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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어서 와라.”
모친이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언니들은 집안 청소를 끝내고 욕실에서 씻고 있다고 했다.
“손만 씻고 나와. 얼른 먹자.”
정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여전히 주방에 있었다. 무경은 거실에 상을 펴고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정경 언니!”
반찬을 담느라 비닐장갑을 낀 무경이 그녀를 불렀다.
“맥주랑 소주 냉장실에 있거든. 그거 시원하게 마시게 냉동실에 넣어줘. 다경 언니가 샤워하러 들어가면서 오늘 마음 편하게 술 마실 거라고 나한테 그거 먼저 하라고 했는데 깜빡했어. 또 늦게 넣어놨다고 잔소리 좀 하겠다.”
무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경이 맥주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가져온 음식들로 가득 찬 냉장고에 빈 공간이 보였다. 한약 상자. 정경의 한약 상자가 사라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경이 나간 사이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정경이 깨끗해진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모른 척 집 안 청소를 하는 언니들이 치운 것이, 엄마와 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겨둔 재우의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DVD도, 그의 책들도, 그리고 남아 있던 몇 개의 사진까지 이제는 사라졌다.
엄마와 언니들이 아무렇지 않게 음식 장만을 하고 왁자지껄 수다를 떨어도 자신을 향해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경이 먹먹한 가슴을 숨기려 담담히 웃었다.

#7 끝이란…



집을 나서던 정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새로 이사 온 집이 나서는 순간은 좀 어색하다. 일부러 익숙해지기 위해 인테리어공사도 여러 번 와서 확인했지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새로운 변화에 기분이 설레기도 했다. 예전보다 크기가 반으로 줄긴 했지만 요리하기 좋은 주방구조도 만족스러웠고, 직접 고른 벽지도 마음에 들었다. 무경이 고른 파란색 문도 눈에 들어왔다. 무경과 산책을 하며 좀 걸어가면 공원이 있는 것도 알았고, 도서관이 가깝다는 것도 좋았다.
그와 살았던 집을 정리하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무경의 회사와 가깝고, 또 재우와 함께 했던 방송국, 집과는 멀어졌다. 그러면서 작업실도 옮겼다. 예전에 그녀의 작업실이 2년 계약이 끝나 비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배에게 연락을 했는데, 운이 좋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페인트만 새로 칠하니 예전 그대로였다. 책장으로 한쪽 벽을 채우고, 새 책상과 소파를 들어놓았다. 냉장고와 에어컨까지 들여놓고 나니, 작업실이 아늑하게 채워졌다.
마음에 들었다. 익숙함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편안함이 있어 그 작은 공간이 좋았다. 새로운 것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느지막하게 출발을 했다. 작업실 대신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압구정동의 한 카페였다.
“동서, 아니다. 이제 동서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미안. 일부러 이쪽까지 오게 해서.”
카페로 들어가자 문희가 반가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희는 재우의 형수, 그러니까 1년 전까지는 그녀와 동서지간이었다. 이혼 후에도 간간이 문자로나마 소식은 전했기에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그녀의 병원이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진짜 반갑네.”
“형님, 잘 지내셨어요?”
“그냥 언니라고 불러. 형님은 무슨,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냥 아는 언니라고 해. 여기 다 정리해야지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하지.”
알고는 있었지만, 정경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좋아 보인다고는 못하겠지만 살이 빠져서 더 예뻐졌다. 분위기도 있어지고. 머리 자르니까 어려 보여. 나도 좀 자를까.”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려는 문희의 농담에 정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통장 확인했어.”
“……네.”
“다 보낸 거 같더라.”
정경이 웃자 문희는 안쓰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동서, 바보니? 그걸 다 보내? 그리고 차라도 그냥 타지, 그건 왜 보내니? 이 집 그거 없어도 여전히 잘살 거야.”
“…….”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에휴.”
문희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벌컥 물을 마셨다.

정경은 집을 정리했고, 그 돈을 모두 재우에게 주고자 했다. 아무것도 남기도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재우는 절대 받지 않겠다며 만나자는 이야기만을 되풀이했다.
―정경아.
전화를 받은 재우의 목소리에서 살짝 흥분과 긴장이 묻어 있었다.
“집이 팔렸어. 문자로 계좌번호만 알려줘.”
정경은 담담히 용건만을 말했다.
―…….
“끊을게.”
―……정경아.
재우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
―계좌번호는 만나서 줄게. 만나서,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냥 문자로 남겨 줘.”
―이사 갈 집은 구했어? 어디야? 방송국하고는 가까워? 무슨 동이야. 여자 혼자 집 알아보러……?
