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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3화
03. 미워지지 않는 (3)
한집에 사는 것이 싫은 걸까.
왜 나한테만 딴사람처럼 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이유를 찾고 또 찾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다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의연해지고 침착해진 거다, 처음에 비하면. 처음엔 고민에 밤잠을 설쳤고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닐까 눈치도 적지 않게 봤다. 지금이야 내가 무엇을 해도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크게 마음 쓰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불쑥불쑥 의문이 치밀었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교생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일이었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말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답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또 잠을 설쳤다. 별 대꾸 없이 창문을 닫고 들어가던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밤새 잠자리가 불편했다. 숙제하느라 늦게 잠든 것으로도 모자라 잠까지 설쳤는데, 하필 오늘 주번이라 30분 일찍 등교해야 해서 컨디션이 더 최악이었다. 토스트를 대충 입에 구겨 넣고 터덜터덜 현관문을 나섰다. 물도 없이 뻑뻑하게 꿀꺽 삼키며 정원 한쪽에 놓인 자전거를 끌고 대문을 열던 순간, 앞을 가로막는 까만 그림자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 깜짝이야!”
귀신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 부주의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기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이 튀어나와서 더 놀랐다.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왼쪽 가슴을 붙들고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과하게 놀라 팔짝 뛴 나를 덤덤하게 바라보는 인물은 제 잘못은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란 내가 잘못이지, 그냥 집에 들어오던 사람이 잘못이겠나 싶다가도 나만 놀라 팔짝 뛴 유난이 부끄러워 마음이 불편했다.
그에겐 재수 없을 만큼 반듯한 습관 몇 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언제나 남들보다 빨리 등교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살게 된 이래 나란히 등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와 나란히 출발하고 도착하는 것이 싫어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일찍 가는 건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에게 내가 그만큼 영향력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부터 그런 착각은 하지 않았다.
그와 등교 시간이 겹치는 것은 내가 주번일 때뿐이지만, 비어 있는 식탁을 보며 이미 등교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평소 등교하던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예외적인 모습에 웬일로 조깅을 이렇게 늦게 다녀왔나 하는 의문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안녕!”
자존심도 없다. 어제 그렇게 무참히 씹혀 놓고 또 잡초처럼 꿋꿋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놀란 것이 무안한 마음이기도 했고, 그냥 여기서 지나치면 앞으로도 영영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자고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도 당연히 그는 내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어. 안녕.”
아니, 그러는 줄 알았다.
내 곁을 지나쳐 가면서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되레 내가 더 놀랐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화들짝 뒤돌아 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진짜 인사한 거 맞냐고, 그를 붙잡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시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쳐다본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빈자리에 시선을 두고 가만히 멈춰 서 있기를 한참. 다시 천천히 대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자전거에 올라타면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가로 움직였다. 이렇게 비굴하고도 자존심이 없을 수가. 인사 주고받은 게 뭐 별일이야, 전교에서 그와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건 나뿐일 텐데. 꾹꾹 페달을 밟았다. 마음속에 뒤치며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 밟으면서.
“세탁 안 해 줘도 된대.”
체육복 하나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 체육복을 낚아챈 혁수가 체육복에 코를 박고 꽥 소리를 질렀다.
“억! 이걸 세탁해 달라고 하면 완전 사기꾼 아니냐?”
“빌리는 놈이 말이 많다?”
“예, 연 회장님. 고오맙습니다.”
구시렁거리면서도 체육복 상의에 머리를 집어넣는 혁수의 옆으로 그가 지나간다. 체육복을 두고 온 놈이 있으면 반 전체가 운동장 열 바퀴를 뛰어야 하는 독사 같은 체육 쌤 때문에 누구 하나 체육복 두고 오는 일은 대형 사고다. 다행인 것은 우리 반 회장의 존재였다. 그는 누구에게라도 체육복을 빌려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와, 피죤 냄새.”
모두 무사히 체육복을 갖춰 입고 체육 수업 몸풀기로 운동장 두 바퀴를 뛰었다. 반 바퀴쯤 달렸을 때 뒤에서 혁수가 하는 말에 힐끗 돌아보았다.
“쉐리거든.”
피죤 아니다, 인마.
“남자 새끼 주제에 어떻게 옷에서 향기가 나냐?”
“야, 문보한테서 떨어져, 오염시키지 마!”
