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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거실로 나가자 멍하니 앉아 있는 무경이 보였다. 정경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우유를 내밀었다.
“지금 4시야.”
“어.”
“우리 좀 자자. 엄마랑 언니들 오면 아마 하루 종일 정신없을 거야. 10시쯤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8시쯤 오시겠지.”
무경이 픽 웃었다. 엄마는 항상 딸들이 신경 쓸까 봐, 도착 시간을 두 시간쯤 늘려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마중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이면 초인종을 눌렀다. 이제는 딸들도 모두 적응이 돼서 한두 시간쯤은 기본으로 일찍 나가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인 무경이 우유를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경 역시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데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정경이 피곤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와 언니에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하는지…….
눈을 떴다. TV를 틀려던 그녀의 눈에 그가 아끼던 DVD들이 보였다. 그가 두고 간 몇몇 짐들은 흔적처럼 치우지 못했다. 혹시나 엄마가 와서, 휑한 집 안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DVD가 그렇게 중요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짐을 옮기게 하면서도 DVD만은 직접 옮기는 재우에게 정경이 물었다. 정경은 소파에 앉아 그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쉬는 중이었다.
“나정경, 그래도 우리가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DVD의 가치를 모른단 말이야?”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DVD를 장식장에 천천히 넣기 시작했다. 넣은 것에도 순서가 있는지 그는 고심하고 있었고, 손길은 진지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정경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DVD일 뿐인데……. 게다가 원하기만 하면 컴퓨터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그것들 사이에서 한정판으로 나왔던 자신의 드라마 DVD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 죽으면 이거 보면서 내 생각해. 유품으로 남길게.”
정경의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 아니다. 나정경은 아마도 김재우 없인 못 살 테니까, 차라리 잘생긴 내 얼굴을 찍은 DVD를 남겨야겠구나.”
심장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재우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마지막 어느 날까지 그는 함께이겠지.
마지막 순간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겠지.
“진짜 그래 줄래?”
담담하게 묻는 정경을 보며 재우가 무릎으로 걸어 다가왔다.
“어. 그런데 다른 것 말고 이런 거 찍어야겠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그에게서 커피 맛이 느껴졌다.
딴생각에 빠졌던 정경이 벌떡 일어섰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고 싶었다.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을 들어서는 엄마와 언니들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정경아!”
“나무경!”
피곤한 정경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엄마,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분명히 언니들 퇴근하고 금요일에 간다고 했는데, 금요일에 김치 담는다고 준비하고, 반찬 만든다고 준비하고, 나무경 좋아하는 떡 만든다고 방앗간 가고, 무슨 명절 때보다 일을 더한 것 같아.”
엄마와 언니들이 들고 온 몇 상자의 짐들을 보고 놀란 무경의 물음에 다경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오라니까.”
정경이 얼음이 든 시원한 주스를 내왔다.
“정경아, 그 하얀 상자에 들은 것만 우선 냉장고에 넣을 건 넣어. 나머지는 우리가 정리해야 하니까.”
그러면서 나경은 거실에 누워 버렸다.
엄마는 이미 주스를 다 마시고 주방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경이 엄마의 팔을 잡았다.
“엄마, 내가 할게. 쉬어.”
“많이 쉬었어. 너는 못해. 내가 해야지.”
엄마는 일어서려고 했다.
“엄마, 우리 도착한 지 10분도 안 되었어. 우리 좀 쉬자. 무경아, 상자에 국이랑 끓여 왔거든. 그리고 엄마가 아예 도시락 싸셨다. 너희들 아침에 힘들게 밥 차리지 말고 그거 먹으라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국만 데워서 도시락으로 아침 먹어.”
언니들의 말에 결국 엄마도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어.”
무경이 후다닥 주방으로 갔다.
“엄마, 언니, 점심은 나가서 먹자. 다들 피곤하니까. 내가 예약할게.”
냉장고를 정리하고 온 정경의 말에 다들 힘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약은 잘 먹고 있냐?”
정경을 유심히 살피던 모친이 미간을 모았다.
“……어.”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피곤해서.”
모친을 향해 환하게 웃은 정경이 일어서서 주방으로 가려고 했다.
“하긴. 나정경은 일 한 번 시작하면, 정신이 없잖아.”
바닥에 누워 있는 나경의 말에 다경도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정경아, 너 그 약 먹을 때 무리하면 안 돼.”