“김 PD님. 그냥 문자 줘.”
정경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재우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만나자는 문자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정경은 문희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녀 역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이건…… 아버님이 보내시는 거.”
문희는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정경 쪽으로 밀었다.
“……?”
“동서가 보낸 그 돈, 내 돈도 아닌데, 그렇게 큰 돈을 내가 마음대로 처리하기 곤란해서, 아버님께 드렸어. 그게 서방님 몫이라고 해도 아버님이 전해주셔야 집안이 조용할 것 같아서.”
“네.”
문희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아버님께서 이거 동서한테 전해주라고 하셨어. 미안하단 이야기도 전해달라고.”
“…….”
정경의 표정을 본 문희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버님도 그러시더라. 동서는 절대 안 받을 거라고. 그런데 이 돈 안 받으면 아버님이 직접 오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더 불편한 일 만들지 말고 오늘 그냥 받아. 이거 동서가 보낸 돈하고는 별개로 아버님이 주시고 싶어서 주신 거래. 나 아버님 그런 표정 처음 봤어. 많이 안타까워하시더라.”
정경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셨다. 넘치게 잘해주셨고, 과분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것이 다른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만 가지고 싶었다.
“동서, 고민하지 말고 당당하게 받아. 솔직히 그 집이랑, 이 돈 다 받아도 부족하다고 생각해, 나는.”
문희는 정경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정경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진 아버님 심부름이야.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 이야기.”
“……?”
“힘들지?”
“…….”
정경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웃었다.
“말해 뭐하니? 당연한 걸. 나 좋은 이야기하러 온 거 아니야. 그래도 동서 알아야 할 것 같아서.”
“…….”
“이 상황에서도 아버님이랑 어머님은 아직도 동서한테 미련을 못 버리시고 계셔. 당연해. 동서 많이 좋아하셨으니까. 좋은 분들이지만 결국 자식 일에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더라. 그건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애 낳아보니까 알겠어.”
정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쁜 하트로 꾸며진 찻잔에 시선이 머물렀다.
“동서, 아니, 정경 씨.”
“…….”
“흠. 있잖아. 서방님하고 그 여자, ……집안에서 허락했어.”
자신도 모르게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한 육 개월 되었나. 허락이라기보다는 아버님은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포기하셨다고 봐야겠지. 그 깐깐한 양반이 그럴 정도면……. 어머님은 어쩔 수 없이 아버님 뜻에 따르시는 거고.”
아버님의 의견이 절대적인 엄한 집안이었다. 그래서이겠지.
표정관리가 잘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경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허락하면 바로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그러고 있네. 아직 그 여자 얼굴은 보지도 못했어. 우리도 TV로만 보고 있어.”
문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정경 씨, 그냥 잊어. 차라리 아이 생기기 전에 빨리 끝낸 게 나아.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다행일지도 몰라.”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며느리는 너밖에 없다고 그의 집안에서 계속 반대해 주길 바라기라도 것인가. 스스로가 우스워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가슴 한구석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리다.
“괜찮아?”
“……네.”
문희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서방님하고 그 여자 결혼 전까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실 건가 봐. 특히, 동서한테는. 이 봉투 주시면서 나한테도 입단속을 시키시는데. 그렇지만 난 그건 아니라고 봐. 그렇게 해서라도 동서랑 잘되길 바라시는 마음은 알지만 이미 끝났잖아.”
정경이 테이블에 놓인 하얀 봉투에 시선이 머물렀다.
“형님, 저 이거 안 받을게요.”
“어?”
“아버님이 여러 번 찾아보셔도 못 받아요. 이거 받으면…….”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봉투가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고, 진짜 돈을 보고 결혼한 여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울컥 화가 난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무언가를 설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다.
“아버님께는 그냥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주세요. 이제 따로 연락드리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요.”
“…….”
문희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동서 좋아했어.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자꾸 동서라고 불러지네.”
그렇게 자주 보진 않았다. 결혼기간이 짧기도 했고, 자신의 가족을 만나는 것을 유독 싫어했던 재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문희는 의사인 직업 때문인지 항상 정확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 둘 다 살가운 성격이 아닌 탓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며느리라는, 그리고 여자라는 유대감 때문인지 가끔 연락도 하며 편하게 지내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재우의 형, 재영 역시 그녀를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한 번 정우와 문희의 결혼기념일에 함께 여행을 가서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편하고 즐거웠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 집 사람들, 이혼 후에 이런 말 하는 것이 위로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정경의 표정을 읽은 듯 문희 역시 피식 웃었다.