더 바짝 붙어 킁킁거리던 혁수가 억 소리를 내며 멀리 떨어져 나간다. 내 앞에서 뛰다가 속도를 늦춰 나와 혁수 사이를 갈라놓은 정언에게 오물 취급받고 펄쩍 뛰더니, 곧장 다른 사람에게 불똥이 튀었다.
“연 회장, 이 새끼 너 일부러 그랬냐?”
썩은 냄새가 나는 체육복을 빌려다 준 상냥한 놈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상냥한 거 맞겠지. 일부러 사물함에서 며칠이나 홀대당하던 체육복을 골라 빌리진 않았을 테니까. 음, 웃으니까 좀 수상하긴 하다.
뒤에서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그가 앞으로 뛰어가고, 그 뒤를 혁수가 죽어라 쫓아간다. 그 쓸데없는 짓을 구경하는 것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 바퀴를 금방 다 뛰었다. 아침에 집 앞에서 마주친 사람과 전혀 딴판, 완전히 다른 사람인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아서 내 기분만 애매해진다.
사실 남학생들에게 향기 나는 체육복이라는 것은 유니콘만큼 귀한 존재였다. 대부분 주말에 한 번 세탁하면 토요일까지 사물함에 처박아 놓는다. 그러니 첫 수업에서 땀이 밴 채 쭉 입는 거고, 남학생들 사이에선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더러우면 깔끔한 체하는 놈이 이상한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도리어 내가 별종이 되었다.
내가 지나치게 깔끔하게 구는 것은 맞다. 체육복은 매일매일 빨아서 새것으로 챙겨 다녔다. 그러기 위해 애초에 두 벌을 구입했고, 땀이 난 교복을 입고 수업을 듣는 찝찝함을 방지하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뛰러 나갔다. 옷에 배인 섬유 유연제 냄새가 땀 냄새보다 훨씬 좋았다. 그래서 유난을 떨었다.
그런데 우리 반에서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친. 연 회장, 너도 피죤 쓰냐.”
그의 등을 한 대 후려치며 경악하는 혁수의 외침에 혼자 속으로 대답했다.
걔도 쉐리다, 인마.
같은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는 옷에 같은 섬유 유연제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줄 맞춰 국민 체조를 하면서 결코 꺼내 놓을 수 없는 말만 속으로 삼켰다. 그 역시 체육 수업이 있는 날 바로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세탁하는 별종이었다. 나처럼 교복까지 갈아입고 점심시간에 뛰어다니는 유난은 떨지 않더라도.
중간고사 수행 평가 중 하나인 50미터 달리기 기록을 재고 스탠드로 돌아와 앉았다. 출석 번호대로 두 명씩 뛰고 그다음엔 혼자 뛰든 다른 사람과 알아서 짝을 지어서 뛰든, 이번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가장 빠른 기록으로 쳐준다는 말에 뜻밖에 다들 열심히 매달렸다.
나는 다시 뛰어 봤자 크게 기록이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욕심내지 않고 스탠드에 앉았다.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기록 단축을 위해 애쓰는 반 애들을 구경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나오느라 피곤한 몸이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노곤하게 녹았다.
“문보! 나랑 뛰자!”
깜빡 졸려는 찰나 언제 온지도 모를 재윤이 내 손목을 턱 잡았다.
“응? 나 뛰었는데.”
“나랑 기록 비슷하잖아. 둘이 뛰면 기록 잘 나온다?”
마지못해 끌려 나갔다. 나는 아닐 테지만 재윤이라도 기록 단축이 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고개를 거세게 털어 나른하던 정신을 깨우고 순서를 기다려 한 번 더 뛰었다. 놀라울 것 없이 내 기록은 처음에 뛴 것보다 조금 느렸고, 재윤의 기록은 빨라졌다.
“야, 문! 나랑도 뛰자!”
스탠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음 놈에게 바로 잡혔다. 그렇게 끌려 나온 김에 여러 명의 기록을 단축해 줬다. 내 기록은 첫 기록보다 고작 0.1초 빨라졌다. 수행 평가 등급이 오를 정도도 아니었다. 남 좋은 일만 실컷 시키고 체력이 바닥났다.
남들은 달리기할 때 옆에 다른 사람과 함께 달리면 경쟁 심리가 생겨서 더 기록이 잘 나온다는데, 나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 없이 똑같았다. 원래 그렇다. 열등감이나 승부욕, 또는 경쟁의식이 별로 없었다.
