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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렇게 그녀의 네 번째 드라마를 시작했다. 처음에 미영의 닦달로 시작된 것이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다. 미영의 말처럼 처음보다 두 번째가 좋았고,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더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잘될 거라고 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꼭 드라마의 성공 때문은 아니다. 그저 보여주고 싶다. 만 배쯤 유명해지지는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잘하고 있음을. 그리고 괜찮음을.
정경의 어릴 때 꿈 역시 드라마 작가였다. 드라마를 보며 감동하고, 대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곤 했다.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단어를 선택했을까 신기했다. 보통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잘생긴 남자배우나 예쁜 여자주인공의 패션보다는 대본을 쓴 작가가 궁금했다.
그리고 바라던 작가가 되었다. 어릴 때 꿈과 현재의 직업이 같을 확률은 거의 없다는데 유일하게 자매 중 가장 더디게 자란 정경만이 그것을 이루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고 있던 정경이 가방 속에서 울리는 진동에 걸음을 멈추었다. 비어버린 텀블러를 가방에 넣고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퇴근 후 지하철 안이라는 무경의 문자에 정경도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탁.
바쁘게 걷다 보니 누군가와 부딪혔다. 들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붙잡았다. 손을 놓은 정경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들었다.
“미안합니다. 괜찮으세요?”
부딪힌 어깨가 아파와 정경이 살짝 인상을 썼다.
“괜찮으세요?”
남자는 그녀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휴대폰에 시선이 머물렀다.
흠.
어차피 새 휴대폰도 아니고 액정도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자 정경은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잠깐만요?”
남자의 부름에 정경이 그제야 남자를 쳐다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남자가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진짜?”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가리켰다. 그가 묻고 있었던 것은 휴대폰이 아니라 그녀의 상태였나 보다.
아.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꽤나 바빠 보이는 남자를 두고 정경이 돌아섰다. 무언가 말하려던 남자를 무심하게 지나친 정경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정경은 휴대폰을 꺼내 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경이 급한 이유는 오늘이 미경의 집들이 날이었기 때문이다. 집들이는 따로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정경과 무경을 초대해 저녁을 먹자고 했다. 미영의 집이 정경의 집에서 멀지 않았지만, 미리 사놓은 선물을 가져가려면 서두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미리 재워놓은 불고기도 가져가야 했다.
멀리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오는 무경이 보였다.

“언니, 축하해.”
“미영아.”
정경과 무경의 인사에 미영과 서창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미리 준비한 집들이 선물과 함께 정경이 해온 불고기와 샐러드를 내밀었다. 미영은 좋아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무경은 신혼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정경은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을 보는 정경의 얼굴에도 웃음이 스몄다.
이미 거실에는 상이 차려져 있고, 국이며 매운탕이며 반찬들로 가득했다.
“구경할 것도 없어. 그대로다.”
주방에 있던 미영이 큰 소리로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서창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영의 말대로 예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네. 제가 들어오기만 해서 달라진 것 별로 없어요.”
“아니야. 달라졌어. 우선은 분위기가 달라졌어.”
무경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
주방에서 나오던 미영이 무경을 바라보았다.
“메마르고 건조한 언니 집에 온기가 찾아왔잖아. 솔직히 조금 무섭던 언니 얼굴도 얼마나 순해 보이는데.”
장난스러운 무경의 말에 서창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죠? 얼굴은 좀 달라졌죠. 진짜 미영이 도끼눈이 사라졌다니까요.”
미영이 서창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절대 누나라고 안 부른다.”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리는 미영의 말에도 서창은 사람 좋게 웃었다.

서창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끝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고, 미영이 후식이라며 와인과 과일을 가져왔다. 미영과 서창은 밥 먹는 내내, 그리고 설거지 내내 서로 토닥거리면서도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무경이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와, 이 접시.”
선물을 펴 본 미영이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집들이 선물은 예전 미영이 정경과 함께 간단하게 혼수준비를 하러 다닐 때, 미영이 유독 마음에 들어 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무조건 절약해야 한다며 그녀는 고급스러운 접시세트를 포기하고 실용적인 그릇세트를 샀다. 그러면서도 내내 그 접시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정경은 지난주 무경과 함께 그 접시를 주문했었다.
“고맙다. 나정경, 나무경. 아마도 우리 주방에서 이게 제일 비싼 물건이겠다. 게다가 내가 오라고 해놓고, 맛있는 음식은 정경이가 다 해오고.”
“아니야. 언니가 해준 샤브샤브도 맛있었어.”
무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경아, 너 결혼할 땐 내가 더 멋진 걸로 해줄게. 정경이 너도.”
항상 자신을 신경 써주는 미영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정경의 얼굴에도 따뜻한 웃음이 번졌다.

