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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꽃낙엽




시작하다 1화
01.Prologue


날이 맑았다. 따뜻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졌고, 바람에 살랑이는 초록 나뭇잎은 그림 같았다.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반짝거리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한 풍경, 지저귀는 새의 사랑스러운 노랫소리. 전부 동화처럼 감미로웠다.
큰 나무 아래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아이들은 왁자지껄한 소리를 냈고, 어떤 아이는 나무를 타다가 다쳤고, 어떤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칼싸움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 얌전한 아이는 나무 아래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아이는 나무를 잘 탔지만 주목받는 것을 싫어했고, 그런 이유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었다. 그 대신 아무도 없을 때,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널따란 나뭇가지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주위 풍경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아이가 동네에서 나무를 가장 잘 탄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날 아이는 도통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날이 평소보다 따뜻해 나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운 책을 들고 나왔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새 우는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자꾸만 거슬렸고, 살갗에 닿는 바람도 성가셨다. 결국 읽히지 않는 책을 덮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를 발견했다.
아이는 멜빵바지 앞주머니에 새끼 새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평소 둥지의 위치를 알고 있던 터라 망설임 없이 나무를 탔고, 무사히 꼭대기에 다다랐다. 둥지에 새끼 새를 내려놓아 주고 아이는 평소처럼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다리를 흔들며 따뜻한 햇살을 쬈다.
하지만 아이는 간과해서는 안 되었다. 그날은 평소와 다른 날이었다는 사실을.
책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나른했던 탓일까.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아이는 깜빡 졸았고, 찰나의 순간에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강한 바람을 버텨 내기엔 아이의 몸이 너무 작았다. 둥지에서 떨어지던 새끼 새처럼 나무 아래로 떨어지면서야 정신이 들었지만, 그땐 이미 추락하고 있었다. 아이는 눈앞이 새하얘졌다. 중간중간 부딪히는 잔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속도를 줄여 주었지만 아이의 몸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떨어졌다, 계속.
아래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과 마주칠 때까지.



02. 예전에도 그랬듯이


다시 만났을 땐 잊지 않으려 애썼던 것을 잊고 말았고, 또다시 만났을 땐 잊고자 했던 어떤 것도 잊지 못했다.

