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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는지, 얼마만큼의 많은 눈물을 쏟아 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에 감각이 없어졌을 때야 눈을 떴다.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구역질이 치밀고 머릿속을 비틀어 쑤셔 대는 통증까지 더해졌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몇 번이나 탁한 숨을 내뱉고야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제야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두통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천천히 눈을 뜨고 창밖으로 흐릿한 시선을 돌렸다. 어두침침한 마음과는 달리 푸른 하늘에는 한적한 구름만이 떠 있었다. 매연으로 가득하던 하늘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낯설었다.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자신은 이곳에 있는 것인가. 특별할 것도 없이 평소와 같았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고 여느 때처럼 서점으로 도망치려는 찰나 몇몇 학생들에게 끌려가 그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당해야 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평소보다 그들의 행동이 더 악질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아마도 다른 일로 짜증 난 게 있었으리라. 화풀이 대상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이유도 없었을 테고.
그들은 언제나처럼 한참이나 폭력을 가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학교 안에 있는 연못으로 끌고 갔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빠졌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를 연못으로 밀어 넣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뼛속까지 차가운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연못의 깊이는 기껏해야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았지만 존재하지도 않을 동전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킬킬거리며 장난삼아 돌을 던졌다. 돌을 맞기 싫으면 물에 잠겨야 했다. 아마도 구차하게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처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으리라. 그래야 그로 인해 우월감을 느낄 테니까.
그들의 방식은 언제나 일정했기에 재희가 할 수 있는 것 또한 정해져 있었다. 얼굴과 머리에 돌을 맞고 피를 흘리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물에 잠겼다가 떠오르며 괴물 같은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온몸으로 애원했다. 그럴수록 비웃음이 커지고 악랄한 말들이 쏟아졌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긴, 생각을 하면 무얼 할까. 어차피 반항도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그저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 장난감이 필요했고 약자인 저는 언제나처럼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게 룰이었지만 사실상 그대로 죽어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제 바람을 들어주려는지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고, 눈앞이 온통 시뻘겋게 변하며 흐려졌다. 그제야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고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자 연못이 온통 붉게 변해 있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고개를 돌리자 답지 않게 놀란 듯 하얗게 질려서 허둥지둥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으로 피를 토하며 비웃었던 것 같다. 어차피 저 같은 쓰레기 하나 죽였다고 그들이 타격받을 리도 없을 텐데, 아직은 어려서인지 겁을 먹은 꼴이 웃겼다. 태평한 생각을 하며 서서히 힘을 빼고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이제야말로 정말 죽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다른 세상으로 와 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저 죽기를 바랐는데 대체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이곳이 다른 세상이 확실한지도 의문이다. 혹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의심도 들었지만 이곳에 왔을 때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다. 난생처음 보는 울창한 숲,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호수,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색채의 화려한 사람들.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저를 향한 시선만큼은 역시나 같았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 일그러진 얼굴과 혐오를 담은 너무도 익숙한 시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임에도 낯선 곳이라는 상황 때문인지 덜컥 두려움부터 들었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괴물 같은 목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구겨지는 얼굴들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정신도 없었다. 분명히 처음 듣는 언어임에도 그들의 말이 당연한 듯 이해가 되는 것도 혼란스러웠다. 의문을 품을 정신도 없이 무작정 그들을 따라갔다.
냉기로 점점 더 굳어 가는 몸과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몇 번이고 고꾸라질 뻔했지만 아프다고 하소연하지도,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않은가.
과연 그런 무심함이 얼마나 갈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낯선 환경이 두려워 혹여 그들을 놓칠세라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숲을 빠져나가자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앞선 무리 중에서 신전이라는 말을 언뜻 들었던 것 같았지만 차마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여 당황하고, 곧 익숙한 시선들에 잔뜩 움츠리며 사람들에게 떠밀려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인 양 쏟아지는 비웃음에 아무런 반박조차 못했다.
마치 쓰레기를 건드리듯 툭툭 차는 발길질을 묵묵히 받고 있을 때 그녀가 나타났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대우를 받는 아름다운 사람. 신녀라고 했던가. 무슨 생각인지 따라 들어오라는 남자의 말에 화려한 문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뿐이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제 친척들보다 더 높은 위치로 보였다. 그런 그들이 저 같은 걸 신경 쓸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악의 섞인 말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원래 있던 세상의 복식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 화려한 외관, 색색의 머리카락.
낯선 세상이라는 걸 유감없이 보여 주는 모습에 덜컥 두려움부터 들었지만 이곳에서도 저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갑자기 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처분만 기다릴 뿐이다. 어쩌면 더럽다는 이유로 죽여 줄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진정한 자유를 찾은 기념으로 웃으면서 죽어야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기대로 술렁거리는 마음이 엉뚱하다 싶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라 재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누굴까?
