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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10화
04. 부정당한 진실 (2)
“합병되고 다 좋은데, 회식 메뉴가 제일 좋아.”
촬영실 영하가 건너편에서 하는 말에 고기를 씹다 말고 힘없이 웃었다. 말해서 무엇할까.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이 회식 메뉴의 사치였던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 소고기로 회식하고 있는 이 상황은 거의 복권 당첨 수준이었다. 그것도 한우 고기를 굽고 있으니 말 다 했다. 말이 회식 메뉴가 제일 좋다는 거지, 사실 우리 회사 사람 중 합병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아니지.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나.
“그냥 내가 사 먹을래. 집에나 보내 주면 좋겠다.”
내 솔직한 심정은 안 먹고 말지 그 시간에 집에나 한 번 더 다녀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하는 말에 영하가 놀란 눈을 뜨고 물었다.
“너 또 못 잤어?”
“꼴을 보면 모르냐.”
“하루 야근한 놈들보다 멀쩡한데, 뭐. 얼굴이 허옇게 뜨긴 했네, 쯧.”
“야근이 뭐야, 집 못 간 지 보름이 넘었어.”
“보름이가 보름 동안 못 잤어?”
와, 진짜 재미없다.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쳐다봐 주자 빠른 사과가 돌아왔다.
“미안하다. 아, 개그가 안 먹히네.”
“부장님 개그 치지 마.”
“짠 하자.”
“내 처지가 짠하다.”
시선이 따끔했다. 아, 알았다고.
“미안하다.”
나도 빠르게 사과했다. 잠 못 자서 미쳐 갈수록 아무렇게나 던지게 되는 말은 하나도 안 웃겼다. 혀를 한 번 쯧 찬 영하가 제 앞의 불판을 놔두고 우리 불판에서 고기 하나를 집어 먹었다. 역시 네가 굽는 고기가 제일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한숨이 나왔다. 이런 단순한 칭찬에 기쁨을 찾게 된 내 처지가 딱했다.
“왜 만날 너만 집에 못 가?”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미움받는지, 왜 나만 마감 시간 다 돼서 일을 몰아주는지 속 시원한 이유나 좀 들어 봤으면 좋겠다.
“내가 뭐 밉보인 거 있나 보지.”
권고사직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자리를 빼 버리거나 이상한 컨테이너 같은 사무실로 좌천시키는 불한당 같은 짓을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관두길 바라고,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 합병할 때 잘라 버리지 왜 이런 방식으로 사람 피를 말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타임라인팀 전체 회식이 되기 전까지 까맣게 몰랐지만, 이 모든 괴롭힘의 주범은 사원들 이력서를 전부 읽었을 테니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문득, 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떠올랐다.
나는 아주 평범한 순서를 밟으며 살아온 보통의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수도권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대행사를 통해 우리 프로덕션에 일을 맡겨 왔던 천운 그룹은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시행하면서 회사 내에 자체적인 광고 부서를 새로 만들었다. 그 후 대행사를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이렉트로 일을 맡기기 시작했고, 우리 매출 중 80퍼센트가 천운 그룹의 일로 이루어지던 작년에 합병 제안이 왔다.
그들에겐 여태껏 해 왔던 것처럼 외주를 맡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텐데 왜 굳이 우리 회사를 통째로 데리고 가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에겐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심지어 어떤 직원도 누락시키지 않고 연봉을 삭감하지도 않는다는 조건이니 합병을 망설일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 이름을 말해 봤자 아는 사람 없고 어떤 영상을 작업했는지 이야기해야 그제야 알아듣던 작은 회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천운에 다닌다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알아주는 회사의 광고 부서. 그중 영상 광고를 담당하는 타임라인팀. 나는 그 타임라인팀 안의 영상 편집실에 속해 있었다.
문 대리라는 직급도 달았다. 처우도 훨씬 좋아졌다. 정산이 빨리 들어오지 않는다고 안달복달할 일도 없었고, 복지도 비교도 되지 않게 좋았다. 작년 연말까지는 나 역시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처음으로 타임라인팀 아래 모든 팀이 함께 회식하던 자리에서 내가 맞닥뜨릴 진실을 상상도 못 했을 때까지는 그랬다.
천운 그룹이 미국에서 스카우트해 왔다던 그 사람, 우리 타임라인팀을 만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능력이며 성품이 말도 못 하게 좋다고 칭찬만 자자할 뿐 욕하는 사람 하나 없던 그 대단한 팀장이 누구인지.
“어, 연 팀장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사실을 알게 되었던 그 순간이, 내 불행의 시작점이었다.
