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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9화
03. 미워지지 않는 (9)


손. 아주 어릴 때 이후 어떤 친한 친구와도 이렇게 간지럽게 손을 잡은 적은 없었다. 말도 못하게 어색했다.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면서도 서늘했다. 다정하고 상냥해서 좋아하지 않는 놈의 손도 선뜻 잡아 주는 행동은 따뜻했지만, 그것은 심리적인 것일 뿐 닿는 체온은 서늘했다. 그것이 그가 나를 생각하는 온도처럼 느껴졌다. 그 온도 차에 기분이 묘했다.
나를 이끄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끌려가다가 걸음에 속도를 조금 올려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가 손전등으로 비추어 주는 땅을 보며 발을 맞춰 걷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손전등 빛만 아른거리는 어둡고 까만 산속에서 그의 얼굴이 신비롭게 빛나 보였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이 났다.
밤새 고민했다, 물어볼까 말까.
솔직히 말하면 밤을 새운 것까진 아니었다, 밤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으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표현할 만큼 치열하게 고민한 건 맞다. 그러나 결론은 물어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 고민하지 않고 잠들었다. 그것이 불과 어젯밤이었다. 그랬는데.
“있잖아.”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은 서로의 표정을 자세히 살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어두웠고, 항상 스쳐 지나가는 일상적인 공간도 아니었고,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우리, 어릴 때 만난 적 있다면서.”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나도 휘청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어두워서 서로의 표정을 살필 수 없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서늘한 그의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숨을 멈췄다. 그의 눈이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만났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고. 나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그는 나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감정이 분명한 그 눈을 가만히 마주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혹시, 내가 그때 너 괴롭히거나…… 잘못했어?”
밤새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던 것을 막상 꺼내 놓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말문을 열까 고민하던 시간부터 그에게 물어보는 것을 마치는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눈을 마주친 채 대답을 기다리길 한참. 마침내 꺼내 놓은 대답은.
“아니.”
너무 간결해서 허무할 지경이었다. 딱 두 글자의 부정을 곱씹다가 멍하니 되물었다.
“어?”
그리고 착각이 아니라면.
“잘못은 지금 하고 있지.”
그의 표정은 내가 여태껏 본 중 가장 기온이 낮은 바람이 불고 있었고 목소리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냉랭했다. 그 서늘한 얼굴로, 차가운 목소리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되물을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동자의 끝 맛이 썼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손이 잡힌 채 그의 걸음대로 끌려가듯 걸었다.
나에게만 벽을 세우고 나에게만 못되게 굴었다. 싫어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수많은 행동에 대한 해답이 어린 시절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용기 내서 물어본 지금 이 순간, 나는 더 큰 미궁에 빠진 것 같았다.
“어? 왔어? 맞지?”
“문보름이다! 야!”
정신을 차렸을 땐 산 아래에 내려와 있었고 왁자지껄한 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든 순간 손이 허전해졌다. 저리도록 꽉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반 아이들의 움직임에 가려지고 사라진다.
산을 네가 다 접수하고 왔냐며 엉망이 된 내 옷이며 여전히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보고 혀를 차는 모질지만 정 많은 놈들의 걱정을 듣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 신경질을 냈다. 먼저 간 놈, 매정한 놈, 무서워하는 거 알면 앞에서 좀 기다려 주지 하면서 씩씩거리자 얼른 들어가서 생 라면 부숴 먹자고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담력 시험이 끝나고서야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빈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산 아래 평지에 발을 붙이니 바짝 긴장되었던 마음이 놓였다.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면서도, 앞에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던 놈들에게 마음이 풀어졌다.
현관 옆에 서서 교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연선율을 지나치며 왼손을 꽈악 쥐었다. 손이 따뜻하기라도 했다면 남은 온기로 꿈이 아니었음을 곱씹어 보기라도 할 텐데. 손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에 남은 저릿함마저 환상처럼 흩어져서 사라진다.
마치, 꿈처럼.

나에겐 끔찍했던 길 잃은 담력 시험 이후,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냥아, 집사가 부른다.”
“아이씨. 뒈질래, 진짜?”
누굴 산고양이 취급이야! 씩씩거리고 성질을 내자 재밌다고 자지러지게 웃는 놈들을 몇 대 걷어차 주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내 뒤에 대고도 낄낄거리고 웃는 놈들에게 문가에 있던 슬리퍼 한 짝을 집어 던지자 그제야 얻어맞고 조금 조용해졌다.