야근이 어느덧 보름째였다.
탕비실 벽에 붙은 달력을 보며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 보다가 깨달았다. 기가 막혀서 절로 탄식이 나왔다. 매일매일 잠에서 깨어나면 일하고, 그러다가 잠들고, 해가 뜨면 또다시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하는 천편일률적인 생활을 반복하면서 날짜 감각이 아예 없어졌다.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 들어가지 못한 날을 세기 벅찰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계절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런 내 상황에 야근이 놀라운 것은 아니었지만, 퇴근하지 못하고 회사에 처박힌 지 보름째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숨을 내쉬며 보온 텀블러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에너지 음료 한 캔을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에스프레소 샷 두 개를 내려 그 위에 또 부었다. 빨대를 꽂아 몇 번 저어 시원한 온도로 맞춰 들고 탕비실을 나왔다. 탕비실을 이용하는 만큼 월급에서 깐다고 하면, 아마 나는 한 푼도 못 받다 못해 도로 뱉어 내야 할 것이다. 내 자리, 탕비실, 화장실, 그리고 수면실. 그 이상 벗어나지 못한 지도 벌써……. 이제 더는 세기도 싫었다. 구내식당까지 내려가 볼 여유만 생겨도 소원이 없겠다.
“문 대리, 그거 치워!”
“네가 드시냐, 내가 드시지.”
자리에 앉아 빨대를 입에 물고 한 모금 쪼옥 빨아들이자 옆자리 김 대리가 기겁을 했다. 에너지 음료에 에스프레소 섞은 미친 액체를 어떻게 마시냐고, 볼 때마다 비위 상한다며 기겁을 하는 김 대리는 내가 이걸 마시는 심정을 몰라서 그런다. 상식적인 일정을 받아 일주일에 세 번씩만 야근하면 되는 복 받은 인간들은, 괴이한 음료를 치우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거다. 에너지 음료, 고카페인 음료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인간을 위한 생존형 마약이다.
스페이스 바를 눌러 렌더링 돌린 것을 플레이하며 텀블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겨우 두 시간밖에 잘 수 없도록 못살게 군 결과물을 보다가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분명히 프레임 하나씩 움직이면서 문제없는 걸 확인하고 렌더링을 걸었는데, 중간 부분이 또 튀었다. 울고 싶다. 하지만 징징거리고 신세나 한탄하며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이것만 수정하면 끝이라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이펙트가 제대로 들어가도록 수정하고 최종 렌더링을 걸었다. 한 시간 걸린다고 뜨는 창을 확인하며 다시 음료를 한 모금 쪼옥, 빨아들였다. 한 시간이면 렌더링 되는 동안 미리 점심을 먹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너 그러다 죽어.”
그렇게 말하는 옆자리 김 대리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내 손에 들린 텀블러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입에서 빨대를 떼어 내며 그랬다.
“차라리 죽으면 끝나겠지.”
이렇게 살다간, 카페인에 질식하자고 만든 이 괴상한 음료 때문이 아니라 과로로 죽을 거다. 어차피 죽으면 잘 거니까 지금 부지런히 살겠다는 열정 같은 건 이해도 못 하는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처음엔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던 순간을 후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금요일에 회식이래.”
“안 가.”
“감독님 난리 날걸?”
“실장님.”
“아, 좀 넘어가.”
좀 넘어가라고 투덜거리는 김 대리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탁상 달력을 다시 확인했다. 수요일. 회식은 무슨 회식. 회식 가자고 할 거면 양심적으로 일이나 좀 줄여 주든가. 이런 일정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회식 같은 건 갈 수 없다. 게다가 이 컨디션에 술을 마시면 한 모금에 고꾸라질 거다. 우리 편집실의 수장조차 이런 나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다.
편집실을 나와 복도 끝의 탕비실로 다시 돌아왔다.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귀소 본능처럼 탕비실로 돌아와 선반에서 컵라면을 꺼냈다. 이것도 지겨워 죽겠다. 끼니는 컵라면 아니면 샌드위치 아니면 배달 음식인데, 지금은 점심시간도 저녁 시간도 아닌 데다 식당을 찾아 왔다 갔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기운 빠지는 일이라 선택지가 없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젓가락을 꽂아 놓은 컵라면 용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술 사이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느덧 한숨도 습관이었다. 워낙 밤낮이 없고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한 데다 수면실을 갖춰 놓는 것이 당연한 직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적당히 일을 나눠 소화하면 되었기 때문에 야근이 잦아도 그냥저냥 다닐 만했다. 다닐 만하던 회사가 지옥이 된 것은 갑작스러운 합병이 이루어진 얼마 뒤부터였다.
문 기사에서 문 대리라는 직급이 붙고, 연봉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오르고 남들이 들으면 다 알 만한 중소기업의 정직원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이 더 괴로웠다. 편집 파트에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편집실에서 내가 제일 야근이 많았다. 항상 시간이 없었다. 유달리 일이 많아서도 아니었고, 내가 손이 느려서도 아니었다. 마감이 코앞으로 닥친 일만 던져 주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나에게만.
문제는,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는 거였다. 그래서 더 분했다.
굿이라도 해야 할까.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 멍하니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입구를 고정하고 있던 젓가락을 빼서 반으로 톡, 갈랐다. 다 익은 라면을 불어 식히며 이번 일이 끝나면 연차를 내고 온종일 자고 말 거라고 결심했다.
어디 앉을 여유도 없이 라면을 먹었다. 먹는다기보단 해치우는 느낌으로 면을 씹었다. 절반쯤 먹었을 때, 갑자기 탕비실의 문이 열렸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층 어느 부서의 사람과 마주쳐도 탕비실에서 식사를 때우는 내 모습 따위엔 놀라지 않으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러나 돌아본 곳을 확인했을 땐, 입에 문 라면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켰다. 라면을 먹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고 한 손에 어설프게 든 채 그대로 굳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 정갈한 슈트를 입고 닫힌 문 앞에 곧게 서 있는 모습이 하루가 멀다 하고 치열하게 밤을 새우는 우리 층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네 층 탕비실을 쓰면 될 것을 굳이 여기까지 내려온 저의를 모르겠다. 먹던 밥도 체하라고 일부러 그러나.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밥맛이 떨어져서 결국 손에 든 컵라면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우리 층 커피 머신이 고장 나서요.”
신사적인 목소리로 내어놓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에 남은 라면을 붓고 자동 분쇄 버튼을 눌렀다. 아무 대화도 끼어들지 못할 만큼 요란한 소리가 탕비실 안을 거칠게 울렸다.
커피 머신이 고장 났으면 바로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가면 될 일이지, 무려 세 층이나 아래까지 내려올 건 뭔가. 일 제대로 하고 있나 감시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잠이 부족해 있는 대로 예민해져 어떤 말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한 공간에 있다간 날 선 대화만 하게 될 것 같아서 대충 묵례를 하고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회식 이야기 들었어요?”
스쳐 지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직원 관리라는 게 참 무섭다. 이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안부처럼 주고받아야 하는 사회생활이 원망스러운 것은 지금 이 순간 나뿐만은 아닐 거다.
“술 강요 안 할 테니까 와요. 작년 연말 이후 처음인데.”
아닌가. 원망스러운 것은 나뿐인 것이 맞나.
작년 연말. 그 네 글자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숨이 막힌다. 나에겐 여전히 가슴 철렁한 기억을, 이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속이 욱신거렸다. 이 사람에겐 별거 아니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돌이켜 보았자, 나만 유난스럽고 서러운 것들. 그러다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회식 시간만큼 마감을 늦춰 주기라도 할 것인가. 술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회식을 오라 가라 강요하는 것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못 해서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지.
나는 오늘 마감만 끝낸다고 다가 아니었다. 또 월요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이 순서를 기다리듯 줄 서 있었다. 술도, 밥도, 회포를 푸는 것도 다 됐고, 잠이 가장 필요해 딱 죽을 지경이라 내일 연차를 당장 수리해 달라고 우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상사라는 게 직원을 착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회식까지 나오라고 말한다.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상사에게 갖춰야 할 예의고, 도리고, 다 때려치우고 나가 버릴까 발을 뗐다가 다시 쿵, 바닥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울컥 치밀었다, 무언가가.
“일부러 그러십니까, 연 팀장님?”
안 하는 게 좋을 말이 결국 입 밖으로 튀어 나가 버리고 말았다. ‘연 팀장’ 세 글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정면의 탕비실 문에 고집스럽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바로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로 돌렸다. 그 역시 정면을 향했던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쳤다.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그 눈동자가 너무 익숙한데, 한편으론 또 너무 낯설어서.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야근으로 괴롭히는 거, 유치합니다. 싫은 얼굴도 의연하게 마주칠 줄 아셔야죠.”
처음엔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예전을 후회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 예전. 그러니까 매일같이 야근하느라 이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내 상사, 그를 알았던 더 오래전의 그때를.
“누가 그래요, 싫어한다고.”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기가 막힌다.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이러면 더 미친놈이지. 일부러 야근시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합병 직후에도 일이 많아 야근은 잦았지만 버틸 정도는 되었다. 그것이 집에 들어가는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지독한 괴롭힘의 수준이 된 시점은 너무나 명백했다. 작년 연말 회식, 우리 편집실이 속한 타임라인팀의 가장 꼭대기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연 팀장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된 그날 이후부터였다. 바보가 아니라도 안다. 적어도 나는,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를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한 번 미워하는 게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 뭐가 어려울까.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더 울컥했다.
“그런 건 말로 아는 게 아니죠.”
그냥 느껴지는 거지, 예나 지금이나.
마주쳤던 시선을 떼어 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편집실로 돌아와 텀블러에 담긴 각성용 음료를 연달아 여러 모금 꿀꺽꿀꺽 삼켰다. 답답한 속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묵직한 것이 가슴을 틀어막는다.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 예상 못 했다. 아마 세 시간이라도 더 잠을 잔 상태였다면, 상사에게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학자금 대출도 다 못 갚았다. 회사에 갑질하면서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은 오로지 하나, 연 팀장이 내 작업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뿐. 마음 같아선 그걸 믿고 더 설치고, 패악을 부려 보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런 짓을 하기엔 내 간이 너무 작았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구는 학자금 대출도 다 갚지 못해 허덕이며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롭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미국에서 스카우트 받은 수재라 외부 업체를 자기 아래 직속 팀으로 데리고 와 새로 팀을 꾸린다. 상위 매출을 찍어 능력을 증명해 보이니 회사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렇게 칭찬 일색으로 안정된 성공 궤도를 밟아 간다.
열등감 때문은 아니었다. 부러워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억울했다. 어쩔 수 없는 감정에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억울했다. 그뿐이었다.

