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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 사람이 내뿜는 날카로운 기세에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돌았다. 마음 한편을 어지럽히던 찝찝함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서로를 노려보던 시선이 흐트러지자 헤르세리온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다시 진행하지. 우선 그녀와의 개인적인 만남도 중요할 테니 시간을 정하는 것이 어떤가?”
“순번을 정하자는 말인가? 하루씩 만난다면 이틀이라는 공백이 생기지 않나?”
“그럼 오전은 하루씩 번갈아 가며 그녀와 개인 시간을 갖고 오후에는 다 같이 티타임을 가지면 되겠군.”
나쁘지 않았다. 공평한 기회를 방해 없이 능력껏 활용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그녀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신녀 또한 여인이 아닌가. 귀족 영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여인들의 환심을 사는 건 세 사람에게 있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중요한 건 선택이 끝났을 때다.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나는 신탁이 한 곳에만 한정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한 나라에만 축복이 내린다면 다른 곳은 버려진다는 건데 결과가 뻔하지 않나? 신께서도 생각이 있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하고자 하셨을 거다.”
선택된 곳을 뺀 다른 곳이 무너진다면 대륙의 존재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고작 대륙의 일부분만 살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터무니없는 결말이다. 그건 두 사람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걱정하는 건 선택에 따른 축복량의 차이였다.
“내 생각도 같다. 아마도 선택이 끝나면 대륙이 무너지는 건 완전히 멈추겠지. 문제는 그 이후다. 선택받은 곳은 신의 축복이 충만할 것이지만 다른 곳은 현상 유지 정도로 그칠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렇지. 아니면 축복을 받더라도 선택받은 곳보다는 못하겠지. 만약 그 차이가 심하다면 그 또한 문제다.”
과연 선택받지 못한 제국이 그것을 수긍하고 넘어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나라 국민들은 수도 없이 재난과 재해로 죽어 나가고, 수확량이 떨어져 굶어 죽는 이들도 허다했다. 국민들을 건사해야 하는 황태자의 위치로 수많은 목숨을 어깨에 짊어지고 온 이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선택을 받아 확실한 안위를 보장받아야 했다. 선택을 받지 못해도 버림받지는 않을 거라는 안일한 사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선택받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그 리스크라도 줄여야 한다.
“답은 나왔군. 일단 선택이 끝나고 우려하던 상황이 온다면 대륙이 안정권에 들 때까지 신녀를 소유한 제국은 일정 기간 돌아가며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하지. 단, 선택받은 곳이니 제일 많은 혜택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가?”
“신녀를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는 말이군.”
“그 방법밖에 없으니 별수 있나?”
신녀를 독점하려 한다면 다른 제국들과 왕국들이 힘을 합쳐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리되면 선택받은 곳도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신녀가 수긍할지 모르겠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만? 선택이 끝난 후 다른 제국을 돌아보며 축복을 내려 달라 해도 될 일이지 않나?”
“하긴 신의 아이인데 거절은 하지 않겠지.”
“그럼 결론은 나왔으니 서류로 남기는 게 좋겠군.”
세 사람은 세 장의 서류에 협의된 내용과 만약 어길 시 돌아갈 불이익까지 명확하게 작성하고 황태자의 직인을 찍었다. 이것으로 최악의 상황은 대비했다. 이제 누가 선택받아 더 완벽하고 안전한 혜택을 받는가만 남았다.
벨제르와 네르바가 만족한 얼굴로 서류를 품에 안은 채 응접실을 나가고, 보좌관이 들어왔다. 헤르세리온은 굳은 표정을 풀고 입을 열었다.
“협의는 잘 끝났다. 저들도 같은 고민을 한 결과겠지.”
“다행입니다.”
“한시도 신녀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내. 어차피 귀족 영애들과 비슷하겠지만, 어떤 보석을 좋아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문제야 없습니다만, 그래도 신녀님인데 무언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지켜보면 알겠지.”