* * *

“행복해 보이더라.”
미영의 집을 나와 천천히 걷던 무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지?”
정경도 웃었다.
“같은 연하인데 왜 다르지? 그래도 성격은 비슷한가. 미영 언니나 우리 언니나 세긴 센 거 같아.”
무경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무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셋째 언니 다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미영 언니네 아파트가 3층이라는 게 난 괜히 안심이 되더라. 서창 선배 몸 보니까 3층 정도는 거뜬히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던데.”
정경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경을 떠올렸다.

스물다섯 살에 두 살 연하의 형부와 결혼한 다경은 참 많이도 싸웠다고 했다. 허니문베이비라는 조카가 태어난 것이 마냥 좋았던 정경과 무경은 어느 날 다경의 집에 놀러 갔었다. 결혼한 큰언니의 조카들이 남자인 것에 반해 첫 여자 조카가 너무 예쁘고 신기하다던 그녀들은 아기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혼자 아이를 돌보며 힘들어하던 언니는 정경과 무경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언니는 좀 쉬라고 다경을 작은 방에 밀어 넣고 안방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배불리 우유를 먹은 조카를 재우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옆에서 자고 있던 무경 역시 부스스 눈을 떴다.
“왜 저러지?”
무경이 놀란 눈으로 문가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가 잘 자는지 확인한 정경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늦게 들어온 형부와 말다툼이 있었나 보다. 아이가 깰까 봐 문을 꼭 닫고 있던 그녀들의 귀에 형부의 외침이 들렸다.
“그냥 후배야. 오늘 개강 모임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안 간다고 했어. 근데 도서관으로 한수가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잠깐…….”
농담처럼 대학교 3학년 남편을 키운다던 언니의 조근 조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진짜 화났나 보다. 목소리가 진짜 작아졌어.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 우리 집 여자들 화나면 목소리가 더 작아지는데…….”
무경의 말에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줘.”
“…….”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니의 무서운 표정을.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릴게. 그럼 믿을래? 누나!”
애절한 형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우당탕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깜짝 놀란 무경이 안방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언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차라리 뛰어내려.”
“어?”
놀란 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뛰어내리라고. 부모님이나 사람들한테 설명하기도 이혼보다는 사별이 나아. 나는 평생 나 혼자 살 생각 없으니까 재혼하기도 그게 좋고. 애는 어차피 지금도 내가 돈 벌어서 키우니까 애 걱정하지 말고 그냥 뛰어내려.”
다경의 낮은 목소리에 정경과 무경의 눈이 커졌다.
9층 아파트였다. 설마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로 나왔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는 언니와 다르게 형부는 베란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다경 언니 부부에게는 심각한 상황일 텐데도 그 모습을 보는 정경과 무경은 이상하게 웃음을 참고 있었다.
“누나, 만나긴 했는데 나 결혼했다고 말했어. 결혼반지도 보여줬어. 이름도 기억 안 나. 그게 끝이야.”
그러면서 반지를 낀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다경은 코웃음을 쳤다.
“전화해.”
“어?”
“네 소중한 친구 개한수한테 전화하라고.”
“강한수?”
형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형부는 순순히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고도 많은 말이 오갔고, 결국 정경과 무경이 언니를 말리고, 잠에선 깬 조카의 울음소리가 들린 후에야 싸움은 끝이 났었다.

지금은 예전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네 아이를 둔 좋은 아빠에, 좋은 남편이지만.
그때가 생각난 무경과 정경이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바쁘고,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하루였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온 뒤의 시원한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흩날렸다. 평온한 날이었다.

#5 운명이란



정경이 책상 앞에 앉아 커피가 넘칠 듯 가득 든 머그잔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켰다. 새 노트북이다. 어제는 노트북을 샀다.
예전 노트북은 재우가 선물한 것이다. 까만색 노트북 겉면에는 흰색 사인펜으로 그녈 위해 쓴 그의 메모와 그녀만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사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또 하나의 노트북의 겉면에는 그녀에게 써달라고 한 그녀의 메모가 있었다. 그것은 재우의 것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있던 노트북 중 하나만 사라져 버렸다.
한참을 빈 테이블에 시선이 머물렀던 그녀가 문득 책상 위 놓여 있는 다섯 자매의 사진이 있는 액자를 바라보았다. 언니들 사이로 웃고 있는 무경의 앳된 얼굴이 보인다.
무경은 피곤하다며 일찍 잠이 들었다. 아마 마음 약한 동생은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경과 경완이 그런 관계일 줄은 몰랐다. 무경의 상처받은 표정을 애써 모른 체하며 그와 만나지 말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그렇게나 위해주던 동생인데 복잡한 상황에 또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던 자신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메모가 있던 재우의 노트북이 사라진 그의 서재에 우두커니 서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만하자, 우리.”