“그렇지. 지금에 와서 이런 말 나도 웃겨. 그런데 우린 서방님이 동서랑 끝까지 잘 살줄 알았어. 동서랑 결혼하고 서방님이 그렇게 편하게,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 한 10년만이었나 봐.”
문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 양해를 구하며 휴대폰을 받았다.
“지금 만나고 있어.”
문희가 미소 지으며 정경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전화를 끊은 그녀가 말을 있었다.
“그이야. 이 사람도 많이 서운해하거든. 그때 말이야. 서방님이 그 여자 때문에 그렇게 정신 나가기 전에.”
그녀는 정신 나갔다는 표현으로 불만을 말하고 있었다.
“이이가 우리 넷이 또 한 번 여행가고 싶다고 여행지 알아보고 있었거든. 동서 결혼기념일 즈음에 같이 가자고.”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정경이 미소 지었다.
“동서, 나 고아다.”
“……?”
“그래서 동서 언니들 있는 거 너무 부러웠어. 이번에 자매들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알았어. 나 속으로 많이 부럽더라. 진짜.”
무슨 말인지 몰라 정경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고등학교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어렵게 공부했어. 결국 마지막엔 재영 씨 도움도 받았고. 그래도 그때는 재영 씨가 남편이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결국 도움은 받고 있어도 돈 때문에 그 남자가 싫었거든. 의사 되고 그 돈 다 갚고 일부러 지방으로 갔어. 그 사람 피해서. 그렇게 계속 피하고 피하다 어느 날 공항에서 그 남자한테 붙잡혀 와서……. 이렇게 돼 버렸지.”
문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래도 난 결혼은 절대 싫다고 했어. 너무 기우니까. 잘난 집안에서 국회의원에, 교수까지 한 분들이라, 그 부모님계서 반대하실 것이 빤하니까. 그이가 한 번만 만나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인사드리러 갔는데 부모님께서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시더라. 아직 학생인 동생도 있다고 해도,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이 드신 할머니만 계시다고 해도 괜찮다고 고생 많았다고 하시더라.”
고개를 끄덕인 정경이 미소 지었다.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그분들이 누군가와 비교해서 동서한테 마음을 주신 것은 아닐 거야.”
“……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해서 동서랑 서방님 이혼한 건 가족으로서, 형수로서는 많이 안타깝지만, ……여자로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여자로서……. 그녀가 쓰게 웃었다.
“…….”
“잘살아. 다 잊고.”
“……네.”
“다음에 만나면 언니, 동생으로 보자. 알았지?”
문희는 무언가 아쉬운 듯 두서없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정경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낯선 집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정경이 한낮, 아무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앉았다. 아이들이 놀던 흔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답답하다.
아니, 이제 진심으로 담담하다.

#8 세 번째 우연I



무경과 오랜만에 쇼핑을 나온 길이었다. 이사 간 집에는 의외로 필요한 것이 많았다. 그곳에서 쓰던 물건들은 대부분 처분했고, 짐을 줄이자고 예전 집에서 남은 식료품도 거의 다 썼더니, 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늘 하루 필요한 것들을 다 사기 위해 무경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마트에 갔다가 나온 김에 곧 있을 둘째 언니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도 들렀다.
“어, 수영아.”
“어떻게 알았어?”
“어?”
수영의 전화를 받던 무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영이가 이 근처에 있대. 우리 얼굴 보고 가자.”
무경의 말에 정경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아! 여기!”
수영은 남자와 함께였다. 남자도 금방 온 모양인지 둘은 서서 이야기 중이었다. 그는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살짝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정경을 바라보는 수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니!”
정경이 웃었다. 연극을 하겠다던 수영이 포스터를 붙이고, 무대를 만들던 시절, 정경 역시 단막극을 시작했다. 연극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경은 수영에게 맞는 역할을 찾기 시작했다. 단역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는 처음 시작한 정경 역시 무언가를 크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그때부터 수영은 그녀의 드라마에 단역 혹은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전 마지막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친구라는 나름 중요한 역할을 주었다. 그러나 너무 큰 역할에 대한 부담이었는지, 갑자기 생긴 카메라 울렁증이었는지, 결국 그 역할은 여주인공 소속사의 신인 연기자에게 돌아갔다. 결혼을 해서 예전보다 많이 안정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정경에겐 좋은 연기자였던 수영이 안타깝기도 했다.
“잘 지냈어?”
수영은 정경 앞에서 수줍은 듯 웃었다. 수영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니, 덥죠? 앉아요. 시원한 거 마셔요, 우리.”