산에서 내려온 내가 만신창이로 덜덜 떨고 있는 게 딱 길 잃고 헤매다가 주워진 산고양이 꼴이었다고, 그러면 집사는 주워온 연선율이냐고 자기들끼리 웃겨 죽더니 마음대로 사람을 애완동물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산고양이라 나무를 잘 탈지도 모르겠다고 그제야 서바이벌에서의 내 공을 믿어 주는 소리로 속을 뒤집었다. 남의 아픔을 제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이놈들을 친구라고 뒀다니.
“다 썼어?”
“어.”
그에게 종이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어제의 대화만으로도 다시는 편안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 같았던 참인데, 친하지도 않은 두 사람을 집사니 냥이니 하고 주위에서 놀리니까 더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사라고만 하면 차라리 나았다. 종종 주인이 부른다고 표현할 땐 더 견디기 힘들었다. 전교를 탈탈 털어도 그런 호칭을 웃어넘길 수 없는 유일한 사이다, 우리는.
“여자애들 방 들렀다 갈 테니까, 애들한테 대충 방 치워 놓으라고 해.”
수학여행에 와서 웬 종이를 제출하게 된 것은 이튿날 등산 프로그램을 빠졌기 때문이었다. 밤중에 산에서 길을 잃은 가여운 중생에게 한낮의 등산 프로그램은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는 우리 반 아이들의 성화와 여론에 따라 등산에서 제외됐다. 이게 과연 좋은 일이 맞는지 헷갈렸던 건, 어제 산을 죽어라 뛰어오르느라 오늘 등산을 해서 얻을 피로를 미리 다 얻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빈방에 홀로 남아 어제 담력 시험에서 길을 잃은 경위를 적었다. 열어 둔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나른한 봄 햇살을 맞으며 선선하고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꾸벅 졸기도 하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강당에서 이어지는 강연을 들을 때가 되어서야 합류했다.
1학년 때 일정은 그렇게 빡셀 수가 없더니 그래도 마지막 수학여행이라 그런지 강제적인 프로그램보단 자유 시간이 더 많았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별로 즐겁지 않고 강사만 즐거운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보내고, 방에 돌아오면서부터 진정한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내 프로그램 대체 숙제를 담당 선생님에게 제출하러 가는 연선율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더니 풍경이 가관이었다. 이런 돼지우리에 무슨 여자애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연 회장, 여자애들 방 갔어, 지금.”
신발을 벗고 들어서며 시큰둥하게 말하자 곧바로 거친 반응이 쏟아졌다.
“뭐라?”
“야! 이 더러운 것들 당장 안 치워!”
“네가 제일 더러워, 이 새꺄!”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더니 순서도 없이 방을 치우는 통에 먼지가 죽도록 날리기 시작했다. 어째 더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야단법석을 떠는 놈들을 헤치고 지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청소한다기보다 한쪽으로 밀어 놓고 있어 지저분한 것은 매한가지다.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좁혔다가, 깔끔한 방이고 뭐고 둘러앉을 자리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별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 현관에 우르르 버리는 놈이며, 신발에 먼지 들어간다고 한바탕 경악하는 소리며, 방 안이 떠나가라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웠다.
“지만아, 우리 술은 언제 마셔?”
“술이 중요하냐? 그건 좀 놀다가 분위기가 좀 달아올랐을 때 마셔야지!”
눈을 반짝이며 물어봤으나 단칼에 기각당했다. 한쪽에 놓인 생수병을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그 옆에 앉았다.
나에겐 사실 그렇게 충격적인 이벤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자애들이랑 방팅이라고 한 방에서 노는 거. 남녀 합반이던 1학년 때는 뭐 하다가 떨어뜨려 놓으니까 안달을 하는 건지. 나는 이성에 대한 관심보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관심도가 더 높았다. 이미 얼굴 다 알고, 지나갈 때마다 인사도 나누는 윤선혜의 16반 아이들보다 내 옆에 있는 이 술의 맛이 더 궁금했다. 대충 놀고 얼른 좀 마시지. 무슨 맛이길래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렇게 맛있게 마시는지 궁금한데.
“왜 혼자 오냐?”
“준비하고 온대?”