정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경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러나 엄마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6 애썼다…
“그 여자랑 살고 싶다.”
그렇게 말하던 그가 잊히지 않는다. 다른 이야기도 했고, 그 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말 이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다정함을 그대로 믿었고, 그의 웃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솔직했다.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재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넘어지기 전에 그녀를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여전히 그가 욕심난다던 희진의 모습과 겹쳐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고, 자신은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다 어느새 상념에 빠진 것인지……. 고개를 흔든 정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나 그 사람이랑 헤어졌어.”
시골에서 올라온 엄마와 언니들에게 오늘 이혼을 이야기했다. 무경이 준비한 우황청심환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차분했다. 그러나 정경은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왔다.
엄마에게도, 언니들에게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사실 담담히 말을 하긴 했지만 엄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애썼다.”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엄마의 거친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만 생각해 주는 엄마의 마음이, 애썼다고 말해주는 엄마의 진심이 느껴져서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한 번에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는 종종거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굳어진 어깨를, 몰래 삼키던 한숨을, 안쓰럽게 보던 시선을. 그래서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시간을 확인했다. 엄마는 노트북을 들고 나가는 정경에게 딱 한 시간만 있다가 오라고 했다. 그때쯤이면 요리가 다 될 것 같다고, 그러면서 모친은 옷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고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서 계셨다. 그리고 그녈 향해 웃으셨다. 아플 만큼 환하게 웃으셨다.
“정경아.”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
김 PD. 재우다.
재우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정경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정경…….”
그녀의 무거운 한숨에 그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지 마.”
정경의 조용한 말에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
“나 환경 바뀌는 거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 한 번 정 붙이면 바뀌는데 시간 오래 걸리는 것도.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바꿔야 하는 거 싫어. 그러니까 피해 줘.”
재우가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경아.”
정경이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여기 자주 올 것 같아? 계속 올 거면 지금 말해. 내가 다른 곳 찾아볼게.”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저녁 같이할래?”
재우는 대답은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
“‘라르’ 갈래? 지금 예약하면…….”
진짜 예약이라도 할 생각인지 그는 급하게 휴대폰을 들었다.
“집에 엄마랑 오셨어. 나 오늘 우리 일 이야기했어.”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정경이 무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
애썼다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긴 내가 뭐라고……. ‘the story’나 ‘라르’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그냥 모른 척해. 우…….”
‘우리’라고 말하려던 정경이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담담한 그녀의 말에 재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정석이랑 일한다면서?”
그는 자리를 피할 생각도, 대화를 멈출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
“나 한정석하고 친해. 내가…….”
“나 배려하는 거야?”
정경이 그의 말을 잘랐다.
“어?”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이러지 마. 신경 써주지도 말고, 배려해 주지도 마. 다른 PD들한테 내 칭찬 할 필요도 없고, 내 대본 좋다는 이야기도 하지 마. 어차피 다른 방송국이야. 일 때문에는 더 이상 만날 이유도 없을 거고, 일이 있다 해도 내가 알아서 피할게.”
그녀가 담담히 미소 지으며 노트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 노트북이라 다행이다.
며칠 전 미영과 저녁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들을 때만 해도 그냥 소문이겠지 하며 설마 했었다. 지금에 와서 자신의 칭찬을 하고 다닌다는 그가 우습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제 괜찮아졌다고. 이제 담담해졌다고 말하는 오늘.
그와의 마주침은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인 것만 같아 편하지 않았다.
“넌 항상 담담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테이블 위에 자료를 정리하던 손이 잠시 할일을 잊은 듯 허공에서 멈추었다. 정경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정경은 대답 대신 묵묵히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테이블에 널린 자료를 정리하는 간단한 일이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재우가 그녀가 정리를 하려던 노트북을 닫고 손을 짚었다. 대답을 원하는 것이었나.
“…….”
“…….”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담담하지 않았으면, 달라져?”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머물렀다.
“…….”
“내가 내 감정에 솔직했다면, 내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의 결과가 다를 수 있었던 거야? 내가 당신들처럼 결혼이 형식일 뿐이라고……. 다른 여자랑 살고 싶다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의 끝이 달라질 수 있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정경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랬다면 우리가 이혼하지 않았을까? 아니, 결혼 같은 거 하지 않고,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운명이 있다면, 재우와 자신이 운명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들의 운명을 확인시켜 주는 조연에 불과했던 것일까.
