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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재희의 신형이 무너짐과 동시에 내내 주시하고 있던 뮤라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불안하더니 기어코 쓰러진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위태로운 모습이 눈에 밟히던 터라 뮤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재희의 안위를 살폈다.
새파란 입술은 이미 보라색을 띄고 있었고 몸 또한 마치 시체처럼 창백한 푸른색이었다. 뮤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 과한 반응에 의문이 들었지만 품 안에 안긴 재희의 차가운 몸에 깊게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잘 어울리는군.”
“흉물은 흉물끼리 어울려야지.”
두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는 말에도 뮤라는 재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상처투성이 볼을 쓰다듬으며 뮤라는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배 속 어딘가가 쓰렸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다. 그저 짐작하기로 저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이라 여겼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낙인. 이 상징을 갖고 있는 것은 세계를 통틀어 단둘뿐이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멸시와 위협을 받았던가. 초대 황제인 블랙드래곤이 정해 놓은 율법과 제가 타고난 강대한 힘이 없었다면 이름뿐인 황태자라는 위치에도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처지로 뻔뻔하게 재희를 비하하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한낱 동정인지, 그도 아니면 동질감인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뮤라는 흔들리는 눈을 하고 가면으로 가려진 반쪽 얼굴을 미미하게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재희를 안아 들었다.
바로 의원을 부르라 하고 싶지만 저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불러 주지 않을 것이다. 설사 불러 준다고 한들 제대로 치료해 줄 리가 없었다. 마르반에서 데리고 온 의원이라고 다를까. 오히려 신녀를 놔두고 쓸모도 없는 상대에게 신경 쓴다는 이유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이미 수도 없이 당해 보지 않았나. 그러느니 제가 직접 몸에 열기가 돌도록 하는 게 나았다.
그리 결론 내리자마자 뮤라는 자신의 마력을 재희의 몸 안으로 조금씩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가자 저마다 질색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이 자리가 어디라고 그런 흉물을 데리고 와?”
“완전히 제멋대로군.”
그대로 둘 다 나가라는 말이었지만 뮤라는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재희가 불편하지 않게 꼭 끌어안았다. 그런 뮤라의 태도에 모두가 더욱 질타하려는데, 가녀린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저, 그분은 많이 아픈가요?”
재희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뻔한 물음에 뮤라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가 이내 눈을 돌려 버렸다. 분명 걱정하는 것 같은데 무언가 가식적이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너무도 익숙한 느낌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유력한 신녀인 그녀를 멀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제국을 위한다면 품 안의 소년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내키지 않는다. 그보다 저와 같은 처지인 소년이 뮤라는 더 신경 쓰였다.
“신녀, 그대가 걱정할 것 없소.”
“하, 하지만 사람이 쓰러졌는데, 저대로 놔둬도 되나요?”
“아아, 저런 건 신경 쓰지 마라.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놈이다.”
“그렇지. 끼리끼리 어울리지 않나?”
노골적인 비웃음과 적대. 엄연히 똑같은 기회를 얻은 후보임에도 세 사람은 뮤라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뮤라 또한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반응한들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물고 뜯을 것이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한 것이다.
“큼! 그만들 하시지요. 이곳은 중립인 대신전입니다. 부디 그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사람은 신관을 불러 치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신경전이 팽팽한 마당에 자칫 싸움까지 나면 골치가 아파지니, 보다 못한 대신관이 나서 중재를 했다. 그러나 네르바가 나서 말했다.
“신관을 부를 필요가 뭐 있나? 이보게, 마르반 황태자. 자네가 옮기는 게 어떻겠나?”
“그게 좋겠군. 모두 봤다시피 저놈도 검은 머리가 아닌가? 추한 살덩이 때문에 눈은 보이지 않지만 눈동자 또한 검은색일 것 같군. 혹 같은 마룡의 후예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마르반 황태자인 자네가 친히 신경을 써 줘야 하지 않겠나?”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같은 핏줄일지도 모르는데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되지.”
나머지 두 황태자도 동조하자 대신관은 못 이기는 척 입을 다물었다.
비웃음과 악의를 품은 말은 거침이 없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서로 경쟁자이자 같은 위치인 뮤라를 다른 황태자들은 어느새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한 명이라도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다면 이들에게는 이득인 것이다. 게다가 상대에겐 물어뜯기 딱 좋은 큰 흠이 있지 않은가.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빌미로 후보의 자격을 없애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세 사람은 뮤라를 상대로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을 힐끔거리던 그녀는, 시선을 여전히 소년을 꼭 끌어안고 있는 뮤라에게 향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 그러지 말고 신관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황태자님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신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소. 마르반 황태자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오.”
