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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7화
03. 미워지지 않는 (7)


“헉!”
책상을 발로 차면서 몸이 튀어 올라 잠에서 깼다.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자 내 위를 무겁게 덮고 있던 것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씨, 문, 너!”
언제 돌아왔는지 바닥에 떨어진 교복 재킷을 주워 든 정언이 바닥에 굴러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세상모르고 얼마나 오래 잔 건가 놀라서 칠판 위의 시계를 보니 3교시 시작하기 3분 전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나 키 크려나 봐!”
“꿈꿨냐?”
퍽이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꿈 깨라는 뜻이겠지만, 실제로 떨어지는 꿈을 꿨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꿈. 키가 한창 크던 어린 시절에 꾸던 그 꿈을 요즘 부쩍 자주 꾸고 있었다. 조금만 더 크면 180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 넌 지금도 안 작아.”
“애매하게 4센티가 부족하잖아!”
“네 얼굴엔 지금 이 키도 크다니까.”
“이씨, 내 얼굴이 뭐! 왜!”
왜 생긴 거 가지고 그래! 내가 니들보다 커지는 게 싫은 거겠지!
“아…….”
버럭 치밀어 올랐던 성질이 눈앞의 빵을 보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새가 모이 받아먹듯 입을 아, 벌렸다. 떠들다 보니 잠이 완전히 달아났고, 매점 다녀온 놈들이 들고 있는 빵을 보자 식욕이 돌았다. 나 한 입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으니 재윤이 소시지 빵을 내밀어 주어 덥석 베어 물었다.
“김재, 존나 치사하다. 한 입 바꿔 먹자니까 싫다며?”
초코롤 빵을 휘두르며 성질을 내는 혁수를 바라보다가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키고, 초코롤 빵도 달라고 입을 벌렸다. 재윤을 보고 성질을 내며 먹고 떨어지라는 듯 팔만 뻗어 내민다. 한 입 또 덥석 물었다. 이렇게 서로 물어뜯느라 한눈 판 틈을 타 한입씩만 빼앗아 먹어도 배부르겠다고 생각하며 우물우물 입 안 가득 빵을 씹었다.
“드러운 새끼, 너 같음 침 닿은 거 다시 먹고 싶겠냐?”
자기들끼리 아옹다옹하거나 말거나 돌아가면서 한 입씩 얻어먹었다. 이렇게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 될 걸 왜 싸워, 왜.
“간접 키스 꺼져!”
아니, 그럼 뭐 나는 너희 모두와 간접 키스 중이냐.
“어, 그 빵 뭐야? 새로 나왔어?”
“한 입 먹을래?”
“응!”
서로 절대 못 준다고 싸우거나 말거나 꿋꿋하게 한 입씩 얻어먹었다. 아니 내 빵이 탐나면 너도 이거 사지 그랬냐, 아니 한 입 바꿔 먹지도 못하냐, 그럼 네가 먼저 빵 내놔라, 네 침을 어디다 묻히냐, 싫다, 꽥꽥거리고 싸우다가 날 몇 번 손가락질까지 하며 입씨름한다. 네 집 개새끼랑 뽀뽀 안 하냐, 쟤는 그럼 개냐, 넌 개만도 못하다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어느새 지들 손에 든 건 다 처먹고 종이 치자 제자리를 찾아간다. 진심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 시비 걸고 말싸움하는 게 스포츠인 놈들이다.
잠 실컷 자고 배도 채우자 목이 마르다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는데, 짝꿍이 제가 마시던 이온 음료를 건네줬다. 한 모금 시원하게 넘기며 역시 얻어먹는 게 제일 맛있다고 또다시 깨우쳤다.

종례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이었다. 집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작당 모의를 할 정당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이야기다. 이럴 때만 단합이 잘 되는 놈들이 동그랗게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한 시간씩 로테이션하자.”
이건 방팅 이야기였다.
“2방은 무슨 죄냐? 한 시간씩 교체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야지 민주주의 사회에, 어? 평등 몰라, 평등?”
“너희가 운이 없는 거지, 우리가 꼭 바꿔 줘야 되냐?”
가진 놈들이 없는 놈들에게 양보해 줄 리가 없다. 세상이 그렇다. 많이 가졌다고 베푸는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어 다른 것까지 뺏는 놈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있는 놈들이 더 하다고 애초에 연선율을 가진 1방은 로테이션을 해 줄 이유가 없다고 목이 빳빳했다. 이러다가 반 나뉘어져 전쟁이라도 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놈이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럼 술을 포기해, 1방은.”
2방엔 슈퍼 집 아들이 있었다. 모든 술을 조달할 능력을 갖춘 히어로. 기세등등하던 1방이 순식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드디어 타협점을 찾은 건가 눈치를 살피며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 놓기로 했다.
