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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핀 꽃 1권










1화

프롤로그

태초의 신 파아툼이 만든 아름다운 낙원, 파아즈. 신의 축복이 가득한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며, 다양한 피조물들은 온화하고 선한 빛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인간의 수가 늘어나며 낙원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드래곤을 비롯한 태초의 생명체들은 인간의 탐욕에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마지막 남은 드래곤의 수장이자 조율자인 블랙드래곤의 분노가 세상을 휩쓸었다. 대륙의 반을 피로 물들이고 수많은 목숨을 거둔 끝에야 그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너무도 처참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과오는 잊은 채 블랙드래곤을 마룡으로 매도하였고, 끝내 낙원의 주인인 파아툼마저 악신으로 칭하여 내쳤다. 인간들을 사랑하여 아낌없이 베풀었던 파아툼은 깊이 상심해 모든 축복을 거뒀으며, 그로 인해 생기를 잃은 대륙이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을 외면했다.
축복도, 대륙의 균형을 담당했던 조율자도 사라지고, 자연의 법칙까지 깨어진 대륙은 소멸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광기와도 같은 전쟁에 미쳐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벼이 넘겼다.
기상이변은 점점 심해져 몇백 년이 지나자 더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치달았다. 뚜렷했던 계절은 들쑥날쑥 엉망이 되었고, 그에 따라 대륙을 감싼 바다는 해일로 몸살을 앓았다. 뿐만 아니라 비옥했던 대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진으로 쩍쩍 갈라졌으며, 사막은 태양에 삼켜졌고, 고지대는 멈추지 않는 폭설로 곳곳이 눈에 잠기었다.
그제야 인간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무기한 평화를 약조하며 전쟁을 멈췄으나 무너져 가는 대륙을 되살릴 방도는 없었다. 흉흉하고 불길한 소문이 역병처럼 돌아 사람들은 하루하루 공포에 떨었다. 대륙의 소멸을 떠올리게 하는 자연재해들. 그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무력하였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자 결국 인간들은 전설로 치부했던 절대적인 존재를 다시 찾으며 울부짖었다. 저들의 불신과 선조의 죄마저도 잊어버리고, 역사서에도 악으로 매도한 신을. 최악의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들 여유가 없었다. 각국의 권력자들은 대륙의 중립지역에 대신전을 세우고, 하루빨리 구색을 맞추고자 평민 중에서 대신관과 신관들을 뽑아 채워 넣었다. 신성력도 없는, 이름뿐인 신관들은 밤낮으로 축복을 내려 달라 빌었다.
원망과 간절함, 살고 싶다는 욕망을 담은 목소리가 끝내 독해지지 못한 신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간악함을 익히 아는 파아툼은 쉬이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대륙이 죽어 가고 인간들의 공포와 절망이 극에 달할 때였다. 온갖 감정이 담긴 간절함을 끝내 저버리지 못한 파아툼이, 축복을 거둔 지 500년 만에 신탁을 내렸다.
『자다모닐의 날, 축복받은 아이가 셀포드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이의 손길에 생명이 발하고, 발길이 향하는 곳은 축복을 받을 것이며, 선택하는 곳은 곧 안식처가 될 것이니. 두 번째 자다모닐의 날, 내 아이의 의지에 따라 거두어 간 빛이 다시 세상을 비추리라.』
갑작스러운 신탁에 대륙 곳곳을 차지한 각 나라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미 벼랑 끝에 선 인간들은 저들의 죄는 까마득히 잊은 채 마지막 구원과도 같은 새로운 희망에 열광했다.
신탁대로라면, 곧 신의 아이가 이 땅에 내려올 것이다.
경쟁 구도에서 밀려난 왕국들을 제외하고, 네 개의 제국이 신의 아이를 제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앞다투어 사신단을 꾸렸다. 그들은 다음 대 황위에 오를 황태자를 중심으로 사신단과 기사단을 이끌고 네 개의 제국 사이 중립 지역에 있는 대신전으로 몰려들었다.
