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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2화
03. 미워지지 않는 (2)


내 키는 초등학교 때 한 번 훌쩍 크고, 중학교 때 또 한 번 훌쩍 큰 뒤 성장을 멈췄다. 딱 4센티만 더 힘을 내고 멈춰 주지 애매하게 이게 뭐냐고 투덜거렸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다시 키가 크려나 하는 희망이 생겼다. 그 생각에 미치자 어설프게 앉은 다리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잠시 잊히는 것 같았다.
“이게 웃지?”
“아야!”
웃고 있었나 보다. 나도 몰랐다. 수업 끝나는 종이 친 줄은 더더욱 몰랐다.
“쌔앰…….”
책으로 불시에 얻어맞은 정수리를 감싸고 최대한 불쌍한 눈망울을 뜨고 올려다보는데, 어느새 눈앞에 눈세가 사라졌다. 불쌍한 척 빌고 사정해도 소용없는 냉혈한이란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려던 시도가 처참하게 불발로 끝났다. 한 방 날리고 바로 자리를 떠 버리다니, 매정해라.
입을 삐죽거리며 지체하는 사이 우리 반은 물론 복도의 모든 문이 열리며 수업을 끝낸 과목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알 만하다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재빨리 책상을 들고 열린 교실 뒷문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너, 왜 나 안 깨웠어! 이씨!”
번개처럼 내 자리로 돌아가 책상을 내려놓고 짝꿍 놈에게 버럭 하자 뻔뻔한 얼굴로 돌아보더니 “눈세 시간에 조는 너의 깡다구가 감명 깊어서 그냥 둬 봤지.” 했다. 그렇게 말하는 눈이 정말로 즐거운 놀잇감을 찾았던 것처럼 보여 더 괘씸했다. 졸고 싶어서 졸았겠냐고, 잠이 쏟아지는 건 내가 어떻게 못 하는 생리 현상인데! 내 본능이 눈치가 없으면 깨어 있는 정신 있는 놈들이 깨워 줘야지! 이것들은 친구도 아니야!
씩씩거리면서 마침내 다시 만난 의자에 털썩 앉자 짝꿍 놈이 삐죽거리는 내 입술을 집게손으로 잡았다. 으이씨, 하고 고개를 저어 털어 내자 혼자 재밌다고 자지러졌다. 그 순간 머리 위에 다른 손 하나가 턱 얹어졌다.
“티 안 나게 잘 졸다가 갑자기 책상은 왜 걷어차?”
내가?
“왜?”
“그걸 내가 아냐?”
고개를 돌려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정언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삐죽거렸다.
이게 다 떨어지는 꿈 때문이다. 그래서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그런 꿈 꾸면 쪽팔리는 거다. 아니, 그럼 바로 깼어야지 왜 나무에서 떨어지고도 깨지 않아서 뻔뻔하게 아무 일 없던 척 잡아떼지도 못하고 눈세한테 걸렸을까. 밤잠까지 잃는 벌을 받고. 내 팔자야. 울적하게 어깨가 축 처졌다.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정언이 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다. 아니 근데 이것들은 가뜩이나 울적한 나를 왜 이렇게 못살게 굴어.
“매점 가자, 내가 빵 쏜다.”
“어머, 짝꿍아!”
머리끝까지 신경질이 났던 것이 언제냐는 듯 마음이 눈 녹듯 풀렸다. 짝꿍이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눈을 빛냈다. 간식 최고. 군것질 최고.
“나, 초코롤 빵.”
먹을 거 주는 사람은 더 최고.
“안 일어나냐.”
“더 잘 거야. 우리 훈민이가 사다 줄 거니까.”
그러면서 난 매점을 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뽐내며 책상 위에 냉큼 엎드렸다. 15분이나 주어지는 꿀 같은 쉬는 시간이었다. 지금 당장 눈을 붙이면 10분은 더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군것질도 포기할 순 없었다. 밖에 나가서 벌 좀 섰다고 든든하게 먹은 아침이 다 꺼져 배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또 시켜 먹고 지랄이야, 저게!”
버럭 욕을 지르면서도 사다 줄 것임을 안다. 눈꼬리를 접으며 헤헤 웃었다. 나에게 지목당한 짝꿍이자 우리 훈민이는 사내놈이 징그럽다며 툴툴거려도 결국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들어줄 것이다. 마음 약한 놈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부릴 수 있는 호기였다. 아니, 그리고 자고 있는 거 다 알면서 안 깨워 준 덕분에 걸린 것 아닌가. 지금 내 다리가 아픈 건 의자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니까 그도 책임이 없진 않았다.
