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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4화
03. 미워지지 않는 (4)


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딱 기분 좋을 만큼 따뜻하고 맑은 바람이 그와 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묶지 않은 커튼이 바람에 따라 창문 위를 살랑이며 움직였다. 아무 말 없이 턱을 괴고 내 얼굴을 쳐다보는 그의 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어 선뜻 입을 열지 못하기를 한참.
“이동 수업 늦어.”
아, 이동 수업이구나. 지금이 몇 시인지, 늦지는 않았는지 생각했다.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어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움직일 생각을 못 하고 넋을 놓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마주친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오래 눈을 마주치고 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알았다. 그가 단순히 잘생긴 것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내는 것이 얼굴 중 어떤 부분 때문이었다는 것을.
“눈동자 색깔 예쁘다.”
그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로 튀어 나간 말이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밝은 햇살 아래에서 빛이 났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리고 1초 만에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을 땐 이미 늦었다. 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뭔가 실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 감정 없이 쳐다보던 표정이 그리울 만큼 서늘했다. 날카로운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내가 잘못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미안.”
그래서 서둘러 사과했다.
“뭐가 미안한 줄은 알고 사과해?”
그 목소리가 너무 차가워서 가슴에 한기가 들었다.
미안해야 할 일은 맞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내가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사과부터 내뱉고 보았다는 사실까지 아는 듯했다. 대답을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볼일은 끝났다는 듯 책을 챙겨 뒷문을 향해 떠나갔다.
그제야 얼떨떨하게 칠판 위의 시계를 돌아본 나는 수업 시작까지 고작 1분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서둘러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 들고 문단속을 하기 위해 뒷문에서 기다리는 그를 향해 뛰어갔다. 그가 문을 잠그는 것을 보면서 그제야 생각났다. 아, 주번이 나였다. 문단속은 그가 아니라 내 일이었다.
내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 한마디 없이 그가 돌아섰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나도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닌데 그의 걸음을 따라잡으려면 거의 종종거리고 뛰어야 했다. 조금 빨리 깨웠으면 이렇게 뛰어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싶어서, 수업에 챙겨 데려가 주는, 회장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그에게 고마운 줄은 모르고 괜히 심술이 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한숨이 절로 터졌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그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누구에게 어떤 것이라도 빌려다 주고, 잘 모르는 아이들과도 함께 어울리며 웃어 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사람이 꼬일 만큼 예의 있고 다정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알았다. 그래서 모두와 적당히 친분이 있었다. 그 말은 결국 특별히 더 가깝고 친한 친구도 딱히 없다는 이야기지만 어차피 모두와 잘 지내기 때문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전교생 중 단 한 명, 그는 딱 한 사람에게만 예외적으로 불친절했다. 불행하게도 그게 나였다. 그는 나에게만 어색하게 굴고 벽을 세웠다. 물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둘만 따로 있을 때, 오늘 아침처럼 집에서 마주칠 때가 특히 그랬고, 조금 전 교실에서도 그랬다. 남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것도 싫지만, 남들 안 볼 때만 그렇게 대하는 것도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이 사는 게 싫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고, 더 근본적으로 접근해서 특정하게 ‘나를’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물론 생각해 봤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지 못한 채 그가 전학 온 1학년을 보냈고 새로이 2학년이 되어서도 어색하게 지내고 있었다. 1, 2학년 전부 같은 반이었는데도 이렇게 어색한 것은 그가 날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른다. 나의 ‘무엇’ 때문인지.
불현듯 울컥했다. 아니, 눈이 왜. 눈동자 색깔에 콤플렉스라도 있는데 내가 건드린 거야? 근데 내가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예쁘다고 칭찬한 건데, 그게 잘못한 일이야? 내가 뭘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다고, 왜 나만 눈치를 봐야 해. 다른 애들에게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게 웃어 주면서, 아무나 사이좋게 잘 지내면서. 왜 만날 나한테만 얼굴 굳히고 까칠하게 굴고.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성질이 버럭 났다.
“아! 야!”