각 제국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드높이 세운 그들의 위세가 자못 화려했다. 동쪽의 제국 토렌토, 서쪽의 제국 마테라, 북쪽의 제국 레트리아가 줄을 이었고, 그 위풍당당한 행렬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환호성을 내지르며 탄성을 쏟아 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마지막 남쪽의 제국 사신단이 도착하며 일순 침묵이 맴돌았다.
사막국 마르반. 한순간에 미쳐 이 대륙의 반을 파괴하고 피로 물들인 블랙드래곤이 세운 나라. 인간들은 그를 마룡이라 칭하였으며, 그 자손 중 마룡의 상징인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를 타고난 자들은 대대로 미치광이더라.
그로 인해 상징을 타고 태어난 현 마르반의 황태자 또한 대륙 모든 인간들에게 배척받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네 제국 중 하나라는 이유로 신의 아이를 맞이하는 자리에 나타나다니 뻔뻔한 노릇이었다.
마룡인 것도 끔찍하건만 흉물이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니, 다른 제국의 황태자들과는 달리 그는 단조로운 복장에 길게 늘어트린 검은 터번을 쓰고 얼굴 반은 검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구릿빛 피부야 마르반의 특성상 그렇다 치더라도 대륙에는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확실히 마룡의 후예를 나타내는 상징이라, 사람들의 시선에 경멸이 담기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쉬이 입 밖에 불만을 꺼내지는 못했다. 비록 물이 부족해 영토의 반이 사막으로 되어 있는 척박한 곳이라 거지들의 땅이라 불린다지만, 드래곤의 후예이니만큼 황태자가 내뿜는 기세는 평범한 인간이 대적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놓고 무시하고 배척하지만 그의 힘은 두려워하는 모순이었다.
그렇다고 은근한 비웃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마르반 귀족들은 그들의 수장인 초라한 황태자와 달리 화려했으나 그뿐이었다. 사막 나라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비웃음은 더 짙어졌다. 신의 아이도 눈이 있다면 저들을 택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겉으로는 네 개의 제국이 공평하게 기회를 갖는 것 같지만 아무도 마르반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네 제국은 오랜 전쟁을 멈추고 무기한 평화를 약조한 지 2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같은 목적을 품고 오직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나날이 신경전을 더해 가던 중,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밝아 왔다.
태양과 달이 함께하는 자다모닐의 날은 일 년에 두 번이며, 이번이 그 첫 번째 날이었다. 대신관을 선두로 각 제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황태자만이 신전의 뒤편에 있는 태초의 숲으로 들어가고, 신화시대에 성스러운 호수로 불리던 셀포드 앞에 도착했다. 그제야 대신관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아시겠지만 이번이 첫 번째 자다모닐의 날입니다. 그리고 여섯 달이 지나 두 번째 자다모닐이 찾아올 때까지 신전에 머무르며 그분께 선택을 받으셔야 합니다. 단, 협정에 따라 그 기간 동안 제국 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시 후보에서 제외된다는 걸 명심해 주십시오.”
“만약 선택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신의 축복에서 제외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신탁에서는 두 번째 자다모닐의 날에 신의 아이의 의지에 따라 거두어 간 빛이 다시 세상을 비출 것이라 하였지만, 대륙 전체에 미칠지 선택받은 곳에만 미칠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때가 되어 봐야 알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섣부른 판단도 할 수가 없고, 신의 아이에게 선택받는 것만이 확실한 희망이었다.
그로 인해 또다시 전쟁이 터지는 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신관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이 멸망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떠돌고 있었다. 또한 그를 뒷받침하듯 대륙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마당에 구원의 빛이 다시 세상을 비춘다면 대상은 대륙 전체일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아이를 내려 보낸다는 건 적어도 신이 파아즈 대륙을 버릴 생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야 멈춘 전쟁이 신의 아이로 인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고?