신의 아이라고는 하나 아직 특별한 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택받기 전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녀 또한 평범한 인간과 같아서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인간과 같다면 오히려 그녀를 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신녀가 보통 영애들과 같다면 접근하기가 더 쉬울 거다. 그러니 철저히 감시해라.”
토렌토야말로 이 대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인들 못할까. 삐뚜름한 웃음과 함께 금빛 안광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2장. 체념
작은 침대 위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재희의 눈이 힘겹게 올라갔다. 시야가 흐릿해 주위가 불분명하게 보였다. 이내 터져 나오는 기침에 그는 또다시 몸을 웅크리고 힘겹게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일어나려고 해도 몸을 잠식한 열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을 버둥거리다가 결국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시선만을 옆으로 돌리자 침대 옆 탁자 위에 컵 하나와 작은 그릇이 보였다.
비몽사몽간에도 흐릿한 초점을 맞추자 물과, 아마도 수프인 듯한 무언가가 변색된 상태로 굳어 있는 게 보였다. 바짝 마른 입술을 비집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문득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겹쳐졌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세월은 이미 아득히 흘렀는데 상황은 어릴 적 그때와 허무할 정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오직 제 편이었던 단 한 사람, 엄마의 죽음에 충격과 고열로 기절하다시피 쓰러진 상태로 몇 날 며칠을 홀로 보냈었다.
그때도 누군가 다녀가긴 했는지 미음 한 그릇과 물 한 잔이 있었지만 먹지는 못했다. 이미 딱딱하게 굳은 데다 상했는지 날파리까지 꼬인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팠지만 도움을 청하려는 생각은 못 했다. 설사 누군가를 불렀다고 해도 와 줬을지 의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내리 굶으면서 열기에 시달렸다. 혼자라는 게 무서워 차라리 죽기를 바랐는데 사람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그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목소리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아이 특유의 맑은 목소리는 갈라져 마치 가래가 들끓는 것처럼 탁해졌다. 지독한 열기에 성대가 퉁퉁 부었는데 그것을 방치한 탓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이후부터였다.
한동안 목소리만 들어도 인상부터 찌푸리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창고로 사용하는 별채 구석방으로 쫓아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본채에 있어도 겉도는 존재였으니까.
재희는 집안에 절대 섞일 수 없는 이물질이었다. 아버지의 집안은 소위 말하는 상류층이었고, 저는 미천한 천것의 피를 이어받은 불필요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분제도 없는 21세기에 피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집안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오만한 그들의 눈엔 고아인 엄마는 물론 그 자식인 저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정작 몇 년을 쫓아다닌 건 아버지였지만 그들은 엄마에게 재산을 보고 달라붙은 천박한 꽃뱀이라 손가락질했다. 단 한순간도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아들을 낳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집안의 핍박은 더 심해졌다.
거기에는 재희의 외모가 그녀만을 쏙 빼닮은 탓도 있었다. 그들은 당연한 듯 그의 친자가 아니라고 의심하면서도 절대 친자 확인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친자라고 판명 받는 것이 껄끄러웠으리라.
엄마는 그 끔찍한 압박감과 멸시, 조롱을 견뎌 내며 오직 남편과 어린 아들만을 의지하여 겨우겨우 버텼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날이 수척해져 아름다움을 잃어 가는 엄마에게 점점 흥미를 잃고 다른 여자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는 그를 알면서도 누구 하나 잘못이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만을 보였다. 그때 엄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마 속이 썩어 문드러졌으리라. 밤이면 밤마다 어린 저를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을 때 엄마는 결국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무책임하게 떠나 버렸다. 그렇게 유일한 안식처마저 잃었다.
그럼에도 차마 원망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녀가 흘린 눈물이, 버거운 고통이 어렸던 제 가슴에 너무도 깊게 박혀 버린 탓이다. 어찌 원망을 할까. 엄마는 죽어서도 동정 한번 받지 못하고 쓰레기가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남편마저 찾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홀로 버티다가 겨우 집으로 갔지만 돌아온 건 경멸뿐이었다. 엄마를 따라 죽어 버리지 왜 돌아왔느냐며 대놓고 악담을 퍼붓는 그들을 피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랬듯이 그저 조용히 방안에 틀어박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홀로 고립된 채 지독하게 앓았다.