“근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어?”
산통 깨지 말라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뾰족하게 꽂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렇다고 너는 안 할 거냐?”
선혜의 반과 방팅을 하고야 말겠다고 혈안이 된 부회장이 버럭 하는 말에 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내 목적은 술뿐인데!”
그렇다. 내 수학여행 유일한 목적은 술이었다. 여자애들과 노는 거야, 꼭 수학여행이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닌가. 다른 학교 여학생들 만나는 것도 아니고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혹은 앞으로도 약속을 잡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우리 학교 여학생들인데 저렇게까지 열을 올릴 필요가 있나 싶었다. 환경이 바뀐 것에서 오는 들뜬 마음을 노려 여자 친구를 만들어 보겠다는 그런 기대감에 따른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나에겐 집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술이 더 간절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18세가 되도록 술을 입에 대 보지도 못한 고등학생은 나뿐일 거다.
“우리 방 둘 중 하나가 다른 방보다 커.”
그때, 한참이나 별말 없이 애들 하는 얘기를 듣기만 하던 연선율이 입을 열었다.
“이럴 때 전교 회장인 게 좋지.”
당당하게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 얼마 못 가 민망한 듯 웃는다. 무표정하다가 웃으면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지는 얼굴은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기우는 듯 휘청이는 느낌.
“올, 연 회장!”
“이야, 쓸모 있는데?”
하지만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나뿐인 듯 다들 엄지를 추켜세우며 잘나셔서 좋겠다고 환호인지 놀리는지 모를 소리만 내놓는다.
“큰 방에서 놀 사람은 놀고, 작은 방에선 먼저 잘 사람들이나 취한 놈들 자면 되겠네.”
먼저 자면 사람이고 취하면 놈이란다. 그 노골적인 표현엔 자존심도 없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선생님들의 신뢰를 잃을 수 없다, 수학여행에 가서 하는 일탈은 쓸모없는 짓이다 하며 훈계해야 할 전교 회장 주제에 지가 더하다. 같이 작당 모의하고 있다. 반듯하다, 어쩐다 해도 결국 그 역시 보통 남자애였다.
“그리고 선배한테 들었는데, 페인트 볼 서바이벌에서 우승하는 반은 점호 제외야.”
“우오오오!”
“방팅이고, 술판이고 그거 못 이기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다들 이 악물고 집에 가서 비비탄 총이라도 쏴 보고 자든가.”
정말 다들 비비탄 총 찾아 연습할 기세로 시끌벅적 난리가 났다. 우리 집 창고에도 하나 있을 텐데 진짜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나도 들떴다. 벌써 내일이 수학여행이라니 신났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 맞다. 그래서 담력 시험은 진짜인가. 물어봐야 하나.
“청소 당번은 청소하고, 이만 가자.”
하지만 입을 떼 보기도 전에 학급 회의 아닌 회의는 끝이 났고, 연선율이 일어나 짐을 챙겨 나가는 것만 멍하니 쳐다봐야 했다.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물론 시간이 조금 더 여유롭게 남아 있었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물어볼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창고를 뒤졌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비비탄 총이 아직 있나 그저 호기심에 찾아본 것이었다. 그걸 가지고 정말 미리 연습해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창고 방에서 한 시간가량을 헤매고서야 가장 아래 틀어박힌 수납 상자에서 비비탄 총을 찾았다. 그 상자엔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수많은 장난감이 들어 있었는데, 한번 보고 싶어서 찾고 또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어린 시절 앨범도 거기에 있었다. 비비탄 총과 총알, 앨범을 끌어안고 창고 방에서 나와 방 안에 그것들을 내려놓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장 보러 가자!”
기다렸다는 듯 계단을 뛰어 내려가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평소에 장 보러 가자고 해도 귀찮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놈이 이러는 것이 수학여행에 가지고 갈 간식을 살 속셈임을 엄마가 모를 리 없었다.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나를 흘겨보다가 팔을 털어 내고 겉옷 입고 오라는 허락에 다시 기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후드 집업을 걸치고 다시 내려가 신발을 신고 있으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엄마가 지갑을 들고 안방에서 나왔다.
“너 혼자 있어?”
“응.”
“선율이는?”
“학원 갔겠지.”
바르고 성실한 연선율이 수학여행 전날이라고 학원을 빠진다거나 땡땡이를 치는 일이 있을 턱이 있나.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슬렁슬렁 걸어 도착해 카트를 끌었다. 반찬거리를 사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내 목적인 과자 코너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초콜릿은 하나씩 까서 먹기 좋은 낱개 포장 초콜릿으로 담고, 크래커도 담고, 봉지 과자도 종류별로 담았다. 그러다가 다 들고 가지 못할 것 같아서 다시 두세 봉지씩 들고 고민하며 하나씩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선율이도 좀 줘, 너만 먹지 말고.”