대신관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확신을 갖기에는 신에게 버림받은 세월이 너무도 길었던 탓에 쉬이 입을 놀리지 못했다. 설사 확신했다고 해도 날카롭게 날을 세운 황태자들을 보니 무어라 입을 열기에도 난감했다. 신의 아이가 내려오면 앞으로 여섯 달은 함께해야 한다.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 와 대신관이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잔잔하던 셀포드 호수가 작게 출렁이기 시작하고 그 위로 하늘로부터 장엄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 모두가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갑작스럽게 허공에 인영이 나타났다. 기적적인 장면에 탄성을 내지른 것도 잠시, 풍덩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황급히 호수로 다가갔다.
“신의, 아이인가?”
약속된 날짜에 나타난 이라면 신의 아이밖에 더 있을까. 멍하니 질문을 던지는 토렌토 황태자의 말에 대신관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수 안으로 들어가 깨끗한 수건으로 물에 젖은 작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나왔다.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물기 젖은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리고 있던 소녀는 곧 눈을 크게 뜨고 푸른색 눈망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소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지켜보는 이들은 어느새 긴장을 풀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륙에서는 처음 보는 짧은 치마에 남자들같이 베스트를 입은 소녀의 모습은 확실히 낯설었다. 푸른 눈동자는 언뜻 겁을 먹은 듯 떨렸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순수하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얼굴 또한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저, 여기가 어디인가요?”
“신의 사자님을 뵙습니다. 이곳은 파아즈 대륙이며 저는 유일신인 파아툼 님을 모시는 대신관 오델른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네 개의 제국을 통치하시는 황태자님들이시지요.”
“신의 사자? 제가요?”
상황이 이해 안 되는 듯 소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신이 보낸 아이라면 무언가 언질을 받았거나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올 줄 알았는데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저마다 불안과 걱정을 담아 바라보는 중, 오델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파아툼 님께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하셨습니까?”
“그, 그게, 모르겠어요. 뭔가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당황스러움에 힐끔 눈치를 살핀 소녀가 추운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절로 손을 뻗어 감싸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애처로운 그녀의 모습에 오델른이 굳은 얼굴을 풀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그런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오델른이 한 발 물러나자 시종일관 무표정인 마르반 황태자를 제외한 세 명의 황태자가 앞다투어 에스코트를 자청하고 나섰다. 또다시 팽팽하게 날 선 공기에 작게 한숨을 내쉰 오델른이 황태자들을 물리고 그녀를 부축했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을 때였다.
풍덩―!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이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수가 크게 출렁거릴 정도로 파문이 일고, 그 안에서 한 인영이 허우적거리다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놀랐던 얼굴들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앞서 온 소녀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는 있지만 행색은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소녀가 작고, 가녀리고, 아름다워 절로 보호본능을 일으켰다면 지금 나타난 이는 출렁이는 살로 뒤덮인 비대한 몸, 퉁퉁 부은 얼굴, 군데군데 찢어진 데다 무언가가 잔뜩 묻은 지저분한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전신이 울긋불긋한 상처투성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탁의 날에 두 명이 온 것도 당황스러운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저건 뭐지?”
“그,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 신이 약조한 날짜에 두 명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당황스럽기는 오델른도 마찬가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한참이나 물을 게워 내며 헉헉거리던 의문의 소년이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여, 여긴 어디?”
탁했다. 애처롭게 떨리는 고운 목소리를 가진 소녀와는 달리 잔뜩 짓눌러진 듯한 발음과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는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지게 했다. 누가 봐도 신의 아이라 할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잠깐만. 저거 검은 머리 아닌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한 남자와 소녀를 빼고 모두가 경악했다. 물에 젖은 상태였지만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검은 머리카락은 미치광이 마룡의 상징이 아닌가.
저것은 절대 신의 아이가 될 수 없었다.
소년이 비대한 몸뚱이를 하고 있든 말든 적어도 마룡의 상징만 달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신탁의 날에 왔으니 신의 아이 후보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마룡은 이 대륙의 반을 피로 물들인 적이 있었고, 상징을 타고난 후예들도 한순간에 미쳐 전쟁을 주도했었다. 그로 인해 죄 없는 목숨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갔는가. 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마룡의 상징을 한 이를 축복의 존재로 보낼 리가 없었다.