어울리지 않게 다들 정갈하게 앉아 있다가 연선율이 돌아오자마자 고개를 빼꼼 들고 문을 바라보며 그랬다. 문 앞에 서 있던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안 온다는데.”
“뭐?”
“야, 씨. 말이 돼?”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놈들을 가볍게 한 번 훑어봐 준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는데 순간적으로 마주쳤던 눈을 금세 피하더니 내 옆의 생수병 비닐을 찢고 두 병을 꺼내 애들을 향해 흔들어 보이곤 다시 문 쪽으로 멀어졌다.
“마지막 수학여행은 반 애들끼리 놀겠다는데 억지로 끌고 와? 술 있으면 두 병만 좀 달래.”
“주긴 뭘 줘? 야, 갖고 와! 시발, 우리가 다 먹고 죽을 거야!”
“야! 술 까!”
사내놈들이 포효하거나 말거나 연선율은 다시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도 뒤축을 구겨 신지 않고 제대로 신고 나가는 정갈한 뒷모습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며 넋을 놓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옆에 놓인 생수병들을 꺼냈다. 한쪽으로 밀어 놓아 조금 깨끗해졌나 싶던 방이 다시 순식간에 더러워졌고, 과자를 종류별로 뜯고 오징어며 견과류, 과자까지 늘어놓고 종이컵을 나눠 가졌다. 나는 기대에 부풀어 컵에 술을 가득 따랐다.
“컥! 무슨 맛이 이래?”
기겁하며 캑캑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정언이 입 안에 오징어를 넣어 주었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맛있을 줄 알았냐?”
아니, 이걸 무슨 맛으로 마셔? 과학실에서나 맡던 알코올 향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데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맛이라고 할 게 없었다. 이건 그냥 알코올이잖아!
“넌 오로지 술 마실 생각뿐이라며. 많이 마셔, 다 마셔.”
방팅을 잃은 놈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은 듯 눈을 빛냈다. 얼른 쭉 들이키라는 성화에 못 이겨 컵의 반을 비우려다가 실패하고 내려놓았다. 그러자 정언이 소주가 담긴 내 종이컵에 오렌지 주스를 넘치게 따라 준다. 눈치를 보며 한 모금 홀짝였는데 그 이상하던 알코올 맛이 하나도 나지 않아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맛있지? 그래, 옳지. 많이 마셔.”
나는 몰랐다. 달달한 술을 홀짝거리다가 순식간에 훅 간다는 그런 단순한 진리를. 술이라곤 입에 대 본 적도 없고 부모님조차 술을 드시지 않는 나는 그런 건 정말 하나도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는데 머리가 핑 돌아서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반복하며 여기는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떠올리려 애썼다.
“으아!”
그러다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에 다다랐을 땐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렌지 주스를 섞은 술 맛이 좋다고 홀짝거리다가 취했다. 놀라운 것은 연선율이 여자애들한테 술을 전해 주고 돌아오는 아주 짧고도 짧은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거다, 그게.
맛있다고 조잘거리던 입은 취기가 올라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는 순간부터 무겁게 다물어졌다. 졸린다고 그대로 그 자리에 웅크리고 누웠던 것도 생각났다. 잠에 빠지려는 순간 익숙한 손길이 내 허리를 잡고 일으켜 세웠던 것도, 한쪽 팔은 등 뒤에, 다른 한쪽 팔은 두 무릎 뒤에 넣어 영화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하듯 번쩍 들어 올렸던 것도 생각났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기억은 힘을 주어 겨우 뜬 눈앞에 연선율이 보였던 것이었다.
“아, 어지러워…….”
라면 끓이면서 뒷담을 하다가 딱 걸렸을 때만큼이나 수치스러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파닥거리다가 어지러워서 멈췄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옆방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보아 술에 취해 쓰러진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은 듯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시 잠이 쏟아졌다. 쪽팔린 기억은 자고 일어나서 마저 생각하자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달래며 얼굴을 파묻고 있던 베개에서 고개를 들었다. 뒤척거리고 움직여 모로 누웠다. 한숨을 쉬며 감았던 눈을 뜨고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아…….”
이번엔 진짜 놀라서 비명도 안 나왔다. 당연히 옆방에서 같이 놀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가 바로 옆에 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딱 기절하는 줄 알았다. 대체 지금이 몇 시인지 손목시계를 눈앞으로 들어 확인했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에 새벽 3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이 보였다.