후회했다.
왜 그날 그렇게 빛이 좋아 벤치를 떠나지 못했을까.
왜 그날 놀이터에서 마주친 아이가 넘어지는 것에 그토록 조바심을 냈으면서도 아이가 싫다고 했을까.
왜 그를 마음에 담았을까.
왜…….
그런데 이제는 담담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가 쓰게 웃었다.
“내가 담담하지 않으면……. 채 1년도 결혼생활을 못한 이혼녀라는 꼬리표도, 저러니 이혼했지 하는 수군거림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도, 돈 때문에 결혼했다가 이혼 당했다는 손가락질도, ……우리 부모님이 가슴 치며 한탄할 일도 안 만들었을까. 내 동생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자신의 아픔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무경이 떠올랐다.
정경이 잠시 말을 멈추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바라보았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목이 탄다. 그녀가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 나 하나로 바뀔 수 있는 거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김 PD님 원하는 대로 해볼게.”
화도 나지 않는다.
차분한 목소리에 재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김 PD님.”
“그렇게 부르지 마.”
“…….”
재우가 미간을 구겼다.
“왜 넌 날 처음 만난 날처럼 그렇게 불러? 왜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나를 보는 거야?”
어이없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노트북에서 그의 손을 떼어내고 일어섰다. 재우가 일어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잡힌 손목을 바라보던 정경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뭘 원해?”
희진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당당한 그들에게 정경은 항상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
“내가 담담하니까, 내가 이러니까, 뭘 해도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것 같아서, 헌신짝처럼 버려도 아무 말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를 선택한 거 아니야? 아이 낳지 말자고 해도 괜찮다 하고, 이혼하자 해도 아무 말 못할 것 같으니까…… 그럼 된 거잖아. 원하는 대로 다 됐잖아.”
탄식처럼 흐르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경아.”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차라리 처음 만난 것처럼, 아니,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 괜히 미련 남은 것처럼 그런 눈빛으로 나 보지 마. 그거 얼마나 웃기는 건 줄 알아?”
그녀가 그의 팔을 뿌리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행복한 척하지 말지.
내 책상 뒤 소파에 앉아 일 같은 거 하지 말지.
눈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서 눈을 맞추지 말지.
계속 거기 있을 것처럼, 평생 나만 바라볼 것처럼 그런 눈으로 날 보는 짓 따위…….
가슴이 답답하다.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려 정경이 잠시 숨을 참았다.
“가지 마. 얘기 좀 하자.”
그는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문득 그의 시계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의 생일에 자신이 선물한 것이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정경이 고개를 돌렸다.
“…….”
“…….”
“이제 괜찮아?”
도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걸까.
“예전엔……. 아파하는 거, 눈물 흘리는 것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어. 부담 주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사연 많은 사람들이니까, 아이까지 낳았던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데 차라리 맘 편하게 살아보라고 참았어. ……고작 8개월 살았던 내가 10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10년을 한결같았다는데, 나는 당신들의 그 10년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
그녀가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야. 너 만나는 동안 계속 그런 거 아냐.”
그의 말에 정경이 쓰게 웃었다.
“만나? 당신, 나랑 그냥 만난 거 아니야. 우리 결혼해서 함께 살았어. 당신한테는 우습겠지만 ……8개월을 살았어.”
그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짧았지만……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결혼을 후회한 적 없으니까, 괜찮은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었어. 어차피 헤어졌으니까 당신한테 날 버린 죄책감 같은 거 주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런데 이제 그것조차 마음에 안 들어?”
“미안하다.”
마지막까지 사과조차 하지 않았던 그였다. 자신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던 그였다. 자신은, 결혼했던 여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8개월 따위, 기억도 못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가기 위한 방법만 찾고 있던 남자였다. 정경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주위에서 이러지 마. 그 여자랑 살 준비 한다면서. 이러는 거 그 여자한테도 못할 짓이야.”
담담한 정경의 말에 재우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영과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는 또 있었다.
