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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12화
05. 낯선 봄의 거리 (3)
설마 그사이 누가 훔쳐 가지야 않겠지. 더는 생각하지 말자고 눈을 감았다. 연선율에게 내 자전거를 부탁하는 것보다, 2주 치의 먼지가 쌓인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편이 더 쉬운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욱신거리는 발목의 통증에 아까 올라올 때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와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 대신 잠을 청했다.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땐 발목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 반찬도 감흥 없었다. 겨우 배만 채우고 곧바로 씻고 잘 준비를 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고 낮잠까지 잤던 터라 평소라면 눈이 말똥말똥했을 텐데, 아픔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인지 소염제를 먹은 몸이 나른하게 늘어진 탓인지 누우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목에서부터 오른 열이 숨 막히게 더워 창문을 활짝 열고 누웠다.
뜨겁게 열이 오른 발목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달래지지 않는 통증으로 끙끙거리다가 지쳐 잠들었던 것도 잠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몇 번이나 잠에서 깨 뒤척였다.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열이 온몸을 집어삼킨 것 같았다. 답답함에 이불도 다 걷어 버리고 끙끙대다가 다시 잠들었을 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초록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뜨거움에 괴로워하던 몸부림이 시원한 꿈의 온도에 평온을 찾았다.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선선했다.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손을 뻗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끝자락을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펄펄 끓는 얼굴에 댔다가 품에 끌어안았다. 꿈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꿈에서나 잡아 볼 수 있을 바람을 붙잡은 나는 꿈을 꾸는 내내 그것을 놓지 않았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을 나섰다. 어설프고 느린 걸음으로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밤새 펄펄 끓던 열은 꾀병도 부릴 수 없을 만큼 말끔하게 내렸다. 몸이 나아지니 어제 대충 먹었던 저녁 몫까지 곱절로 배가 고파 생선 조림에 밥을 고봉으로 가득 쌓아 아침도 잘 먹었다.
비 오는 날에도 우비 입고 자전거 타는 나에게 버스 등교란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러나 대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또다시 기겁하고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요즘 너무 자주 놀라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내 앞을 막아서며 놀라게 하는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시키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놀린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태연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이 시간에 등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내 자전거 핸들을 붙잡고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내 자전거를 집에 가져다 뒀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고, 말해 주지도 않은 내 자전거 키를 찾은 것에 두 번째로 놀랐고, 마지막으로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가 대신 타고 다니면 되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 나 자신에게 놀랐다. 하긴, 멀뚱히 세워 두느니 누구라도 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타.”
눈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전거에 올라타며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아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뭐?”
“타라고, 그러고 버스 탈 거냐?”
내 깁스한 발을 눈짓하며 하는 말에 마주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의 얼굴 한 번, 비어 있는 자전거 뒷자리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연선율이, 제 뒤에 타라고 말한 건가.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어 머뭇거리며 물었다.
“괜찮아?”
“뭐가.”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내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연선율. 그리고 그 뒤에 타고 있는 자전거 주인. 아무리 깁스를 해서 등교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우리 집에 들러 손수 학교에 데려다줄 정도로 친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회장된 도리로 반 학생을 챙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굳이 이렇게 유난을 떠는 게 더 간지럽고 이상하지 않은가.
“뭐, 어떻게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그의 표정에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누가 묻지 않아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인지, 그가 말하기 싫어 말하지 않는 것인지. 우리 집에서 하숙한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었다. 같이 등교한다고 해서 같은 집에 산다고 생각하는 쪽이 상상력이 지나친 것 같기도 하고. 근처 어디 산다고 생각할 뿐이겠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부 나 혼자 제 발 저리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그의 뒤에 올라탔다. 어차피 내 자전거인데 자전거 주인이 얻어 타는 게 뭐 어떠냐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떨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출발할 준비가 끝났는데 그는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앞쪽을 살피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 있는 손이 붙잡혔다. 의아해하는 사이 한쪽 손이 내려가 그의 허리에 닿고, 이번엔 다른 손까지 붙잡혀 제 허리를 붙잡게 하는 그의 손길에 끌려갔다.
“제대로 잡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그가 자전거를 출발시켰다. 갑자기 몸이 뒤로 쏠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듯 붙잡았다. 좀 친절해지나 했더니 사람을 떨어뜨릴 작정인가 놀라서 그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어깨 잡으면 움직이기 불편한가. 크게 차이 없는 것 같은데 자전거를 모는 건 내가 아니라 연선율이니까 운전하는 놈의 법에 따르기로 했다.
거칠게 출발한 것과 다르게 움직임은 점차 부드러워졌다. 안정적인 속도로 페달을 밟는 그의 등에 나도 모르게 기댔다. 한 번 기댔더니 계속 그대로 있고 싶었다. 서늘했던 손과 다르게 등이 따뜻했다. 그 온도 차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침 햇살이 따뜻했고,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선선했다. 숲속 한가운데 서 있는 듯 청량한 냄새가 났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손에 닿은 그의 옷자락도, 가슴에 닿는 그의 온기도. 우린 아직도 어색하고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존재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집에 살기 때문에 함께 등교하는 날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발목을 접질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발목에 신경이 쏠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신경은 발목이 아닌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 세상에 그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감각. 어쩐지 벅차올라서 숨을 삼켰다. 쿵.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수많은 벽들 중 하나가 부서지는 소리였을까.