“넌 밤새 뭐 했길래 병든 닭처럼 졸아?”
잠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원래도 잠이 많아서 밤늦게까지 깨어 있지 못한다. 그런데 어제는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게 잠들었다. 그래서 한 시간만큼 잠이 부족했다. 이렇게 졸린 것은 잠이 부족한 탓이고, 잠이 부족한 이유는.
“음…….”
마땅하게 설명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매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짝꿍과 정언을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어 걸음 더 걸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창가에 시선을 두다 보니 창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기분을.
어제도 그랬다.
어느덧 왁자지껄하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짝꿍과 정언은 물론, 반 애들 대부분이 긴 쉬는 시간을 교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내기 위해 뛰쳐나간 덕에 교실이 한적했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팔을 베고 누웠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시선의 끝에 닿은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로 직전까지 눈에 보였던 그림 같은 풍경이 감은 눈앞에도 보였다. 나른한 봄 햇살에 당장에라도 노곤하게 잠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여전히 귓가에 닿는 것 같은 음악의 선율을 느꼈다.
잠들지 못했던 밤처럼, 나는 엎드려서도 잠들지 못했다.

“야아, 나 빼고 하냐? 치사하게!”
“그러게 누가 처자래? 이거나 먹고 있어라.”
내가 잠들었던 사이 자기들끼리 인원을 다 채웠다. 억울함에 발을 구르는 내 손에 초코 우유 하나를 쥐여 주고 코트 안으로 뛰어드는 놈들의 뒷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쉬는 시간에 잠 좀 잤다고 끼워 주지도 않는다. 점심시간에 축구하고, 농구하는 것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창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에게 스탠드에 앉아 구경이나 하라니!
“저리 가서 앉아 있어.”
손을 휘적거리며 쫓아내는 것이 괘씸해서 심통이 났다. 모래 먼지가 날리는 코트 한구석에 고집스럽게 서 있었지만 치사하게도 자기들끼리 편짜는 것에만 열을 올렸다. 아니 그러면 운동장으로 나오기 전에 말을 하든가, 뛰어다니면 땀이 난다고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수고까지 하는 동안 왜 아무도 말 한마디 안 해 주고 놔뒀던 건데, 왜?
“점심시간 다 지나겠다. 그냥 대충 팀 짜.”
“아, 연 회장. 너는 선택권이 없어!”
편짜는 시간이 길어지자 한 놈이 말을 꺼냈지만 단번에 기각당했다. 그놈이 사실 이 전쟁의 원인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누가 그를 가질 것이냐에 따라 승패는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하고, 일주일 빵값을 건 혈기 왕성한 남고딩들의 눈엔 양보라곤 조금도 없이 팽팽했다. 대충 손바닥 뒤집고 엎어서 편 가르면 될 것을 굳이 팀 대표가 가위바위보로 한 명씩 데려가자고 열을 올렸다. 그놈을 차지하기 위한 한 치의 양보 없는 기 싸움이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불쑥 끼어들며 해맑게 그랬다.
“6대 5로 하자!”
“너, 아직 거기 있냐?”
“이씨.”
이번엔 내 말이 단박에 기각당해 시무룩하게 물러났다. 아니, 균형이 안 맞으면 상대 팀은 여섯 명이 하면 되잖아. 꼭 이런 데서만 정의를 찾지. 숙제를 베낄 때는 찾아볼 여지조차 없던 양심들이, 내기가 걸린 점심시간 스포츠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저렇게 정의로웠다고, 참나. 결국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한 재윤이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모래 먼지를 피해 터덜터덜 스탠드로 피신했다.
투덜거리면서 우유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쪼옥 빨아들였다. 나쁜 것들. 농구도 안 끼워 주면서 고작 이딴 간식으로 내 마음이 어떻게 풀릴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
“……맛있네.”
맛은 있네. 나쁜 것들. 그러게 6대 5로 하자니까. 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지. 이를 갈고 있으니 경기가 시작됐다. 매일같이 일등으로 점심을 해치우고 코트를 찜해 놓는 혁수가 드리블하며 뛰어가는 모습부터, 패스한 공이 훈민에게 옮겨 갔다가 호기로운 3점 슛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오는 광경까지 지켜보다 혀를 찼다. 저래서 어떻게 이기려고. 흥.
“우리 자리 있다!”
“과자 뜯어 빨리. 어, 보름아!”