“그렇지. 같은 마룡의 후예라면 우리가 오히려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신녀가 몰라서 그러는데 마룡은 미치광이로 모두에게 배척받는 존재다. 저 마르반 황태자가 그 마룡의 상징과 피를 물려받았지. 하나, 이제는 사라진 드래곤의 유일한 핏줄인 것도 사실이니 혹 같은 피임을 의심할 만하다면 우리는 방해하지 않는 게 좋다. 고귀한 핏줄인 만큼 우리 같은 순수한 인간이 방해하면 안 되지 않겠나?”
반복되는 비웃음과 악의에 뮤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배제하려는 이들의 목적이야 뻔하기에 거기에 덜컥 걸려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택받지 못하더라도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그러나 품 안의 소년을 내려다보고 곧이어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무는 그녀를 바라본 순간, 문득 예감이 치밀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마르반을 택하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저 또한 내키지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나 거부감이 드는지는 모르나 더 이상 이곳에서 부질없는 감정 소모를 하느니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가지.”
“예? 그, 그래도 황태자이신데. 그냥 신관을 부르는 것이…….”
“필요 없다.”
단호하게 거절한 뮤라가 재희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가 퍼졌다.
등 뒤로 이죽거리는 말들이 들려왔지만 재희를 안고 문을 향해 다가가는 뮤라의 굳건한 등은 한 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실상은 단 한순간도 숨 막히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태연함을 가장하고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우르르 쏟아지는 시선에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신관들과 각 나라의 사신단 대표들. 단 한 명을 빼고는 일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나 뮤라는 냉담하게 둘러볼 뿐이었다.
“전하, 어찌 그냥 나오십니까? 그분은…….”
왜 안고 나오는지. 차마 끝까지 말을 잊지 못한 아비드의 걱정 어린 시선에 뮤라가 입을 열려는 찰나 마르반 사신단 측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하! 신녀는 어찌하시고 나오신 겁니까? 게다가 그런 걸 안고 계시다니요?”
“그놈은 내려놓고 다시 들어가십시오.”
“마르반 제국을 최우선으로 걱정하셔야지요. 전하의 개인적인 행동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앞다투어 쏟아 내는 말들과 달려들 듯 몸을 들썩이는 행동, 어디를 보아도 다음 대 황제가 될 황태자를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르반 제국에서 뮤라가 받는 취급은 훤히 보이는 것이다.
그 모습에 다른 나라 사신단 대표들의 비웃음이 더 짙어졌다. 제 나라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황태자라니. 말만 제국이지 나라꼴이 엉망이 아닌가. 거지 제국이 망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아비드가 이내 마르반 사신단 앞을 막아서며 간절한 얼굴로 뮤라를 바라봤다. 제발 주군이 더는 모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제 주군의 뜻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아비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분은 제가 모실 테니 일단 방으로 가시지요.”
뮤라가 소년을 안고 나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신을 잃은 소년은 얼핏 봐도 상태가 안 좋았다. 또한 주군의 굳은 표정을 보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비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언성을 높이는 마르반 사신들의 행태에 아비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 무슨 말인가, 단장! 신녀께 잘 보여 마음을 사로잡아도 모자랄 판에 쓸모없는 거나 안고 나오다니!”
“다시 들어가십시오, 전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진정 마르반과 척지려 하십니까? 황태자로서의 위치를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말조심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은 아비드가 또다시 끼어들려는 사신들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사신단이 있는 자리입니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그리고 선택의 시간은 6개월이나 남았고, 진정한 신하라면 전하의 안위부터 살피는 것이 마땅합니다.”
눈에 힘을 주며 노려보는 살벌한 아비드의 시선에 사신단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여기서 반박했다가는 다른 나라 사신단이 보는 앞에서 황태자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제아무리 속내가 그러하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낼 때는 아닌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더 속이 뒤집혔다. 고작 황태자에게 붙어 작위를 따낸 평민 따위가 귀족인 저들을 몰아세우다니. 울컥한 이들이 이를 갈며 물러났다. 후일을 기약하더라도 일단 여기서 더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한발 물러서자마자 아비드가 다시 표정을 풀고 뮤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하, 이분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뮤라가 고집을 피우면 사태는 더 나빠진다. 뮤라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재빨리 재희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마력이 통했는지 시체처럼 시퍼렇게 변했던 피부에 온기가 돌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속으로 안도한 그가 재희를 조심스럽게 아비드의 품으로 보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아비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뮤라를 보고는 신관을 앞장세워 문 앞을 벗어났다.
