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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30분쯤 기다리니 재우가 도착했다. 카페에 들어서는 그에게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 밑에 붙어 있는 작은 밴드였다. 정경의 시선이 그 밴드에 머물며 잠시 표정이 흔들렸다.
“차 마실래?”
재우의 물음에 정경이 고개를 저었다. 커피숍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 같아 이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차를 주문한 재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니들 만났어? 혹시……?”
그러면서 정경의 시선이 그의 뺨에 있는 밴드로 향했다.
“아니야. 이건 다른 일 때문에…….”
재우가 자신의 상처를 만지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언니들 일은 미안해. 몰랐어.”
“괜찮아.”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사는 했어?”
그의 물음에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야? 집은? 혼자 다 한 거야? 너 짐 싸는 거 서툴잖아. 참, 처제랑 같이 살아? 처제는 잘 지내지?”
처제란 말에 정경이 미간을 구겼다.
“…….”
다른 이야긴 하지 않겠다는 표정에 재우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일은 미안해. 우리 일 이야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찾아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아니, 괜찮아. 가만히 계신 게 더 이상한 거지. 난 나정경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은데…….”
재우가 진심이라는 듯 예전처럼 웃고 있었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거.”
정경이 DVD 상자를 내밀었다. 언니들이 청소를 하며 버린 것 중 이것은 가져왔다. 한정판이라 그가 아끼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드라마는 뺐다.
재우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DVD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는 이것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겠지.
“DVD…….”
재우의 얼굴에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 정리했구나.”
뭔가 아쉬움이 남는 목소리였다. 그가 금세 표정을 지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진우 알지? 우리 집들이 때도 왔는데……. 이번에 영화 찍었는데 시사회 오라고 전화 왔더라. 좀 있으면 시작하는데 갈래? 너 하진우 좋아하잖아.”
그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김 PD님, 아니, 재우 씨.”
재우라고 부르자 그는 반가운 듯 눈을 크게 떴다.
“……?”
“나 얼마 전에 형님 뵈었어. 집 문제도 처리했고.”
“들었어.”
“그리고…… 집안에서 양희진 씨 허락했다는 것도 알아.”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재우 씨 탓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재우 씨가 이러는 거 모두에게 아픈 일일 뿐이라는 거…….”
“너도 아파?”
“…….”
“정경아.”
우습게도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나 지쳐. 솔직히 지금까지 내 감정 추스르기도 힘들었어. 그런데 또다시 이런 상황에서 재우 씨를 설득해야 하는 거…… 이건 나한테 못할 짓이라고 생각 안 해? 우리 다 끝난 일이잖아.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영화 시사회 함께 가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정경이 담담히 말했다. 떠난다고 했던 것은 그였다. 그런데 그는 이제 와서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굴고 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 말은 다 과거형이네. 이제 감정 정리가 다 된 거야?”
그가 쓰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우 씨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 당신 가족들은 그 여자와 당신을 허락했다고 했어. 누구는 당신이 그 여자랑 살 집 알아본다는 이야기도 하더라. 그런데 왜 당신은 다른 말을 해?”
무표정한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헤어지고 친구처럼 지내고, 그거 못 해. 뭘 바라는 건지 모르지만 나한테 더 이상 이러지 마.”
“그 여자랑 헤어졌다면, 나 다시…… 받아줄래?”
“아니.”
어렵게 꺼낸 듯한 재우의 말에 비해 정경이 단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난 이미 재우 씨와 끝난 사람이야.”
냉정한 정경의 말에 재우의 얼굴이 구겨졌다. 정경은 담담히 그를 마주했다.
“너 그런 여자 아니란 거 알아.”
“뭐?”
정경이 못 알아들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 무언가에 적응하는 거 어렵듯이 쉽게 잊지 못하는 거 안다고.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돼.”
정경의 시선이 그의 시계에 머물렀다 다시 창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 실내도, 이 상황도, 그리고 이 남자 역시.
정경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나 그 여자랑 헤어졌어.”
정경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다시는 언니들이 찾아가는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정경이 일어섰다.
“걱정하지 마, 언니. 아무 일 없어. 괜찮아.”
다경의 걱정스러운 안부전화를 끊은 정경이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그를 만나고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차가운 태도에 그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의 상처를 배려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시작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았고, 원하던 배우가 캐스팅 된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중간, 어두운 작업실에서 탈출해 올 수 있는 공원이 생겼다는 것도 좋았다.
2년 사이 작업실 옆에 작은 공원이 생겼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지만 분수도 있고, 놀이터와 운동기구도 있어 저녁이면 작은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산책 나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 주말엔 프리마켓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원래는 건물을 지으려고 공사 중이던 공터였던 것 같은데. 주위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더니 이런 작은 공원으로 바뀐 모양이다.
