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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직 이곳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흉물은 자신이 말을 걸어 주기만 해도 감사해야 할 처지임을. 그렇다면 주제를 알고 잘 보이려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닌가. 화사하고 아름다운 세 명의 황태자만 해도 확연한 호감을 보이는 상황에서 저를 무시하고 ‘그딴 놈’을 신경 쓰다니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치밀었다. 징그러운 괴물 주제에 시건방진 태도라니!
차마 소리를 치지는 못하고 애꿎은 침대만 퍽퍽 두드리자니 도저히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한참을 분에 겨워 씩씩거리던 그녀는 지친 듯 행동을 멈췄다. 이윽고 표정이 여유롭게 풀어지며 코웃음 소리가 울렸다.
“내가 그딴 놈을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아쉬울 것도 없으니 무시하면 그만이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뿐이었다. 저는 모두가 환영하는 신녀니까. 그에 반해 ‘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같이 왔다는 사실이 불안했으나 그 몰골을 보고는 의식할 가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물며 다른 이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우위에 선 제가 안달복달 불안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조금 기분 나빴다. 찢어지고 더러운 꼴이었지만 분명 그 옷은 익숙한 교복이었다. 흔해 빠진 칙칙한 싸구려 교복이 아닌 선택된 특별한 계층만이 다닐 수 있다는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교복. 평범한 인간들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곳이 아닌가. 제가 입고 왔던 초라한 교복과는 비교자체가 불가했다.
아무리 부모님을 졸라도 제집 형편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얼마나 짜증나고 부러워했는데! 고작 그런 볼품없는 인간이 그곳을 다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팍 상했다. 차마 겉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붓던 그녀가 돌연 멈칫하며 확연한 비웃음을 흘렸다.
“꼴을 봐서는 왕따겠지? 하긴, 그 역겨운 몰골이라니 당해도 싸지.”
무엇보다 이제는 부러워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이곳에서 명문고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 꼴을 하고 어떻게 저와 함께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행색만 보더라도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면 앞으로의 대접도 저와는 판이하게 다를 게 뻔하다.
“흥, 어디 역겨운 괴물들끼리 잘해 보라지.”
그래 봐야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쓰레기가 발악해 봐야 쓰레기다. 삐뚜름한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베아트리스. 이제부터 이게 내 이름이야. 애칭은 뭐가 좋을까? 예쁜 걸로 지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중얼거리던 그녀의 눈이 몇 차례 깜빡거리고, 곧 작게 하품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피곤했는지 눈꺼풀도 스르르 감겼다.
한참이 지나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남기고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자, 베란다 창가로 검은 그림자가 스르르 형태를 드러냈다.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그녀를 응시하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

베아트리스, 그녀가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이자 신녀라는 공표가 떨어지고 대신전이 있는 중립지역 비토는 축제 준비로 들썩거렸다. 출입을 막지만 않았다면 비토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사람들은 신전 밖에서 그녀를 찬양하기 바빴다. 아름다운 신녀로 인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반면, 재희에 대해서는 신관들이 이야기를 흘리고 나서 단 하루 만에 평판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극명한 차이였다.
똑같이 신탁의 날에 왔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보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모든 이들이 당연하다는 듯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 반응하는 데에는 재희의 볼품없는 외관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대륙에서 멸시받는 마룡의 상징을 가진 탓이었다. 마룡이 이 대륙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신 또한 알고 있을 테니 마룡의 상징을 가진 이를 신의 아이로 보낼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재희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배척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건 비단 비토 지역만이 아니었다. 소문은 빠른 속도로 인근 지역으로 퍼지고 있었고, 그 누구도 재희가 신의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열어 두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며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각국의 사신단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모여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는데, 그들 또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이야기를 나눌 뿐 또 다른 한 명의 존재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유독 마르반 황태자의 처소에만 조용한 침묵이 맴돌았다. 사신단들은 다른 곳에서 자신들의 수장인 황태자를 제외하고 계획을 짜기에 바빴고, 뮤라는 조용한 정적 속에 굳은 얼굴로 창밖만을 응시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아비드가 들어왔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는 뮤라를 확인하곤 굳은 표정을 풀었다.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뮤라의 행방이 잠시 동안 사라졌었던 탓이다. 문밖에 바하스 기사단을 배치해 놨는데 창으로 나갔었는지 온데간데없어, 아비드는 뮤라를 찾아 비밀리에 이곳저곳을 헤매다 들어오는 길이었다. 물론 뮤라의 무력은 감히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만 측근인 제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건 확실히 잘못이었다. 깊게 고개를 숙이는 아비드를 보며 뮤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잠시 알아볼 게 있어 다녀온 길이니 경의 잘못이 아니다.”
