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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11화
05. 낯선 봄의 거리 (2)
야한 잡지를 보는 게 더럽다거나 징그럽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는 나도 신기하다고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구경했고, 엄마 아빠가 여행을 가서 집을 비울 때 새벽에 케이블 채널에서 해 주는 야한 영화도 봤었다. 남자애들은 다 좋아하니까 당연히 나도 좋겠거니 했다가 김이 샜다. 뭐가 좋아서 이걸 보는지 감흥이 없었다. 평소엔 내키지 않아도 같이 모여서, 넘어가는 페이지를 보는 척하지만 사실 별로 좋진 않았다.
성욕 없이 태어나는 인간이 있을까. 그게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내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성에 대한 욕망이 전부 식욕으로 발현되는 건 아닐까. 그런 무수한 생각 끝에, 사람에겐 수많은 취향이 있고 내 취향에 야한 자극은 포함되지 않는가보다고 결론지었다.
매일같이 야동 CD를 공유하고 사이트 주소를 공유하는, 한창 성에 관심이 많은 혈기 왕성한 십 대 남자애들의 이야기에 끼기 어렵다는 것은 확실히 유난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남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야, 문보. 우리 다 봐 간다?”
“나 시간 없어!”
귀도 열려 있고, 입도 열려 있고, 손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대답하면서도 손을 움직이느라 여념이 없는데 갑자기 들리는 이름 세 글자에 나도 모르게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움찔했다.
“쯧쯧, 불쌍한 것. 야, 연 회장! 너도 볼래?”
그러고 보니 그도 그 무리에 없긴 했다. 쫑긋 선 귀에 문 닫히는 소리가 따라붙는 것을 보니 나갔다가 이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답은.
“니들이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같이 안 논다는 거야.”
내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와, 대단한데.
“존나 지만 깨끗한 척이야!”
“인기 많아 좋겠다, 새끼야!”
“너는 인기 없어 본 적이 없어서 공감을 못 하겠지!”
“야 됐어, 좋은 건 나누는 거 아냐. 퉤퉤! 보기만 해 씨발. 야, 가려!”
꼬리를 무는 비난을 앞다투어 쏟아 내는 것을 들으며, 역시 나는 됐다거나 관심 없다거나 하는 말은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저린 손을 주무르며 눈으로는 진열된 문구 용품들을 훑었다.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죽도록 단어를 쓰고 또 쓴 덕분에 영어 선생님이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숙제를 다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학교가 끝나면 잉크 펜을 사러 가겠다고. 필기감이 좋은 볼펜은 종이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대신 필압이 많이 들어 손이 저렸다. 그래서 필기할 때 힘이 덜 들어가는 부드러운 잉크 펜이 간절했다. 어차피 중간고사도 코앞이니 시험공부용 필기도구를 준비할 때가 되기도 했다.
내가 공부 못하는 주제에 필기만 화려한 놈은 맞는데, 시험 기간이라고 책상 정리하다가 결국 해야 할 공부를 못하는 놈은 아니었다. 방은 항상 깨끗하게 해 놓는 편이라 그럴 일은 없었다. 다만 연장 탓, 장비 탓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고, 그 버릇은 시험 때마다 특정 노트와 특정 펜을 마련하는 것으로 발현되곤 했다. 완벽하게 필기도구들이 갖춰져야 공부를 시작할 맛이 났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공부한다고 특출난 성과를 보이는 것도 아닌 주제에 쓸데없이 까다롭게 굴었다.
그러나 막상 문구 코너에 도착했을 땐 펜과 노트는 뒷전으로 두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수첩이며 노트, 메모지, 열쇠고리 같은 것을 구경하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사실 나는 귀엽고 예쁜 문구류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반 거친 사내놈들이 알면 귀여운 척하냐고 기함할 것이 뻔해 학교에 가지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말랑말랑한 파스텔 색감은 여자애들만 좋아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집에 모아 놓은 것들 들고 다녀 보지.
한참이나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구경한 후에야 본래의 용건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사고 싶은데 참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너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더 사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 놓은 건 집에서나 써야 하니까 더 사 봐야 다 쓰지도 못한다고 마음을 달랬다.
