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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8화
03. 미워지지 않는 (8)
그리고 결국 말의 무게는 책임이 되어 돌아왔다. 고작 한 반에서 다섯 명 출전하는 자리에 연선율 다음 순서로 강제 징집됐다. 옷을 갈아입고 무늬만 방탄조끼라는 것을 입고 헬멧을 손에 든 채 다섯 명의 참전 용사가 머리를 맞대고 살아 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다닐 거야?”
“안 되지. 그럼 아무렇게나 쏴도 한 명은 맞을걸?”
이기자고 혈안이 되어 있는 마음은 모든 반이 똑같았다. 우리 반이 이 경기의 우승 상품에 대해 하루 먼저 알았다고 해서, 남들보다 그 마음이 앞선다고 말할 순 없었다. 모든 반 아이들이 점호의 자유를 위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임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정말 적진에 침투하는 전사처럼 답지 않게 심각한 애들 속에서, 나 역시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고 그들이 내놓는 작전에 몰입했다.
“아예 다 따로 다니자.”
“야 무슨,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냐?”
뭐든 무성의한 부회장이 이렇게 성의가 넘치는 것은 조금 전에 펼쳐진 여학생 반의 서바이벌에서 그의 일편단심 윤선혜의 반이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내 목적이 오로지 술뿐이라면 부회장의 목적은 오로지 윤선혜의 16반과의 방팅뿐이었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스카이를 갔을 것이라는 비유에 가장 적합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부회장이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사람이 360도를 다 볼 순 없으니까 둘씩 다니는 건?”
“남은 한 명은 혼자 다녀?”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우리는 홀수다.
“혼자 다닐 수 있지, 연선율?”
그리고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간 것은 내가 의식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까의 일을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한 번씩 그의 뒤꿈치를 걷어찼을 때처럼 나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행동이 튀어 나가는 것을 막아 내지 못할 뿐이었다.
혼자 다닐 사람이 너라며 떠미는 나를 그가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는 그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허공 어디쯤에 시선을 두고 딴청을 부렸다. 다른 놈들은 나와 연선율을 번갈아 보다가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펴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재윤이 내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연선율, 넌 혼자 다니면 되겠다.”
이때다 싶어 내 의견에 동참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지만 결국 나만 아니면 되는 일 아닌가. 나도 냉큼 재윤에게 덥석 붙었다. 연선율이 기막히다는 듯 탄식하고, 부회장은 혁수를 붙잡고 물러섰다. 2대 2대 1로 갈라져 대치하듯 서로 눈치를 보고 있으니 때마침 시간 다 됐으니 모이라고 우렁차게 부르는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연선율도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반박해도 이제 바꿀 시간이 없었다.
그것이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서바이벌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나무가 많은 넓은 숲속에서 다른 반 아이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등을 맞대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기동력을 떨어뜨렸다. 재윤을 잃은 나와 혁수를 잃은 부회장이 만나 함께 다니다가 부회장까지 잃었다. 연선율 혼자 다니라고 했던 말을 돌려받기라도 하듯 나 혼자 남았다.
쫑긋 귀를 세웠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페인트 볼이 어딘가에 맞는 둔탁한 소리와 약한 비명이 터지는 것을 들으며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서 주위를 살피느라 몇 번이나 나무에 머리를 박고 바닥의 돌에 걸려 넘어졌다. 헬멧과 각종 보호대가 아니었으면 다 깨지고 까져서 엉망이 됐을 거다.
이렇게 혼자 다녀선 1분도 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나 뒷걸음질을 치다가 등에 쿵 나무가 닿아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돌아본 곳에는 이 숲속에 있는 것 중 가장 굵고 튼튼할 듯한 나무가 있었다. 위로 뻗어 나간 가지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페인트 총을 어깨에 사선으로 멨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잽싸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머리가 크고 정글짐에서 놀 수 있게 되면서부터 나무를 타고 논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몸의 기억은 언제나 가장 정확했다. 어릴 때처럼 가볍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 튼튼한 나뭇가지를 밟고 섰다. 설마 나무 위까지 살펴보지는 않으리라는 예상대로 나무 아래 모습을 드러낸 1반 아이가 페인트 총으로 사방을 겨누며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세 명이 더 지나가는 것을 편안하게 지켜보았다. 대충 여기서 자기들끼리 싸워 인원수를 줄이길 기다렸다가 끝나갈 때쯤 내려가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참이었다.
탕!
소리가 들리는 쪽을 내려다보는 순간 탄성이 나오려던 것을 속으로 삼켰다. 이쪽으로 뛰어오다가 쫓아오던 다른 반 아이를 쏘아 맞힌 사람은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죽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우리 반 회장. 그러게 혼자 다녀도 되는 거 맞다니까.