“어차피 다 나눠 먹을 텐데, 뭐.”
걔랑 나는 친근하게 과자를 나눠 먹을 사이가 아니었다. 엄마는 우리가 그렇게 다정한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에서 그렇게 티가 나는데 모르는 편이 더 이상했다. 다만 엄마가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연선율이 나에게만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만 벽을 세우고 차갑게 대한다는 것. 엄마는 그가 원래 낯을 가려서 나에게 행동하듯 모두를 대하는 줄 알 거다. 굳이 나만 미움받는다고 솔직하게 정정할 마음도, 그럴 이유도 없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는 않았다.
“엄마.”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에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엄마를 불렀다. 그러고도 한참 멍하니 있다가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랑 선율이 엄마랑 친구잖아.”
“응, 근데.”
우리 집에서 그가 하숙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우리 엄마와 연선율의 엄마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사이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집에 하숙하는 것보다 친구 집에 맡기는 편이 나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선율을 제외한 그의 가족은 전부 미국에 있었다. 이민을 가며 연선율만 한국에 남았고, 홀로 남게 되면서 우리 집에서 하숙을 시작하게 된 것이 작년 가을이었다. 연고 없는 이민은 아니었다. 그의 할머니가 미국인이라는 건 엄마한테 따로 들었다. 그의 눈동자 색이 주위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옅은 갈색인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한국인이니까 그의 아버지는 혼혈. 어머니는 또 한국인. 복잡하다. 왜 연선율만 한국에 남았는지 그 가족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어떤 이유로든 그는 홀로 한국에 남았고 그래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실 내 생각에, 연선율은 혼자 살아도 아무런 문제없을 인간이다. 어차피 있는 집 자식이니 집안일이야 도우미 아주머니를 쓰면 될 일이고, 혼자 알람 듣고 새벽같이 일어나는 일에 어려움이 없고 스스로 알아서 전교권 성적을 유지하고, 교우 관계도 원만한 데다 바르고 성실한 타입이니 엇나갈 일도 없었다. 딱히 누군가의 손길이나 감시가 필요한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봐 준다는 개념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비단 연선율이 부족해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끼니를 제대로 된 밥으로 챙겨 먹고 어른이 있는 집에서 안전하게 학교를 마치는 것도 아직 미성년자에겐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 집에 아들을 맡길 정도로 친한 사이인 어머니들끼리, 이전엔 교류가 없었을까.
“어릴 때 나랑 걔는 만난 적 없어?”
“너랑 선율이?”
“응.”
“왜 없어? 너 기억 안 나니?”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어본 게 결코 아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그대로 굳어져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엄마가 카트를 끌고 한참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든 초코 과자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바짝 따라붙었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떠오를 리 없는 막연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인상을 썼다.
어릴 때의 일이라고 전부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은 대충 다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연선율은 아니었다. 그와 만난 기억은 조금도 없었다. 잠시 스치듯이 만났다고 해도 결코 잊을 수 있는 외모가 아니었을 텐데, 그때도.
“진짜 만났어? 난 기억 안 나.”
간장을 고르던 엄마가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한참이나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런다.
“내 아들, 기억력 어떡하니.”
유전자다, 유전자! 피는 못 속인다는데 내 기억력이 내 탓이야, 뭐?
“한 번 만났어? 두 번?”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와 한집에 살고서 반년이 넘어서야 처음 알게 된 진실에 나는 혼이 쏙 빠졌다.
“한 번이나 두 번이 중요하니, 어차피 보름이 네가 기억 못 하면 들어도 몰라.”
엄마가 혀를 쯧 차며 하는 말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틀린 말이 없었다. 혹여 열 번을 봤다고 엄마가 말해 준다고 해서 없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날 리가 없었다. 남이 해 주는 이야기는 내 기억이 아니다. 나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작년에 처음 만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옛날에, 연선율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가정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옛날의 추억 속에, 연선율이 나를 싫어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일을 그 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문! 나도 하나만.”
“으응.”
왼손에 든 통감자 컵을 기계적으로 쓱 옆을 향해 내밀자 하나 쿡 찍어 가지고 갔다. 다시 컵을 내 앞으로 가져와 이쑤시개에 꽂힌 통감자를 한입 베어 물어 우물거리고 씹었다. 시선은 한곳에 고정된 채 멍하니 입을 움직였다.
연선율은 기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채 멍하니 걸음을 옮기다가 무릎에 무언가 쾅 부딪혀 악 소리를 질렀다.