산책을 마친 정경이 카페에 앉아 따뜻한 카페라떼를 마시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작업실 맞은편에 생긴 커피숍은 동네의 자유로운 분위기처럼 조금은 소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잠시 쉬기에는 괜찮았다.
정경이 편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생활이 일상이었던 것처럼 지난 시간이 조금씩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렇게 시간은 흘러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정경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안녕하세요?”
생각에 잠겼던 정경이 고개를 들었다.
“……네.”
대답을 하면서도 정경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연기자들과 PD, 그리고 방송국 사람들까지 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강형입니다.”
그가 정경의 표정을 읽은 듯 낮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누구지……. 프로덕션 사람인가. 외모가 연기자 같기도 하다.
“이수영 씨 시동생.”
“아.”
그제야 생각난 듯 굳어 있던 정경의 얼굴에 미소가 스몄다.
#9 세 번째 우연II
강형은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도 되는지를 묻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수영인 잘 있죠?”
정경이 묻자 강형이 잠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날 이후 만난 적이 없어서……. 아, 형수님 생일 선물만 집으로 배달시켜 보냈죠. 아마 그걸 더 좋아했을 거 같은데.”
한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어려워하는 수영에 비해 깍듯이 형수님이라 부르는 그를 보며 정경의 얼굴에 웃음이 스몄다.
“이쪽에 일이 있으셨나 봐요?”
정경이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단정한 정장 차림의 그가 더 튀는 느낌이다. 직업 때문인지 무경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정경은 좀 낯설기도 하고 그래서 눈길이 가기도 했다.
‘재우 역시 정장보다는…….’
생각이 미치자 정경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업무차 왔다고 하면 능력 있어 보이겠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후배한테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그런데 이 동넨 몇 년 만에 와서 그런지 많이 달라져서 좀 헤맸어요. 그래도 학교 다닐 때는 가끔 오기도 했던 것 같은데.”
강형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경이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무경처럼 직장인들의 반듯함이 보였다.
“…….”
“…….”
갑자기 누군가 그의 앞에 섰다.
“선배, 갑자기 급하게 들어가더니 여기였어요?”
젊은 여자였다. 여자 역시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강형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일순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 장난스럽게 웃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자는 잠시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눈치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잠시 정경에게 양해를 구한 강형이 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정경 역시 이제는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시간을 확인하며 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렸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그들은 한참을 이야기했고, 휴대폰에 무언가를 메모하던 여자는 먼저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강형과 정경의 눈이 마주쳤다. 강형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확연히 달라지는 그런 모습이 조금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
그녀의 표정을 읽은 그가 물었다.
“갑자기 표정이 달라져서 좀…….”
“좀?”
“신기해요.”
“아, 일이니까.”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일이라고…….”
“나한테는 그게 그거라서.”
정경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피식 웃는다.
일어나겠다고 말할 때를 놓쳐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어울리지 않게, 강형은 주문한 차가 든 쟁반을 들고 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빈 잔을 치우고 따뜻한 카페라떼 한잔을 놓고 자신의 앞엔 얼음이 가득 든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접시에 놓인 케이크까지.
“차가운 거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따뜻한 걸로 주문했어요. 나도 같은 걸로 마시고 싶지만 오늘은 좀 무리예요. 미안합니다.”
뜬금없는 사과를 하는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예전에 그녀와 같은 카페라떼를 주문했었던 것 같은데. 정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배려에 그녀가 잠시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배려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정경은 강형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기분을 지웠다.
“감사합니다.”
정경이 담담히 인사를 했다.
따뜻한 차를 좋아한다. 차가운 걸 천성적으로 싫어한 것인지, 여름에도 얼음 든 음료수엔 손이 가지 않았다. 적당히 따뜻한 차가 좋았다.
“…….”
“…….”
정경이 차를 마시며 무심하게 유리창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휴대폰은 괜찮아요?”
“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휴대폰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때 나랑 부딪혔었는데……. 휴대폰 떨어뜨렸잖아요.”
“아.”
고개는 끄덕였지만 정경은 그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떨어뜨렸었나.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강형은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픽 웃었다.
“회색 짧은 반바지 트레이닝복에 흰색 운동화, 운동하고 온 것인지 머리는 좀 젖어 있었고, 그리고 텀블러랑 휴대폰을 들고 급하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6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고, ‘the story’와 편의점 중간쯤이었나.”
대수롭지 않게 웃는 그녀를 보며 강형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정경이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미영의 집들이가 있었던 날인가 보다.
“그때, 내가 붙잡으려고 했던 건 모르죠?”
“……?”
“보기보다 걸음이 빠르던데.”
그가 피식 웃었다.
“두 번까지는 우연, 세 번이라면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색한 상황에 정경이 먼저 일어서려 했다.