점심시간마다 농구며 축구 따위를 하는 것도 이기는 재미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뛰어다니는 것이 재밌고, 공을 뺏고, 빼앗기고 골을 넣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과정이 즐거워서일 뿐이었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 이기고야 말겠다는 승부욕은 별로 없었다. 공부도 그렇다. 공부에 흥미 있는 학생은 드물지만 그래도 특정 누구보단 성적이 잘 나왔으면 싶은, 그런 최소한의 비교 대상이 있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나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중간고사 때 나보다 등수가 낮았던 친구가 기말고사 때 나보다 위로 올라간다고 해서 상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보다 잘난 대상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나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본 채 걸음을 옮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앞을 보며 걷기를 잠시, 다시 시선이 돌아갔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 한쪽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절로 눈이 갔다. 매점과 여학생 반이 더 가까워 이미 매점엔 여학생들로 가득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몇몇 아이들이 그에게 이온 음료를 건네주는 것이 보였다. 괜한 사양과 거절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 드는 모습이 여유로웠다. 이온 음료를 시작으로 출출하겠다며 빵도 하나 주고, 우유도 하나 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서 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인식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 무언가 불쑥 나타났다.
“어, 초코 라떼!”
“오다 주웠다.”
언제 저 바글거리는 매점을 뚫고 다녀온 건지, 재윤이 내 눈앞에 초코 라떼 캔을 흔들며 그랬다. 줍기는 무슨.
“또 같이 뛰어 줄게!”
그거 같이 뛰어 줬다고 짠돌이 김재윤이 초코 라떼를 사 주다니. 남는 장사다. 혹시라도 무를까 봐 재빨리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는데 머리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턱 얹어졌다. 비어 있는 손을 들어 위에서 흔들거리던 것을 잡아 눈앞으로 내려서 보니 바나나 우유였다.
“이 먹을 거라면 용왕한테 간도 내줄 놈아.”
“헤헤.”
바나나 우유를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내 덕에 기록 0.7초 단축한 성준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노동의 대가가 톡톡했다. 바나나 우유는 다음 쉬는 시간에 마셔야지, 생각하고 초코 라떼를 마저 한 모금 넘겼다.
“부럽던?”
“뭐가?”
입 안의 음료를 꿀꺽 삼키며 되묻자 재윤이 온갖 음료수와 빵을 들고 중앙 현관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눈짓했다. 아. 그쪽을 보고 있던 걸 본 모양이었다.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어깨만 으쓱하며 알아서 생각하도록 뒀다. 부러운 건 음료수나 빵을 받는 그의 인기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부러운 건 그런 게 아니라…….
“문보! 확인증 안 내?”
턱을 괴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짝꿍이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너도 내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엇을 내라는 건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무슨 확인증. 근래 받은 가정 통신문 중 사인을 받아 제출해야 하는 것이 있었나. 그의 손에 들린 확인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것에 기겁하고 놀랐다.
“아!”
“또, 두고 왔냐?”
이쯤 되면 기억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이 분명하다.
아침은 꼭 챙겨 먹고 나오니까, 식탁 위에 올려 두면 절대 까먹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결코 까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인을 받고 바로 식탁 위에 올려 뒀는데, 잠이 제대로 깨지 않은 상태로 대충 토스트만 물고 나오느라 그런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됐다. 오늘까지 내지 않으면 수학여행 누락시킨다고 엄포를 놓던 담임 얼굴이 눈앞에 생생했다. 수학여행 못 가고 학교에 남아 보충 수업을 해야 할지도 모를 위기였다. 끔찍하다, 그건 죽어도 싫다. 하지만 우리 담임은 그런 사정을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집에 전화해서 가져와 달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엄마도 출근했으니까.
“끝나고 집에 가서 가져오면 안 되나? 응? 짝꿍아! 점심시간에 외출증 끊을까?”
“나한테 말하면 뭐해, 연 회장한테 말해.”
그러면서 제 거만 쏙 앞으로 넘겼다. 우리 확인증 내놓으라고 앞자리에서 손을 까딱이고 있던 놈이 혀를 쯧쯧 차며 나를 측은하게 한 번 쳐다봐 주고 제 확인증을 합쳐 또 앞줄로 넘겼다. 자기들 일 아니라고 이렇게 나 몰라라 한다. 내 덕에 기록 줄여서 고마운 건 그때뿐이지, 매정한 놈들.
떠나가는 확인증을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교탁에 서서 확인증을 받아 정리하고 있는 그에게로 힐끗 시선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직접 말하라니. 못할 건 없는데 괜히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아 움츠러들었다. 담임에게 바로 말하는 것보다 그래도 그를 통하는 것이 제출 기한을 미루든 외출증을 끊든 모든 처리에 유리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 회장! 문보 확인증 두고 왔대!”