뮤라의 말에도 아비드는 근심을 떨쳐 내지 못했다. 경쟁자인 다른 제국의 황태자들과 그들의 무력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아닌가. 사신단인 귀족들의 호위 기사들을 제외하더라도 각 황태자들이 대동하고 온 기사만 해도 각각 1백 명이었다.
이곳에서 싸움을 할 수는 없다지만 사고로 위장해 일을 벌일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세 명의 황태자가 작정하고 연합한다면 위험해지는 건 주군이었다.
게다가 뮤라의 개인 기사단 바하스는 고작해야 30명이 전부였다. 다른 제국과 비교할 것도 없이, 마르반 제국 내에 다른 황자들의 개인 기사단 수에 비해도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원칙상 황태자의 개인 기사단보다 더 많은 수를 보유할 수 없음에도 황제가 허락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뮤라가 더 많은 인원을 기사단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그만큼 현재 뮤라의 입지는 마르반 내에서 바닥을 기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또한 바하스 기사단 하나하나 신분을 보자면 멸시받는 귀족가의 사생아거나, 평민이거나, 그도 아니면 후계자 싸움에 밀려나거나, 스스로 가문을 뛰쳐나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과 다른 기사단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도 모자라 이곳으로 오는 내내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받았던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르반 제국 사신단의 무시와 괴롭힘도 끝이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위험이 꼭 밖에만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타국보다는 자국의 상황이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이리도 안팎으로 적뿐이니, 제아무리 바하스 기사단의 무력이 강하다고는 해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비드는 좀처럼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어째서 세상이 제 주군에게만 이렇게나 가혹한지.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화가 난다. 그러면서도 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다. 그것이 아비드의 진심이었다. 그런 아비드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뮤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나는 경들이 있어 든든하다. 그것이면 돼.”
욕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황태자라고는 하나 황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상황이 그랬다. 그러니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았다. 그저 저와 같은 처지의 어린 동생과 제 기사단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뮤라에게 있어 아비드와 바하스 기사단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믿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인원이 적으면 어떠한가. 저를 주군으로 섬기며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충신들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아비드를 비롯해 바하스 기사단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쉽게 당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사신단은 뭘 하고 있지?”
“저들끼리 모여 신녀를 끌어들일 계획을 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획이라. 뮤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우리 마르반을 택할 일은 없다.”
무슨 짓을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 중얼거리는 뮤라를 보며 아비드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녀를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전하의 위치가 더욱 흔들릴 겁니다.”
지금 마르반 제국에서 뮤라는 황태자이면서도 천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신녀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번에야말로 제국을 등한시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걸 빌미로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보란 듯이 공개처형 할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황제가 아니었고, 그걸 뮤라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씁쓸한 한숨을 내쉰 그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다.”
“전하.”
“나는 황태자라는 허울뿐인 지위가 싫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버리고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려놓지도 못한다. 내려놓는 순간 어린 동생의 목숨 또한 사라질 테니까. 그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은 언제까지고 저들이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설사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황제는 이 순간에도 갖은 핑계를 대며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다. 게다가 배다른 형제들은 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고, 그들의 수족인 귀족들은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갈고 조소를 보내고 있으리라.
“아무리 끔찍해도 그 아이 하나만큼은 보호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뮤라의 말에 아비드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 여덟 살이 된 어린 황자. 미천한 하녀의 배를 빌려 태어난 것보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라는 게 더 문제일 것이다.
지금껏 같은 대에 마룡의 상징이 두 사람에게 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제국이 망할 징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무 죄도 없는 제 주군은 입에 담지 못할 저주와 악의 속에서 홀로 버티며 하루에도 수십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어째서 제 주군의 잘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린 황자의 잘못일까. 그저 태어난 것뿐이었다. 제 의지로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며, 상징을 간절히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너무도 끔찍했다. 하녀는 더러운 걸 낳았다는 죄목으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제가 황족과 귀족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제 주군을 앞에 세워 놓고 온갖 모욕을 주며 하녀의 처참한 죽음을 보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릴 지경이다. 그것이 과연 피가 섞인 아비가 자식에게 할 짓인가. 그것도 모자라 갓 태어난 핏덩이마저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 넣어 죽이려는 걸 제 주군이 살렸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인형이 되겠노라. 그리 말하며 핏덩이를 끌어안았었다.