테스트 용지에 아무 단어나 적으며 펜을 고르고, 시험공부 할 때만 쓰는 진하고 부드러운 샤프심을 사고, 샤프가 갑자기 고장 날까 봐 여분으로 샤프도 하나 더 샀다. 달처럼 동그란 모양의 지우개까지 작은 바구니에 골라 담고 노트 코너로 이동했다. 스프링이나 제본 노트는 왼쪽 페이지를 필기할 때 불편하기 때문에 시험용 연장으론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로 넘기면서 한 페이지씩 쓸 수 있고, 부드럽게 찢어 소지하기도 편한 노트를 골랐다. 그렇게 익숙한 노트 다섯 개까지 챙겨 계산 줄을 기다리는데 교복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노트를 안았던 손목에 바구니를 걸고 핸드폰을 꺼내 보니 엄마한테 문자가 도착했다고 깜빡이고 있었다.
[밥 다 됐는데, 너 언제 나갔니?]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전거를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버스 타고 나와야 하는 거리라 자전거를 놓고 왔는데, 그 자전거 때문에 내가 당연히 집에 있는 줄 아셨던 모양이다.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덧 엄마가 집에 도착할 시간에서 한 시간이 더 훌쩍 지나 있었다.
[엄마, 나 서점. 얼른 갈게]
계산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서점을 가로질러 출구로 향했다. 밥 다 식게 한다고 꾸중 들을 생각에 조급하게 걸어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가는 문을 밀어 열려는 순간이었다. 스치듯이 본 것에 주춤 걸음을 멈췄다. 의식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닿은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학원에 있을 시간 아닌가. 여긴 어쩐 일일까. 아니 그보다는…….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나를.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친 눈에 발목이 붙잡힌 것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쪽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그 책이 무엇인지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서점에 책을 사러 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마주친 눈을 떼어 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굳어져 서 있었다. 마침내 고개를 돌리고 문을 밀어 열었다. 길게 이어져 있던 시선의 끈을 끊어 낸 채 한 발자국씩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으며 나는 내 뒤에 따라붙은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그러다가 다시 속도를 높였다. 착각이 아니라는 듯 내 뒤에 따라붙은 발자국은 내 속도에 맞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선율이다.
목적지가 같아도 나란히 걸어 함께 돌아갈 사이는 아닌 연선율. 설마하니 같은 버스에 올라탄 그가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옆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버스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가의 벚나무엔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활짝 피고 꽃잎이 떨어져 봄의 눈이 될 풍경을 기대하며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 있는 연선율이 신경 쓰였다. 돌아보지 않기 위해 고집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학여행 때, 여태껏 나누었던 대화를 다 모은 것보다 많은 말을 나눴다. 반 아이들과 그러던 것처럼 아옹다옹하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산에서 내려오며 손도 잡았고, 심지어 옆자리에 누워서 자기까지 했는데. 가까워지거나 벽이 허물어지기는커녕 그때 이후로 더 어색해졌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보다 더 불편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그것은 내가 의식해서일까, 그가 의식해서일까. 술김에 한 말을 내가 신경 쓰기 때문일까, 그가 신경 쓰기 때문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술김이 아니었다면 결코 꺼내 놓지 않았을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나 역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온 신경이 그를 향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색은 그가 모르기를 바랐다. 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을 그가 알았다고 해서.
우리의 관계가 바뀔 일은 조금도 없을 것 같았다.
방 불을 끄고 누운 순간이었다.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소리에 귀가 쫑긋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예쁜 소리. 처음엔 그가 듣는 음악 CD인 줄 알았다. 항상 옆방에서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음악 소리가 그랬듯이.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소리가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이 기타 소리가 그가 직접 연주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를 깨우러 그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침대 옆에 놓인 기타를 보긴 했다. 그저 장식용인지, 그가 기타를 칠 줄 아는 건지, 기타를 볼 땐 종종 생각했지만 물어볼 수 없어 언제나 의문일 뿐이었다. 자유 악기로 자유곡을 연주하는 중간고사 수행 평가가 아니었다면 의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웃음이 났다.