앓고 난 후에 목소리가 괴물처럼 변해 버려 별채로 쫓겨난 후로 한동안은 그들을 볼 수조차 없었다. 밖에서 문을 잠근 탓에 나갈 수도 없이, 사용인이 하루 두 번 초라한 음식을 내어 주는 걸로 연명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같은 상류층인 여자와 재혼했다.
엄마와 달리 그녀는 모두에게 환영받았고 쌍둥이까지 낳아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와 그녀가 가끔 정원에서 파티를 열거나 쌍둥이와 산책을 나올 때면 어둠 속에서 몰래 지켜보며 숨죽여 울었다.
사랑받고 싶은데 그들을 보는 게 두려웠다. 또 한편으로는 당연시 여겼다. 어차피 저는 그들에게 완전히 잊힌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임에도 누구 하나 그 문제로 찾아오지 않았기에 그저 멍하니 별채 안에서 1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그녀가 찾아왔다. 화려한 그녀는 마치 공작새 같았다. 사랑받는 위치와 배척받는 위치를 어린 저조차도 명확하게 구분하여 깨달을 만큼, 초라하게 말라 가던 엄마와는 너무도 달랐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뻣뻣하게 굳은 저를 그녀는 마치 더러운 걸 보듯이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러곤 다음 날 전혀 다른 얼굴로 또다시 별채를 찾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달콤한 초콜릿이 가득 담긴 상자와 커다란 케이크를 가지고.
‘사랑받고 싶니?’
다정한 미소, 그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 그저 그리 물은 게 전부였지만 온통 어둠뿐인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그녀는 제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천사 같았다. 겉모습만 화려하고 다정할 뿐 속은 음습한 독기를 품은 독사였는데, 그때는 제 눈이 멀어 버렸는지 멍청하게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우습지 않은가. 그리 물은 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주제넘은 착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너무도 간절해서, 정말 그녀 말대로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거부는 생각도 못 하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이미 그때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미련한 욕심에 사랑받고 싶어서 매달렸다. 하지만 사랑받는 방법을 몰랐다. 엄마는 그저 존재하는 자체가 사랑이라 말했지만 그들에게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제게 그녀가 손을 내민 것이다.
그녀는 볼품없이 말라비틀어진 제 행색에 안타까워하며 매일같이 케이크와 초콜릿을 가져다줬다. 그녀가 보여 주는 미소와 달콤함에 빠져 그것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래야만 그녀가 계속해서 웃어 줬으니까.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 보니 볼품없이 말랐던 몸은 점점 더 비대해져 갔고 영양 균형이 깨져 자주 아팠다. 그때쯤엔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보여 주는 호의를 놓칠 수가 없어 무작정 매달렸다.
그래서 미련하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초콜릿도 케이크도 질려서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그녀가 원하기에 꾸역꾸역 먹어 치웠고,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입을 닫고 살았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라고 해서 구부정하게 움츠렸다.
순식간에 돌변하는 그녀의 행동과 표정에 반항은 꿈도 꾸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비대한 몸뚱이, 말도 못 하는 벙어리가 되어서야 그녀는 마치 상을 주듯이 뒤늦게 초등학교에 보내 주었지만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새로운 생활의 기대로 설레었지만 이미 그때의 저는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겉돌게 되면서 학교에서도 홀로 고립됐지만 집안사람들이 내뿜는 악의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참을 만했다.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았지만 별채를 벗어나는 것이 즐거웠고, 공부가 좋았다. 만약 학교에서의 악의를 참지 못한다면 또다시 홀로 별채에 갇혀 방치되어야 할 테니까. 혼자보다는 차라리 비웃음거리가 되는 게 더 나았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눈치를 보면서도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시험 때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받았다. 처음으로 작게나마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고 작은 희망에 부풀었다. 시험지를 보면 그녀도 아버지도 칭찬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생전 처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은 그녀에게 시험지를 내미는 순간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녀는 시험지를 보자마자 뺨을 때렸고, 교과서를 모두 갈기갈기 찢었으며, 두 번 다시 공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몰랐다. 단지 그녀가 원하니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저는 뚱보에 목소리괴물도 모자라 바보천치가 되었다. 집안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비웃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쏟아 냈지만 그녀는 지극히 만족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재희가 단 한순간도 공부를 게을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록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지만 학교에서의 수업 내용을 닥치는 대로 암기하고, 몰래 구한 교과서가 헤져 너덜거릴 정도로 보고 또 보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아마 그때의 저는 이미 그녀가 목적한 바를 눈치챘던 것 같다.
