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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6화
03. 미워지지 않는 (6)


둘이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는 아침 식사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거실에서 TV를 조금 보고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깨작거리다가 점심을 먹었다. 그다음엔 방으로 돌아와 노트 필기를 보며 교과서를 정리했다.
알록달록 색이 예쁜 펜으로 또박또박 적힌 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사내놈 교과서와 노트가 뭐 이렇게 알록달록하냐고 질색을 하던 놈들도 결국은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서로 못 빌려서 안달이었다. 남자답지 못하다고 저는 아닌 척하면서도 사실은 다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본능이 숨어 있는 거다. 솔직하지 못한 것들 같으니.
공부 못하는 것들이 꼭 노트 필기는 화려하게 한다는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 모의고사 등급은 객관적으로 별로였다. 그래도 예쁜 노트를 사고 색이 고운 펜을 모아 필기하는 것에 집착하느라 수업 시간에 덜 졸게 되었고, 덕분에 내신 성적은 비교적 덜 한심했다. 효율이 나쁘진 않았다.
노트에 필기한 주요 내용을 교과서에 옮기는 것도 순수한 공부 목적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산 예쁜 에메랄드색 펜을 쓰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옮겨 적으면서도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근현대사 필기를 다 정리했을 땐, 글씨 좀 오래 봤다고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져 낮잠을 청했다.
허기가 져서 다시 잠에서 깼다. 엄마가 집을 비운 것을 확인하고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고 물을 올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다가 선반에서 라면을 꺼내기 위해 뒤를 돈 순간,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에 비명을 겨우 삼켰다. 기척도 없이 주방에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연선율 때문에. 이 집에 있는 것이 놀라운 사람도 아닌데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놀랐다. 심약하게 팔딱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컵에 따르는 그를 쳐다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라면 먹을래?”
결코, 내 이성적인 사고를 거쳐서 나온 물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그가 그대로 몸을 돌려 주방을 나가 버렸다. 빈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억울해서 열이 올랐다.
아니, 나도 속이 있지. 아침에 그 꼴을 당하고 뭐 대단히 자비로워서 물어봤겠느냔 말이다. 꼭 함께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예의상 물어본 말에 저렇게 대꾸도 안 하고 가 버리니 더 신경질 났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진짜? 속이 끓어서 라면을 꺼내 거칠게 봉지를 뜯었다.
“나한테만 만날 무게 잡고! 뭐, 사과받을 마음이 없어? 기가 막혀, 진짜.”
입에서 구시렁거리는 불만의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의식적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은 다 무시하고! 오히려 같은 집 살면 더 잘 지내야 하는 거 아냐? 마주치기 싫어도 마주쳐야 하면, 어?”
면을 신경질적으로 쪼갰다. 면을 반으로 쪼개지 않고 끓이는 내 취향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아니, 다른 애들한테는 세상 그렇게 친절하면서. 나한테만 못됐고!”
끓는 물에 면을 던져 넣고 수프를 신경질적으로 탈탈 털어 넣었다. 끓는 라면을 쳐다보며 씩씩거리다가 달걀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입은 쉬지 않고 불만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물어보면, 어, 아니, 그거 하나 대답하는 게 어렵…… 으악!”
비명을 꽥 질렀다. 냉장고에 다 도착해서야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놀라 기절할 뻔했다. 그리고.
“헉!”
그대로 입을 쩍 벌리고 굳어졌다. 아, 어, 세상에.
“어.”
“어?”
“먹는다고, 하나 더 끓여.”
멍청하게 되물은 채 한참을 얼어붙어 있었다. 헛것이면 좋겠는데 말을 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구시렁거리며 욕했던 대상이 대체 언제 귀신처럼 돌아와 앉아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식탁 앞에 앉아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듯 턱을 괴고, 심지어.
심지어 웃고 있었다, 연선율이. 제발 아니길 바라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뗐다.
“……들었어?”
“네 말 무시한다는 부분부터.”
……다 들은 거잖아!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말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며 혀 깨물고 콱 죽고 싶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선반으로 다가가 라면을 하나 더 꺼냈다. 하나는 이미 반쯤 끓여졌겠지만 나도 모르겠다. 반은 불고 반은 덜 익혀 먹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쟤가 내가 하던 혼잣말을 다 들었다는 게 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엄마. 엄마 어딨어요, 엄마. 이럴 때 왜 없어요, 엄마. 살려 줘.
“맛있네.”
나한테만 무게 잡고 내 말은 다 무시한다고 했더니 라면을 먹으며 맛있다는 감상도 말했다. 정작 나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면을 씹어 삼켰다. 아니 무시하고 간 거 아니었어? 대체 왜 다시 돌아온 건데, 왜.