나를 태우고 달려온 연선율은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졸았다. 하필이면 눈세 시간에 걸려 복도로 쫓겨났다. 그는 잠을 설쳐서 그렇다고 했지만 모두들 날 태우고 오는 수고를 하느라 피곤해서 그랬으리라 여겼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느냐 하면…… 나는 그것보단, 바르고 반듯한 연선율의 오점이 될지언정 그의 또 다른 예외를 만든 것이 나라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그에게 어색하고 불편한 사람이 오로지 나뿐이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더없이 어색했던 둘 사이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전히 거리가 느껴졌지만 밀어내고 피하는 수고를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부담스럽고 불편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나는 그가 운전하는 자전거 뒷자리에 타서 익숙하게 등교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전거 태워 달라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인간이었고, 연선율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다쳤다면 기꺼이 그런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인간이었다. 진실이야 어떻든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우리의 이미지가 그랬다. 너네 같은 동네에 살았었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반응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그와 같은 집에 산다는 이야기를 왜 하지 않았는지,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 역시 생각났다. 그의 뒤에 타서 학교 근처에 나타나는 순간부터 자전거를 학교 안에 댈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시선들이 의식됐다. 연선율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숨겨져 있던 알량한 본심이 고개를 들었다. 발목을 다쳐 매점을 평소처럼 가지 못하는 것도 밖으로 싸돌아다닐 수 없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괜히 불만스러웠을 것 같아서.
“이게 발목 다쳤다고 상전이야, 아주!”
“우준아아. 어차피 한 번은 매점 갈 거잖아아…….”
발목이 아파도 식욕은 줄지 않았다. 그리고 매번 같은 놈에게 부탁하는 건 신상에 이로울 것 없는 짓이라 매일 타깃을 변경해야 했다. 오늘의 타깃은 뒷자리 우준이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고 매 쉬는 시간마다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책상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우준의 책상에 뒤통수를 베고 누워 올려다보며 그가 문제집을 보지 못하게 방해했다. 우준이가 내 머리를 들어 옆 페이지로 옮겼다. 그러다가 다시 내 머리를 들어 종이를 뒤 페이지로도 넘겼다. 문제집 못 보게 괴롭혀 매점으로 가게 만들려던 내 노력이 무색하게, 그가 옮기는 대로 머리만 이리저리 움직여지며 본전도 못 찾았다. 그러나 지금 이 2교시 쉬는 시간을 놓치면 또 50분 동안 배를 주려야 해서 나는 절박했다. 애처로운 눈으로 집요하게 올려다보았다. 우준은 마주치면 마음이 약해질 것을 아는지 내 얼굴 쪽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페이지로 슬금슬금 머리를 움직였다. 마침내 눈이 딱 마주쳤다. 희망에 찬 눈을 반짝이는데 또다시 내 눈을 외면한 우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버럭 소리쳤다.
“연 집사! 너희 냥이 먹이 좀 줘라!”
“이씨, 누가 집사야!”
내가 냥이 소리 듣는 것보다 연선율이 내 주인이라는 게 더 기분 나빠서 버럭 하며 누운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다, 오늘은 만만한 정언을 갈궈 빵을 사다 달라고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연선율과 잠시 그대로 시선이 닿아 있다가 이내 둘 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 하나가 부서졌다고 모든 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문보름! 나 영어 노트 좀 보여 주라.”
중간고사가 다가오니 필기 노트를 빌려 달라는 놈들이 부쩍 많아졌다. 평소엔 노트 필기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 변태 같다고 욕하면서, 시험 기간만 되면 모두가 손을 벌렸다. 혀를 쯧 차면서도 책상 서랍에서 노트를 찾아 내일까지 돌려 달라면서 건네주려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얼른 노트를 뒤로 물렀다. 손바닥 위까지 올라왔다가 멀어지는 노트를 보던 부회장이 시선을 들어 의아하게 쳐다보았고, 나는 눈을 마주친 채 씨익 웃었다. 간식을 해결할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맨입으로?”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란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우리 CA가 더는 영화 감상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거 놓으라는 부회장에게 반쯤 매달린 채 시청각실 도착했을 때 비단 사람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공기가 아예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우리 학교에 시청각실이라곤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더 웃긴 건 문학부와 합쳐서 수업한다는 저번 시간의 전달 사항을 미리 기억하고 있던 놈이 내 주위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윤선혜와 같이 CA를 듣는다는 사실에 처음 며칠 밤잠을 설쳤던 부회장마저 놀라서 멈춰 선 것을 보며, 이건 뭐 바보들의 잔치가 따로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갑자기 휘청 중심을 잃었다. 문학부와 합동 수업임을 알자마자 날 버리고 윤선혜를 찾아 떠나는 부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막혀 탄식했다. 저 우정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
“보름아!”