그때부터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망가진 저를 보고도 끊임없이 경계하고, 사소한 걸로도 날카롭게 반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꽃뱀의 자식까지 감싸는 자상한 그녀.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모습이었고 저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렇게, 학교에 보내 제대로 교육시켜도 어쩔 수 없는 바보라는 것을 주위에 보여 주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안심하고 만족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고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악동 같은 쌍둥이들의 괴롭힘도 늘어나고, 학교에서는 전교 왕따로 살아가며 매일같이 폭력에 시달렸다.
그에게 허락된 자유는 고작 몰래 책을 읽는 시간이 전부였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집에 가기 위해 눈치 보며 서점 구석에 죽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많은 책을 읽게 됐다.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또 한편으로는 닮은 책 속의 세상은 언제나 새로웠고…… 제 처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그래도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방식, 옳고 그름을 책으로 배우고, 희망을 키우고, 꿈을 꾸며,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안 날 만큼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잠깐의 휴식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녀가 손을 썼는지 제 수준으로 들어가기에는 터무니없이 커트라인이 높은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생활은 그야말로 빛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연속이 되었다. 가진 자들 특유의 오만함과 잔인함에 변변한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정말 개돼지처럼 바닥을 기어야 했으니까.
거기다 꽃뱀의 자식이라는 악명까지 더해져 폭력의 강도는 더 심해졌고 끝내 한쪽 다리에 장애까지 가지게 됐다. 그로 인해 병신이라는 별칭이 하나 더 붙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누구 하나 손을 내밀지 않는, 하루하루 비참한 그 생활에 이미 적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견뎠다. 차마 스스로 죽을 수는 없어서. 삶을 살아갈 이유를 잃었다 해도, 아니 처음부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엄마와 그리 약속했기에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벌레처럼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과연 이곳에서도 약속이 유효할까? 아직까지 현실인지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다른 세상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새삼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적어도 제게 죽음은 끝이 아닌 안식이니까.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한 안식. 그 끝을 상상하자 처음으로 심장이 술렁였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기쁨이라는 낯선 감정이었다. 어쩐지 진심으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웃는 것조차 힘들었다.
점점 숨을 쉬는 것마저 버거워지는 걸 느끼고 작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릿한 시야로 아픈 엄마의 표정이 보였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바뀌지 않는 현실에 죽도록 노력했다. 그러니 이제는 쉬어도 되리라. 아득해지는 정신에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면서.
***
신의 사자가 오고 나흘째 되는 새벽녘. 모두가 잠들고 긴장이 가장 쉽게 풀어지는 이른 시간이었다. 아비드는 오래도록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뮤라를 바라보고는 서랍을 열어 작은 병 하나를 품 안에 넣고 기척도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작게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문밖에 있는 기사들 중 한 명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조용한 복도를 재빨리 가로질렀다. 한참이나 걸어 신전 제일 구석진 곳에 도착한 그는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또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것도 못 했다. 사신단들이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통에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사흘인데 정말이지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쳤다. 벌써부터 이 지경인데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렇다고 저마저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제 주군이 묘하게 신경 썼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자꾸만 불안해서 오긴 왔는데 선뜻 문을 열기는 망설여졌다. 만약 깨어 있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간 고민하다가 방 안의 기척을 살폈다.