제 주군 또한 어릴 때 불에 타 죽을 위험에 처했다고 들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 반쪽과 온몸이 화상 흉터로 가득했다. 그런 마당에 어찌 모르는 척할까. 같은 처지인 어린 황자를 차마 고통 속에서 죽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간청하는 제 주군을, 내려다보며 비웃던 황제의 비열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
주위에서 비웃던 황후와 황자, 귀족들 또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하찮은 버러지를 보는 듯한 그 눈빛들을 어찌 잊겠는가. 그때의 참담함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치솟을 지경이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원한을 다시 한 번 심장에 새기며 아비드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 후 뮤라의 씁쓸한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죽게 놔뒀어야 했을까.”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이제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들어.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그 아이가 저리 고통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가 더 괴롭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비드는 단호하게 답했다. 절대 제 주군의 잘못이 아니었다. 제 주군은 강하면서도 누구보다 정이 많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산 채로 불에 타 죽을 위기에 처한 핏덩이를 어찌 모르는 척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황제는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조금의 마력도 없고 정치에도 무능한 황제는 제 아들을 시기했다. 미치광이 마룡, 모두가 멸시하고 천대하는 존재지만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황후에게서 난 자식이었다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뮤라는 그저 힘없는 후궁의 자식이었다. 무엇 하나 마음에 안 들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황제인 블랙드래곤이 정해 놓은 바꿀 수 없는 율법 탓에 몇 대에 한 번씩 마룡의 상징을 가지고 태어난 황자는 무조건 황태자위에 올려야 했다. 설사 내키지 않는 일이라 해도 만천하에 퍼진 율법의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마룡이 사라지고 700년간 그 상징을 물려받은 황제가 세 명이 나왔으나 모두 평판이 최악을 달렸다. 사서에 이르기를, 그들은 광증이 있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평판이었을까. 역대 피를 이은 황제들은 마룡의 후예라는 점 하나 때문에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수도 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황제가 되지 못하고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예들도 있을 정도로 환경 자체가 인간의 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최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황제에 오른 이들의 심정을 유추하는 것은 너무도 쉽지 않은가. 정점에 서기까지 가슴에 사무친 원한을 차곡차곡 쌓았으리라. 그리고 황제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과연 복수하지 않고 넘어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마르반 제국 자체가 그들을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미치광이로 몰아갔다고 봐야 한다.
황제와 황자, 귀족들은 제 주군이 역대 황제들처럼 미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래야 뚜렷한 명분을 대고 끌어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를 때문에 이제껏 정신을 망가트리는 독의 위협도 수없이 받았다. 죽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주군 안에 있는 강대한 드래곤의 힘이 그 어떤 독도 몸 안에서 태워 버리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자리에서 그리 오래 있었건만 황태자비도, 그 흔한 후비도 없는 주군. 귀족들 누구도 곧 미치거나 죽을 황태자를 위해 딸을 내놓지 않았다. 주군이 지금껏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린 황자뿐이었다.
하지만 이 아슬아슬한 경계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만약 황자가 잘못된다면 제 주군은 버티지 못하리라. 아니, 버틸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황자 역시 제 주군의 절차를 밟아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 경계가 무너질지 불안했다.
아비드는 이토록 불합리하게 고통받는 주군을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하나하나 되갚아 주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기회를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데 제 주군의 말이 걸렸다.
그녀가 마르반을 택할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제 주군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아비드가 급히 입을 열려는 찰나 뮤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그보다 그 소년은 괜찮나?”
“예? 아, 그 신녀와 같이 온 분 말씀이십니까?”
“신녀?”
글쎄. 과연 진짜 신녀일지 모르겠군. 그리 중얼거리며 입가를 비트는 모습에 아비드가 놀란 듯 되물었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아니다. 그래서 소년은?”
“신관들이 의원을 불러 치료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은 참견할 수 없었습니다.”
방 같지도 않은 먼지투성이 골방을 내준 인간들이 과연 의원을 불러 줬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신탁이 있는 날 나타난 존재를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상하게 불안했지만 차마 제 주군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이상 제 주군이 소년을 신경 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신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때문에 사신단이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지 않는가.