한참을 걷던 신관이 멈춰 서며 문을 열자 아비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설마, 이곳이 맞나?”
“예? 아, 예. 맞습니다.”
눈치를 보면서도 부정하지 않는 신관을 보며 아비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로막힌 복도 끝에 작은 쪽문이 있는 걸 보니 이곳은 신전 제일 구석진 방이 아닌가. 아마도 신전 뒤쪽으로 통하는 문일 것이다. 이런 곳에 있는 방이라니. 아니, 방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허름한 나무 침대에 작은 탁자 하나, 겨우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 청소도 하지 않았는지 먼지투성이인 방. 제아무리 배척받는 상대라 해도 이런 곳에 머무르게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신께서 정하신 날에 온 또 다른 신의 사자가 아닌가. 아직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처사는 심한 것이다.
“다른 방을 내줘라. 아픈 분을 이런 곳에서 지내시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지금은 다른 방이 없습니다.”
“뭐라? 이렇게 큰 대신전에 방이 없다?”
“예. 각국의 사신단들의 수가 많아서 지금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거짓이다. 떨떠름한 신관의 표정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방을 내놔라 큰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했다가는 제 주군의 흠이 될 것이다.
아비드는 나직하게 이를 갈고는 재희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발밑에 개어져 있는 이불을 들고 문밖을 나가 거칠게 먼지를 털어 냈다. 좁은 복도가 날리는 먼지로 자욱했다. 더더욱 불쾌한 표정을 지은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재희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재희의 입에서 미약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아비드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드러났다. 어째서 이 소년은 아무도 반기지 않는 몰골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불쌍하고 가련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보자니 꼭 제 주군을 보는 것 같아 더 마음이 무거웠다.
“옷과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고 의원도 데려와라.”
아비드의 말에 신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치광이 황태자를 모시는 기사라 그런지 그 또한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럴 시간에 신녀에게나 신경 쓸 것이지. 그래 봐야 선택받지도 못하겠지만. 두고 보자니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입을 삐죽이다가, 돌아보는 매서운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이후부터는 저희 신관들이 보살피겠습니다. 이 이상 참견하시는 건 조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아주십시오.”
여기서 물러나라는 말이다. 신의 사자가 한 제국을 선택하기까지의 모든 관리는 대신전에서 할 일이었다. 제삼자가 이 이상 끼어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비드는 섣불리 물러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과연 신관들이 이 소년을 치료해 줄까? 답은 뻔하다. 설사 의원을 데려온들 진심으로 치료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배척받는다고는 해도 신탁이 명시한 날에 온 이상은 허무하게 죽도록 방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리 결론을 내린 아비드는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문을 열기 전 소년을 힐끔 바라본 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물러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더는 있을 명분이 없었다. 제가 관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아비드는 굳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

문밖의 소란에 황태자들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대신관 또한 삐뚜름하게 미소 짓고는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누구 하나 자신들의 행동이 지나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반 제국의 귀족들마저 저 모양인데 자신들의 멸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대륙에서 마룡의 후예가 처한 현실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저 마르반의 마룡이 황태자라는 위치로 인해 자신들과 동등하게 신의 아이에게 선택받을 기회를 얻었다는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태자라고 다 같은 건 아니지 않은가.
이들에게 마룡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제 나라 안위를 위해서는 만일에 대비해 한 명이라도 밀어내야 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 또한 밀어내어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아야 제국이 진정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못 할까.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는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놓고 웃음을 팔 수도 있었다.
황태자들이 저마다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날카롭게 견제할 때 그녀만이 문을 힐끔거리며 안절부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신녀, 표정이 안 좋소. 괜찮은 것이오?”
“예? 아, 그분이 걱정돼서…….”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어느새 안절부절못하던 기색 대신 걱정을 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자 네 사람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신녀의 착한 마음씨는 알겠으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비대한 몸만 보더라도 병을 달고 살 것 같더군.”
“애초에 저리 살을 찌웠다는 건 본시 게으른 성격이라는 게지. 아프다한들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확실히 스스로 노력도 안 하는 놈은 걱정해 줄 가치가 없지.”
저마다 지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자 그녀가 울상을 짓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마른 입술로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힐끔 눈동자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그 황태자님이요, 왜 가면을 쓰고 계신가요?”