그러니 같은 날에 왔다고 해서 신의 아이는 아니었다. 하물며 신의 아이로 확실시되는 그녀가 있었다. 그렇다면 저 소년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도 마룡의 상징을 가졌다니 어쩐지 불안했다. 혹 대륙에 희망을 주고 또 한편으로는 절망도 주신 것인가. 신의 의도를 헤아리기엔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룡의 상징을 가진 한 명은 절대 신의 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 황태자와 대신관은 그리 결론을 내리면서도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축복만 받기를 바랐는데 달갑지 않은 존재까지 나타날 줄이야. 이 자리에만 검은 머리카락이 둘이나 있었다.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버리자 오델른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황이 어찌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쪽도 따라오는 게 좋겠군요.”
그러고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다른 이들을 따라 가 버렸다.
소년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고, 마르반 황태자는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주시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마저 몸을 돌리자 소년 또한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한 발 내딛다가 비틀거린 소년의 기척에, 앞서가던 마르반 황태자는 우뚝 멈췄다가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소년이 한쪽 다리를 절면서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셀포드의 차가운 물 때문에 한기가 드는 듯 소년의 입술이 새파랗게 변했지만 누구도 그런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장. 두 명의 사자


신이 보낸 아이, 약조한 자다모닐에 나타난 두 명의 이방인을 두고 대신전에 모인 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명의 이방인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단 한 사람만을 환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소녀와 추한 소년. 순백의 머리카락에 옅게 홍조를 띈 새하얀 살결, 푸른 하늘 같은 맑은 눈동자, 지켜 주고 싶을 정도의 가녀린 소녀와는 달리 소년은 비대할 정도로 뚱뚱한 몸에 온통 상처투성이 몰골이었다.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누가 봐도 신에게 사랑받는 아이는 정해진 것이다. 하물며 마룡의 상징인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은 처음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무도 반기지 않는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극명한 차이는 행동으로 드러났다.
두려움과 추위에 떨며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을 구석으로 밀쳐 낸 사람들은 앞다투어 소녀를 향해 호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혹여 감기라도 걸릴세라 호들갑을 떨며 소녀를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동안에도 소년 곁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세 명의 황태자들이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마르반 황태자만이 고개를 숙인 소년의 검은 머리카락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도 잠시 수군거리는 주변의 소리에 살짝 주먹을 쥐고 다른 황태자들을 따라 회의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가 떠나고 소년, 재희만이 덩그러니 남아 추위에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낯선 세상과 낯선 사람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재희는 한 가지만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낯선 이곳에서도,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추위로 일그러진 재희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바들바들 떨며 멍하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였다.
주고받는 말소리와 우르르 몰려드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재희는 무심코 눈을 들었다가 곧바로 부딪혀 오는 혐오가 담긴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알아서 시선을 내린다. 재희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었다.
“뭐야, 이건?”
“진짜 역겨운 몰골이네?”
역겹다.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라 재희는 반응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그 미치광이 마룡의 후예처럼 새까매. 신께서는 왜 저런 걸 같이 보낸 거지?”
“그야 모르지. 신의 의중을 인간인 우리가 알 수가 있나.”
“혹시 그거 아닐까? 신녀이신 그분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딸려 보낸 걸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야 말이 되네. 그럼 저건 신녀님의 종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걸 옆에 두었다가 더러운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절대 안 돼. 신녀님 곁에는 우리 같은 신관이 있어야지.”
아무렇지 않게 쏟아 내는 비난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비대한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저들은 모른다. 경멸과 비웃음은 재희에게 있어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 그 순간에는 상처 입힐 수 있으나 그뿐이었다.