“한 잔 받으세요!”
나도 모르게 영하를 흘겨보았다. 한 사무실에서 부딪히며 몇 년을 아옹다옹 지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영하는 상사라고 해서 아부하는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하는 인간이었다.
“난 통합 회식이 그렇게 좋더라.”
내 흘겨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볼을 붉히며 속삭이는 말이 알 만했다. 그녀에게 최고의 가치는 돈이고 그다음은 잘생기고 예쁜 것들이다. 그 말은 즉,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호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불렀다는 것이다. 회식 메뉴가 가장 좋지만 아마 그보다 잘생긴 연 팀장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좋다고.
인기 많은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차돌박이 3인분 주세요!”
이쪽으로 다가오는 연 팀장 너머로 보이는 사장님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추가로 주문을 넣었다. 성질을 낼 주제가 안 되니 회식비라도 탕진해야 속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비싼 놈만 노린다. 그런 생각으로 불판의 고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건너편 영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그를 외면했다. 고고하게 한자리에 앉아 있어 주면 좀 좋아. 직원들 사기 증진이 무슨 상관이라고 친히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아다니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하와 연 팀장이 한 잔씩 주고받고 있을 때 차돌박이가 도착했다. 받자마자 바로 불판에 올렸다. 얇은 고기가 빠르게 익는 것을 보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기운도 없는데 굳이 내가 고기를 굽는 것은 누군가 성가시게 말을 거는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모르는 척하고 싶은 그 사람이 눈치도 없이 말을 걸었다.
“내가 구울게요. 좀 먹어요.”
그러면서 내 집게를 향해 손을 뻗길래 손을 뒤로 빼서 피했다. 털털한 상사인 척해 보겠다는 건가. 사원들 다 놔두고 저가 고기를 굽겠다고 하면 우리만 불편하고 눈치 보인다. 구워 주는 거나 얌전히 받아먹지. 아무 말 없이 그 손길을 무시하고 고기나 뒤집었더니 따가운 시선이 사방에서 꽂혔다. 그중 가장 이글이글 불을 내고 있는 실장님의 시선은 마치 시말서라도 쓰게 만들 기세라서,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마지못해 대꾸했다.
“먹고 있는데요.”
그렇게 대답하며 집게를 내려놓고 보란 듯이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 상황에선 집게를 넘겨줘도 역적, 대답을 안 해도 역적이다. 지위 낮은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팀장님, 문 대리 일 좀 줄여 주세요.”
목에 걸릴 뻔했다. 내 우울한 표정을 보며 거든답시고 영하가 꺼낸 말은 이미 내가 저질렀던 짓이었다. 불과 그저께 이러는 거 유치하다고 따졌던 일이었다. 하지 말라고 영하를 노려봐 주려다가 문득, 궁금했다. 남들 앞에서 그는 뭐라고 대답할지.
“특별히 문 대리만 많이 주는 건 아닌데.”
그러나 대답은 싱거웠다.
그러시겠지. 일이 많은 게 아니라 시간이 없는 거니까. 마감 시간 얼마 안 남겨 놓고 촉박하게 줘서 죽어나는 거지, 엄밀히 따지면 남들보다 일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능력이 떨어져서 혼자만 매일 밤새고 집에도 못 가는 줄 오해할 거다. 연 팀장이 그런 비열한 짓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바른말을 할까 그냥 참을까. 그렇게 충동과 싸우던 중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기를 뒤집던 손을 우뚝 멈췄다.
“집에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라도 기다립니까?”
뭐, 이런 미친. 어떻게 들어도 비아냥거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피하던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올곧게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나도 비꼬듯이 대답했다.
“있으면, 일 좀 여유롭게 주십니까?”
집에 기다릴 사람 없으면 매일 야근하고 집에 못 가도 상관없다는 얘기인가, 아직 결혼도 못 했느냐고 떠보는 건가. 기분이 상해서 탐탁지 않은 투로 대답하자 그가 웃었다.
“아뇨.”
입은 웃고 있었으나 결코 호의가 아닌 얼굴이었다. 서늘하게 웃는 얼굴이 내 상황이 어떻든 앞으로도 일을 이렇게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 울컥하던 순간이었다.
“목 빠지게 아들 기다리는 부모님은 계시죠, 문 대리는.”
냉큼 낚아채는 김 대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더는 그에게 표정을 내보이기 싫어졌다. 마주쳤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바삭하게 구워진 차돌박이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 나는 이 나이 되도록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건너편의 그 역시 알고 있는 그 집에서.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나만 조금도 변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받아 놓고 입에도 대지 않던 잔을 들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차라리 잠들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 반, 씁쓸한 마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반인 심정이었다.