“아아, 흉터를 가리려는 속셈이겠지.”
“흉터요?”
“화상 흉터. 아까 흉터투성이 손을 보지 못했나? 그 정도는 약과다. 듣자 하니 얼굴의 반, 그리고 온몸이 징그러운 화상으로 뒤덮였다고 하더군.”
“쯧, 생각만 해도 흉물스럽군.”
온몸이 흉터라니. 불시에 떠오르는 상상에 그녀가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잘게 떠는 그녀의 모습을 네 사람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곧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음이 아파요. 제국의 황태자님인데 어쩌다가 그리되셨을까요?”
눈물로 가득한 눈동자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마르반 황태자를 걱정하는 모양새라 세 사람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모두 의미를 두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쟁할 가치도 없는 마르반 황태자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제국의 황태자라 해서 우리와 같은 위치는 아니오. 오히려 다른 제국들보다 마르반 제국 내에서 더 멸시받는 존재지.”
“제 나라 국민들에게 쓰레기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황태자라니 우습지도 않군.”
“조금 전에 듣지 않았나? 한낱 귀족들이 황태자에게 덤벼드는 걸. 황제도 귀족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마룡의 상징인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타고난 탓에 어쩔 수 없이 황태자에 올린 것이다.”
“과연 얼마나 갈지 모르겠군. 지금까지는 용케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
마르반 황제나 귀족들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치우려고 들 것이다. 뻔히 예상되는 일에 세 사람의 얼굴에 확연한 비웃음이 어리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모두가 죽이려고 드는 황태자다. 마룡의 증표를 타고난 역대 황제들은 하나같이 미치광이로 생을 마감했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지. 그러니 지금의 황태자 또한 죽거나 미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즉, 마르반 황태자를 택한 순간 그녀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는 의미였다. 말뜻을 알아들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에 세 사람이 진득한 웃음을 교환했다.
이로써 하나는 말끔하게 처리했다. 이제 세 명이서 맞붙을 일만이 남은 것이다. 과연 누가 최후의 선택을 받을지는 모를 일이나 제국의 운명이 달린 이상 누구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또한 자신감도 넘쳤다. 세 사람의 외모는 대륙에서 제일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데다 가진 권력도 거대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건으로 밀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누가 더 빨리 그녀를 사로잡느냐만 남았다.
‘그리고 그 승자는 당연히 내가 될 것이다.’
황태자들은 각자 같은 생각, 같은 결론을 내리며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팽팽한 기 싸움에 점점 기세가 험해지자 보다 못한 대신관이 나서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조금 피곤하고 아직 낯설어서 그런데 그만 쉬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그렇군. 우리가 생각이 짧았소. 시간은 많으니 그만 가서 쉬도록 하고, 내일 다과나 같이 합시다.”
“내가 방까지 안내하지.”
“무슨 소리! 신녀, 나와 함께 가는 게 좋겠군.”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손을 내미는 세 사람의 행동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하자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신관이 나섰다.
“신녀께서 불편해하십니다. 오늘은 세 분도 이쯤에서 쉬시고 신녀님의 에스코트는 제가 하겠습니다.”
대신관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살핀 세 사람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아직은 시일이 많이 남았다. 굳이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으리라. 세 사람이 한 발짝 물러나자 대신관이 그녀의 손을 잡고 회의장을 나섰다.
문밖에 있던 이들이 그녀를 향해 일제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누구 하나 신의 아이인 그녀를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들에게 보답하듯 미소를 지어 주곤 대신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표정이 한순간 미미하게 찌푸려졌으나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방에 도착한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곳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예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대신관님.”
좀 전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장소하고는 격이 다를 만큼 휘황찬란했다. 검소해야 할 신전 안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지만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신녀님을 위해 준비된 방이니 편하게 지내십시오. 특별히 시중들 시녀들도 따로 뽑아 두었으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침대 옆에 있는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뭘 해야 하나요?”
“아무래도 다른 세계에서 오셨으니 이 세계에 대한 지식과 예법을 배우는 게 좋으실 것 같아 아카데미 교수님 몇 분을 초대할까 합니다.”
“교수요? 그럼, 공부를 해야겠네요.”
“신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니 잘 해내실 겁니다.”
흐뭇한 웃음을 머금은 대신관을 본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곤하실 테니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네. 내일 봐요.”
대신관이 나가고 곧바로 시녀들이 들어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그녀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기고 장신구를 빼내며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으나 더할 나위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신녀님. 숙면에 좋은 차라도 내올까요?”