갑자기 불린 이름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윤지였다. 여자애들은 귀엽다. 그래서 여자애들이 부르는 내 이름도 너무 귀엽게 느껴진다. 욕 아니면 감사하지. 사내놈들이 성까지 붙여서 거칠게 부르거나 이름 앞 두 글자만 부를 때와 달리 왠지 뒷목이 간지럽다. 원래도 간지러운 이름인데 이름만 떼고 불리니까, 더.
“오늘은 같이 안 해?”
“응, 저놈들이 나 버렸어.”
하지만 간지럽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선을 긋고 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라도 투정을 부리고 싶던 참에 잘 만났다고 툴툴거리자, 안됐다고 응원이나 하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금세 시선을 거둔다. 응원이라니. 너도 지고, 거기 너도 지고, 모두가 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왜 세상 모든 게임엔 위너와 루저가 있는가. 모두가 위너거나 모두가 루저면 좋을 것을. 혼자 속으로 그렇게 구시렁거리며 다시 시선을 정면을 향해 돌렸다.
어느새 스탠드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는 점심시간에 바람을 쐬기 위해 무리 지어 나온 학생들 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주변에선 과자가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간간이 감탄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스탠드의 앉은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한 것을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앉은 곳이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자리가 좁아진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였다.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과 내가 있을 곳이 아닌 듯한 어색함을 느끼며 초코 우유를 한 모금 더 꿀꺽 삼켰다. 매일매일 봐도 적응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오로지 한곳을 향해 있는 이 광경이.
그 한곳이라는 건 다름 아닌 우리 반 농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코트였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구경할 만한 거리는 못 된다. 선수들의 경기도 아니고, 남고생들의 농구 수준이 뭐 다 그렇지.
코트를 누비는 수많은 놈들이 만화나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한껏 취해 자세를 잡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별로 멋있진 않았다. 바깥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코트 안의 일원이 되어 뛰고 있을 때도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 있어 이미 알고 있었다. 코트 안을 누비는 그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이나 함성의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그 안에 우리 학교 명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학교에는 명물이 하나씩 있다. 그 명물은 잔디밭 운동장이라는 외적인 것이기도 하고, 피도 눈물도 없어 교육청에 이틀에 한 번꼴로 항의가 들어가는 구에서 가장 괴팍하기로 소문난 선생님이기도 하고, 가장 예쁜, 혹은 전국에서 가장 못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복이기도 하고, 번화가에 나가면 유명 기획사에서 모셔 가려고 안달이라는 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학교의 명물은 지금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제 팀원으로 탐냈음은 물론 관객들의 시선까지 빼앗은 인물.
우리 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위 좀 놀아 본 놈들. 나 좀 봐 달라고, 나 잘나간다고 소문내고 광고하는 부류, 혹은 비뚤어지고 반항하는 자기 자신에게 취해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런 부류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목받을 짓은 단 하나도 하지 않고도 알아서 시선이 따라붙는 정반대의 인간상. 그를 보려고 스탠드에 앉은 게 아니었더라도, 결국 자연스럽게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사람.
이렇게 온전하게 쏟아지는 시선을 그 역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거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원래 가장 돋보이는 것에 눈이 가는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가장 큰 것, 가장 빠른 것, 가장 빛나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눈도 한 사람만을 좇고 있었다.
그 순간 골을 넣은 그가 고개를 돌린다. 화사한 얼굴이 햇살 아래에서 반짝 빛난다. 햇살이 눈부신 것인지 활짝 웃는 그 얼굴이 눈부신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스쳐 가는 그 얼굴 한 번에 스탠드가 술렁거리는 듯했다.
그가 팀원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러다 다시 상대 팀의 공을 빼앗아 드리블하며 골대를 향해 나아가고. 여유롭게 슛을 넣어 성공하는 모든 광경이 그림 같았다. 같이 뛰어다닐 땐 괜찮은데. 같은 팀이면 신나고 다른 팀이면 약 오르고 말 일인데. 여기 이렇게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모든 광경이 새삼스러웠다.
다 마신 우유갑을 손에 쥐고 반대쪽 손으론 턱을 괴고 멍하니 코트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을 휘어뜨리고 사랑스럽게 활짝 웃었다. 정확히 이쪽을 돌아보면서. 아니, 이쪽을 보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을 뿐이다. 그러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듯한 그의 시선에 가슴이 이미 철렁했다.
“야, 활력이…… 이 맛에…… 지.”
“오늘…… 다!”
시간과 공기가 멈추는 듯했다.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란도 들리지 않았다. 현실이 멀어지듯 아득한 기분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멎었다.
“아, 예비 종. 이거 내가 다…… 다.”