모두가 비웃을 때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강렬하게 부딪혀 오는 시선에 황급히 시선을 피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사실상 그때는 서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몸에 감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경멸하는 상대를 직접 옮겨 줄 이들이 아니다. 바깥에 있던 똑같은 복장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설마, 그 가면 쓴 사람일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떨쳐 냈다. 화려한 그들과 같이 있는 것만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저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처분만 기다리면 된다.
아프다고 약을 줄 것 같지도 않고 이대로 죽으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그리 결론을 내리자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동시에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감으며 간절하게 바랐다.
‘제발, 이번에는 죽을 수 있기를.’

***

몸을 조심스럽게 흔드는 손길에 그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한창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짜증이 울컥 치밀어 한소리 하려던 찰나 ‘신녀님’ 소리에 눈을 번쩍 뜨며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재빨리 눈을 굴려 침대가에 시립한 시녀들을 보고야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음을 머금었다.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입니다, 신녀님.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저희들은 이곳에 있는 동안 신녀님을 모실 시녀들이니 편하게 하대하셔도 됩니다.”
“그러고 싶은데 아직 적응이 안 돼서. 나중에 편해지면 그리할게요. 그보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인가요?”
“오늘 아카데미 교수님들과 예법을 가르쳐 주실 분이 오시기로 하셔서요. 아무래도 조금 서둘러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들과 예법 선생이라니. 기어코 공부를 하라는 건가. 거기서도 지겹도록 공부했는데 여기서 또 하라니. 부글부글 끓는 속에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고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께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어쩌죠? 벨제르 전하와 오전에 약속이 있고 오후에는 다 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시급한 만큼 황태자님들도 이해하시고 불편함 없이 시간을 조정하셨습니다.”
결론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속으로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그녀가 애써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하지 않은 시녀들의 목욕 시중을 받으며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그녀는 곧 눈앞에 펼쳐진 수십 벌의 화려한 드레스를 보며 슬며시 입가를 끌어 올렸다.
“드레스가 많네요.”
“곧 더 많아지실 겁니다. 지금은 급히 준비한 것이라 얼마 되지 않지만 황태자님들이 최고의 드레스들을 준비해 주실 테니까요.”
“전하들이요?”
“그럼요. 드레스뿐일까요? 신녀님이 원하신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다 해 드릴 겁니다.”
저를 위해 아름다운 황태자들이 무엇이든 해 줄 것이라고. 황홀한 꿈같은 현실에 그녀는 시원스레 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입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조금 부담스러운데. 내가 그런 걸 받아도 될까요?”
“당연한 말씀을요. 신녀님은 이 대륙의 유일한 희망이시니 마땅한 대우입니다.”
“신녀님이 아니면 그 누가 황태자님들께 선물을 받겠어요? 언제든지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황태자님들은 신녀님이 무언가 요구하시기를 바라실 테니까요.”
각 제국끼리 경쟁이 붙은 마당에 무엇인들 못 해 줄까. 시녀들이 호들갑스럽지 않게 웃으며 화려한 드레스 중 그녀의 눈길이 가장 많이 가는 것을 눈치껏 꺼내 시중을 들었다.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하고, 헤르세리온이 선물한 화려한 보석 세트까지 착용한 그녀는 거울을 보고 만족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세상에! 정말 아름다우세요, 신녀님.”
“어쩜! 이리도 우아하실까요?”
“제국 어디를 가셔도 대륙의 꽃은 신녀님이실 겁니다.”
“부끄럽네요. 세 사람 실력이 좋아서 그래요.”
물론 본바탕이 잘나지 않았다면 백날 꾸며도 소용이 없겠지만. 그녀는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시녀들에게 공치사를 돌렸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아부가 담긴 칭송이 돌아왔고,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거울을 바라봤다.
화려하면서도 결코 과하지 않은 제 모습은 누가 봐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모습에 어떤 남자가 넘어가지 않을까. 하물며 저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신녀였다. 아직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희망이라 할 정도면 제 존재가 대단한 것만은 확실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저는 그저 이 고고한 위치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지극히 만족스러운 결론에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듯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이 순간은 분명 현실이니까.
화려하게 빛나는 제 모습에 눈이 부셨다. 아름다운 세 남자가 저 하나를 두고 경쟁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웃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실없이 비집고 나오는 웃음에 시녀들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그때, 또다시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구겼다.
‘찝찝하게! 도대체 그놈은 뭐야?’