부를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 그를 노리는 다른 반 아이가 보였다. 그를 불러 그가 반응하는 것보다 다른 반 아이가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고, 나는 소득 없이 위치만 노출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하다가 사선으로 메고 있던 페인트 총을 급히 벗어 들고 나무 뒤에 숨은 놈을 겨눴다.
탕!
“아! 뭐야?”
오, 나 사격에 소질 있나 봐.
정확히 배에 명중한 페인트 볼이 어디서 날아온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숨었다. 비명이 들린 곳을 돌아본 연선율은 그제야 저를 노렸던 놈이 성질을 내며 본부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를 불러야 하나 다시 한 번 망설이는데 눈이 마주쳤다, 고민이 무색하게. 설마 나무 위를 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뭇잎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뭐 하냐, 너?”
그가 기막히다는 듯 탄식했다.
“살면 되는 거 아냐.”
나무에 올라가지 말라는 규칙도 없는데, 뭐 어떠냐고 받아치다가 되물었다.
“몇 명이나 남았어?”
“한 명? 그만 내려와.”
별로 다정하진 않았지만 싫은 기색을 크게 내비치지도 않으며 하는 말에 내려갈 길을 살폈다. 전장에 단둘만 남는 상황이 되면 이 정도 대화는 선뜻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 생각하며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연! 뒤에!”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그의 뒤를 노리는 것을 보며 버럭 소리 지르자 그가 재빠르게 엎드렸다. 뒤도는 것보다 일단 피하는 게 낫다는 빠른 판단 덕분에 페인트 볼이 빗나갔다. 나는 느슨하게 잡고 있던 총을 제대로 쥐고 빗나가면 끝이란 생각에 두 발을 연속으로 쏘았다. 첫 발은 빗나갔고 연달아 쏜 것이 상대 팀 팔에 맞았다.
“야! 너 왜 거기 있냐?”
맞은 놈이 기겁하며 하는 말에 시원하게 씩 웃었다. 페인트 총을 다시 어깨에 메고 나뭇가지를 두 손으로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가뿐하게 땅으로 뛰어내려 착지했다. 답답했던 헬멧을 벗고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바람이 통하니까 개운했다. 구시렁거리며 사라지는 최후 일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뿌듯하게 연선율을 돌아봤다.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있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버리는 것을 보며 나도 웃었다.
“고생했다.”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내미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 손을 마주 부딪쳤다. 안 좋은 감정은 잠시 잊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으니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살짝만 부딪혔던 손을 거두고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걸었다.
서로의 영웅담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한마디도 더 주고받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바로 곁에 있는데도 느껴지는 거리감 때문인지 본부로 돌아가는 길이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아니 의식할 새도 없이 금세 길이 끝났던가. 아니 길었던가. 사실 어느 쪽인지, 어느 쪽이 기분 탓인 건지, 나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어색함이고 길이 멀고 거리감이 어떻고,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밤에 마실 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심지어 술 파티는 오늘 밤이 아니라 내일 밤에 벌어질 일이었다. 오늘 밤은 아니었다. 오늘 밤은 나에게 가장 심각한 난관을 예고하고 있었다.
“밥이 입에 안 맞냐?”
“설마, 쟤가?”
저녁 식사 전 공지를 듣고 밥맛이 뚝 떨어졌다.
“야, 일정 여유로워서 좋지 않냐? 밤에 하나 남았지?”
밤에 하나. 그 생각을 하니 가슴에 무언가 턱 답답한 것이 걸리고, 입 안을 까슬하게 굴러다니던 밥알에 가시가 돋친 것 같았다. 결국 더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속에서 뜨겁게 치미는 무언가에 절로 고개를 푹 숙이자 옆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너 우냐?”
우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 같은데.
“나 몸이 안 좋아.”
“이게 담력 시험 안 가려고 수작질이네.”
에이씨, 안 통하네.
“진짜야. 체했나 봐.”
“차라리 밥맛이 없단 말을 믿지.”
우울하게 입을 삐죽이다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보며 버럭 했다.
“야, 내가 승리의 주역인데 좀 봐주면 안 돼? 어?”
“글쎄 내가 못 봐서 모르겠는데?”
“내가 연선율 몇 번을 구해 줬는지 알기나 해?”