“김재우, 그 여자랑 방송국 옆 삼영아파트 계약하는 거 민숙 언니가 봤다더라. 민숙 언니도 이번에 계약금 받은 걸로 방송국 앞으로 이사 오려고 전세 알아보러 갔는데 거기서 둘이 그러고 있더래. 그년 완전 좋아 죽는 표정이고 김재우는 민숙 언니 보고 완전히 당황하더래. 그래서 민숙 언니는 그냥 모른 척 나와 버렸다고 하는데. 그 언니가 입은 무겁잖아. 그래도 무슨 일 있었던 거냐고 물으면서 네 걱정하더라.”
민숙이라면 재우와도 함께 자주 만났던 재우의 선배였다. 그 소식에도 그녀는 남의 일처럼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 여자한테 못 가. ……너 때문에.”
정경이 핏기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왜 이래?”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정경아.”
“그럼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그만해. 차라리 그 여자랑 살고 싶다고 했을 때가 더 나았어.”
그 여자랑 다시 살지도 못할 거면서, 날 평생 속이지도 못할 거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문득 요리를 하다가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여전히 유아용품 코너를 서성이면서 스스로를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요리를 못 하는 자신을, 아이를 싫어한다는 자신을 보며 다른 여자를 떠올렸을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경은 요리를 배우고, 아이 옷을 버리지 못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담담해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도,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가슴이 시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경이 떨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나 지금은 아무 감정이 없어. 그래서 이젠 진심으로 담담해졌어. 그러니까 그만해.”
“정경아.”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정경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
“우리 밥 먹으면서…….”
정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모았다.
“우리가 편하게 밥 먹을 사이였어? 우리 이혼했어. 그것도 당신이 다른 여자랑 살고 싶다고 해서 이혼했어. 그러니까…….”
여전히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도는데……. 어제 일처럼 그의 표정까지 선명한데…….
다음 말을 삼킨 그녀가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편안했어. 널 만나면 예전에 내가 죽게 힘들었던 시간이 꿈같더라. 편안하고 아늑했어. 네 옆에선 아무 생각 없이 숨 쉴 수 있었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피 터지게 싸우지 않아도, 미친 듯이 치열하지 않아도, 웃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게 좋았어. 나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 그것도 사랑이었는데…….”
후회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희진일 다시 만났어. 그 여자 내 아일 지웠다고 했거든. 우리 집 반대는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고, 날 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떠나겠다고. 미친놈처럼 매달려 보고, 공항까지 쫓아갔는데 뿌리치던 여자였거든.”
정경이 멈칫했다.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나 보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다.
“…….”
그녀가 테이블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했다.
지금에 와서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아이가 죽었다고 하더라.”
정경이 멈칫했다.
“내가 모르는 시간에 그 아이가 숨 쉬고, 웃고, 아장아장 걸어 다녔대. 이름까지 있었던 아이래. 그게 몇 년 전 이야기라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 하는 그 여자가, 여전히 아이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그 여자가……. 나 아니면 안 된다는데. 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가 안쓰러웠어. 넌, 나정경은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
정경의 얼굴에 허탈한 표정이 스쳤다. 문득 TV에서 보았던, 환하게 웃던 희진의 모습이 떠올라 정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나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해.”
“아니. 이제 내가 안 괜찮아. 나정경만 떠올라. 나정경만 궁금하고, 나정경이 뭘 하고 있는지 미친놈처럼 보고 싶어.”
“그게 아니겠지.”
정경이 천천히 돌아섰다.
“……?”
“내가 버린 여자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 방송국 사람들한테 날 칭찬하면서 가슴속에 죄책감 같은 걸 털어버리고 싶었겠지. 그런데 담담한 내가,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사과도 변명도 없던 그였다.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말하는데, 왜 상처를 헤집어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구는 것일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 봐.”
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진심이야. 그러니까 그만해.”
“나정경!”
“아까 오다가 부동산에 집 내놨어. 나한테 그런 과분한 위자료 필요 없어.”
이제 굳이 그 집에 살 이유가 없어졌다. 몰지도 않는 자동차를 애써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릴 필요도, 지우고 지워도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외면할 필요도 없어졌다. 명절이면, 부모님의 생신이면 재우가 보냈다는 거짓말을 하며 내밀던 선물도, 그걸 보고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아프게 보는 것도, 다른 여자와 지내고 있을 재우의 거짓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어졌다.
정경이 계단을 내려오며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경아.
“엄마, 지금 가고 있어요.”
정경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담담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재우를 뒤로 한 채 정경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