아니, 그런데 왜 옆자리에 누워 있어. 설마 이 방이 술 취해 자러 온 애들로 꽉 차 있다고 해도 곧 죽어도 내 옆에는 눕지 않을 연선율이.
“술버릇 어지간히 얌전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어깨를 움찔했다.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저것은 반어법인가 진실인가. 설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필름이 끊긴 사건이 있었던 건가 아연해졌다. 혹시 내가 속에 있는 말을 술김에 꺼낸 것은 아닐까. 같은 집에 산다느니 그런 헛소리를 반 애들 다 있는 데서 늘어놨다거나…….
“잠만 잤어.”
……는 아니구나. 내 생각이 훤히 보인다는 듯 바로 안심시켜 주는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순간이었다.
“다만 내 옷 붙잡고 안 놔 준 덕분에, 내가 여기 있지.”
“컥!”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을 말이었다. 차라리 잠든 척할까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자 그 역시 대화할 마음이 없는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은 고요했다. 내 숨소리와 바로 앞의 그의 숨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방 안에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어.”
입 밖으로 내놓지 않은 말을 그가 너무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었다. 내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것은 아닐까 긴장이 되는 한편, 이미 다 보이는 것이라면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새벽의 봄바람, 왁자지껄한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매일 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자리에 들면서도 수많은 벽을 사이에 두었던 평소와 달리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연선율. 그리고, 술을 잔뜩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그 역시도 알고 있는 그런 순간. 그래서…….
“연선율.”
천천히 눈을 떴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시선을 떼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불렀기에 쳐다본 것인지, 조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달에 빛나는 그 옅은 눈동자가,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지러웠고, 취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주변이 온통 흔들렸지만, 흐릿한 눈앞에 그의 얼굴 하나만큼은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이거 술김에 하는 말 맞는데.”
눈앞에 초점이 맞은 단 하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맴돌던 말을 천천히 꺼내 놓았다.
“나 좀 그만 미워해.”
“…….”
“나는.”
미동도 없이, 한번 깜빡이지도 않는 그 눈을 보면서. 나는 지금 어지럽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래서 술김에 이 말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나는, 네가 미워지지 않아서 불공평하단 말이야.”
그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놓았다. 취중 진담의 기회는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너에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을 용기도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어?”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니었지만, 그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절로 한 번 더 묻게 되었다.
“알겠어?”
한 번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집스럽게 마주치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답 없는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고 싶던 말을 솔직하게 내놓았다. 내일 일어나 후회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엔 후련했다. 오늘은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까마득하게 정신이 멀어지던 순간. 어렴풋이 알았다는 대답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 말은 꿈의 문을 열고 난 후 들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전에 들은 것이었을까.
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다르게, 잊는 것이 좋았을 바람과는 다르게,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04. 부정당한 진실 (1)


망할 놈의 세상아.
“짠! 문 대리 잔 안 들어? 다시, 다시. 짠!”
짠 같은 소리. 내 처지가 짠하다. 건성으로 팔을 뻗어 실장님과 잔만 부딪치고 다시 내려놓았다. 눈앞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고 있는 고기를 뒤집었다. 가위를 들어 한입 크기로 자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도 모자란 시간에, 찰나의 잠도 아쉬운 시간에, 결국 회식 자리에 끌려왔다. 그냥 자기네 사무실끼리 따로 회식하지 왜 굳이 팀 통합 회식을 하겠다고 이 난리인지를 모르겠다. 각자 맡은 소임이나 다하면 좋겠다. 그놈의 단합이니 회포를 푸니, 하여간 집 들어가기 싫어서 회식 자리 만드는 짓 좀 작작하지.
“술 안 마셔?”
김 대리가 잔에 술을 채우며 묻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시면 죽어. 적당히 배만 좀 채우고 일어나려고.”
잠이 이렇게 부족한데 술까지 마셨다간 진짜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 술에 취하면 잠드는 술버릇은 주정치고 얌전하다곤 해도, 같이 마시는 사람들에겐 귀찮고 성가신 술버릇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피곤이 나를 잡아먹었을 때는 한 모금도 위험했다. 술은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말을 바꾸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 익은 고기를 가장자리로 몰아 놓고 새로 고기를 올렸다. 한쪽 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다 구워진 고기를 기름장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왕 끌려온 거 몸보신이라도 해야지 생각하며 부지런히 고기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