꿈같은 이 현실에도 불안한 것은 같이 온 존재 때문이다. 분명 별 볼 일 없는 자일 텐데 같은 곳에서 같은 날에 왔다는 게 신경 쓰인다. 정말 실수일까? 만약 실수가 아니라면? 문득 드는 생각에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초조한 듯 두 손을 맞잡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실수가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것저것 따져 봐도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러니 무시하면 그만인데 마치 손가락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거슬리고 짜증이 치밀었다.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명색이 신녀라 대놓고 치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거짓으로라도 자애롭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거슬리는 존재를 감싸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확실히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안심이 된다. 그러자면 이곳의 상황부터 상세히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 전까지도 편히 둘 생각은 없었다. 같은 날에 왔다고 해서 같은 위치는 아니라는 걸 명확하게 알려 줘야만 한다. 그래야만 주제를 파악할 테니까. 그리 결론 내리자마자 그녀는 번뜩이는 눈을 내리깔고 시녀들이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신녀님, 괜찮으세요?”
“어디가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시어요.”
“그러고 보니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각 제국 사절단에 동행한 궁의가 있으니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당장에라도 방을 나갈 듯한 시녀의 행동에 그녀가 급히 고개를 내젓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아픈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단지 걱정이 돼서.”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신녀님.”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다 해 드리겠습니다.”
“예.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뭐든지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말씀을 해 주세요.”
마치 간이라도 빼 달라면 빼 줄 태세인 시녀들의 행동에 그녀는 가늠하듯 힐끗 기색을 살피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마워요. 안 그래도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다름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온 사람이요. 그때 쓰러졌잖아요? 왠지 걱정도 되고 한번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말끝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시커먼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 시녀들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은 듯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며 반발하고 나섰다.
“절대 안 됩니다, 신녀님. 그놈은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맞습니다. 그런 흉물을 걱정이라니요?”
“아무리 신녀님이라도 그런 걸 가까이 하시면 큰일 납니다.”
첫날 황태자들의 말로 이미 그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한 것 같아 그녀는 슬그머니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하세요. 그 사람도 인간인데 흉물 취급은 좀 듣기가 안 좋네요.”
말속에는 엄연히 모순이 존재했지만 그녀도 듣는 시녀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녀들이 재빨리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신의 아이라 보통 인간들보다는 자비로움을 갖고 있을 테지만 실상을 알면 달라질 것이다. 대륙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를 누가 반기겠는가. 저들도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대륙의 희망이나 마찬가지인 신녀 입장에서도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라. 시녀들이 정색을 하고는 앞다투어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신녀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어요.”
“신녀님은 모르셔서 그렇지, 그놈은 마룡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르반 황태자라는 인간을 보셨지요? 칙칙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가 마룡의 후예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존재지요.”
“지금껏 그 상징을 타고난 이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가족도 못 알아보고 닥치는 대로 죽이는 미치광이를 과연 누가 인간 취급을 해 주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그놈들은 피에 미쳐서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일으켰지요. 사실상 대륙에 문제가 생긴 것도 모두 그놈들 때문입니다. 아마 그놈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상 언젠가는 또 전쟁을 일으킬 테고 그리되면 아까운 목숨들만 사라질 겁니다.”
그녀는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견제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최악의 평판이지 않은가. 괜한 걱정이었다. 놀랐다는 듯 입가를 가린 그녀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세상에, 끔찍해라.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마룡의 후예들이 미치는 이유가 신의 저주 때문이랍니다.”
“저주요?”
“예.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신의 저주 때문에 한순간에 미쳐서 닥치는 대로 피를 뿌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신녀님께서도 조심하시어요. 혹 가까이 갔다가 그놈들이 미쳐서 해악을 끼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놈들 몰골을 생각해 보셔요. 한 놈은 끔찍한 흉터에 한 놈은 더러운 몰골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자칫 다가갔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큰일입니다.”
“그렇군요. 후우, 안타깝네요.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밑바닥 신분이었을 텐데 저주까지 받았다니…….”
일부러 말끝을 흐린 그녀는 순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에 입 안을 질끈 깨물었다. 시녀들의 말만 들어 봐도 그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불안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역시 의식할 가치도 없었다. 속으로 만족한 웃음을 흘린 그녀가 마치 신녀로서 자비라도 베풀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리니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아직은 저주가 발동한 게 아니잖아요? 불쌍하니까 신관들한테 신경은 써 달라고 해 주세요. 보니까 다리도 절고 신분이 그래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을 텐데, 낯선 곳에 이유도 모르고 와서 얼마나 무섭겠어요? 하다못해 잡일이라도 시켜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요.”
“어쩜! 역시 신녀님이세요. 그런 흉물까지 신경 쓰시다니!”
