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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5화
03. 미워지지 않는 (5)


우리 집은 넓은 것에 비해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라 저녁이 되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머리 크고 나서부터 아빠는 다른 지역으로 회사를 옮긴 통에 1층에는 엄마만, 2층에는 나만 있게 되어 더 허전해졌다. 어릴 땐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워서 외롭지 않았는데, 그 아이들이 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떠나보낸 빈자리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뒤로 반려동물도 키우지 않았다.
외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큰 집에 계속 혼자였고, 그렇게 점차 더해진 외로움은 덜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나에게 2층 옆방에 하숙생이 들어온다는 건, 동생이 생긴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된 것처럼 기쁜 이야기였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살아서 느낄 불편보다 외로움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더 기뻐서 마냥 들떴다.
다만 내가 간과했던 사실은, 하숙생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학생 형이 오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심지어 그 하숙생이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남학생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전교생 중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하숙생 형이 우리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떠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와 내가 친하게 지내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더 필사적으로 조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부모님과 함께 사는지 혼자 사는지 같은 소상한 이야기를 굳이 밖에서 꺼내 놓지 않았다. 숨기고 싶기 때문인지, 말할 이유가 없어서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것을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
어쨌거나 서로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개인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십 대 남학생이 어느 부분을 예민하게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경제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타향살이하는데 밥이나 잘 챙겨 먹을지, 엇나가지 않게 돌봐 줄 어른이 있을지, 그런 이유로 하숙하게 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한 지붕 아래 산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단지 그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밀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수학여행 조 배정 얘기 들었어?”
“그래 봤자 두 조 아니야?”
“그래도 방이 나뉘는 건데 안 궁금해?”
곧 죽어도 붙어야 할 단짝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모두와 적당히 잘 지내는 게 좋았다. 절친한 단짝이 없다고 해서 딱히 불편함을 느끼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가볍게 스며드는 쪽이 더 편했다. 적당한 친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짝지어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무리가 없고, 때마다 다른 친구와 어울려 놀아도 거리낌도 거리감도 없이 스며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와 방이 나뉘어도 상관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방 호수 알아내야 한다고 다들 난리래.”
어떤 그림일지 뻔했다. 수학여행을 기회처럼, 평소 호감이 있는 반 아이의 방 호수를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다. 오늘 시청각실에서도 본 것처럼. 그리고 체육 시간 끝나고 그에게 쏟아지던 간식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 반은 누구, 연선율?”
우리 반의 방 호수가 이슈라면 그게 누구 때문일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 묻자 정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수긍했다. 인정하기 싫어도 별수 없었다. 어쨌거나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학생을 한 명 고르라면 반박의 여지없이 연선율이니까.
“같은 반인 게 득인 거냐, 실인 거냐.”
득실을 따질 수 있는 정언이 차라리 부러웠다. 그에게 미움받는 유일무이한 사람인 나는 그런 것을 따질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유치하게 방팅이니 뭐니 했다가 걸리면 잠도 못 자고 벌설 것이 뻔하지만, 한창 혈기 왕성한 십 대 남녀가 수학여행에 가서 아무 일 없이 돌아오는 것도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가장 거리낌 없이 스릴을 즐기는 십 대가 아닌가.
그저 그런 반이었다면 밤에 몰래 과자나 까먹고 숨겨 온 술을 마시는 것 정도로 끝나겠지만, 연선율이 있는 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많은 여자 반에서 접촉해 오는 연락을 받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이벤트가 될 것이라고 들뜬 놈들이 있는 한편, 어차피 걔들의 목적은 전부 연선율이고, 연선율 근처의 우리는 못생김이 돋보일 뿐일 텐데 대체 우리가 얻는 득은 뭐냐고 펄펄 뛰는 놈들도 있었다. 오징어라고 놀렸다가 정말 잡히면 죽일 기세로 쫓아온 부회장만 봐도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선율은 대부분의 친구들과 잘 지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그에게 경쟁 심리를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성적으로 앞서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인기로 앞서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운동으로 앞서고 싶어 했다. 하물며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그를 좋아해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그가 모든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과 그런 심리는 무관한 일이었다.