“치사…… 나도…… 래!”
소란스러움이 멀어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창가 앞에 앉아 있는 그도, 코트를 누비며 모두를 향해 웃어 보이는 그도.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 유독 멀게 느껴졌다. 숨이 멎는 기분은 오로지 나의 일방적인 감상일 뿐이었다. 내가 있는 방향을 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그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착각하기엔 이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우리 동네 가장 안쪽 골목엔 근사한 이층집이 있다. 하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다란 잔디밭이 펼쳐진 정원이 보이고, 한편에 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나무에 걸린 작은 나무 그네가 있었다. 정원의 봄은 꽃이 가득 피었고, 여름엔 녹음이 짙었고, 가을엔 낙엽이 그림 같았고, 겨울엔 눈 내린 하얀 풍경이 눈부셨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 냄새가 물씬 나는 집 안의 풍경이 펼쳐진다. 바닥이며 천장이 온통 나무로 된 1층엔 거실과 주방 그리고 안방이 있었고,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2층엔 가장 넓은 방이 하나, 창고로 쓰이는 가장 작은 방이 하나, 가장 넓은 방과 창문을 나란히 둔 방이 하나 있었다. 두 방은 창문을 열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서로의 방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이는 구조였다. 이층 중간에 거실을 하나 두고 그렇게 세 개의 방이 있었다.
그 이층집 풍경을 내가 이렇게 자세하게 아는 이유는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이층집인 것은 딱히 부유하고 여유로운 환경이라서가 아니었다. 꽤 넓은 이층집이고 동네에서 가장 돋보이는 집이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대단한 부잣집인 줄로 오해하는데, 그냥 집만 좋을 뿐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저 이 집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집에서 나는 나고 자랐다. 그리고 지금 그 이층집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트 위에 빽빽하게 적고 또 적으며 마침내 마지막 한 번을 남겨 놓았다. 시험에 이 단원이 나오면 절대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비 없는 눈세. 눈세는 눈이 세 개라 눈세다. 눈이 세 개라 절대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해선 안 되는데, 무덤을 판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 어디 탓할 곳도 없었다.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뻐근한 손목을 돌리고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굳은 목을 풀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덧 밤 12시였다. 뻑뻑한 눈을 비볐다. 얼른 마저 쓰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펜을 쥐는 순간이었다.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음악 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음악 소리. 형태가 없는 그것이 바람을 타고 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기타 소리가 근사하고, 그 선율에 맞춰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따뜻했다.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걸터앉았다. 살짝 고개를 빼고 옆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틀어 놓은 음악이 밤바람을 타고 내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인가 생각했는데,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음악CD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부터 창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옆방도 겨울이 지나 날씨가 풀리면서부터 창문을 열어 놓고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방 모두 창문을 열어 놓으면 간혹 옆방의 소리가 내 방으로 넘어오기도 했다. 2층 거실을 사이에 두고 있어 방문의 거리는 그다지 가깝지 않았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이상하게 그 사이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한쪽 다리를 창틀 위에 올려 무릎을 세웠다. 창틀에 등을 기대어 앉아 새벽과 어울리는 음악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다. 달이 밝아 밤이 눈부셨다.
기타의 선율과 달콤한 보컬의 목소리, 휘영청 밝은 달, 자정의 따뜻한 봄바람. 모든 것이 낭만적인 밤이었다.
어제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게 잠든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취한 채 창밖을 바라보느라 잘 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다. 지금도 그랬다. 마저 숙제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뿐, 심장이 간지러운 감각을 느끼며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음악이 끝나고 다음 트랙으로 넘어간다. 천천히 다시 시작되는 반주를 듣다가 감은 눈을 떴다. 그리고.
“아…….”
눈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보였다.
“아, 안녕?”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창문을 닫으려 했던 듯 문을 잡은 채 가만히 나를 돌아보고 있는 얼굴이 낯설었다. 그 낯선 얼굴은 인사를 돌려주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숙제하느라. 눈세 시간에 걸렸잖아.”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은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냥 들려서 들은 건데, 그가 틀어 놓은 음악을 훔쳐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사도 받아 주지 않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수업 시간에 걸려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전부 지켜봤기 때문에 다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변명처럼 다시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마주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래서 더 가슴이 요동쳤다.
창가 앞에 앉아 있는 그도. 코트를 누비며 모두를 향해 웃어 보이는 그도.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 유독 멀게 느껴졌다. 지금의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옆방, 한 방향으로 나란히 나 있는 창문,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데. 학교에서의 그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 다정함 속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향해 웃었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비록 그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사이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