“올라가.”
마주 앉은 식탁 가운데에 놓인 라면 냄비가 비자마자 벌떡 일어나 빈 그릇을 챙기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눈짓하며 그랬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도망치듯 위층으로 올라와 버렸다. 라면은 내가 끓였으니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는 듯 싱크대로 가서 물을 트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문을 닫았다.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파닥거렸다. 이불을 걷어차며 창피함에 몸부림쳤다.
차라리 오만상을 쓰고 있었으면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이겠거니, 하고 이런 기분이 덜했을 거다. 그런데 웃고 있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약점 잡힌 기분이었다. 몇 배로 수치스러웠다. 날 보고 웃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연선율. 아니 처음 만나 인사한 뒤로 웃은 적이 없을뿐더러 그런 밝은 표정조차 처음 보여 주는 연선율.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지 말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돼서 미칠 것 같았다.
입조심해야 하는 건데, 같이 사는 집에서. 아, 으아아아.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다, 엉엉.
현실 도피로는 뭐니 뭐니 해도 자는 게 최고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진정이 되어 별일이 아닌 것 같아지고, 괴롭고 슬플 때도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차라리 잠들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낮잠을 잘 만큼 잔 몸뚱이는 현실 도피도 맘대로 못하게 했다.
한참 침대 위에서 이불을 차다가 벌떡 일어났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까, 하는 마음에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정원의 풍경에 무릎이 꺾이듯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래서 보였을까 긴장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정원을 쳐다보았다.
연선율이 평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의 곁에 놓인 잔에 담긴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오렌지 주스는 어쩌고 지금은 또 커피야. 내가 창피함에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태연하게 설거지를 마치고 따뜻한 햇볕 아래에 자리를 펴 책을 읽고 있다니. 나에게나 별일이지 그에겐 별것도 아닌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창틀에 두 팔을 얹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책에 완전히 몰입한 그는 누군가의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거다, 워낙 집중력이 좋으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이사도 없이 살아온 집이었다. 봄부터 겨울까지, 정원의 사계절은 특별한 감흥이 없을 만큼 나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정원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앉아 있는 풍경이 평소와 다르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내가 알던 봄의 정원이고, 그 안에 연선율이 앉아 있다는 그 하나만 달라졌을 뿐인데 모든 것이 생소했다. 이 기분은 어떤 이유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그의 정수리와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책을 쥐고 다른 손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옆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커피를 내려놓는 그의 손끝부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손끝에서 팔로, 팔에서 목으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을 따라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햇살에 반짝거리고 빛났다. 그것이 마치 햇빛에 빛나는 물결 같았다. 그렇게 가깝지도, 그렇게 멀지도 않은 거리에 앉아 정원 속에 녹아 있는 풍경이 더없이 분위기가 좋았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어쩐지 그가 마시는 블랙커피가 굉장히 근사하게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기를 한참. 그가 평상 위로 드러누웠다. 한쪽 팔로는 팔베개를 만들어 베고,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은 높이를 맞춰 눈앞에 들었다. 허공을 향해 든 책 너머 그를 지켜보는 내가 보일 것 같아 재빠르게 창문에서 떨어졌다. 잠시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아래층으로 향했다. 평소에 먹던 달콤한 믹스 커피가 아니라 블랙커피를 타서 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나는 하나도 근사하지 않았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쓰고 독한 맛에 후회해야 했다.

과욕은 참사를 부른다. 그리고 그 참사는 바로 늦잠이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괜히 멋있어 보여 블랙커피를 따라 마셨던 것이 너무 큰 효과를 발휘한 덕분에 새벽 2시까지 뜬눈으로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시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이 2시였고, 그 뒤로도 한참 뒤척였으니 심지어 2시에도 잠들지 못했던 거다. 평소 취침 시간은 자정을 결코 넘기지 않았고, 혹여 늦게 자는 일이 있어도 1시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들곤 했으니 거의 기록을 세운 셈이었다.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빈속으론 절대 문밖을 나설 수 없는 집이라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물고 서둘러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다. 지각은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횡단보도 신호에 걸릴 때마다 손목시계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5분, 4분, 3분. 시간이 줄어들수록 피가 말랐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죽도록 페달을 밟아 쏜살같이 학교 정문에 다다른 순간 학주의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려 기겁을 하며 다리에 더 힘을 주고 죽을힘을 다해 속력을 높였다.
“5, 4, 3…….”