특히 남학생들은 그와 잘 지내긴 해도 그와 항상 붙어 있길 바라진 않았다. 모두와 잘 지낼지언정 그에게 단짝이 없는 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붙어 다니면서 비교 대상이 되고 싶을 사람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반을 통해서 연선율에게 접근한다. 너무 흔한 일이라 에피소드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우리 집 하숙생이 연선율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연선율과 가까워지려고 할까, 그게 달갑지 않은 마음. 이건 묘한 마음이다. 열등감도 질투심도 없는 내가 가진 뜻 모를 감정이다. 나도 그와 가깝지 않은데 누군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거기 매점 잘돼 있을까?”
화제를 돌리면서 그러자 천천히 페달을 밟는 내 자전거를 따라 걷던 정언이 질색한다.
“밥 잘 나오는 것보다 그게 궁금하냐?”
“당연하지! 가방 크기를 정하는 중요한 문제야!”
“많이 챙겨 와 봤자 술안주로 다 뜯긴다, 너.”
그건 그렇다. 술 몰래 챙겨 올 생각에 신난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가장 기대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나였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술을 마시지 않아서 술은 구경도 못 하고 살았다. 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이 나이 남자애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년의 시도는 실패했으나 올해는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선생님들이 연선율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넘어가니까, 전적으로 그의 융통성에 걸린 문제긴 한데.
“나 이쪽으로 간다? 숙제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할게. 받을 거지? 응?”
“봐서.”
말은 저렇게 ‘봐서’라고 해도 전화하면 상세하게 풀이 과정 다 알려 줄 거라는 건 중학교 시절부터 겪어서 알고 있었다. 갈림길에 멈춰 서서 두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인사하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우리 집은 자전거를 타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걷기에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서 도보로 얼마나 걸리는지는 다 까먹었다. 하지만 걸어서 남들보다 30분씩 일찍 등교하는 그가 독하다는 건 계산해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자전거를 한쪽에 잘 세워 두었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땀이나 식혀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원 한편에 놓인 평상에 드러누웠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떴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안녕!’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모습의 두 사람이 평상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낯설었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의 얼굴이. 당시의 나는 몰랐다. 저것이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음을. 저렇게 반갑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
‘아…… 안녕하세요?’
영문을 모르고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작년의 내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앞의 그를 살피던 과거의 내가 어색한 인사를 내놓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잠시, 양손을 마주 부딪치며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 하숙생으로 온다던 그 형이구나! 저는 문보름이에요!’
그리고 길었지, 정적이.
‘연선율.’
‘와, 이름 예쁘네요.’
저 때까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그와 처음 만났던 작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빈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날을 끝으로 다정하게 인사하는 연선율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는데. 그렇다면 잘못 꿴 단추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저 순간이었을까. 동갑인 주제에 형이라고 한 게 기분이 나빴던 걸까. 하지만 하숙생이라면 대학생을 생각하는 게 보통이지, 그가 그걸로 그렇게 속 좁게 굴 사람인가. 적어도 나에게 보여 주는 모습 말고 학교에서 보여 주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럴 그릇은 아니었다.
같이 사는 이유가 이복형제라든가 피가 섞이지 않은 법적 형제라든가 하는 관계라면 나를 싫어하는 것을 수긍할 텐데. 나에게만 불편하게 대하는 것도 이해할 텐데. 속 시원히 물어보고 싶다가도 너무나 명백하게 나만 신경 쓰고 나만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확인받게 될 것 같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꿈치를 걷어차는 호기를 부렸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밀린 숙제를 하느라 늦은 밤이 되어서도 속이 답답했다. 바람이나 쐬려고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엔 걸터앉는 대신 창문 앞에 주저앉아 창틀에 두 팔을 기댔다. 날이 맑아서 여전히 달이 밝았다. 서울 변두리라 공기가 깨끗해서 별도, 달도 잘 보였다. 오늘따라 그런 밤하늘이 사랑스러웠다. 달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머릿속에 남아 있던 구절을 천천히 읊조렸다.
“달은 밤이던가요.”