“신관들한테는 저희가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고마워요. 부탁 좀 할게요.”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싱긋 웃고 돌아서는 그녀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네르바가 들어오라 말하자 시녀가 황급히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베아트리스를 모시는 시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래, 신녀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아냈나?”
“예, 전하. 지난 며칠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신녀님은 화려한 보석이나 드레스를 유독 좋아하셨습니다.”
“보석에 드레스라.”
신녀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다는 말인가. 차라리 잘됐다. 여인의 비위 하나 맞추지 못할까. 보석과 드레스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그녀가 일반 귀족영애와 같다면 오히려 상대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다른 점은?”
“그것이, 같이 온 놈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녀님 세상에서도 미천한 신분인 데다 몸도 온전치 못해서인지 여러모로 불쌍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시녀의 보고에 네르바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신녀라 자비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미천한 신분이라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물며 마룡의 상징까지 가진 이상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그놈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것 없다. 다른 놈들에 대해서는 별말 없었나?”
“예, 전하.”
“알았다. 앞으로도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다른 시녀들도 경계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시녀가 물러가자 네르바는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막대한 책임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턱턱 막혔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만 목표로 하고 자존심도 버려야 했다. 황태자가 대수인가. 제 나라를 위해 구걸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반드시 선택받는다.”
그래야만 제 나라가 살고 국민들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쟁취할 것이다. 네르바의 날카로운 눈빛이 굳은 각오로 단호하게 빛났다.

***

지난 며칠간 열이 내렸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통에 재희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을 바라보다 또다시 까무룩 잠들기만 했다. 얼핏 깨어날 때마다 해가 뜨고, 밤이 되는 것을 보고야 며칠이 흘렀다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그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봤던 변색된 수프는 사라지고 대신 깨끗한 물이 물병에 담겨 있었지만 사실상 몸을 일으키는 것도 버거워 갈증조차 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아침이면 몸이 조금쯤은 가벼웠다. 며칠을 먹지 못하고 갈증과 고열에 시달렸다면 이미 기력이 하나도 없어야 정상이다. 살아 있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여전히 힘은 들어가지 않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남은 열까지 떨어진다면 움직일 수도 있으리라.
게다가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옷이 바뀌어 있었다. 찢어진 교복도 아니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뻣뻣하고 거친 천도 아닌 훨씬 부드러운 감촉이다. 누군가 저를 신경 써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라 더 놀랐다.
‘이해를 못 하겠어.’
왜 저 같은 걸 신경 쓰는지 솔직한 심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고 며칠이 지나도록 사람 그림자도 보지 못해 믿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결과를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확실히 누군가가 다녀갔다.
문득 이곳이 신을 모시는 신전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혹시나 신관들인가 했다. 그러나 곧 힘없이 웃고 말았다. 하나같이 비웃고 장난치듯 발길질을 하던 사람들이다. 아프다고 챙겨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바람은 저도 같긴 한데……. 아무래도 아픈 걸로 죽기는 힘들 것 같아 쓴웃음을 흘릴 때였다.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재희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황급히 눈을 감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주해 봐야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고 그냥 잠든 척하자 싶어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였다.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곧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절로 움찔거리려는 몸을 억누르자 거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이불이 사라졌다.
“뭐야, 이 새끼 아직도 안 죽었네?”
“질기다, 질겨. 벌써 굶어 죽은 줄 알았더니 뭐가 이렇게 질긴 거야?”
제 생각이 맞았다. 저들은 제가 죽기를 바란다. 그러니 누군가 다녀갔다고 해도 저들은 아닐 것이다. 하긴, 무슨 상관일까. 화풀이든 뭐든 그저 빨리 하고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날카로운 시선과 악의적인 말을 묵묵히 감내했다.
“얼굴이 벌건 거 보니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이대로 놔둬도 되는 거야? 그래도 신녀님이 신경 써 달라고 했잖아?”
“괜찮아. 어차피 이놈 주제로 감히 신녀님을 만나지도 못해. 시녀 말 들어 보니까 이놈은 인간 축에도 못 끼는 천민 같더라고?”
“천민? 확실해?”
“그래! 신녀님이 온 곳에서도 계급이 있을 거 아니야? 신녀님이 직접 밑바닥 신분이라고 했으니 천민밖에 더 있어? 그래도 신녀님이 얼마나 착하신지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주시잖아? 세상에서 천민을 인간 대접해 주는 건 신녀님밖에 없다니까.”