그렇다더라는 말뿐 내가 나무를 타서 이겼다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믿어 주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말 좀 해 보라고 연선율을 쳐다보아도 알아서들 생각하라고 나 몰라라 하는 덕에 나는 어쩌다 살아남은 놈이 되었고, 당연히 연선율 덕분에 우승했다고 모두가 맘대로 생각해 버렸다. 쪽수가 밀리는 나는 아무리 팔짝 뛰어도 그들 맘대로 확신하는 것을 바꿀 힘이 없었다. 우승해 줘 봐야 아무 소용없다. 내일 술 마시자고 죽어라 열심히 하면 뭐해, 내일까지 갈 것도 없이 오늘 심장 마비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우울하게 밥도 반이나 남기고 몸을 웅크리고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이러고 있으면 정말 아프다고 생각해 주고 두고 나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내 손을 잡아 본 훈민이 손이 이렇게 따뜻하다니 너의 위는 정상인 것이 틀림없다며 끌고 나갔다. 딴 놈의 고통이 나의 행복인 이 죽일 놈의 남고딩들. 두고 보자.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담력 시험을 본다는 산 아래 도착했다. 그리고 본능처럼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두 명씩 짝지어서 산 중턱의 산책로를 돌아 아래로 내려오면 되는 코스라는 말에 기절할 것 같았다. 고작 두 명이라니, 짝이 왼쪽에 서면 오른쪽이 비고, 뒤에 서면 앞이 비고, 앞에 서면 뒤가 비잖아! 못해도 네 명은 붙여 줘야지 이건 말도 안 된다. 두 명씩 올라서 어느 세월에 끝낼 셈인가. 급한 대로 우리 반에서 제일 겁 없고 덩치 큰 놈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연선율 입에서 나온 말에 발이 굳어져 우뚝 멈춰 섰다.
“우리 반은 홀수네?”
연선율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늘한 불안감이 훑고 지나갔다. 눈을 마주쳐선 안 된다는 본능과 시선을 피해야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내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눈이 정통으로 마주쳐 버렸다.
“혼자 갈 수 있지, 문보름?”
그건 내가 낮에 연선율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니! 못 가! 왜 나야?”
그와 어색한 사이라는 것도 잊고 바락 달려들었더니 그가 웃었다. 평소에 반짝거리고 빛난다고 생각했던 환한 그 웃음이 지금 이 순간 저승사자의 마지막 표정처럼 무서웠다. 나쁜 놈, 못된 놈. 나한테만 속 좁게 구는 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우리 반을 승리로 이끌 만큼 가장 용감하시니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데에 할 말을 잃은 게 아니라 전의를 상실했다. 그게 지어낸 말이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을 제일 잘 아는 놈이 그 말을 이용해서 저 어두운 산에 나 혼자 보내려고 그런다. 억울하고 열받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 했어. 고작 페인트 볼 전장에 홀로 가라고 떠미는 것과 생사가 걸린 저 어두운 산을 혼자 오르는 걸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을 수가 있어. 진짜 백번 싫어해도 모자란 놈이다, 나한테는.
잔뜩 울상이 되어서 절박한 눈으로 애들을 돌아보자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 자기들끼리 짝짓는다. 결코 날 위해 대신 혼자 가 주겠다는 놈이 없었다.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겁이 많다는 걸 모르지도 않는 놈들이, 내가 담력 시험을 피해 보겠다고 꾀병까지 부리려 했던 것을 전부 아는 놈들이, 오히려 재밌겠다고 눈을 빛내는 것을 보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내가 어떻게든 꼭 한 번 복수한다. 두고 봐.
아래에서 시간을 두고 애들을 보내는 교관의 손을 붙잡고 같이 가 주시면 안 되냐는 먹히지도 않을 소리까지 해 봐도 당연히 소용없었다. 출발하면 멈춰 서 있다가 뒤에 오는 애들 붙잡고 같이 가려고 했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내가 마지막 순서였다. 고의가 분명했다. 반항해 봐도 씨알도 안 먹혔다. 차라리 빨리 순서가 돌아와서 끝내는 게 낫겠다는 마음과 그래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고 싶은 마음. 그 두 가지를 놓고 싸우다가 마침내 내 순서가 되어 떠밀리듯 출발했다.
걸음걸음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려서 비틀거렸다. 다음 반 아이들이라도 기다려 볼까 했지만 어두운 산속에서 잠시도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뛰어서 앞에 가던 애들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뛰다 보니 산속에 내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제발 먼저 출발한 누구라도 이 소리를 듣고 멈춰 주길 바랐다.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내가 계속 같은 곳을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그 자리에 브레이크를 밟듯 황급히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달리기가 느린 편도 아닌데 아무리 뛰어도 앞에 출발했던 정언과 지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원래라면 그 둘이 보이지 않더라도 15분 걸린다던 코스의 끝은 보여야 하는데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 무성한 나무뿐이었다. 귀신에게 홀렸다. 홀린 게 분명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악!”
기절할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바람마저 날 약 올리고 지나가는 귀신의 발소리 같았다. 손전등 빛에 뭐가 비칠지 몰라 무서워서 전원을 꺼 버렸다. 불빛이 사라진 검은 산에 홀로 남겨졌다.