정말 제 주군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다. 하다못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는다면 6개월이라는 유예도 짧아질지 모른다. 막아야 한다. 소년에게는 미안하지만 제 주군이 먼저였다. 그리 결론 내리면서도 아비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년의 방은 어디쯤에 있지?”
설마 찾아갈 생각인가?
“안 됩니다, 전하. 신이 주군의 뜻을 꺾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황자님을 생각하십시오. 사신단 전체가 황제의 눈과 귀입니다. 이 이상 그분을 신경 썼다가는 전하뿐만 아니라 황자님도 위험합니다.”
아비드의 간절한 말과 시선에 뮤라는 굳은 표정으로 몇 차례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뮤라 또한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이번에 신녀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걸 빌미로 저를 끌어내리고 죽이려고 할 것이다. 거기다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인 소년을 신녀보다 더 신경 썼다는 이유라면 저들에게는 더 큰 명분이 되리라.
하지만 그 또한 하찮은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오래전부터 저를 제거하고자 했고, 이번이 절호의 기회일 터이니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결론은 같을 것이다. 그러니 발버둥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기에는 삶의 목적도 없고 너무도 지쳤다.
이미 이번 결과에 상관없이 황자만은 피신시켜 황궁을 떠나라고 그림자에게 명령해 둔 상태였다. 아비드와 기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황궁에 도착하기 전 모두 자유를 찾아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저를 선택할 일은 없을 테니 결과는 정해져 있다. 그럴 바에 차라리 신경 쓰이는 소년의 곁에 있는 게 더 나았다.
그리 결론 내리자마자 뮤라는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이리도 소년을 신경 쓰는 것인가. 그저 같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을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시선이 향했다.
처음 봤을 때는 지저분한 몰골에 상처투성이 비대한 몸 때문에 놀랐지만 다른 이들처럼 혐오감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뭐랄까. 어딘가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또 알 수 없는 묘한 기대감마저 들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어째서 그러한 반응을 보인 것인지는 모른다. 과한 반응에 이상하게도 여겼다. 그래서 신경을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제 눈은 소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소년이 쓰러졌을 때 심장이 철렁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뮤라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하나의 가설에 조소했다. 동정할 처지도 아닌데 그 소년을 통해 자신을 본 것인가. 그러고 보면 처지가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제국의 황태자라 하나, 무엇 하나 당당하게 내세울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소년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뮤라가 쓰디쓴 웃음을 흘리자 초조하게 그의 안색만을 살피던 아비드가 조급한 듯 말했다.
“전하, 제가 신경 쓰겠습니다. 대놓고 찾아가면 말들이 많을 테니 약을 지어 조용히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내키시지 않더라도 그녀의 곁에 있어 주십시오.”
그래야만 사신단의 압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선택되든 안 되든 그건 그 이후 일이었다. 아비드의 말뜻을 알아들은 뮤라의 미간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지만 차마 더는 걱정 끼칠 수 없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6개월. 끝이 같다고 해서 굳이 압박을 견딜 필요는 없으리라. 뮤라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밤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마르반 제국을 뺀 나머지 제국의 황태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넓은 응접실 안으로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샅샅이 탐색하느라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은 표정이 그들 모두가 이 자리를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제국의 운명이 여인 하나에 달려 있어 그 마음에 처절하게 매달려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최악의 상황까지 몰린 터라 달리 방도가 없었다. 황태자들은 새삼 짊어진 무게가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양보하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신탁이 의미하는 바가 대륙 전체에 미칠지 확실하지 않은 이상 무조건 신녀의 선택을 받아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는가. 신녀는 한 사람이고 그녀를 원하는 제국은 여럿이다.
문제는 선택받기까지의 과정이고, 또 그 이후였다. 서로 부딪히다 보면 그걸 빌미로 자칫 자격을 잃을 수도 있고, 한 명이라도 떨어뜨리기 위해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겉으로야 협정을 지킨다지만 뒤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선택이 끝난 후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신탁의 의미가 선택받은 곳에 한정된다면 주체는 신녀가 될 테니 그 이후에도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한 공방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되면 평화협정은 깨어지고 다시 전쟁이 터진다. 과연 무너져 가는 대륙이 또 한차례의 전쟁을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할 것도 없이 결말이 뻔했다.
세 사람 또한 그것을 잘 알기에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지만, 저마다 골치가 아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그대들도 잘 알겠지.”