우스운 말이다. 21세기에 계급이라니. 그런데 웃기게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다. 저 또한 그 지긋지긋한 핏줄 우월주의의 피해자가 아닌가. 과연 그녀가 같은 세계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저를 인간 축에도 들지 않는 천민으로 취급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하긴, 꼴만 봐도 천민 같네.”
“그러니까 신녀님께는 신경 써 주고 있다고 하고 대신관님 말씀을 따르면 되는 거야. 신녀님이 선택하기 전까지만 목숨 붙여 놓으면 된다고 했으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을 걸 주면 되겠지.”
“그렇게 하자고. 그 전에 치워 버리기에는 신전 입장에서도 좀 찝찝하니까.”
“찝찝할 것도 없어. 어차피 이놈이 죽든지 말든지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우리는 그저 며칠에 한 번 이놈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보고만 하면 돼.”
차라리 죽여 주지.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재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쳇, 귀찮게. 도대체 파아툼 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딸려 보낸 거야?”
“그러게. 신녀님만 보내도 되는 걸 이건 왜 보냈지?”
파아툼은 누굴까? 이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저를 데리고 온 게 그 사람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세계 사람이다. 혹 제 처지를 낯선 세상에서도 느껴 보고 비관하라고 데리고 왔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싶지만 도저히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긴 혼자 백날 생각하면 뭐하나. 이래저래 결론은 같을 것이라 마음을 비우려는 찰나, 흘러나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진짜 실수한 거 아니야? 신이라고 해서 실수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잖아? 아니면 신녀님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런 하찮은 쓰레기를 데려왔는지도 모르지.”
“큭큭, 그거 말 되네.”
신이라니? 그 파아툼이라는 사람이 인간이 아니고 신이란 말인가? 정말 신이 있다니. 경악할 사실에 충격에 빠진 것도 잠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 말대로 실수한 건가. 그도 아니면 그녀를 위한 제물인가. 이유가 무엇이든 싫다. 원망스럽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었다면 더는 고통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째서 낯선 세계까지 와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바란 적도 없었다. 헛된 꿈을 꿀 정도로 희망이 남아 있지도 않았었다. 그저 죽기를 바란 것뿐인데 그것이 그리도 큰 욕심이었을까.
“야야, 그러고 보니 이놈 입고 있는 옷은 뭐야? 너 이걸 갖다줬어?”
“어라? 아닌데. 내가 준 건 평민들도 안 입는 완전 싸구려였는데. 갈아입히지도 않았어. 누가 이런 놈 몸에 손을 대?”
“그럼 이건 누가 갈아입혔어?”
“그야 모르지. 아! 혹시 그놈 아니야? 그 마룡 황태자 기사단장 말이야. 그날 이놈을 안고 온 게 그 기사잖아? 그놈이 왔다 간 것 같은데. 어쩌면 이놈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그놈 때문인지도 모르지.”
마룡 황태자? 기사단장? 그 사람들은 또 누굴까. 그럼 이때까지 제가 무사한 건 그 사람들 때문인가. 하지만 무엇 때문에 저 같은 걸 보살펴 준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답답해하는데 이어서 흘러나오는 말에 또다시 의문이 차올랐다.
“하! 더러운 것들끼리 웃기지도 않아. 꼴에 제 주인하고 같은 검은 머리라고 챙기는 건가. 그래 봐야 역겨운 것들이 뭘 한다고?”
“오히려 잘됐지. 알아서 신경 쓴다면 우리는 할 게 없잖아? 이놈이 살아나면 일이나 시키면서 부려 먹으면 되고 솔직히 죽어도 그만이지. 어차피 몰래 다녀간 것 같은데 생색은 우리가 내면 그만 아니야?”
“그런가. 하긴, 그놈들이 알아도 나설 주제는 못 되니까. 대신관님한테는 대충 살아 있다고만 하고 그만 가자. 역겨운 쓰레기랑 같은 곳에 있어서인지 숨 막힌다.”
그들은 저속한 웃음을 흘리며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제야 눈을 뜬 재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룡 황태자. 검은 머리. 저 또한 새까만 검은색이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 있던 그 사람 또한 검은 머리였다.
유독 화려한 색채들 중에 유일한 무채색이라 더 눈에 띄었다. 어둡던 눈동자와 마주쳤던 것을 떠올리자 더더욱 의문만 더해졌다. 이곳에서 검은 머리는 좋지 않은 평을 받는 건가. 저들의 말을 들어 보자면 검은 머리가 많은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더 이해 가지 않는다. 만약 저들이 말한 상대가 그라면 황태자가 아닌가. 황태자라면 높은 사람일 텐데 어째서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웃는 걸까. 자신처럼 고작 핏줄로 계급을 따지는 것이 아닌, 진정한 신분을 나타내는 계급이 존재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