반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인데 재희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한 줌의 희망조차 품고 있지 않은 탓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희는 그들의 비웃음과 악의를 묵묵히 받아 냈다. 달리 무어라 반응하고 싶지도 않았다. 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의 반응조차 없는 그 모습에 기분이 상한 듯 다가온 두 명의 신관들이 쭈그려 앉아 있는 재희의 비대한 몸을 발로 툭툭 차듯이 건드렸다. 동시에 들려오는 저속한 웃음소리에 재희는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뭐야? 왜 아무런 말도 안 해? 고귀한 신관님이 말을 하면 뭐라 대꾸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이거 인간의 말도 못 하는 병신인가?”
“그런 거야? 쳇, 생긴 것도 더러운데 말도 못 하는 병신이라니 완전히 쓰레기잖아.”
인간은 선하지만 악하다. 나약하면서도 강하고, 순수하면서도 이기적이다. 깨끗하게 태어나 자라면서 점점 세상을 알고 검게 물들어 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약자를 괴롭히며 만족한다. 자신보다 못한 존재에게는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재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거칠 일이라면 묵묵히 견디며 멈추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 반응하면 장난 수준에서 악질적인 행동으로 변할 뿐이니까.
그때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신관들의 행동이 멈췄다.
“신녀님과 대신관님을 뵙습니다.”
“여기서 뭐하는 건가?”
“그것이, 이 사람이 여기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물어보려던 참입니다.”
“이대로 둘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할까요?”
어차피 신의 아이가 누구인지는 뻔하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불청객은 치워 버리는 게 나았다. 그것을 바라고 묻는 질문에 대신관의 시선이 여전히 잔뜩 웅크리듯 쭈그려 앉아 있는 재희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은 다른 신관들과 마찬가지로 온정이라고는 일절 품지 않아 차가웠고, 흘러나오는 말 또한 마지못해 한다는 듯 매섭기만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래도 명색이 신께서 예언하신 날짜에 같이 온 존재이니 어느 정도 대우는 해야겠지. 그러니 따라오세요.”
자신의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옆에 선 신녀만을 데리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남은 신관들이 얼굴을 구기며 재희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하여간, 대신관님은 속도 좋아. 신녀님은 뻔히 정해졌는데 이런 것까지 대우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러게. 마룡의 상징을 가진 놈을 뭐하러 대우해 줘?”
“어쩌겠어. 마지못해 그런 것이겠지.”
상황이 변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신탁대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나타난 존재였다. 설사 신의 사자가 아니라 딸려 온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 차마 내치지는 못하리라. 현실이 그렇기에 더 짜증이 치미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 보니 신관들은 불쾌함에 흉흉한 얼굴로 재희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뭐해? 당장 안 들어가?”
“젠장. 어제 먹은 게 올라오려고 하네.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나니 빨리 들어가 버려.”
재희는 거칠게 떠밀려 주저앉으려는 몸을 간신히 세우고 고개 숙인 그대로 절뚝거리며 문을 향했다. 뒤에서 다리까지 저는 병신이라는 비웃음이 들려왔지만 재희는 아무런 동요 없이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고, 재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거까지 불렀나?”
“불쾌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지요. 신탁의 날에 왔으니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흥! 저런 게 신의 사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디서 쓰레기 같은 게 굴러 왔는지 모르겠군.”
“천민도 저놈보다 역겹지는 않을 것 같다.”
마르반 황태자를 제외한 황태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불쾌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아무리 신탁의 날에 왔다고 한들 저런 꼴이어서야……. 보고 있자니 역겨움만 심해져 황태자들은 구겨진 얼굴로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대신관이 난감한 듯 어색하게 웃다가 그 사이에 다소곳이 앉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소녀에게 시선을 주며 도움을 청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가 재빨리 표정이 바뀌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기, 자세한 건 모르지만 저분도 저와 같이 온 것 같은데. 이야기는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대로 두기에는 불쌍해서. 말끝을 흘리듯 웅얼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하자 비난을 쏟아 내던 이들이 단번에 입을 다물며 말을 바꿨다.
“저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역시 신녀는 다른 것 같소. 얼굴도 아름다운데 마음씨까지 곱군.”