어릴 때 한 번씩 배워 보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놈들도 있었고,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어렸을 때 배웠다며 성격과도, 외모와도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취미를 가진 놈들도 정체를 드러냈다. 교회에서 매주 연주한다며 반짝거리는 플루트의 자태를 뽐내는 놈들도 있었다. 물론 어떤 악기도 다룰 줄 몰라서 리코더나 불어야 하는 나 같은 놈들이 제일 많았다. 그런데 연선율이 클래식 기타를 들고 온 거다.
그는 그날 등교 때부터 하교 때까지 네가 기타 연주하니까 재수 없다는 놈들의 성화를 들으며 로망스를 스무 번 넘게 연주해야 했다. 기타로 연주하는 곡이라곤 로망스밖에 모르는 촌스러운 놈들은 몇 번을 들어도 처음처럼 감탄하며 좋아했다.
그놈들은 모를 거다, 연선율이 이런 선율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음악 시간엔 모두가 다 같이 연습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가 연습하는 잔잔하고 애틋한 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선생님을 제외하면 한 집에 사는 나뿐이었다. 기분이 또 오묘했다. 나만 아는 유명인의 은밀한 사생활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느리게 깜빡이던 눈을 감았다. 이런 밤늦은 시간에 기타를 연주해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단독주택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졌다. 잔잔한 선율이 마치 자장가 같았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서서히 잠에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기타 선율이 멈췄다.
“응, 아니야. 안 자고 있었어.”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정말? 좋겠네.”
전화 통화 소리. 눕기 전에 시계를 봤을 때 자정이 가까웠는데 대체 이 시간에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통화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했다. 용건이 있어 전화한 같은 학교 사내놈일 리가 없는 말투.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면서 하는 말에…….
“나도 보고 싶어.”
왜 가슴이 철렁했는지. 왜 나도 모르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는지. 왜 창가로 달려가다가 차마 더 가지 못하고 멈춰 섰는지. 조금 전까지 기분 좋을 만큼 선선하다고 느끼던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왜 서늘하게 느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을 설쳤다. 뭐가 그렇게 신경 쓰여 잠도 못 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늦잠을 잤다. 문제는, 저번처럼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아도 결코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을 때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페달을 밟아 보았지만 안 될 날엔 뭘 해도 안 된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횡단보도마다 신호에 걸렸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과 갈등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어떻게 운 좋게 오늘은 지각생이 적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기적적으로 오늘은 학주가 출근하지 않았다거나.
하지만 그런 희망은 스무 명의 지각생이 기합받는 것을 훔쳐보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도저히 교문을 통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그대로 5분간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전거 핸들을 꽉 쥐고 학주의 시야에 걸리지 않는 별관 건물 쪽 담벼락으로 향했다. 워낙 담이 높아 아무도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라 뒷문과 다르게 감시조차 없는 곳이었다.
담벼락 한쪽 구석에 자전거를 잘 세워 자물쇠를 채워 잠갔다. 그러고는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1학년 때 지각을 면하기 위해 두 번쯤 넘어 본 벽이었으니 허튼 시도는 아니었다. 주위를 살피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훌쩍 담을 올라탔다.
어릴 때 이후 나무 대신, 종종 이렇게 학교 벽을 탔다. 아무리 높아도 나에겐 장벽이 될 수 없었다. 담벼락 꼭대기에 올라 몸을 숙인 채 중심을 잡았다. 운동장을 처절하게 돌고 있는 학생들과 학주의 위치를 확인하고 눈에 띄지 않게 착지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뭐 하냐?”
아침 조례가 시작된 시간. 마침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확률도 희박한데 하필 그게 우리 반 회장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민망해서. 우리 학교에서 가장 높은 담장 위에 올라탄 나를 올려다보는 그 눈이, 페인트 볼 서바이벌 때 나무 위에 올라탄 나를 바라보던 그 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꼭대기에서 그를 내려다보게 되는 일이 자꾸 생기는지 모르겠다. 무안한 마음에 대답 없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수학여행 이후 단 한마디의 대화도 없었던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온도의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전히 불편한 그와 나 사이에 이 담장보다 높은 벽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정적과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다시 운을 뗀 첫마디가 거기서 뭐 하냐는 질문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갑작스럽게 마주친 얼굴에 비명을 지르듯 놀란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리고 뛰었다. 두근거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이를 거야?”
“내가 왜.”