정작 내 입은 떨어지지 않는데, 이놈들의 가벼운 입이 빛과 같은 속도로 떨어졌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확인증을 다 모은 그가 교실을 나갈 때까지 입을 뗄 수 있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도저히 그에게 가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 언제냐는 듯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억지로 내 용건을 전달해 준 짝꿍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전교에서 가장 어색한 사이라는 사정은 아무도 모르니까. 맨 앞으로 걸어 나가 엉거주춤 교탁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와 닿은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찰나가 영겁 같았다.
“외출증이나, 아니면 끝나고…….”
그의 시선에 괜히 눈치 보게 되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입을 뗀 순간이었다.
“저번에 냈잖아.”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 눈을 가만히 마주치고 있던 그가 까닥 아래를 향해 눈짓했다. 홀린 듯이 눈동자를 움직여 아래를 쳐다보았다. 내리깐 시선 끝에 놓여 있는 것은, 제출한 기억이 없는 내 수학여행 확인증이었다.
“아…… 그랬지.”
“정신 챙겨.”
그가 흐트러졌던 확인증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떴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빈 교탁만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확인증을 낼 기회는 지금까지 세 번이 있었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지만, 난 결코 미리 낸 적이 없었다. 분명히 어제저녁까지도 식탁 위에 확인증이 있는 것을 똑똑히 봤다.
그렇다면 이건, 그가 식탁 위의 내 확인증을 챙겨 와 주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먼저 집을 나서고 그가 나보다 더 나중에 집을 나섰기에 가능했던 일. 다정하고 상냥한, 학교에서의 그를 생각하면 당연한 행동이지만, 나와 단둘이 남았을 때의 그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싫어도 반장의 직무를 다 하기 위해선 흘린 것도 챙겨 와 주는 건가. 즐겁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또 그렇게 애매한 기분이었다.
“넌 내고도 까먹어?”
“그러게.”
자리로 돌아와 뻘쭘한 척 그러자 짝꿍이 혀를 쯧 찼다. 그러면서 이어 꺼내 놓는 말에 캭,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먹는 것도 그렇게 좀 까먹어야 할 텐데.”
“사 주고 말해!”
“사 주잖아!”
사 줬지, 맞다. 맛있는 거 주는 사람 좋은 사람이다. 그럼, 그럼.
오늘은 정말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이틀이나 쌓인 수면 부족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내가 정신력이 좋은 인간도 아니었다. 이대로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일등으로 급식을 받아 빠르게 해치우고 바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주번 좀 한다고 어지간히 유난이라며 옆에서 시끄럽게 굴던 놈들은 그래도 마음은 착해서 내 팔과 볼 사이에 애지중지하던 미니 베개를 끼워 주고 놀러 나갔다.
방송반이 틀어 주는 최신 가요와 운동장에 나가지 않은 반 애들이 교실 앞 컴퓨터에 몰래 설치한 게임을 하는 소리, 왁자지껄하게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란이 깊은 잠을 잘 순 없게 만들었지만, 폭신한 베개가 편안해서 얕게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 꿈을 꾸었다.
또다시 나는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무지로도 판단할 수 있었다. 죽진 않더라도 어디 하나 부러질 것이라고. 바닥에 가까워지는 것이 무서워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초록 잔디 위로 떨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작은 연못이 눈에 보였다. 그 연못엔 푸른 하늘이 비치고 있었고, 달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것이 나를 받아 주었고, 그래서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왼쪽 관자놀이를 기대고 엎드린, 눈앞에 보이는 텅 빈 교실의 풍경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꿈이 이상하다.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고 파란 하늘이 맑았던 낮에, 왜 밤하늘의 달이 비치고 있었을까.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나치게 조용한 교실도, 심지어 교실이 전부 비어 있다는 사실도 의아해서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오늘 아침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잠에서 채 깨지 않아 이 상황이 꿈의 연장선처럼 느껴져 갑작스럽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번엔 비교적 조용하게 놀라 눈만 휘둥그렇게 뜨는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왜 안 깨우고?”
“지금 깨우려고 했어.”
그가 내 앞자리에 앉은 채 뒤돌아 앉아 있었다. 내 책상에 팔을 세워 턱을 괴고 있던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갓 잠에서 깬 내 얼굴을 바로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놀란 가슴이 도통 진정될 줄을 몰랐다. 텅 빈 교실에 그와 잠에서 갓 깨어난 나, 단둘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