그래서 그의 뒤꿈치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어차피 실내화 쪽에 맞아서 별로 아프지도 않을 거다. 갑작스럽게 걷어차여 걸음을 멈춘 그를 지나쳐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걸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숙이고 들어갔으면 너도 좀 잘 지내보려는 척이라도 해야지. 고작 한집 산다는 거, 그게 싫어서 나한테만 못되게 구는 것이 갑자기 못 견디게 미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사실 나는 둔감한 편이었다. 날 때부터 이런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 말에 따르면 어릴 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얌전하고, 내성적이고, 예민한 편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성격이 변했다는데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내가 기억할 수 있던 순간부터는 항상 무던했고 태평했던 터라 어디 가서 미움받고 산 적도 없었다. 모두와 잘 지내고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냈다. 열등감도, 승부욕도, 경쟁 심리도 없는 여유로운 성격이라 나보다 잘난 대상에게 샘내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나보다 잘난 친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잘난 친구를 좋아하는 일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이놈이 내 친구라고 뻐길 수 있는 잘난 친구 한 명쯤은 모두가 가지고 싶을 것이다. 다만 경계가 아슬아슬한 것은 그 잘난 친구가 나의 존재를 빛나게 해 주는 정도의 친구가 될지 그저 비교당해 열등감을 키우는 존재가 될지, 그것이 양날의 검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후자의 경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나는 그와 잘 지내고 싶었다는 거다. 전교를 통틀어 가장 평판도 좋고 인기도 많은 그가 내 친구라고 말할 수 있으면 자랑스러울 것 같았다. 언제나 친해지고 싶었고, 같은 집에 살기 때문에 더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적도 있었다.
뭐, 이제는 다 그른 것 같지만.
“연 회장은 우리 학교의 악이야.”
“뭐래.”
“재수 없는 거 혼자 다 하냐?”
반 애들과 그가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들으며 CA로 흩어지기 전 마지막 쉬는 시간에 나누어 준 학교 신문을 한 장씩 넘겼다. 연 회장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어떤 이유인지 너무 쉽게 짐작할 수 있어서 궁금하지도 않았다. 한 장, 한 장 뒤로 넘기다가 마침내 백일장 장원 페이지에서 멈췄다.
“사내새끼가 무슨 이런 걸 써?”
“시집 들고 창가에 앉아서 폼 잡고 그럴라고? 어?”
경기를 일으키며 요란하게 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뜩이나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데 남자애들의 선망 대상과 여자애들의 호감 대상인 그가 백일장 장원까지 도맡아 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조금 재수 없는 일이고, 심지어.

『 달밤
- 연선율 』

장원의 영광을 거머쥔 글이 이토록 간지러운 시라면 시커먼 사내놈들이 질색하고 아연실색할 만도 했다. 간지럽다고 오글거린다고 고함을 지르다가 그의 목을 틀어쥐고 흔들며 온몸에 돋은 소름을 털어 내는 시끌벅적한 소리를 뒤로 하고, 그렇게 간지럽다는 그 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 밤을 기다리는 것은
달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달을 기다리는 것은
밤이 낭만적이기 때문입니다.
창밖을 바라보면
밝은 달이 그립습니다.
선량한 운율이 닿는 시간이
애틋합니다.
달은 밤이던가요.
다른 밤은 없던가요. 』

몇 번이고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접하는 시라곤 언어 영역의 지문으로 나오는 시뿐이지만, 어릴 땐 나도 책을 좋아했던 감성 소년이었다. 하지만 자주 접하지 않아도, 시에 대해서 잘 몰라도, 취향에 맞는 글은 알아볼 수 있었다.
나에게만 냉정하고 차갑게 굴어도, 그게 얄미워 그를 걷어차고 그 뒤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의 시를 읽는 순간엔 그런 것들을 전부 잊게 되었다. 천성적인 다정함과 상냥함, 그리고 가슴 설레게 하는 감성이 시를 잘 모르는 나에게도 와 닿았다.
시와 함께 어우러진 그의 이름이 어쩐지 생소하게 느껴져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연선율. 이름마저 시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의 시는 여태껏 딱 두 번, 백일장 장원으로 걸린 두 편의 시밖에 읽지 못했지만 몇 번이고 곱씹고, 입 안에 맴돌도록 속으로 중얼거릴 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 집 창밖으로 보이는 보름달이 얼마나 예쁜지, 이 시를 가장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들은 모를 그런 비밀을 독점한 듯한 이 감정은 여전히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속없는 나의 마음에 얕게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웃다가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얼굴에서 황급히 웃음기를 지워 냈다.