카운트다운 2초를 남기고 교문을 통과해 자전거에서 잽싸게 내려 학주 앞에 섰다.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몰고 오느라 숨을 헐떡이며 교복 상태를 검사받고 겨우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죽음의 지각 벌을 피한 대신 출발부터 도착까지 전속력으로 페달을 돌리느라 다리 힘을 잃었다. 휘청이며 자전거 보관소에 자전거를 고정했다. 힐끗 돌아본 운동장 한쪽엔 열댓 명의 학생과 학주가 보였다.
무서운 기세로 나무 봉을 휘두르는 학주가 일렬종대로 뒷짐 지고 머리 박고 엎드려뻗쳐 있는 학생들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살벌한 풍경. 가장 왼쪽에 엎드려 있던 학생이 학주의 신호에 맞춰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저 사이에 엎드린 것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오싹함에 어깨를 움츠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 내 뒤로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온 학생이 다시 줄 끝에 머리 박고 엎드리고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던 학생이 다시 운동장을 달리는 광경이 이어졌다. 지각한 학생이 열 명이면 열 번이다. 운동장을 늦게 돌수록 연대 책임을 지는 학생들의 고통이 더해진다. 인원수대로 반복하는 학주의 지각 벌은 우리 학교 학생들의 지각률을 반으로 줄어들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죽어도 지각만큼은 면해야 했다. 저건 진짜 사람 피를 말리는 짓이었다. 한 번 해 봐서 그 지독함을 뼈저리게 알았다.
“와 아깝다.”
창가에 붙어 운동장을 구경하던 놈들이 교실에 들어서는 나를 돌아보며 그런다. 벌칙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깝다고 말하는 그것들을 보고 소리를 꽥 질렀다.
“난 담력 시험 하는 줄 알았어!”
그러며 책상에 책가방을 쾅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짝꿍이 나를 올려다보며 그런다.
“담력 시험 있대.”
아니, 뭐가 있어. 교문 2초 남기고 통과하는 게 담력 시험만큼 무서웠다니까.
……음?
“수학여행.”
“뻥치지 마!”
설마.
“진짠데?”
“미친 거 아냐?”
말도 안 돼, 거짓말. 학주 벌칙 걸리는 것보다 천만 배는 더 오싹한 소리였다. 지각을 겨우 면하고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소문은 날 속이기 위한 쇼는 아닐까 싶을 만큼 충격적이었고, 차라리 쇼라고 믿고 싶을 만큼 끔찍했다. 수학여행에 담력 시험이 대체 웬 말이야. 누가 그래, 누가!
“미친 건 너야, 문보름. 안 앉냐?”
다리에 힘이 풀리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결백한 눈을 깜빡이며 어느새 들어온 담임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조금 괴팍하지만 반 아이들에겐 의외로 따뜻한 선생님을 보며 최대한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결국 선생님도 조례 시간에 얌전히 앉아 있지 못한 내 행실을 한번 노려보고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넘어가 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가방을 책상 위에서 내려 옆에 걸었다.
“오늘은 종례 생략한다. 3학년 시험 감독해야 한다. 미리 얘기하는데 내일 수학여행에 늦거나, 쓸데없는 물건 챙겨 오거나, 허튼짓 꾸며 오면 책임은 전적으로 너희 탓이다. 난 너희 모르는 척할 거다.”
하지 말란 말은 없었다. 알아서 재주껏 뭔 짓을 해도 담임 선생님은 발 빼고 모든 권한을 교관에게 넘긴다는 이야기였다.
“방 배정은 회장이 이따가 붙여 줄 거고, 어떤 이의도 접수해 주지 않는다. 방 바꾸는 놈들은 남은 2학년 기간 내내 청소를 담당하는 아름다운 직책을 떠넘겨 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이상하게 자유롭고 쓸데없이 엄격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알아서 하라 하고, 통용해 줄 것 같은 일은 하지 말라는 말에 하여간 별난 선생님이다 싶었다. 그러나 별난 건 별난 거고 벌써부터 신났다. 완전 자유를 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방이야 사내놈들이 대충 엉겨서 자면 되는 건데 누가 바꾸려고 쓸데없는 짓을 할까 싶었다.
“야 연 회장! 이거 네가 짰냐?”
“존나 기준이 뭐야 키순이냐? 앞뒤가 없잖아!”