최종 아웃풋을 전송하고 컨펌이 떨어지자마자 반차를 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집까지 버스 타고 왕복하는 그 시간마저 아까워 또다시 수면실로 향했다. 회사에는 수면실이 있으면 안 된다. 여차하면 수면실에서 자면 된다는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일을 쌓아 주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연봉이 많아지면 뭐하나, 쓸 시간이 없는데. 학자금 대출이 빠져나가니 다 내 돈같이 느껴지지도 않고.
그런 한탄을 삼키며 이제 회사 침대가 아니라 거의 내 방 침대처럼 느껴지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언제나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고, 시트며 베개가 깨끗하게 세탁되어 좋은 향기가 나는 수면실이 그나마 내 삶을 덜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 마감 이틀씩 뒤로 미룬단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대신 회식 참여 안 하면 연차에서 깐다니까 괜히 빠지지 말고 다 와. 특히 문 대리, 너.’
연차 쓸 시간이나 주고 말하지. 기가 막혀서. 노동청에 찔러 버릴까.
다시 속이 끓어서 오려던 잠이 통째로 달아났다. 그냥 말을 말 것을, 괜한 말을 한 것이 후회됐다. 그냥 아무 말 없이 회식 당일에 일이 바쁘다고 빠졌어야 했다. 괴롭히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감정은 단지 분노가 아니었다. 서러움이었다.
감정의 골이 깊어도 내가 더 깊어야 할 사이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지만, 다시 만나면 기필코 미워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미움을 받는 건 도리어 나였으니까. 예전에도 그랬듯이.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내며 눈을 감았다. 다시 잠이 오길 기다렸다. 노력한 만큼 점차 의식이 흐려졌다. 꿈의 문턱을 넘어 들어가며 몸을 더 웅크렸다. 따뜻한 품을 찾듯 그렇게. 그리고 이내 꿈에 빠져들었다.