“아니, 괜찮아요. 모두 수고했어요.”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시녀들이 물러나고, 귀를 쫑긋 세운 채 한동안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후다닥 거울 앞으로 다가가 짧게 탄성을 흘리며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몸짓에 따라 잠옷 치마가 화사하게 퍼졌다가 내려앉는 모습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행복해! 드레스도 잠옷도 너무 예쁘다. 완전 공주풍이잖아!”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얼떨떨하면서도 행복한 현실에 새하얀 백발을 당겨 보기도 하고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통증을 느낀 그녀는 다시 한 번 작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매일 밤 꿈을 꾸기는 했었지만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이게 현실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차원이동을 한 것인데 어찌 쉽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것도 외모까지 바뀐 채로. 흔하디흔한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이 순백으로 변하고 갈색 눈동자 또한 푸른 하늘을 닮은 청안으로 바뀌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저분한 여드름으로 한창 고생 중이었던 황인종 특유의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고 매끈하게 변했다. 큰 가슴에 굴곡진 몸매 또한 너무도 아름다웠다. 예전의 제 모습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라 그녀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흘렸다.
“꺄! 어떡해! 완전 여신급이야. 역시 신녀이기 때문이겠지?”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신녀. 소설 속에 나오는 흔한 레퍼토리지만 중요한 점은 지금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망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미남들에게 사랑받는 소녀. 자신은 이 세계에 선택받은 주인공이니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상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지는 전율에 부르르 떨다가 문득 떠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녀는 절로 감탄을 쏟아 냈다. 신이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이곳의 신일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잃었을 때 확실하게 들렸던 목소리.
‘너는 사고로 죽었다. 내가 만약 너에게 다시 살 기회를 준다면 어찌할 테냐?’
그 상황에서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살고 싶었으니까. 짜증 날 정도로 평범한 삶이었지만 고작 열일곱 살 나이로 죽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 목이 터져라 살고 싶다고 외쳤다.
‘살 기회를 얻는다면 무엇이 하고 싶으냐?’
사랑받고 싶다고 했다. 아름다운 외모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제 대답에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어 초조했었다. 혹시 기회를 주지 않을까 불안해서. 하지만 잠시 후에 들려온 말은 제 불안감을 말끔하게 해소시켰다.
‘네가 원하는 대로 기회를 주마. 아름다운 외모를 주겠다. 그러나, 행복해질지 불행해질지는 모두 너에게 달렸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는데 불행해질 리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확실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가. 이제야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신의 선택까지 받은 신녀라니. 꿈같은 현실에 활짝 웃고는 손을 내려다봤다.
불거진 마디 하나 없이 하얗고 예쁜 손. 이제 이 손이 기적을 일으킬지 모른다. 제게도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신성력이 있겠지? 그것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술렁거리는 기대로 손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지만 신성력을 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녀는 한참을 노려보다가 아무런 변화가 없자 입술을 삐죽이며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로 다가가 몸을 던졌다. 조금의 충격도 없이 온몸을 푹신하게 감싸는 안락한 느낌에 그녀는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신성력은 못 봐서 아쉽지만 그거야 차츰 배우면 될 것이다. 어차피 제가 신녀일 테니까. 신의 목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외모로 바뀌고, 새로 살 기회까지 얻었다. 의심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실실 웃음을 터트리다가 불시에 떠오른 가족들의 얼굴에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이젠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전생의 삶은 끝났다. 제 죽음을 보고 과연 슬퍼하기나 했을까. 가족이라고는 매일같이 공부나 하라고 잔소리하는 부모와 잘난 척하는 언니뿐이다. 딱히 정이 있는 것도 아니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얼마 전에 사귄 남자친구가 조금 걸렸지만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아 미련을 버렸다.
이곳 황태자들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볼 것도 없지 않은가. 이제는 외모에 신경 쓸 것도 없이 화려한 미남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꺅꺅 소리라도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삼키고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한참을 정신없이 굴러다니며 기쁨을 표현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 그녀가 아름다운 얼굴을 표독스럽게 일그러트렸다.
“마르반 황태자라고? 하! 웃기지도 않아.”
온몸이 화상 흉터라니, 괴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또다시 떠오르는 화상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한 상상에 그녀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 꼴로 감히 나를 무시해?”
마르반은 가까워질 가치도 없었다. 애초에 사막 제국이라는 말에 관심조차 없긴 했지만, 상대가 먼저 거부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저는 모두가 환영하는 신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