소름이 끼쳤다. 차오르는 숨을 크게 내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곁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쉬느라 산소가 부족해 기절할 것 같았다. 살려 달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몸이 떨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소름 끼쳐서 다시 손전등을 켤까 하다가, 귀신이 빛 보고 찾아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도 다시 켜지 못하고 손만 떨었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올걸. 왜 또 착하게 말 듣고 방에다 두고 와서. 이러다 날 밝을 때까지 여기서 이렇게 떨고 있으면 어떡하나 싶은데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스산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내 손을 스치고 지나가는 나뭇잎에 또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비명 지르는 것처럼 나 좀 살려 달라는 말이 나와 주면 좋겠는데 갑작스럽게 터지는 비명 말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아서 답답했다. 양손으로 손전등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지나 눈을 뜨면 날이 밝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던 참이었다.
으르렁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몇 번 느리게 감았다 뜨자 그새 조금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무언가 검은 형체가 보였다. 들짐승도 사나 봐, 으아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이 달려 근처의 가장 큰 나무를 찾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내 발소리의 메아리인지 아니면 들짐승인지 바람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무 위에라도 있으면 안전할까 싶어 나무 기둥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악!”
내 어깨에 닿는 무언가에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결국 왈칵 눈물이 터지고 다가오지 말라고 온몸을 파닥이는데 갑자기 탁 소리와 함께 눈앞이 밝아졌다.
“네가 들짐승이냐, 이 나무도 올라타게?”
눈물이 볼을 타고 툭 아래로 떨어진다. 흐릿하게 번지던 눈앞에 초점이 맞았다. 눈부신 것은 손전등 빛이었고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은…….
“하긴 들짐승 크기나 되면 찾기 어렵지나 않지.”
“야! 이 나쁜 놈아!”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부드러운 것이 뺨에 닿았다. 그것이 그의 손이라는 것을 안 순간 훌쩍임이 멈췄다. 치밀었던 화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식었다. 얼굴을 엉망으로 적신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 낸 연선율이 내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과장 조금 보태 저만 한 사내놈을 번쩍 드는 힘에 놀라 어영부영하는 사이 발이 땅에 닿았다. 멍하니 눈앞의 연선율을 보다가 울컥하고 다시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르고 그의 정강이며 발을 마구잡이로 걷어찼다.
“너! 진짜! 넌 나한테만 못됐어, 이 나쁜 새끼!”
이제 살았다는, 아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놓이는 한편, 날 혼자 보내 이 사달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눈앞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식었던 열이 다시 불같이 끓어올랐다.
“좋냐? 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그러나 주먹을 휘두르고 아무렇게나 걷어차도 닿는 게 없었다. 이 어둠 속에서 한 대도 맞지 않겠다고 피하는 그가 더 얄미워 다시 왈칵 쏟아진 눈물을 팔을 들어 옷소매로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같이 가기 싫으면 계속 여기 있든가.”
“안 돼! 나 두고 가지 마.”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리는 그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손을 뻗어 그의 한 손을 냉큼 붙잡았다. 그러고는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욕하고 난리 친 사실은 없던 일처럼 잊고 얼른 내려가자고 조르자 그가 나를 흘겨보며 기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산 중턱까지 들어와 있고, 잘한다.”
혼낸다. 마음은 같은 또래가 혼낸다고 쫄기라도 할 것 같냐고 울컥하는데, 몸은 귀가 축 처진 멍멍이처럼 기가 죽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난 길 따라 왔는데.”
“길 따라오면 어떡해, 중간에 산책로로 꺾었어야지!”
아, 맞다. 중간에 산책로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었다. 난 길 따라서 간다고 갔는데, 무서움에 이성을 잃어 정신없이 뛴다고 너무 정직하게 등산길을 따라 올라가 버린 것이 사달이었다. 나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2학년을 통틀어 혼자 길을 잃었을 것이 분명해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네가 나 혼자 보냈잖아! 왜 화내! 엄마야!”
그 순간 음습한 짐승 소리 같은 것이 들려 그의 팔을 와락 끌어안으며 비명을 지르자 그가 걸음을 멈췄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팔에 매달려 덜덜 떨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아 떼어 냈다. 그 손길에 휘청 밀려나 아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닿는 것도 싫다 이건가. 무서워서 이러지, 그런 게 아니면 내가 손끝이라도 댈 줄 아느냐고 성질을 내려던 순간이었다.
내 한쪽 손에 서늘한 체온이 닿았다. 의아한 사이 손가락이 엇갈려 겹쳐졌다. 놓치지 않게 단단히 깍지를 껴서 손을 잡은 그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