“아악!”
“앞 좀 보고 다녀.”
대수롭지 않게 힐긋 시선만 주고 제 갈 길 가는 매정한 놈들을 보고 있으니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딴 데 정신이 팔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벤치에 정강이가 제대로 부딪혔다. 정강이를 감싸 쥐고 낑낑거리다가 다시 휘청이며 걸음을 옮겼다. 나쁜 것들, 괜찮냐고 묻지도 않아.
“빨리 안 오냐? 두고 간다.”
나에게서 하나 가져간 통감자의 마지막 한 입을 쏙 입에 넣고 앞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훈민이 버스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휴게소에서 주어진 자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정말 내가 마지막일까 봐 걸음을 서둘렀다. 부딪힌 정강이가 욱신거리고 아파서 인상을 찌푸린 채 낑낑거리고 버스에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기 무섭게 버스가 출발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기다리지도 않고 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다른 애들은 다 챙겨 가도 나는 버리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반 회장이라, 휴게소에서 버려지는 게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통감자 하나를 이쑤시개로 거칠게 쿡 찔렀다.
밤새 고민했다, 물어볼까 말까. 그러나 물어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개를 들어 살짝 옆을 훔쳐봤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연선율을 시야로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우리가 더 어렸을 때 만난 적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본다고 해서 그와 갑자기 가까워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본능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허물어질 벽이었다면 다시 만난 첫날 그가 먼저 나에게 예전의 기억을 꺼내 알은척을 했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그저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수학여행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소지품 검사가 간단하고 빠르게, 그리고 무사히 넘어간 것은 단연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반 회장의 공이었다.
“와, 뻔뻔한 새끼.”
방 한구석에 500밀리리터 생수통 20개짜리 팩을 내려놓은 부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감탄 반 놀라움 반으로 하는 말에 뒤따라 들어오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다.
“거짓말까지 잘하니 놀랍냐?”
대답까지 뻔뻔했다. 다 잘하는데 거짓말까지 잘한다고 잘난 척하는 척을 하더니 또 웃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도 방 한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잘난 척처럼 들리지만 사실 다 맞는 소리였다. 잘난 놈이 잘난 척한다고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금세 쑥스러워하며 웃어 버리기 때문일 거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지. 심지어 잘생긴 얼굴이라면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홀린 듯 수긍하게 되는 것도 차라리 개연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부회장이 내려놓은 생수 한 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반 술이 저거다. 저 생수. 스무 개의 생수는 사실 전부 소주였다. 그런데 선생님들과 교관 앞에선 마시는 물이 바뀌어 탈이 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따로 준비한 생수라고 전교 회장답게 신뢰 가는 어조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천연덕스럽고 믿음직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연선율은 처음 보았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어제 학교 끝나고 슈퍼 집 지만이네 집에 같이 가서 생수 페트병을 전부 소주로 채워 담고, 살짝 칼집을 냈던 비닐은 들기 편하게 만드는 척 테이프로 두르고 손잡이를 만들어 다시 감쪽같이 포장했다고 애들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들어 보이더니, 선생님들 앞에선 그렇게 결백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다 알고 있던 우리도 순간 진짜 물인가 착각할 뻔했다.
반 애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하면 발 벗고 나서서 말려야 할 회장이, 그것도 전교 회장인 주제에, 이런 못된 짓을 솔선수범하다니 기함할 일이다.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을 이용해서 작당 모의에 앞장서는 인간이 어디 흔한가. 반듯하다 말았다. 얘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다.
“이렇게 공들였는데 점호 제외 안 되면 어쩌냐?”
약 올리듯 그의 옆에서 혁수가 조잘거리는 순간 갑자기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어느새 생수병이 아니라 연선율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내 눈과 마주친 그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술 마실 생각뿐인 애가 이겨 주겠지.”
음?
“비비탄 총으로 연습은 하고 왔지?”
그러고 보니까 책상 위에 올려놓고 완전히 까먹었네. 가 아니라 지금 이건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시비를 거는 거야?
설마하니 정말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대화하는 것조차 흔치 않고 특히 이렇게 많은 애들 사이에서 나를 콕 집어 말하는 것은 더더욱 없던 일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내 목적은 술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더 받아칠 말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반 애들 모두가 반짝거리는 희망의 눈동자로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방을 나가 볼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문보, 발컨인데.”
정언이 못 미덥다는 듯 꺼내 놓는 말에 다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각자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정신이 번쩍 돌아와 고개를 휙 돌려 정언을 쏘아보며 버럭 했다.
“왜, 뭐! 니들이 보태 준 거 있냐?”
이씨. 마우스랑 키보드로 하는 건 못할 수도 있지,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