휘황찬란한 달빛이 눈부셨다. 따뜻한 봄 햇살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눈부신 달빛도 이렇게나 따뜻하다. 그와 눈이 마주쳐서 급히 덮었던 신문은, 저녁을 먹고서야 가방에서 꺼내 다시 펼쳐 들고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은 구절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따뜻한 시를 쓰는 연선율이 왜 나에게만 차갑게 대하고 탐탁지 않게 여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거리는 앞으로도 좁힐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밤은 없던가요.”
내일은 사과해 볼까. 사실 내가 걷어찬 것 같은 별거 아닌 일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을 테지만, 그런 용건이 아니면 말을 걸 구실이 없으니까.
왜, 나는. 그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나의 거리가 물리적인 가까움을 뛰어넘을 만큼 심리적으로 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가까워지고 싶은 걸까.

저녁은 걸러도 아침밥은 거르지 않는다. 평생 출근 준비로 바빠도 아침은 꼭 먹어야 한다고 차려 주고 나가는 부모님 아래에서 크다 보니, 주말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주중에 모자랐던 잠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정오가 넘어가도록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간절한데, 학교 가야 하는 시간만큼 이르게는 아니더라도 8시엔 일어나서 아침을 먹어야 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앞으로 구르는 줄 알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계단의 나무 난간을 짚고 터덜터덜 내려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눈앞에 갓 지은 따뜻한 밥이 놓였다. 눈뜨자마자 밥이 쉽게 넘어갈 리가 없지만 좋아하는 반찬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높은 확률로 일요일 아침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 반찬이 나왔고,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갈치조림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갈치조림의 자태에 군침이 돌아 얼른 숟가락을 들려고 하던 순간 엄마의 말에 우뚝 굳었다.
“선율이 깨워 와.”
아.
고개를 들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건너편이 비어 있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괜히 기운이 빠졌다. 아니, 그럼 애초에 아래층으로 내려오기 전에 말했으면 좋았을 걸 굳이 식탁 앞에 앉았다가 올라가게 하냐고 대들기도 지쳤다. 매번 까먹고 혼자 내려오는 나도 나였다. 반박하다간 도리어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것 같았다.
“아니이……. 주말에 작정하고 자는 애를 꼭 아침 먹으라고 깨워야 돼……?”
“시끄럽다.”
“아니 엄마가 깨우면…….”
“당장 안 가?”
“네에…….”
말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 없단 생각에 대들어 봤다가 소득도 없이 쫓겨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좋아하는 생선 반찬을 앞에 두고, 입 한번 대 보지 못하고 계단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멀지도 않은 거리가 천릿길 같았다. 아직 잠이 달아나지 않은 정신을 깨우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털어 냈다. 마침내 방문 앞에 멈춰 섰을 땐, 문고리를 손에 잡지 못하고 한참이나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이 문 앞에 서면서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아지지도 않았다, 이 긴장감이. 심지어 이번엔 그의 뒤꿈치를 다짜고짜 걷어차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평소보다 곱절로 불편한 상황이었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눈 딱 감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도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있기를 한참, 마침내 문턱을 넘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방에 들어올 일은 거의 없었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가끔 그를 깨우러 들어올 때 말곤 아예 없었다. 연선율과 친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의 신세라는 게 그랬다. 고작 일요일에만 출입이 허락되는 방 안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밝았다. 햇살이 따가워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고, 딱 한숨 더 자고 싶을 만큼만 아늑했다. 그렇게 차분한 분위기의 방 안을 가로질러 가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연선율이 있었다.
그는 바르고 성실하다. 그래서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는 학생이었고, 어쩌면 전교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는 학생일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등교하기만 하면 조금 부지런하다 생각하고 말 일인데, 그가 매일 아침 한 시간가량 동네를 조깅한다는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아침 운동까지 하고 가장 먼저 등교하는 주제에 학교 끝나면 곧장 버스를 타고 유명 종합 학원으로 간다. 학원 수업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 자정이 지난다. 그런데도 수업 시간에 조는 일 한번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지런한 생활에도 비밀이 있었다. 전교에서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이.
