집 작부의 딸이었거든. 보통의 집에서도 반대할 조건인데 재우 씨 집안에선 당연했겠죠. 그 대단한 집안에서는.”
그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넘치게 잘해주시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먼저 챙겨주시던 분들이었다. 시댁에 가지 않으려는 재우 때문에 저녁이면 혼자 안부 전화를 하고, 주말이면 혼자서 찾아뵙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시던, 자주 오지 않아도 잘사는 것이면 됐다고 말씀하시던 따뜻한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이유였을까. 희진의 집안과 비교하여 평범할 뿐 자신의 집안이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던 것인가.
한 번의 명절을 지낸 것이 재우와 시댁에서 보낸 전부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동네 어른들에게 만큼의 다정함도 없었던 그가 이상했지만, 집안의 엄한 분위기 때문이려니 했다. 그녀의 집에는 너무도 착하고 다정한 사위였기에,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만은 다정했기에.
시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옆을 지켜주고, 애쓰게 부친 전 모양이 이상해질 때마다 큭큭거리면서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며 맛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주었다. 그의 형과 형수가 다정한 모습을 보이면, 장난스럽게 그녀의 눈을 가리며, 저건 다 가짜라고 진짜는 너와 나라고 진지하게 속삭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진짜는 따로 있었나 보다. 정경이 쓰게 웃었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생겼어요. 그때 그 집에서 누군가 찾아왔어요. 그리고 제안을 하더라고. 아이를 낳지 말고 유학을 가라고. 그 당시엔 재우 씨 집안 때문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런 모멸감을 느끼면서 평생 재우 씨랑 사느니 차라리 공부해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차마 아인 못 지우겠더라고. 그 사람과 내 아이잖아. 우리의 유일한 사랑의 증거잖아.”
“…….”
“그래서 엄마한테 내 아이를 맡기고 유학을 갔어요. 성공해서 멋지게 나타나려고 했어. 누구보다 멋진 엄마가 된다면 그럼 그 남자도, 그 집안도 달라지지 않을까 했지.”
희진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눈빛이 허공을 헤매는 듯 했다.
“그런데 아이가 죽었다는 연락이 왔어요. 내 아이가 죽었다는데 난 병원이 아니라 경찰서 먼저 갔어요. 술집 작부 할머니가 매달 딸이 죽도록 일해서 보내준 돈만 받고, 어린 손녀를 돌보지 않아서 배가 고파 죽었대요.”
정경이 놀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믿어져요? 먹을 게 넘쳐나는 이 세상에 배고파 죽었다는 게. 엄마란 여잔 요리하겠다고 유학까지 갔는데.”
손끝이 떨렸다.
“나한테 이런 이야길 하는 이유가 뭐예요?”
어떤 목소리가 나왔는지. 어떻게 목소리를 냈는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일 가졌어요? 재우 씨 아일 가졌어요? 그 남자, 절대 아인 갖지 않겠다고 했거든.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자기한테는 죽어도 아인 없다고 했거든. 그런데 그것조차 다 거짓이었어? 진짜 그 사람 아이를 가진 거예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갑자기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귀가 윙윙대긴 하는데, 분명 희진은 앞에서 뭐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깐만요.”
정경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흐릿하던 희진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정경이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원하는 게 뭐예요?”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담담한 정경의 말에 그녀의 비릿한 웃음이 보였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요?”
희진이 그녀에게 되묻는다.
“…….”
“그 사람이, 재우 씨가 원하는 건 뭘까요?”
그녀의 눈빛은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일까, 아니면 정경일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
그녀가 이렇게 끝까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들에게…….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무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닌데. 정경이 가볍게 웃으며 괜찮다는 듯 무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집에 가서 맥주 마실까?”
무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주 매운 걸로 안주하자. 낙지볶음 같은 걸로. 갑자기 배고파.”
팔짱을 낀 무경의 말에 정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무경이 잠시 멈춰서 휴대폰을 확인하는 사이 정경이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는 누군가가 보였다.