특수 부위를 추가로 주문해 천천히 구워 먹으면서 술을 한 잔, 두 잔 비웠다. 우리 테이블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연 팀장과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을 마음도 없었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무심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나서야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끌벅적한 고깃집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시원해 속이 조금 트였다. 불판 앞에 내내 앉아 있느라 달아오른 볼이 지나가는 바람에 차츰 식어 가는 듯했다. 길가에 피어 있는 벚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밤이 서늘한 계절이었다. 밤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느낄 틈도 없이 숨 막히게 이어지는 내 일상이 새삼스럽게 측은했다.
안에서 잘 보이지 않을 구석 자리로 피해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담뱃불을 붙이고 한 모금 크게 연기를 들이마시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 벽에 등을 기댔다. 담배 연기가 들어오니 벌써 내 주량인 소주 두 병을 다 마신 것처럼 취기가 올랐다. 연기를 뱉어 내며 한숨도 함께 내쉬었다. 분위기가 고조됐으니 한 명쯤 빠져나가도 모를 것 같은데. 핸드폰도 챙겼겠다, 지갑도 뒷주머니에 잘 있겠다, 이대로 집으로 갈까. 오래간만에 편한 내 침대에 누워서 자 볼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가려는 줄 알았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 목소리.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입 안에 맴돌던 담배 연기를 뱉어 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을 쳐다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힘이 들어가 담배가 구겨졌다.
가려던 참이었다는 말이 목을 간질였다. 가까스로 참아 낸 것은 그저께 일이 생각나서였다. 회식에 갈 수 없다는 기색을 보였다가 강제적으로 회식에 끌려와 있지 않은가. 지금 솔직하게 가려고 했다는 말을 해 봤자 불리해지기만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담배 맛이 떨어져서 바닥에 버리고 발끝으로 비벼 껐다.
“술 적당히 마셔요.”
회식에서 술 적당히 마시라는 상사는 처음 보았다. 더 안 마신다고 잡아먹으려는 사람들은 봤어도. 혼자 착한 척할 셈인가. 나에게만 그렇게 못되게 굴고 미워하는 것에 이미 이골이 났는데, 이제 와서 위해 주는 척해 봐야 감흥도 없었다.
많이 마시면 뭐. 또 아무 데서나 잠들었다가 깨어나 속에 있는 말을 할까 봐,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알은척이라도 할까 봐 걱정되나 보지. 이젠 비아냥거리는 말을 꺼내 놓을 열정도 생기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
“2차는 회 먹으러 갈 거니까.”
마치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그 말이 기가 막혀서 대꾸하고 싶지가 않았다. 회 먹으러 갈 거니까 1차에서 뻗지 말란 소리다. 역시 술을 더 열심히 마시고 2차까지 가기 전에 잠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충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의 곁을 스쳐 다시 가게 안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흘깃 시선을 돌려 가게 밖의 그를 쳐다보았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어디 전화하는 것도 아니면서 밖에 나간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떼어내고 차돌박이를 더 시켰다.
“우리 애는 전학 보내 달라고 난린데.”
“아니 왜요? 지원해서 간 거 아니었어요?”
“양아치들이 물 흐려서 공부할 수가 없다고. 이래서 환경 무시 못 해.”
자리를 비운 사이 심각한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 분위기에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고기나 구웠다. 실장님이 요즘 제일 고민된다던 자녀의 학업 이야기였다. 중학생이라고 했던가, 고등학생이라고 했던가. 한창 방황할 나이라고 생각하며 빈 잔에 술을 채우다가 귀에 꽂히는 말에 우뚝 멈췄다.
“맞아요, 애들이 물 흐리면 답이 없어요. 저 학교 다닐 때 조폭 아들이 하나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3년 내내 다들 걔 눈치 본다고 학급 분위기 가관이었다니까요.”
괜히 들어왔다. 득 될 것 없는, 회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이야기야 전공이 비슷하니까 자주 나왔어도 중, 고등학교 이야기까지 넘어간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이게 웬 신의 장난 같은 일인가. 학창 시절 이야기는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밖에 서 있는 누구 때문에.
“연 팀장님은 학교 다닐 때도 인기 많았겠어요.”