“신녀가 원한다면 저 역겨운 꼴도 참아야겠지.”
“뭐하느냐? 신녀께서 원하신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의 바람대로 일제히 태도를 바꾼 그들의 말에 문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움츠려 있던 재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추위로 덜덜 떨리는 몸, 시퍼렇게 변한 입술. 여기저기 찢어지고 멍든 상처들. 그리고 비대할 정도로 뚱뚱한 몸은 모두의 거부감과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신녀, 저 흉한 얼굴을 보시오. 참으로 역겹지 않소?”
“그, 그렇지만 외모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분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대우를 받는 재희를 향해 그녀는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그녀를 재희는 아무런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저와는 달리 젖은 옷을 갈아입은 듯 화려한 보석이 달린 드레스 차림. 새하얀 백발. 푸른 눈동자.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러니 저들이 더러운 몰골인 저를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재희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뜨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고개를 들라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주제는 아는 것 같군.”
“저런 건 신경 쓸 가치도 없소. 오히려 신녀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니 저놈 옆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오.”
“내 생각도 그렇다. 저런 건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지.”
“저 지저분한 머리카락 좀 보라지. 꼭 더러운 피가 섞인 누구와 같지 않은가?”
마지막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미치광이 마룡의 후예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소유한 마르반 황태자를 칭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도발하듯 비웃음을 내비쳤지만 마르반 황태자의 표정은 시종일관 미동조차 없었다.
무어라 반응이라도 했다면 이때다 싶어 세 명이 작당을 해서라도 경쟁자 중 하나인 마르반 황태자를 몰아붙였겠지만 도발이 먹히지 않는 이상은 소용없는 일이다. 흥을 잃은 듯 그들은 신녀에게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먼저 소개부터 하겠소. 나는 토렌토 제국의 황태자인 헤르세리온 르바인 윌 토렌토라고 하오.”
“나는 레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벨제르 프리네우스 루벤 레트리아다.”
“난 마테라 제국의 황태자로 네르바 볼란트 홀튼 마테라다.”
각각 제 소개를 마친 세 사람을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금발과 금안, 은발과 청안, 적발과 적안.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홀린 듯 응시하던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르반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짧게 말했다.
“뮤라 바실론 칸 마르반이다.”
그게 끝이었다. 무뚝뚝한 것도 모자라 일말의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서늘한 목소리에 그녀가 당황스러운 듯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보다 헤르세리온이 더 빨랐다.
“앞으로 차차 알게 될 테니 저자는 신경 쓰지 마시오, 신녀. 그보다 신녀의 이름을 알려 주겠소?”
헤르세리온이 금안을 감싼 날카로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묻자 그녀가 넋을 놓은 듯 보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다른 두 황태자의 기세가 사나워지자 대신관이 손을 들어 말없이 중재했다.
“저, 제 이름은 베아트리스. 축복받은 행복한 아이라는 뜻이에요.”
“오! 신의 아이로서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역시 신의 아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신녀 외에 누가 신의 아이란 말인가?”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이름만큼이나 아름답다.”
저마다 쏟아 내는 칭찬에 그녀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는 재희와 뮤라 단 두 명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뮤라와는 달리 재희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곧바로 부딪혀 오는 뮤라의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의문점이 있었지만 이내 잡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의문이 대수인가. 중요한 건 그녀와 자신의 명확한 차이였다.
배척받는 저와는 달리 그녀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존재다. 애초에 비교하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아니 비교할 자격조차 제게는 없었다. 그러니 생각해서 무얼 할까.
재희는 씁쓸한 조소와도 같은 웃음을 짓다가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비틀거렸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차갑게 얼어붙어 저릿한 손으로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뜨겁고 불편해 숨이 가빠졌다. 힘들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어차피 저들은 제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젠 그만 쉬고 싶은데. 할 수만 있다면 잠들고 싶은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뜨거운 속이 더욱 울렁거리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점점 몽롱하게 풀리는 정신과 어지러운 시야에 더는 견디지 못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이 기울고,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걸 끝으로 재희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