“……연선율.”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작게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도 그는 곧바로 눈을 뜨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람 소리만 듣고 벌떡 일어나는 6일간의 연선율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중 단 하루 일요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연선율은 늦잠을 잔다.
“일어나, 연선율?”
다 큰 사내놈 방에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엄마 때문에 아침 먹으라고 그를 깨우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그렇게 일주일에 딱 한 번 그의 방에 들어가서 곤히 잠든 그를 깨웠다. 이렇게 산 지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 적응되지 않았고, 긴장이 풀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를 깨우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그를 깨우는 일이 어려웠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등교하기 전 매일같이 조깅을 하는 것도, 주말이면 늦잠을 자는 의외의 허술한 구석이 있는 것도, 전부 그와 사이좋게 지내는 전교생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남들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유일하게 어색한 사이인 나만이 알고 있는 모습이라는 건 어쩐지 남모를 비밀을 엿보는 기분이었으니까. 우월감이라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그것과 유사한 기분. 비록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야, 연선율!”
몇 번을 부르며 흔들어 깨워도 곤히 잠들어 아무 반응이 없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어깨를 흔들던 손에서 힘을 거뒀다.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채 잠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도 얌전하게 자네. 어쩜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이 이렇게 정갈할까. 이런 외모로 세상을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잘난 놈이랑 친구 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게 아닐까. 내가 별종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끄는 매력이라는 것에 그의 외모가 큰 몫을 한다고 생각했다. 단짝까진 아니더라도 다들 잘 지내고는 싶을 거다. 말은 안 해도. 그런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이 늘어졌다.
침대 매트리스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잠든 그를 바라보기를 한참,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났다. 엎드려 자고 있는 나를 텅 빈 교실에서 기다렸던 연선율. 내가 어떤 꼴로 자고 있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 불현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넋을 놓고 있던 정신을 다시 붙들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가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정말 내가 엎드려 자고 있었던 그때처럼.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내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까먹었다. 잠에 취한 그의 눈은 평소 무심코 마주쳤던 서늘한 눈빛과 달랐다.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깊은 눈으로 지그시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 정신이 팔려 넋을 놓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어깨에 닿았던 손을 떼었다.
“……밥 먹어.”
잊을 뻔했던 용건을 겨우 꺼내 놓자,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곧바로 몸을 일으킬 줄 알았는데 잠이 쉽게 달아나지 않는 듯 눈앞의 내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시선을 떼고 일어나 나가야 하는 걸까.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앉은 채 눈만 두어 번 깜빡였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평소 놀라울 만큼 부지런한 일상이 거짓인 사람처럼 일요일의 그는 잠에서 깨는 것을 어려워했고, 깨워도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허공을 보듯 멍하니 내 얼굴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이렇게…….
“……나갈게.”
정신이 들면 그제야 따라 나갈 테니 먼저 나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누운 몸을 일으킨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거, 미안해.”
그래서였다.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사과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가.”
그러나 미간을 좁히고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목소리는 한기가 도는 것처럼 냉정해서.
“저번에 찬 거.”
괜한 짓을 한 건가 했다. 그래도 사과할 건 사과해야 했다. 상대방이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서 나도 똑같은 인간이 될 순 없으니까.
“사과받을 마음 없는데.”
그러나 돌아온 그의 대답에 맥이 풀렸다. 괜한 짓이 맞았다. 아니, 사과의 말 한마디 건 것도 저렇게 기분 나쁜 티를 내야 되나.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말 자체를 듣기도 싫은 듯 뾰족하게 반응하는 것에 맘이 상했다. 아무리 갓 잠에서 깼다곤 하지만, 그래서 예민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냥 내가 싫은 거겠지.
“싫으면 됐어.”
열받아서 이번엔 무릎을 차고 싶었다. 나도 콱 똑같은 인간 해 버릴까. 관계 개선은 무슨. 애초에 내가 잘못해서 나빠진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잘 지내보려고 해야 돼. 괜히 사과했다고 생각하며 잔뜩 열받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방에서 나와 버렸다.
남들에게 보여 주는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이 진짜야, 아니면 나한테 하는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이 진짜야.
용기 내서 한 발짝 다가가도, 영원히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와 나 사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