정경이 웃었다.
“너도 앉아, 나무경.”
그러면서도 수영은 무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 여기는 우리… 도련…… 님.”
남자 역시 알고 나온 자리는 아닌 듯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잠시 반짝인 것 같다. 아마도 무경 때문이겠지.
서로 어색한 인사를 끝내고 차를 주문하기로 했다.
“난, 생과일주스, 언니는요?”
의견을 묻는 표정으로 수영이 무경과 정경을 쳐다보았다.
“난 아이스커피.”
무경의 말에 수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난 카페라떼.”
“나도 그럼 아이스커피 마셔야겠다. 아이스커피 둘이랑 따뜻한 카페라떼요.”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뭐 하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시동생, 강형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한참 어려 보이는 수영의 말에도 그는 무뚝뚝하지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정경이 살짝 웃었다. 이 분위기는 아마도 수영이 무경과 저 남자를 위해 만든 자리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차를 가져온 남자가 그녀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 역시 따뜻한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었다. 의외다. 남자들은 이런 날, 따뜻한 걸 좋아하지 않는데.
소개팅 자리가 된 듯 소개가 이어졌다. 잠시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는데 옆 테이블에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앉아서 쉬고 있었다. 부른 배에 손을 얹고 쉬는 여자를 보는 그녀의 얼굴이 복잡해지는 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 잠깐만요.”
잠시, 무경과 수영이 생일 선물을 고른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카페엔 그녀와 수영의 시동생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정경은 무심했다. 어쩌면 무경에게 유경완이란 남자가 있었기에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잠시 그의 존재를 잊었다. 그녀의 시선이 유모차에 머물렀다.
“아이 좋아해요?”
예전의 어느 날, 그날의 누군가처럼……. 남자가 그렇게 물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정경은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난 아이를 좋아합니다.”
강형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원래 좋아하지 않았는데, 조카가 생기고 보니 아, 내가 아이를 좋아했었구나, 라고 생각했죠. 원래 사람들은 잘 몰라요, 나처럼. 아이가 생기고 겪어봐야 알죠.”
그녀가 웃었다.
“난 시끄럽게 우는 것도 겪었는데 좋았어요, 아이가.”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아이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딱딱하던 얼굴이 아이를 이야기하며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본 정경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웃을 줄도 아는 남자인가 싶었다. 그 이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냥 유쾌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 * *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제는 스스로 진동을 울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오랜 동안 써오던 구식 휴대폰이다. 구식이라는 재우의 놀림에도 손에 익숙한 휴대폰을 버리지 못했다. 커플번호로 바꾸고, 휴대폰도 같은 걸로 하자던 재우에게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수명을 다한 것인지 이것도 자꾸 먹통이 된다.
모르는 번호였다.
“네.”
―정경아.
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경아, 잠깐 보자.
“……무슨 일 있어? 그냥 전화로 해.”
―만나서 이야기하자.
“…….”
정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는 거, 나 불편해.”
―……알아. 그래도…….
“특별한 이야기 없으면 끊을게.”
―정경아, 잠깐만……. 나, 나 처형들 만났어.
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도 문희가 꺼냈던 말은 이 이야기였나 보다. 언니들이 재우를 찾아간 모양이다. 정경이 잠시 눈을 감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 주변을 눌렀다.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난감함보다 먼저 드는 것은 속상했을 언니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언니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무경의 걱정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 정도는 당해도 되지 않나 하는 못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정도쯤은…….

미리 나와 재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경아.
“언니.”
가경이다.
“근무시간 아니야?”
―아, 잠깐 쉬는 시간. 혹시 무슨 일은 없지?
여운을 남기는 언니의 말에 정경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어.”
―혹시, 혹시 말이야. 누가 널 찾아오거나 그런 일은?
조심스러운 가경의 질문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없어. 지금 작업실이야.”
전화기 속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언니, 나 괜찮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탈이야.”
―몸은 어때?
“좋아.”
―좋긴. 너 괜찮다, 괜찮다 하다가 진짜 속병 생긴다.
“진짜 괜찮아.”
―어제 엄마랑 전주 가서 보약 한 제 지었어. 오늘 오후에 찾아서 택배 보내면 내일은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잊어버리지 말고 챙겨먹어.
언니의 당부에 정경이 쓰게 웃었다. 지금 형부며 조카 때문에 신경 쓸 일도 많을 텐데.
“……미안해.”
―아이고, 별소릴 다한다. 그런 소리 하려면 끊는다. 들어가!
툭. 가경이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던 정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