날이 맑았다. 따뜻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졌고, 바람에 살랑이는 초록 나뭇잎이 그림 같았다.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반짝거리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한 풍경, 지저귀는 새의 사랑스러운 노랫소리. 전부 동화처럼 감미로웠다.
새끼 새를 둥지로 돌려보내 준 아이는 그렇게 떨어졌다, 계속.
아래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과 마주칠 때까지.



03. 미워지지 않는 (1)


“문보름!”
눈을 번쩍 떴다. 눈만 뜬 게 아니라 몸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머릿속은 여전히 뿌옇고 흐린데, 귀만 칼같이 열린 것은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결코 가볍게 흘려들어선 안 되는 목소리, 그것은.
“책상 들고 나가!”
망했다.
울상을 지으며 앞의 책상을 들고 어기적어기적 뒷문을 향해 걸었다.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등 뒤에 닿았다가 한둘씩 눈치 보듯 떨어져 나갔다. 다른 시간도 아니고, 교실 밖으로 쫓겨나는 친구를 보는 것조차 찰나의 시선만 겨우 주고 떨어져야 하는 눈세 시간에, 존 것도 아니고 꿈까지 꿀 정도로 숙면해 버리다니. 미쳤다, 미쳤어.
명을 재촉하는 바보짓에 한숨을 쉬며 복도에 책상을 놓고 아래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다. 지금부터 오늘 수업 진도를 열 번 베껴 써야 했다. 이 시간 내에 끝낼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오늘도 잠은 다 잤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에서 깨는 순간은 기억나도 잠이 드는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꿈의 끝은 기억이 나도 시작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꿈 같은 게 아니라, 달랑 책상만 들고나와 투명 의자에 앉아서 노트에 빼곡히 글씨를 채워 넣으며 벌서야 하는 지금의 내 현실이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글씨를 쓰다가 우뚝 멈췄다. 나를 부르는 눈세의 목소리에 깨어나기 직전까지 꾸고 있던 꿈이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깨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 마지막으로 느꼈던 온기. 그것이 손끝에, 그리고 온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어?’
떨어진 곳은 초록 잔디밭이 아니었다.
한동안 꾼 적 없어서 잊고 있던 꿈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 하도 자주 꿔서 다시 꿈을 꾸자마자 익숙하다는 것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내 방 침대에 누워 꾸는 꿈인지, 수업 중에 깜빡 잠들어 꾸는 꿈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나무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깨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꿈은 다름 아닌, 한창 키 클 때 자주 꾸던 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