“회장 권력이다, 왜.”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착각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그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사람이 전부 이 교실 안에 모여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방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잊고 있었다. 단순히 카드와 화투를 챙겨 놀 생각이거나 술을 마실 생각에만 들떠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연선율과 같은 방이라는 특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수학여행 마지막 밤을 아름답게 장식하겠다는 큰 목표 의식. 연선율과 같은 반이라고 골 세레모니를 하듯 교실을 뛰쳐나가 복도를 달리는 놈이며, 내가 너랑 짝꿍인데 왜 같은 방이 아니냐고 연선율의 멱살을 잡는 시늉을 하는 놈이며, 무조건 윤선혜 반과 만나야 한다고 벌써부터 호들갑을 떠는 부회장 놈까지. 각양각색 난리였다. 그런 놈들을 하나씩 치우고 지나가 교실 뒤에 붙은 배정표 앞에 도착해 나란히 늘어진 이름을 확인했다.

『 1방
……박희훈. 김재윤. 문보름. 연선율. 강정언…….
2방……. 』

나란히 붙은 이름이 낯설었다.
별거 아닌 일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매일 밤 같은 울타리 안에서 잠을 자면서도.

내 인생에서 가장 긴 1교시였다. 나는 우리 반 시간표가 전교에서 가장 최악일 거라고 자부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하나, 월요일 1교시 과목 때문이었다. 우리 반의 월요일 1교시는 수학이다. 심지어 우리 반은 문과반이다. 이보다 끔찍할 수 없는 시간표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억지로 눈을 뜬 채 문제 풀이를 노트에 받아 적는 시간은 도무지 흘러갈 줄 몰랐고 초침이 한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기계적으로 필기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문제는 검은색으로, 풀이는 파란색으로, 정답은 빨간색으로 필기하는 법칙은 결코 실수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수업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져 잠을 잤다. 그것이 끔찍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10분 뒤 그다음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야, 이거 뭐야?”
얼떨떨하게 프린트물을 뒤로 넘기며 짝꿍에게 속삭여 묻자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던 그가 힐끗 나를 보며 대답하는 말에.
“영어 단어 쪽지 시험이지, 뭐야.”
“뭐?”
영어 단어 쪽지 시험? 그런 게 있었어?
의문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고 없던 시험이라기엔 반 아이들의 반응이 너무나 평탄하고 순순한 것으로 보아, 이건 예정되어 있던 시험이다. 그런데 나만 몰랐을 수가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 내도 애초에 외운 적 없는 단어들이 생각날 리 없었다. 반도 적어 내지 못한 시험지가 내 손을 떠나고서야 불현듯 떠올랐다. 정원에서 연선율이 보고 있던 책. 그거 영어 단어 교재였구나. 깨닫고 보니 기가 막혔다. 나는 시집이나 되는 줄 알았다. 그 분위기로 읽던 것이 영어 단어라니 완전히 사기였다.
이제야 생각났는데, 처음부터 쪽지 시험을 까맣게 잊고 있던 건 아니었다. 분명 토요일 밤에는 내일 일어나면 영어 단어 외워야지 다짐했던 것 같다. 새카맣게 잊은 것은 아침부터 연선율을 깨우는 것에 혼이 쏙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라면을 끓이며 그의 뒷담을 중얼거리다가 걸린 이후 모든 사고가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잠이 오지 않는다고 자학하기만 했으니까.
“나 완전 까먹고 있었어.”
마음이 지옥 같던 영어 시간이 끝나고 책상에 엎어지며 그러자 짝꿍이 혀를 쯧 찬다.
“늦게까지 외워 놓고 엄살은.”
내가 지각할 뻔하고 1교시부터 졸음이 쏟아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 늦게까지 공부했기 때문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시험 기간에도 새벽 1시를 결코 넘겨 잠드는 법이 없는 나를 뭐로 보고. 난 그저 평소 마시지 않던 블랙커피 때문에 잠들지 못했을 뿐인데.
절망스러운 것은 수행 평가 성적이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틀린 단어를 백 번씩 써 와야 하는 노동에 가까운 숙제가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15분의 긴 쉬는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책상에 엎드린 김에 잠이나 마저 자자. 어차피 지난 일, 어쩔 수 없지. 태평하게 생각했다.
심란한 속이 언제였냐는 듯 잠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얘 또 매점 안 가고 잔다느니, 요즘 왜 이렇게 자냐느니, 밤에 대체 뭘 하냐느니 하는 소리가 꿈처럼 곁에서 들려왔다. 시끌벅적한데도 잠이 깨기는커녕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정신이 깨어 있는 마지막쯤, 내 고개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폭신한 베개가 딱딱한 팔에 얹어져 자세가 편안해졌다. 그러고는 어두운 천이 툭 떨어져 머리끝까지 덮어졌다. 교복 재킷을 내 위에 버려 놓고 가는 건지 덮어 주고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빛 하나 들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더 깊게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