그리고 슬쩍 미간을 찌푸린 그는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재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 식은땀에 흠뻑 젖은 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아비드는 체온을 재고자 급히 이마에 손을 얹었다가 흠칫 놀라 다급하게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차가운 물과 수건을 가져온 그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이곳으로 올 때 찢어지고 젖은 옷 그대로인 모습에 작게 이를 갈고는 속옷 한 장만 남겨 둔 채 모조리 벗겨 냈다. 그 순간 아비드는 잠시 손을 멈췄다.
전신에 폭행의 흔적이 가득했다. 날카로운 날붙이로 그은 듯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되는 것 같은 크고 작은 상처들. 뜨거운 걸로 지진 듯 보이는 무수한 화상 자국. 하얀 피부에 빼곡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상처들이 가득하다.
설마 소년이 온 곳에도 노예 같은 게 있는 걸까. 하지만 그리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일을 했다고 보기에는 드문드문 드러난 피부도 하얗고, 상처가 많을 뿐 손바닥은 굳은살 하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상처가 생긴 것인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흉터에 손을 뻗다가 거친 숨소리를 듣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흉터가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체온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몸이 불덩이였다. 이 정도 고열이면 자칫 내장 기관이 열기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열기를 잡아야 하는데 이미 늦은 건 아닌지 불안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고 닦아 내고, 혹시나 싶어 가지고 온 해열에 좋은 약병을 꺼내 힘겹게 먹이고야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고작 약 한 병으로 완치될 수는 없겠지만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다.
“천벌 받을 놈들.”
아픈 사람인 걸 뻔히 알면서 젖은 옷을 갈아입히지도 않고 그대로 방치하다니! 게다가 상태로 보자니 의원을 불러 주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만약 제가 와 보지 않았다면 소년은 이 끔찍한 고통을 혼자 견뎌 내야 했으리라. 어찌 이리도 모질 수가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는 행태에 진저리를 치다가 이내 맥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탁의 날에 왔으니 설마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 조금은 그들의 양심에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과가 이것이다. 그리 당하고도 또다시 믿으려고 했던 어리석음에 아비드는 조소를 흘렸다.
그러나 이렇게 살린다고 해서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비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재희를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봤다. 지금 시점에선 소년의 앞날이 너무도 불투명했다.
아직 나이도 어린 소년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인가. 저들은 이 소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모든 판단을 끝마쳤다. 고작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이미 답을 내린 것이다.
“쳐 죽일 놈들.”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적의에 자칫 살기라도 터져 나올세라 그는 주먹을 끌어 쥐며 어지러운 심기를 다스렸다. 아비드가 이리도 분노하는 것은 소년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모진 핍박과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제 주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상대를 알려고 들지도 않은 채 무작정 짓밟는 인간들의 추악한 행태는 이미 지독히도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니다. 익숙하기에 더 지치고 더 아픈 법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그 사실을 알까. 오히려 더 우월감을 드러내며 오만하게 짓밟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그 사실에 씁쓸한 탄식을 쏟아 낸 아비드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변색된 수프와 지저분한 물. 저것을 음식이라고 가져왔을까. 보나마나 먹지도 못할 종류일 것이다. 애초에 일말의 기대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나마 저것도 생색이라도 낼 요량으로 가져다 놨으리라.
그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펑퍼짐하고 거칠어 피부가 다 쓸릴 것 같은 후줄근한 옷이 보이고, 아비드의 표정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이를 바득바득 갈고는 다시 한 번 몸을 닦아 내고 임시로나마 옷을 갈아입혔다.
지금도 이 모양인데 의원을 불러 줄 리가 없다. 신전의 의원도, 마르반 사신단과 함께 온 의원도 믿을 수가 없는 이상 신전 밖에서 비밀리에 약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먹을 것도 따로 챙겨야 할 터. 아무래도 한동안은 새벽녘에 오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제 주군도 조금은 안심할 테다.
무엇보다 낮에는 신녀의 곁에 있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사신단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군에게는 그조차도 고역일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을 어찌할까.