“차 잘 마셨어요. 수영이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결혼하려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이야기하는 무미건조한 그의 말투에 정경이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
“생각이 달라서, 원하는 바가 달라서 결국 결혼까지는 못했어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힘들었어요. 드라마처럼…….”
드라마를 이야기하며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술 마시고, 울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쓴 드라마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당연히 결혼을 할 줄 알았는데……. 사소한 문제가 커지고, 결론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헤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친구는 유학을 가길 원했고, 난 정착하길 바랐죠. 지금은 친구는 아니더라도, 가끔 소식은 들어요. 결혼해서 아주 잘살고 있다는 소식.”
“…….”
위로를 바라는 것인가. 정경이 대답해 줄 말을 찾지 못하고 담담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어요.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죠.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그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가능한 거니까요.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 쉽진 않겠지만, 난 중요한 건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형이 단호한 표정으로 담담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위로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상황을 아는 남자였기에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왜……. 굳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다. 다만 그의 관심을 막고자,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올까 피곤하다.
정경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다시 웃었다.
* * *
한가한 오후, 작업실로 택배가 배달되었다. 발신인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택배에 정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공기청정기였다. 누굴까 싶었다. 무경이나 미영이기를 바랐지만,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녀가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정경아.
반가워하는 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택배가 왔어. 잘못 온 거 같아.”
―잘못 간 거 아니야.
다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려보낼게.”
―너 거기서 작업하면 밤에 기침했잖아. 그냥 써.
“보낼게.”
그는 막무가내였다. 재우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했지만 정경은 단호히 전화를 끊었다.
결국 문희에게 전화를 걸어 공기청정기를 돌려보냈다. 그녀 역시 재우의 집으로 택배를 돌려보내,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쉰 문희는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택배를 되돌려 보내고 나니 온몸에 기운이 빠진다. 하루면 몇 번의 감정이 오가는지 모르겠다. 편안한 일상이라고 느껴지다가도 이런 조그만 일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만다.
그런데 김재우. 그에겐 모든 것이 쉬운 모양이다.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도, 또다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녀에겐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었다.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학교를 졸업하고도 여전히 자리도 잡지 못한 채 막막한 미래를 바라볼 때도, 동생 무경이 졸업을 하기도 전에 취업이 되어 원룸에서 연립주택으로, 거기서 또 작은 아파트로 옮겨갈 때에도, 미안함과 함께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했던 언니와 무경에게 들었던 것이 아니라도 어렵사리 단막극 극본공모에 당선되고, 차차 드라마작가로 자리를 잡아가면서도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세상에 공은 없다’던 모친의 말처럼 무언가 쉽게 내 손으로 들어오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는 참 쉬웠다. 조용히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마음속에 쉽게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면 항상 그곳에 있을 것처럼 그는 그렇게 시선을 마주하고는 했다.
그래서였나 보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항상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라는데 너무 쉽게 들어왔던 그라서 너무 쉽게 믿어버렸나 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너무 아팠고, 시린 공허함을 남겼다.
자신의 쓴 드라마 여주인공들이 실연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조용히 눈물만 흘리라고도 했고, 어떤 장면에선 소리 내어 펑펑 울라고도 했다.
그러나 다 거짓일 뿐이다. 너무 슬프면, 너무 아프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에서 알게 되었다. 너무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쳐도, 토해낼 수 있는 것은 떨리는 한숨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경험을 통해 더 현실적인 글이 나올 수 있다니, 쓴웃음이 나온다.
TV를 켰다. 고정된 것처럼 요리채널에선 서바이벌 요리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경이 요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미영아.”
―나정경, 어째 이렇게 연락도 없이 조용하냐?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한 PD가 막 쪼아? 내가 뭐라고 좀 할까.
한 PD와는 대학선후배로 친하게 지내는 미영의 말에 정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오랜만에 들어가는데 감각 떨어졌다고 욕하면 어떻게 해? 미리 미리 준비 좀 하려고.”
―오랜만은 무슨, 한 편하면 다들 그 정도는 쉬는데. 그리고 한 PD는 좋아하던데. 며칠 전에 만났거든. 입이 귀에 걸렸어.”
피식, 그의 성격상 입이 귀에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
―아무튼 나와라. 바람 좀 쐬자. 민숙 선배도 너 보고 싶어 하고.
“민숙 선배?”
정경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야, 너 진짜……. 원래 때린 놈이 다리 못 뻗고 자는 거야. 너처럼 맞은 사람이 알아서 피하는 게 아니고.
미영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미영아, 그냥 작업실로 올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정경…….
미영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알았어. 대신 맛있는 거 사줘라.
농담 섞인 미영의 말에 정경이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민숙은 재우를 통해 알게 되어 함께 종종 만나던 사람이다. 통하는 것도 많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음도 편해져서 나중에는 재우보다 자신과 더 친해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입도 무겁고, 정경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이제는 입조심해야 할 일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여전히…… 그와 연관된,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는 한 걸음 물러나게 된다.