침묵을 깬 헤르세리온의 말에 두 사람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닥친 현실만이 아니라 더 먼 미래를 보자면 어차피 한쪽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 다 같이 살 방도를 마련해야만 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나중에 더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괜찮았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겠군. 이 자리에서 다시 협정을 맺지.”
벨제르의 말에 두 사람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건 물론 신녀의 선택이고. 선택받는다면 우선 안정권에 접어드는 것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야겠지.”
“그 전에 깔끔하게 원칙을 정하는 게 어떤가? 손을 잡은 후에 뒤통수치는 일이 없어야지.”
“물론 그럴 생각이다. 그녀의 선택을 받는 일에 어떤 노력을 하든 상관없지만 경쟁자를 밀어내는 건 금지로 한다.”
“마르반도?”
언뜻 비웃음이 어린 네르바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대륙의 안위를 결정하는 이 자리에서 마르반이 왜 나온단 말인가. 마룡의 후예인 그는 어차피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신녀가 마르반을 선택할 일은 없을 것 같군.”
“하긴, 그놈도 주제를 잘 알고 있으니 욕심은 못 부리겠지.”
저들이 무어라 해도 반박 한번 못 하던 인간이다. 스스로 자격이 없는 걸 알고 있으니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악착같이 버틸 것 같은데. 그놈이야 주제를 파악한다지만 마르반 귀족들은 아니지 않나. 조용히 물러날 놈들이 아니다.”
“고작 몇 달이다. 무시해라.”
“아니, 무시보다는 발악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
같은 황태자지만 엄연히 극과 극의 입장이었다. 앞으로 몇 달은 이곳에서 꼼짝도 못 하는 마당에 유흥거리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리라.
“그럼 마르반은 신경 쓸 것 없고. 그놈은 뭘 것 같나?”
그놈이라니? 두 사람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네르바가 미간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
“신녀와 같은 날에 온 놈 말이다. 아무래도 신의 의도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 흉한 몰골은 그렇다 치고 마룡의 상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절대 신의 아이는 아닐 것이다. 신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혐오의 상징을 달고 그런 꼴로 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찝찝한 것은 신탁의 날에 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상하지 않나? 이 대륙에 축복을 내려 주실 생각이라면 굳이 두 명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같은 날에 두 명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겉모습도 극명하게 차이가 나지.”
마치 비교 대상을 정해서 보내 준 것처럼. 설마 신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인가.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네르바는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대륙에서 마룡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미치광이 학살자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반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가 마룡의 후예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으로 어떤 취급을 받을지 뻔히 알면서 사랑하는 아이를 그런 꼴로 보내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누가 봐도 신의 아이는 그녀가 확실했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찝찝함에 네르바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건 다른 두 사람도 매한가지였다. 제국의 안위가 걸린 이상 몇 번이고 심사숙고해야 했지만 너무도 확연한 차이에 더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수일 수도 있지. 정말 신의 아이라면 그런 꼴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 같군. 그게 아니면 마룡에 대한 경고를 다시 한 번 주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 한편의 혼란을 몰아내려는 듯 벨제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녀를 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이상 선택받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경고라. 그럴 수도 있겠군.”
과거 마룡은 하루아침에 미쳐 대륙의 반을 피로 물들였다. 대륙이 멸망 직전까지 갔었던 선례가 있으니만큼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진짜 드래곤도 아니고 지지 기반도 없이 배척받는 마르반 황태자의 위치로는 터무니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었다. 마룡의 힘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이제까지의 역사에 기록된 바, 그 후예들의 힘은 위험했다.
혹 대륙이 멸망에 가까운 혼란에 휩싸여 있는 이때, 신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마르반 황태자가 미쳐 날뛰게 된다면? 만약 그럴 위험성이 있어 경고를 한 거라면 두 명이 온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여타 위험성에 대한 고민은 추후의 일이었다.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신녀의 선택을 받는 것. 다른 제국보다 더 먼저 제국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고 싶지 않군. 그리 불안하면 그대들은 그놈도 신경 쓰고 알아서 챙겨라. 나는 그녀에게 집중할 생각이다.”
두 사람의 신경이 분산되면 오히려 기회는 많아진다. 벨제르가 비죽 입가를 끌어 올리자 나머지도 생각을 멈추고 짜증을 담아 받아쳤다.
“누구 마음대로. 나도 그딴 놈은 신경 안 쓴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일은 없다. 당당하게 승부를 보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