유경완. 그가 서 있었다. 정경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를 못 본 척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굳이 알은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경완 씨!”
그의 이름은 부른 것은 뒤에 서 있던 무경이었다. 굳은 표정의 경완, 처음 시작하는 설렘을 담은 무경, 그리고…… 자신.
어떻게 해야 할까.
“무경 씨.”
그가 차분히 동생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무경이 다가오는 것을 본 경완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네.”
그의 시선은 오롯이 무경을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요?”
반가워하는 무경의 목소리에 정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4 두 번째 우연



일을 잘하려면 체력이 필수라며 운동을 같이하자는 무경의 말대로 수영을 시작했다. 수영을 좋아하는 무경과 시원한 물을 가르는 것도 좋았지만, 함께 등록한 요가를 하는 것도 괜찮았다. 월, 수, 금은 새벽녘에 무경과 수영을 하고, 화, 목은 오후에 요가를 하기로 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다녀왔고, 후배와 오랜만에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서점에 들렀다 스포츠센터에 왔다.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요가와 명상이 좋았다. 요가를 끝내고 어둠 속에서 잠시 갖는 휴식이 그녀를 고요하게 만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개운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the story’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본 주인도 그녀에게 반가운 알은체를 했고 그녀 역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문자가 왔다. 한정석 PD였다. 내일쯤 만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그의 문자에 알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그녀가 만났던 PD들 역시 제각각이었다. 일의 특성상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1년 전 마지막 작품을 하며 만난 고상민 PD는 정경과 비슷한 또래로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그것부터 정경과는 좀 달랐다. 그녀로선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고, 그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긍하기도 했다. 그러나 늦은 밤이고, 새벽이고, 시도 때도 없는 연락에 작가치고는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정경은 난감했다. 그는 또래인 자신이 친구처럼 편했다고는 했지만 그녀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마 그 역시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은 정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잔소리와 비례하는 뛰어난 감각이나, 높은 시청률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꽤나 트러블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잘 나온 시청률은 의외의 아량과 사람들 간의 끈끈한 단합을 가져온다.
드라마의 인기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배려와 함께 나와 잘 맞는 연출력이 뛰어난 PD이며, 글 잘 쓰는 작가였다는,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나 보다. 그리고 요즘까지도 그들과는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낸다.
그에 비해 한정석 PD는 미영의 말 그대로 무난한 사람이었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그는 처음 만난 날 그렇게 말했다.
“김재우 PD하고는 같은 모임을 해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 작가님과 김 PD 일, 잘은 모르지만 귀가 있고, 이 바닥에서 계속 뭉개고 있으니 아예 모르진 않아요.”
“……네.”
그녀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소문이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또 가장 정확할 때도 있으니까. 김미영이 내 후배이기도 하고, 애 엄마 친구예요.”
“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한정석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김미영이 쓸데없이 발은 넓어가지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죠.”
그가 진심으로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김미영 주위에 나정경 작가님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김재우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 여자도 그렇고.”
그가 시선으로 TV화면을 가리켰다.
항상 틀어놓는 회의실 안의 TV에선 양희진의 일과 인생, 그리고 연애를 다룬다는 일종의 스타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정경과 한정석의 시선도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했다.
“나도 뭐, 김 PD랑 그렇게 친한 사인 아니니까. 그런 것 때문엔 부담 갖지 말아요. 그리고 일 외에 다른 걸 이슈로 삼을 만큼 능력 없지도 않으니까. 이건 뭐 지극히 내 개인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
그가 지금까지 일했던 누구보다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어쨌든 잘해 봅시다. 어차피 PD가 한 말 믿는 작가는 없을 테지만, 고상민하고도 일했다면서요. 그럼 나는 양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혼자 일 다 하는 것처럼 닦달하진 않을 거니까. 생각보다는 괜찮을 겁니다. 김미영이 별로 좋은 말 안 했을 거란 건 좀 알 거 같아요. 아마 김미영이 말한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한정석의 말에 정경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