다정한 말로 노트북 겉면을 채우던 그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텅 빈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결혼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때였다.
뒤돌아보면 혹시나 그가 있을 것 같아 하루면 수십 번씩 그의 서재를 열어보았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조용하던 집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상하게 모르는 번호라는 것 자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끈질기게 전화벨이 울렸다.
―유경완입니다.”
“……?”
유경완, 누구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재우 친구입니다.
“……네.”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꼭 만나고 싶다는 남자의 전화에 정경은 긴장했다.

그는 그녀의 동네로 오겠다고 했다. 항상 가던 ‘the story’가 아닌 다른 커피전문점으로 갔다. 그곳엔 깔끔한 인상의 그가 서 있었다. 조금은 차갑게 보이는 그가 그녀를 향해 흐린 미소를 지었다.
“유경완입니다.”
그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결혼식 때 뵙고 처음인 것 같은데…….”
“……네.”
정경의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친구가 자신의 안부를 묻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 테니.
남자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
주스를 주문한 그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정경이 물었다. 무슨 이유로 친구의 이혼한 와이프를 찾아온 것일까. 긴장되었다. 별일 아니겠지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친하지도 않았던, 결혼식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경완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까.
‘사실은 이혼도, 그 여자도, 지금까지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김재우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김재우가 나쁜 사건에 휘말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등 드라마 작가란 직업이 이런 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그를 만나러 오는 동안 혼자 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결말은 우습게도 모든 것이 거짓일 뿐 아니라 나정경을 위해 김재우가 꾸민 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결말을 내면서도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양희진 역시 제 친구입니다.”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담담하게 포장할 수도, 무표정하게 반응하기도 어려웠다.
“…….”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경완 역시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가만히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대학 때부터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재우도 함께.”
“그, 그럼 재우 씨와 그 여자의 관계도 알고 있었어요?”
정경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
“그게 나와 결혼한 후라는 것도 알았어요?”
“네.”
정경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자신만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족, 그의 친구들,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자신만 아무것도 모른 체 바보처럼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전 운명을 믿습니다.”
“……?”
“그 친구들, 김재우와 양희진이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가 모르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좋았다 나빴다 판단하는 건 어렵지만 한 가지는 압니다. 쉽게 서로를 끊어낼 수 없다는 것. 힘들겠지만……. 그래서 정경 씨도 빨리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주제넘게 들리시겠지만, 혹시 미련이 남으셨다면…….”
미련.
미련이란 게 뭘까. 그에게 남아 있는 마음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미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던가.
“제가 왜……. 제가 왜 여기서 유경완 씨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운명이든 아니든, 그 사람과 내 일이에요.”
정경이 잠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듯 말을 멈추었다.
“미안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저 정경 씨도 모든 것을 잊고 털고 일어났으면 했습니다.”
그녀가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좋은 친구네요.”
그녀의 담담한 말에 경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을 위해서 정경 씨를 찾아온 건 아니에요.”
그의 말은 단호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장 이해되는 말이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진다는 거예요. 정경 씨,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겁니다.”
경완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미안한 표정을 지었었다.
“미안합니다.”
정경이 쓰게 웃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심정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답답함을, 미칠 것 같은 그 심정을 그는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렇게 경완과 헤어졌다. 아무리 그의 의도가 좋았다 해도, 그가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해도 그 상황에서 그를 좋게 기억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결혼식에도 왔었던 그는 결혼 후 재우와 그 여자가 만나는 것까지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경과 함께 있는, 애틋한 표정을 가진 다른 모습의 그를 보게 되었다. 이기적이지만, 무경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냥 그대로 끝냈으면 했다. 결국 무경에게도 상처만 남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완과 ‘라르’에서 마주친 후 무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완 씨랑 무슨 사이야?”
“그게…….”
무경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망설임이 눈에 보였다.
“김 PD 친구야. 좋아하니, 경완 씨? 내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할래?”
무경이 대답 대신 정경을 바라보았다.