그럴 정성도 없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치는 그 말에 상심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르길 바랐던 것도 아닌데, 왜 상심해.
“계속 거기 있게?”
답을 찾지도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려오는 걸 도와주겠다는 듯 내미는 그 상냥한 손이 낯설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수학여행 때 생각이 났다. 어두운 산속에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손이 겹쳐 보였다. 나 좀 그만 미워하라던 투정도 떠올랐다.
남들에겐 전혀 특별할 것 없겠지만 나에게만큼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의 낯선 친절에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저어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서늘한 그의 손과 술김에 마주쳤던 그의 눈빛이 자꾸 떠올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손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야, 잠깐!”
바닥에 착지한 순간 비명을 삼키고 바닥을 굴렀다. 누가 올까 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 역시 날 크게 부르다가 소리를 낮추고 급히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야!”
그의 손에 붙잡힌 발목이 눈물 나게 아파서 소리를 죽인 비명이 터졌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접질린 발목이 무사하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었다. 잡으라고 내밀어 준 그의 손을, 그의 친절을 거절한 대가가 지독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가 다친 적이 없었다. 괜히 옆에서 지켜보며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손을 잡지 않은 것은 나였으면서 누구라도 탓하고 싶은 이 속 좁은 마음이 더 서러워, 훌쩍거리다가 양손에 힘을 주어 땅을 짚고 일어났다.
“양호실 데려다줄게.”
접질린 발이 땅에 살짝만 닿아도 욱신거리고 아팠다. 하지만 이 아픔조차 괜히 투정부리고 싶은 엄살인 것 같아서 최대한 태연한 척 걸었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는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더 속상했다. 어디 하나 다치거나 아프지 않으면 관심조차 받지 못할 사이라는 것이 실감 나는데, 그게 왜 이렇게 서운한지 모르겠다. 아프니까 마음만 약해지는 모양이었다. 얼른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대꾸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더 묻기를 포기한 듯한 그의 한숨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래도 꿋꿋이 그의 손길을 무시하고 걸었다. 별거 아니라고, 금세 나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결국 조퇴해야 했다. 아니, 강제 조퇴당했다.
애들한테는 차마 담을 넘느라 이렇게 됐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뛰다가 접질렸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발목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안 아픈 척 태연하게 걷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발목이 욱신거리며 아팠고 점점 부어올랐다. 수업시간에도 전혀 집중되지 않아 정신이 혼미해지던 순간, 연선율이 나에게 조퇴증을 내밀었다. 더는 괜찮은 척할 수도 없는 지경이라 순순히 받아들였다. 건네받으며 그의 손을 스쳤을 때, 차라리 그 손을 잡았어야 했다고 아주 잠시 후회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아파서 운동화로 갈아 신지 못하고 실내화를 신은 채 조퇴했다. 물리 치료나 받으리라던 예상과 달리, 나는 깁스를 하고 커다란 검은 찍찍이 신발을 신고 정형외과를 나서야 했다. 목발을 짚을 필요까진 없지만 1, 2주는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이번엔 진심으로 그 손을 잡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절뚝이며 계단을 올랐다. 내 방 침대에 누워 몸이 편해지고서야 담벼락 옆에 세워 둔 자전거가 생각났다. 발목이 다 나을 때까지 자전거는 탈 수도 없겠지만 계속 그곳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복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사물함에 내 자전거 열쇠가 있으니 집까지 좀 가져와 달라고 정언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쓰다가 천천히 손을 멈췄다. 가지고 오다가 연선율과 마주치면 안 되는데.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연락처를 뒤졌다. 저장되어 있지만 단 한 번도 연락해 본 적 없는 연락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서로의 번호를 모르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직접 교환한 적 없어도 나에겐 그의 번호가 있었고 그에게도 내 번호가 있을 것이다. 그는 반 아이들 비상 연락망을 통째로 핸드폰에 저장해야 하는 우리 반 회장이기 때문에 내 번호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나는 같이 사는 동갑내기 하숙생에게 연락할 급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번호를 저장해 놓으라던 엄마의 성화로 그의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 동의하에 교환한 번호도 아닌데, 갑자기 친한 척 집에 올 때 내 자전거를 가지고 와 달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