이것도 괜찮아지겠지.
빈손으로 오겠다던 미영은 치킨, 보쌈, 떡볶이, 튀김에 김밥까지 두서없는 안줏거리에 소주, 맥주, 복분자주와 콜라까지 한 가득 들고 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꺼낸 것은 양주였다.
“이 양주는 이거 신혼여행 갔을 때 사온 건데, 서창이랑 마시긴 좀 아까워서.”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너무 더워.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 귀찮을 것 같아서. 나 아침부터 굶었더니 마트에 있는 거 다 먹고 싶더라. 우선 맥주만 냉동실에 넣어. 냉장고에 있던 거 사오긴 했는데 얼음처럼 차게 마시자.”
미영이 선풍기 앞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정경이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 더운 줄 몰랐는데 밖이 덥긴 한가 보다.
“피자 먹을까 했는데……. 새로 생긴 데가 괜찮더라.”
정경이 웃으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아냐, 아냐, 나 어제 강은이한테 갔다가 피자 질리도록 먹었어. 나중에는 고추장이라도 있으면 발라서 먹고 싶더라.”
“큭, 강은이는 요즘 뭐 해?”
“그대로지 뭐. 나랑 같이 하나 말아먹고, 다시 케이블로 갔어. 이번에 케이블 ‘싱글 러브&레시피’라던가 아무튼 그것도 같이하기로 했나 봐. 걔도 이제부터 10억 모아서 책 쓰겠다고 난리도 아니다.”
들어본 적 있는데, 좀 전에 본 것인가. 정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잠깐 쉬었다 시작하자.”
미영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신발을 벗고는 땀을 식혔다.
그사이 정경은 책이 널린 테이블을 치우고 미영이 사온 안주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샤워까지 하고 나온 미영이 시원한 맥주가 반가운지 박수를 치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참, 어제 김 PD도 봤다. 여전히 일은 잘하는데, 일만 끝나면 술이라더라. 술꾼 이종삼이 고개를 저을 정도면 알만 하지.”
미영은 얼마 전부터 김 PD의 이야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프로페셔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듣기보다 자신에게 듣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그녀 나름의 판단일 것이다. 그만큼 요즘 그에 대해 들리는 소문이 많은 모양이다.
“어.”
정경은 대수롭지 않은 듯 컵을 가져왔다.
“양희진도 봤어.”
“…….”
멈칫하던 그녀는 얼른 씁쓸한 표정을 지웠다.
“같이 본 건 아니고, 따로. 양희진은 강은이한테 갔다가 봤어. 걔 이 근처에 ‘H&J 키친’ 차린 거 알아?”
“……아니.”
H&J. J…….
담담한 표정 아래 심장이 저릿하다.
“나도 어제 알았는데 육 개월쯤 되었다나 봐. 꽤 잘나간대. 세상엔 권선징악이란 게 없는지, 그런 애들이 더 잘나가고. 더 잘살고. 얼마 전에 스타다큐 찍은 것도 반응 좋다더라.”
“……어.”
형식적인 대답이다. 미영이 그녀 앞에 맥주를 따서 내밀었다.
“배고플 때 샀더니 좀 많긴 하다. 누구 부를까? 아니다. 퇴근시간인데 무경이한테 전화해 봐.”
“서창 씨는?”
“이번 주 신입사원 연수. 일주일짜리야. 드디어 일주일은 자유야. 일찍 들어오란 잔소리에서도 해방이고, 집 좀 깨끗하게 정리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졌다.”
신이 난 듯 웃던 미영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는 무경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맥주에 금방 시원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경이 오겠다고 했지만 이미 수영장 들어가려고 옷 갈아입는 중이라고 했으니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양주와 맥주 세 캔을 비운 미영은 기분 좋게 소파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정경 역시 이번에 무경이 선물한 푹신한 일인용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있었다. 파란 소파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예전 생각난다. 너 이 작업실 처음 얻고 나서, 우리 며칠 동안 무경이랑 수영이랑 밤새 술 마시곤 했잖아.”
“참, 수영이는 잘살지?”
“응.”
“마스크도 괜찮고, 목소리도 좋았는데 왜 연기 관뒀는지 모르겠어. 나중에 라디오 DJ 같은 것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정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경이랑 같이 와서 계약하고, 내 작업실을 가진 것처럼 신나더라. 막 두근거렸었어. 무경이랑 계속 여기 구경하면서 히죽거렸어. 이제 잘나가는 작가 친구, 작가 언니 두는 건가 해서.”
그랬다.
첫 작업실이 설레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에 며칠을 미영과, 어떤 날은 무경, 수영과 함께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정경 역시 그때를 생각하며 아련하게 미소 지었다.
“맞아. 우리 그랬었지.”
미영이 ‘그때가 좋았는데’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