문가에 우두커니 서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찾다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눈을 반짝 빛내고 있는 윤선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여기 있는데 부회장 놈은 대체 뭘 보고 날 버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못하는 나와 마주치길 기다렸다는 듯 선혜 말고도 두어 명의 여자아이들이 용건이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선율과 같은 동네에 사는지, 원래 그렇게 친한지, 그런 질문들이 쏟아지리라 각오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가라앉히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나에게 던져진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보름아, 근데 왜 냥이야?”
아……?
“뭐?”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되물었다.
“너한테 물어보라던데?”
“누가?”
“선율이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애꿎은 눈만 느리게 깜빡이며 뜻을 짐작해 보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나에게 쏠리던 수많은 시선과 관심들은 연선율과 같이 등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 아니 결국은 그것 때문이 맞나. 처음은 둘이 같이 등교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지금의 관심은 연선율이 그것에 대해 답한 말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고 여자애들을 채근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들어오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물어보면, 그와 함께 등교하는 사이일 뿐 그런 간단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친분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교생 중 유일하게 그와 어색하고 불편한 사람이라는 사실, 심지어 어쩌면 그에게 미움받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남들에게는 조금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알량한 마음이다. 속 좁은 마음이고. 그런데 그와 연관된 일에는 그렇게 되었다. 그와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감추고 싶은, 그런 옹졸한 마음이 되었다.
뒤늦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비어 있는 것은 또 앞줄뿐이었다. 설마 오늘도 공포 스릴러 장르는 아니겠지 움츠러들었는데, 문학부 선생님이 들어와 칠판에 큰 글씨로 쓰는 타이틀은 다행히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영화였다.
<오만과 편견>
대체 문학부와 영화부를 합쳐 어떻게 수업하시겠다는 건가. 우리가 문학 수업을 듣는 건지 그들이 우리와 함께 영화를 보는 건지 걱정했는데, 문학 원작의 영화를 감상하는 수업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오만과 편견이라니. 좋아서 비명을 삼키는 여자아이들과 달리 아무 반응도 없는 남자 놈들은 장르가 뭔지도 모르는 듯했다.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인가 보다고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책을 멀리하고 산 지 오래였지만 오만과 편견이 어떤 내용의 소설인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읽었던 수많은 책 중 하나였다. 그때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못 하면서 읽었다. 주인공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조차 헷갈려 하면서도,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 보았던 소설이었다. 아마 책은 초등학교 때 친척 누구를 줘 버려서 집엔 없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이 흐르는 사이 시청각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CA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머지 뒷부분은 다음 시간에 보겠다는 전달 사항과 함께 수업이 끝났다. 이번 주는 감상문이 없다고 기뻐 날뛰는 놈들이 시청각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몇몇 애들에게 붙잡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연선율이 시야로 보였다. 그 모습을 지나쳐 시청각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바로 뒤에서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움찔하며 놀라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그가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따라붙어 서 있었다.
“나, 오늘 학생부 일 있는데.”
발목을 다친 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는데, 그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별다른 용건 없이 그가 먼저 말을 건다는 것.
“응.”
매일매일 함께 집에 돌아갈 순 없겠지. 이런 날도 있는 게 당연했다.
데리고 왔으니 데려다주었다. 요즘 그는 자전거와 함께 나를 집에 데려다 놓고 학원으로 갔다. 처음엔 번거로울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덧 당연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있다니까 함께 돌아가진 못할 모양이었다. 그가 늦게 돌아온다면 마주칠 걱정이 없으니 오늘은 정언이에게 데려다 달라고 말해 볼까. 그런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옆에서 나란히 발맞추어 걷던 그가 내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르기에 아직 용건이 남은 건가 해서 고개를 돌렸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기다리라고.”
아, 너무 당연히 알아서 집에 가라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오래 안 걸려, 교실에 있어.”
그 말을 남기고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들은 별로 놀랍지 않게 받아들이겠지, 이 친절을. 나에게만 유난스럽던 그의 무관심과 외면이 남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어 다정을 베푸는데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았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방해된다고 구박을 들으며 창틀에 걸터앉아 청소가 끝나길 기다렸다. 어느덧 모두가 빠져나간 텅 빈 교실에 홀로 남았다. 수학여행 다녀온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중간고사도 곧이라, 학생부 일이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겠거니 생각하며 창가 옆의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창밖을 내다보며 바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길게 늘어져 엎드렸다.
그와 친해지거나 가까워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허물어진 벽도 있었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는 벽이 더 많았고, 그런 만큼 여전히 마음의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매일 그가 모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등하교를 함께하고 있으니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공기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그 전엔 겨울처럼 차가웠다면 지금은 초봄.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나는 찬바람이 쌩쌩 불던 때보다 오히려 지금 더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남들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를 대하길 바랐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상냥하고 다정하게 친절을 베풀길 바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만족스러움이 아니라 상실감이었다. 무언가를 뺏긴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