종종 이렇게, 무심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친해지고 싶은 건 나의 일방적인 바람임을 알고 있다. 내가 자꾸 그를 신경 쓰고, 자주 그를 살피고, 그렇기 때문에 시선이 느껴져서 그 역시 이렇게 한 번씩 나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것도. 내가 그를 보지 않는다면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도끼병이 아니다. 착각은 하지 않는다.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것은 내 장점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가 왜 나를 보고 있었는지가 아니라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또 그를 훔쳐보고 있던 것을 들켰을까 걱정했다.
지레 찔리는 마음에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고, 몇 번이나 곱씹으며 펴 놓았던 백일장 장원 페이지를 덮었다. 그가 페이지를 덮는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떠나가고서야 괜히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마른 볼을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닿았던 자리가 간지러웠다. 너무 멍청하게 웃고 있었을 것 같아서 민망했고, 비웃은 건 아니었는데 비웃는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소심해졌다. 바로 전에 내가 그에게 한 짓이 있어서.
그러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내가 그랬다는 걸 마음에 길게 담아 둘 만큼 나한테 관심이 없다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학교 신문을 책가방에 밀어 넣고 지퍼를 닫았다. 노트와 필통, 그리고 숙제 프린트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훠이! 문단속하게 나가, 빨리.”
CA 시간까지 5분 남았는데도 각자 부서로 가지 않는 놈들을 쫓아내며 주번의 임무를 다했다.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놈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갔다. 빈손으로 나가는 놈들은 다 운동 부서고 필통이라도 들고 가는 놈들은 그래도 교실에는 앉아야 하는 부서다.
교실이 텅 빌 때까지 지키고 서 있다가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시청각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영화 감상 CA에 입성한 승리자였다. 딱히 욕심낸 것은 아닌데 운이 좋아 그렇게 됐다. 같이 듣는 두 놈은 날 버리고 자기들끼리 뒷자리 잡겠다고 진작 나가 버렸고, 내 자리까지 맡아 줄 위인들이 아니니 꼼짝없이 맨 앞줄에서 봐야 할 것이다. 오늘은 제발 내가 볼 수 없는 장르의 영화가 아니길 빌며 시청각실 뒷문을 열었다.
“오늘 영화 뭐래?”
정말 맨 앞 구석에만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옆자리 친구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옆자리 애가 돌아보더니 측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28일 후.”
“악!”
아니, 그런 걸 영화 감상부에서 대체 왜 봐, 왜? 교육적인 측면이 하나도 없는데 대체 왜!
불안한 예감은 왜 언제나 틀리지 않는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나는 이 구역의 최고 약심장이었다. 귀신, 공포 영화, 큰 소리,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고 무서웠다. 장난으로 놀라게 하면 거의 혼절하듯 놀라는 내 반응에 놀린 놈들이 되레 더 놀라서, 거친 사내놈들도 웬만해서 나에게 갑자기 놀라게 하는 장난은 안 친다.
이미 오늘 치 할당량은 아침에 대문 앞에서 다 끝난 것 같은데 어떡하지. 벌써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래, 감상문은 인터넷에서 찾아서 쓰고, 이번 시간은 졸린 김에 눈을 감고 있자.
꺄아아!
문제는 눈을 감으니 더 생생하다는 것이었다. 공포 영화는 시각의 공포가 아니라 청각의 공포라더니 보이지 않는다고 무서움이 덜어지는 게 아니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이렇게 막 틀어 줘도 되는 건가. 제발 등급에 맞는 영화를 보게 하는 정성이라도 들이는 선생님이 CA 부서를 맡았으면 좋겠다. 뭐든 대충하는 선생님은 이렇게 애들이 무슨 비디오를 빌려 와서 틀어도 상관조차 하지 않았다. 기가 막히고 억울할 노릇이었다. 귀까지 막으면 혼날 것 같아서 최대한 영화 사운드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중얼중얼.
거의 울 것처럼 보였는지 내가 무서운 거라면 질색하는 걸 아는 오지랖 넓은 놈들이 쉬는 시간에 자리를 바꿔 줬다. 맨 뒷자리에 옮겨 앉아 우리 반 부회장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있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끼이이! 쿠구구그!
“워!”
“으아악!”
웬만해선 안 놀린다고 했지 아예 안 놀린다곤 안 했다. 소름 끼치는 사운드에 잔뜩 졸아 있는데 갑자기 내가 붙들고 있던 놈이 워! 하고 놀려 시청각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애들은 다 소리 죽여 큭큭거리며 웃고, 선생님은 남의 속도 모르고 조용히 하라고 교탁만 두드렸다. 쪽팔리지도 않았다. 놀란 가슴이 팔딱이는 것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을 뿐이었다. 서러워서 부회장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배신이야. 복수할 거야, 나쁜 놈아.