씹어 삼키던 고기가 목에 걸릴 뻔했다. 밖에 서 있던 그 ‘누구’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그가 영문을 몰라 무슨 이야기냐고 되묻는 목소리를 들으며 쓴 숨을 삼켰다. 학교 다니던 시절의 연 팀장을 아는 유일한 사람. 나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팀장치고 어린 나이야 그의 스펙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지만 대리 직급인 누군가와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기함할 거다. 그리고 나는 꺼내고 싶지 않은 옛날이야기를 꺼내도록 강요받게 될 테다. 인기인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나를 통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경계하고 피하고 싶던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와 별로 좋은 감정으로 엮여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항상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좋지도 않았던 사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접근은 나에게 상처밖에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것이 동창에 같은 나이면서 팀장과 대리라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서 기인한 열등감이라고 말하겠지만, 차라리 열등감이라는 단순한 감정으로 정리될 수 있으면 나도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좀 놀아 보셨을 것 같은데?”
“그래, 주변에서 가만히 뒀겠어?”
반반하니 또 모른다고 실장님이 하는 그 말에 조용히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좀 놀아 본 연선율이라니. 사회생활하다가 처음 만났으면 저들처럼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 시절의 그를 아는 나에겐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 학교 애들은 다 착했다. 학생들은 결국 가장 잘나가는 놈의 분위기를 닮게 되어 있었다. 우리 학교는 가장 잘난 놈인 전교 회장이 반듯하고 바르고 모두와 잘 지내는 사람이라서, 전체적으로 크게 말썽 피우는 놈 없이 분위기가 좋았다. 또래 아이들은 선생님의 백 마디 훈육보다 동경하고 닮고 싶은 놈의 행실에 더 자극을 받았다.
지나고 생각할수록, 머리가 커서 되돌아볼수록, 모든 일을 더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때는 몰랐던 일들도 보인다. 그가 만든 학교 분위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의미 있게 여겨졌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나,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는 타고난 천성.
그와 같은 남자는 그 뒤로도 만나 보지 못했다. 강약약강의 허세 가득한 남자들뿐이었다. 그처럼 성실하고 바른 유형의 남자가 서열의 동물인 남자들 사이에서 최상위층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인지, 세상을 살아가며 문득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추억이 미화돼서가 아니었다. 나만큼 그에게 냉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시 잔을 들고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그가 대답하는 말이 들렸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내어놓은 말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냥 얌전한 학생이었어요. 미국에서 졸업했으니까요.”
그것은 진실이었지만 나에겐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말이었다.
05. 낯선 봄의 거리 (1)
“문! 나, 문학 필기 노트 좀!”
“성의가 없다.”
“문보름 님. 저에게 문학 필기 노트를 하사하여 주십시오.”
“옛다.”
“개 같은 냥이 새끼.”
개면 개고, 고양이면 고양이지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읊으며 노트를 품에 숨기는 이훈민이 기가 막혀 도로 노트 가져오라고 손을 뻗었다. 그랬더니 이놈이 몸을 틀면서 냉큼 자리를 떠 도망가 버렸다. 다음부터 빌려주나 봐라, 저런 배은망덕한 놈. 괜히 산에서 길은 잃어버려서 욕의 길이만 늘어났다. 개새끼만 들어도 기분 나쁜데 동시에 두 동물로 욕을 들으니 숨김없이 얼굴이 구겨져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영어 단어를 반복해서 쓰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한두 개만 틀려도 힘든데 절반을 틀렸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쓰고도 다 쓰지 못해 매 쉬는 시간마다 죽도록 쓰고 있었다. 영어는 마지막 교시니까 점심시간까지 바치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안 돼도 어떡해, 되게 해야지.
“와, 씨발. 죽인다!”
이 시끄러운 것들, 내가 죽인다.
“이야, 느이 형 휴가 나왔냐?”
“존나 끝장나지, 어우 와, 야, 이거 봐.”
“니들만 보냐! 와 씨! 나도 나도!”
“야, 문! 너도 잠깐 숨통 좀 터!”
니들이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안 놀아 주는 거다, 이 짐승들아. 힐끗 시선을 돌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출처는 아마도 혁수 형 방일 것으로 추정되는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야! 우와! 존나, 씨발! 하면서 환호하는데 혀를 차면서도 웃겼다.
“아이씨, 아직 넘기지 마!”
“내 거야, 새꺄!”
쟤들이 웃긴 게 아니라, 내가 웃긴 거다.
숙제하느라 바빠서 저기 낄 틈도 없지만,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해도 기꺼이 저기에 껴 있었을까 생각하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기에 억지로 끼어 있었을 거다. 괜히 나는 별로라고 튀는 소리를 해 봤자 대체 왜 안 보냐고 너 혼자만 깨끗한 척하는 거냐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길고 긴 질문들이 성가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