아비드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고 재희의 열을 재 보았다. 그리고 젖은 수건을 빨아 방 한쪽에 걸어 놓고는 물을 담은 대야까지 챙겨 드는 걸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을 먹었으니 곧 차도를 보일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다시 침상 쪽을 바라본 아비드가 씁쓸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렇게 아비드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서서히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소음이 들려올 즈음엔 서서히 열이 내리기 시작했고, 거칠어진 재희의 호흡도 점차 고르게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을 뜬 재희는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몇 차례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던 재희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지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낯선 느낌이 스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느낌이다. 얼핏 깨어났을 때와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꼭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단순한 착각인가. 멍한 정신으로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지친 얼굴로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아마 되지도 않은 꿈이라도 꿨을 것이다.
좀 더 뚜렷해진 시야에 옆 탁자를 돌아보자 변색된 수프와 먼지로 가득한 지저분한 물 잔이 그대로였다. 역시나 저 같은 걸 누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그저 이러고도 살아남은 제 꼴이 우스울 뿐이다. 정말 신이 있다면 제 작은 바람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죽는 것 하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
정말 자살해야지만 이 지긋지긋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받을 고통이 남아 있어 죽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이제는 정말 지쳐 버렸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언제까지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의 말대로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서? 하지만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핍박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기서 더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더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솔직히 미치도록 억울하니까. 저도 사람이지 않은가. 바보로 살아왔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저 또한 아픔을 느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감정을 억눌러 온 탓에 하소연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설사 할 기회가 있다 한들 누구에게 하란 말인가. 제 말을 귀담아 들어 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 태어난 자체가 죄악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못 한다. 더는 사랑받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그저 바라는 게 있다면 이제 그만 쉬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약간 주홍빛이 섞인 맑은 하늘을 보니 아침인 것 같다.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살던 곳이 아닌 낯선 세상.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만이 있는 곳인데도 하늘은 같았다. 그저 끔찍했던 그곳의 탁한 하늘과는 달리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맑은 하늘이 신기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저는 이곳에서도 혼자였다.
순간 가슴이 아파 오고 숨이 막혔다. 도대체 뭘 기대했나. 멍청한 저를 마구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조적인 웃음 대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울어서는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약해지는 마음에 습관처럼 설움을 토해 내듯 숨죽여 울었다.
가슴이 텅 비어 버린 허전함과 쓰라리게 아픈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무심코 입을 열어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제 처지가 바보 같아 숨이 넘어갈 정도로 헐떡였다. 무언가가 콱 짓누르는 듯 답답한 느낌에 힘없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지만 도무지 풀리지를 않았다.
그저 온몸이 아팠다. 고통스럽고 쓰리고 따가웠다. 너무 아프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혼자라는 사실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도 아프게 다가오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바보 같지 않은가.
새삼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유일한 제 편이었던 엄마마저 곁을 떠난 후로는 언제나 혼자였기에 외로움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그 고통을 삼키고 억눌러 끝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아플 일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한 번 터진 눈물이, 아픔이 멈추지 않고 온몸으로 퍼졌다. 차라리 소리라도 마음껏 지르면 답답한 속이 풀릴까? 누군가 알아주지 않을까? 아픈 곳이 조금은 치유되지 않을까?
헛된 희망이 아주 조금씩 어지러운 머릿속을 좀먹어 갔지만 곧바로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떨쳐 냈다. 못 한다. 소리 내어 우는 방법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돌아올 반응을 뻔히 아는데 바보 같은 짓을 왜 한단 말인가.
희망을 품기에는 이미 너무도 지쳐 있었다. 그러니 그저 지나가자. 오늘은 그저 평소보다 더 약해진 것뿐이다. 낯선 세상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일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만 허락하자.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듯 결론 내리고 어그러진 마음을 쏟아 냈다. 눈물을 멈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왜 우는지도 잊은 채 그저 하염없이 소리 죽여 울었다. 계속해서 울다 보면 답답한 속도, 막막한 상황도, 부질없는 희망도, 그리고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마저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지칠 때까지 모든 것을 쏟아 내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