믿을 놈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영화에서는 점점 더 살벌한 사운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울고 싶다. 차라리 잠들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텐데 무서워서 잠도 안 왔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차라리 기절하면 좋을까, 아니면 아프다고 양호실로 도망갈까 망설이기를 한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영화 사운드가 마침내 뚝 끊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시간 과제였던 영화 감상 숙제까지 제출하고서야 움츠러들었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이번 영화 감상 숙제 마지막엔 꼭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쓸 거다. 공포 영화는 보지 말자고. 이렇게 공포 영화 같은 것도 거르지 않고 볼 줄 알았으면 절대 이 CA 안 들었을 거라는, 남들에겐 배부른 투정일 소리가 절로 터졌다. 차라리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든 예술 영화를 보는 편이 나았다.
“다음 시간부터는 선생님 병가로, CA 담당 선생님이 바뀔 거야.”
선생님의 전달 사항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러고 보니 만삭의 임산부 선생님이 이런 좀비 영화를 봐도 되는 거야? 나만 무서워? 나만 그래? 좀비 영화에 감흥이라곤 조금도 없는 평온한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가 더 하찮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오며 뒷말을 기다리는데, 이어지는 말은 더 놀랄 수 없을 것 같던 내 눈을 더 휘둥그렇게 떠지도록 만들었다.
“문학부 선생님께서 문학부와 같이 CA를 담당해 준다고 하셨으니까 말 잘 듣고, 장소는 시청각실 그대로니까 장소 몰라서 지각했다고 변명하면 다음 학기 때 괴로울 줄 알아라.”
문학부.
“쌤, 진짜요? 문학부?”
“대박, 선생님 내년까지 다녀오시면 안 돼요?”
“미진이 네가 교장 선생님께 부탁해 주면 사양하진 않을게.”
젊은 선생님이라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되로 받은 걸 말로 받아쳐서, 학생들은 단숨에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꼬리만 내렸을 뿐 들떠서 상기된 표정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다른 부서와 합쳐서 수업한다고 하면 인원이 많아지니 불편하고 소란스럽다며 내키지 않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름부터 지루한 문학부를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이유는 뻔했다. 문학부에 모두가 환영하고 원하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일장 장원을 거머쥔 사람이 문학부라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니까.
“야 문학부에 선혜 있지 않냐?”
일편단심 선혜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벌써부터 다음 CA에 대한 설렘과 기대에 부푼 부회장이 잔뜩 들떠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선혜.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도 문학부였다. CA 부서 확정되자마자 학교 내 최고 선남선녀인 두 사람이 눈 맞는 거 아니냐고 근거도 없는 걱정으로 남자 놈들이 난리가 났었으니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문학부와 합친다는 것을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반겼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괜히 무안해서 애꿎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왜 당연하게, 남자애들과 다른 인물을 생각했나 싶어서.
“있음 뭐해, 넌는 그냥 오징어 1이야.”
“이 시발, 뒈지고 싶냐.”
그래서 민망한 마음을 달래려 시비를 던졌다. 아까 나를 놀라게 한 것에 대한 복수의 한마디를 남겨 주고 교실로 빠르게 뛰어갔다. 문을 열어야 해서 달려가는 거지 잡히면 뒈진다고 해서 뛰는 게 아니다. 진짜 아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문보! 피방 고?”
“나 이번 달 정액권 끝났어.”
“그럼 너희 집 가서 숙제하자.”
정언은 놀고 싶은 것보단 일찍 집에 들어가기 싫은 듯했다. 어차피 혼자 숙제해 봐야 시간만 잡아먹을 테니 나보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나은 그의 제안이 나쁘진 않았다. 교실을 마지막까지 정리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려 준 정언에게 무심코 그러자고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안 돼.”
학교 친구를 집에 데려갈 수 없는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그 하숙생 형 때문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교실 문을 잠갔다.
정언과는 같은 중학교를 나와 같은 고등학교까지 배정받았고, 1학년 때 같은 반까지 했다. 그것이 죽고 못 사는 단짝이라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다른 놈들보단 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언에게 우리 집에 하숙생 형 온다고 떠들었던 것은 작년에 내가 했던 일 중 가장 후회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