“……언니.”
“그 사람이랑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 ……네 감정이 아직 시작인 단계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웃고 있는 사진 속에 무경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저렇게 웃고 있던 아이인데. 그게 뭐라고.
결국 자신의 욕심이 아니던가.
무경이 좋다는데……. 그 애가 그렇게 웃고 있는데…….
정경이 담담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마, 엄마와 언니는 이미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스민 정경이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언니.”
새벽녘 서재 문을 연 무경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왜? 배고파?”
피식. 무경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애야?”
무경이 서재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언니.”
무경이 또 언니를 불렀다. 정경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무경아, 말해.”
정경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언니들이 돌봐서인지 무경은 불안할 때면 언니를 부르곤 한다. 아직 애 맞는데.
“응?”
“말하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
“유경완 씨 만났어?”
정경이 먼저 물었다.
“……어.”
무경이 소파에 웅크린 채 바닥만을 응시했다. 정경에게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밤새 뒤척인 것인지 무경은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냥 지나갔으면 했는데.”
정경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많이 힘들어?”
무경이 고개를 저었다.
“……언니, ……언니, ……사장님 만난 적 있어?”
“사장님? 유경완 씨?”
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Mu’ 사장이었어. 그래서 만나게 된 거야.”
정경은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랬구나.”
“언니, 나 어떻게 해?”
무경이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나쁜 사람이야. 다 알았다고 했어. 내가 물었는데 그걸 숨기지도 않아. 나도 알고, 언니도 알고, 그 여자도, 형부도 알면서, 그러면서도 나를 만났대. 너무 웃어서, 나만 보면 웃어서 바보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런데 무서운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데도…….”
“무경아.”
정경이 안쓰러운 그녀의 작은 등을 쓰다듬었다.
“언니, 나 막 슬프진 않아.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고 하지는 않아.”
무경이 쓰게 웃으며 정경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문득문득 가슴이 막 답답해. 그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일까 봐 겁도 나.”
“…….”
“그러면서도 ‘사정이 있었을 거야’ 하면서 그 사람에게 가고 싶기도 해. 나 어떻게 해?”
무경이 말을 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언니한테 이런 말하면 안 되는데……. 언니는 더 힘들 텐데. 잠이 덜 깼나 봐. 일해. 나 우유 한 잔 마시고 다시 자야겠다.”
무경이 무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 무경을 바라보는 정경이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왜 고민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경아, 나 이혼하고 유경완 씨 만난 적 있어.”
무경이 멈칫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처음은…… 결혼식 날이었는데……. 뭐랄까 굉장히 당황하는 표정이었거든. 듣기로는 굉장히 빈틈없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아무튼 그날은 그랬어.”
“…….”
“그리고 다음에 봤을 땐, 재우 씨가 이 집을 나간 후였어.”
굳어지는 무경의 표정에 정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어느 날 찾아왔더라. 그 여자랑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처음엔 몰랐어. 뜬금없이 운명 이야기를 했어. 운명을 믿는지 묻더라. 자긴 운명을 믿는다고. 김 PD랑 난 운명이 아닐 거라고. 그러니까 털어버리라고. 두 번째였거든. 결혼식 때 보고 처음 만난 거니까. 그래서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나한테 그런 말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사과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날 그 사람이 한 말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 그때 누구한테도 말 못했거든. 내가 힘들다는 거. 말하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때 날 위해 일부러 찾아왔어. 분명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걸 알았을 텐데.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무서운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더 솔직히 난 내 동생이 이런 복잡한 상황에 얽혀드는 게 싫었어. 아무리 내가 김 PD를 잊고, 이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유경완 씨와 그 여자, 그리고 너는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없으니까. 김 PD랑 유경완 씨 집안끼리도 친하다고 들었거든.”
무경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무경아, 결국 난 너와 그 남자를 반대하고 싶은 핑계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운명이라면, 그런 게 있어서 그 남자가 네 운명이라면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 왜냐하면 나 때문에 네가 상처받는 것도 싫으니까.”
“언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 사람 마음이라는 거 생각대로 안 되는 거라는 거 나도 이제 알아. 너무 늦게 알긴 했지만……. 그러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해.”
“생각해 보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 나를 찾아올 필요까진 없었어. 나를 위로하고 싶었던 거라는 거, 나한테 툭툭 털고 일어나길 바랐던 거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 사람 나를 일부러 찾아온 건 아마도 그게 그 사람 진심이었을지도 몰라.”
그가 굳이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자신을 찾아온 것은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훌훌 털고 일어나라고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무경의 얼굴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좀 자둬. 엄마 오시는데 얼굴이 그 모양이면 속상하실 거야.”
정경이 동생의 어깨를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