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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마룡, 더러운 것?’
사내들이 했던 말을 떠올린 재희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룡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나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를 도와주고도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이건 아니다.
혹 이것 또한 제 탓일까. 모두가 배척하는 저를 챙긴다면 결코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원망하지 않을 텐데. 저 때문에 괜히 저런 소리를 듣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도움을 받고 보답은 못할망정 비웃음을 듣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서라도 상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만두라고 말해야겠지. 괴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가 없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혐오스럽게 보더라도 용기를 내 보자 싶어 마음을 다잡고 밤을 위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부디 상대가 찾아왔을 때 깨어날 수 있기를. 작은 바람을 끝으로 흐릿해지는 정신을 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열기 속에서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재희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났다. 그 와중에도 차가운 감촉은 부드럽게 몸을 오가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도 재희에게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시원하면서도 아픈 감각에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끙끙거리던 재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잠시 후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동시에 몸을 오가는 부드러운 움직임이 딱 멈췄지만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얇은 막을 씌워 놓은 듯 흐릿한 시선으로 재희가 눈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곧 물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열기와 갈증으로 바짝 말라 버린 목에 시원한 물이 들어오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허겁지겁 마셨다.
“천천히 마시세요. 급히 마시면 물도 체합니다.”
어르듯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재희는 의문부터 들었다. 누굴까? 누군데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제 곁에 있는 걸까. 제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찾아왔던 신관들의 말을 떠올리고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에 몇 차례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좀 더 초점이 뚜렷해졌다. 시야에 처음 보는 사람이 담겼다. 재희는 언뜻 실망감이 스치는 걸 느끼곤 지레 놀라 움찔했다.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실망이라니? 이해하지 못할 반응이다.
설마 검은 머리의 그가 올 거라고 내심 기대한 것일까. 멍청한 생각이다. 황태자라던 그가 저를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터무니없는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입술을 달싹이자 목이 마른 것이라 생각한 아비드가 몇 차례에 걸쳐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 넣었다.
“괜찮습니까?”
“누…구?”
갈증이 가셨다곤 해도 오랜 열기로 원래보다 더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에 재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젠 괴물이라 말할 것이다. 제 목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 또한 그럴 것이라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비드의 말은 달랐다.
“고열 때문에 목이 많이 부었습니다. 열이 다 내릴 때까지는 답답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말은 안 하는 게 치료에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낮고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 안에 적의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재희는 뻣뻣하게 굳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비웃지 않는 걸까. 이런 반응은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재희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저 당황스러움에 눈만 깜빡이자니 곧 무언가가 입술을 건드렸다.
“지금은 식도도 붓고 속도 많이 상해서 죽도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수프를 좀 더 묽게 끓여 온 것이니 일단은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그런 연후에 약도 드셔야 하루빨리 쾌차할 겁니다.”
아비드의 다정한 목소리와 조심스럽게 묽은 수프를 먹여 주는 행동에 재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문도 진의도 파악하기 전에 가슴 저 밑바닥부터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곤 눈앞이 흐릿해졌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이 흥건하게 차오른 눈물에 재희는 소리 없이 눈물만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런 재희를 내려다보는 아비드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결코 그 모습이 추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자꾸만 제 주군과 겹쳐 보인 탓이다.
어찌 이리도 같은가. 모든 감정을 버려야 했던 주군과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눈앞의 소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 모습만 봐도 살아온 과거가 보이는 듯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도 없다.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섣부른 위로가 다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 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작은 도움을 주는 게 전부였다.
젖은 수건으로 묵묵히 눈물을 닦아 내고,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수프를 먹였다. 좀처럼 멎지 않는 눈물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은 양의 수프와 약을 먹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아비드는 재촉하지 않고 재희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전날보다 그래도 열이 많이 내렸습니다. 내일은 상태를 봐서 죽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직은 열기 때문에 화상을 입은 식도와 내장이 죽을 받아들이기에는 힘들 테지만, 이 상태로 마냥 묽은 수프만 먹다가는 차도를 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먹고 토하더라도 일단은 기력부터 보하자 싶어 한 말이었지만 재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서 그럽니까?”
아니다. 제 주제에 이리 신경 써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호의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더는 안 된다. 재희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마디 할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지만 이 이상 호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하세요.”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엄마의 말만 아니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터. 이리 질기게 살아온 건 그저 죽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낯선 세상이니만큼 엄마와의 약속도 끊어졌을 것이다. 이런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약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의 사후 처음 받아 보는 온전한 보살핌에 나약한 저는 눈치도 없이 기대려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피해를 입는 건 눈앞의 상대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곁에 계시면, 같이 욕먹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의 은혜로도 충분하고 감사했다. 미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아비드의 커다란 손이 재희의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런 문제라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더 떨어질 평판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재희가 의문을 담고 바라보자 아비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계의 더러운 일면에 대해 말해 주고 싶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로는 내키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제 주군과 같이 죽어 버린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저런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아비드는 누구보다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눈빛. 아니,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지친 자의 어둠이었다. 이런 마당에 몸이 나아도 암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굳이 일깨워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니, 몸이 완전히 낫고 나서라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말해 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응어리가 맺힌 듯 답답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쉰 아비드가 이불을 끌어 재희의 목까지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만 가 보겠습니다. 낮에는 다른 사람 이목도 있으니 새벽에 들르겠습니다. 힘드시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담담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 말에 재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감사하고 미안하지만 여전히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비드는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서서히 약효가 도는지 열이 많이 내리고 거칠었던 숨결이 가라앉았다. 재희는 잠시 고민 끝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제 뜻은 확고했다. 더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은인이 저 때문에 손가락질 받는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 결론을 내리자 더는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빠졌던 그 호수. 더운 바깥 날씨에 비해 물은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차가웠다. 얼핏 봤을 때도 컸으니까 아마 가운데로 가면 수심이 더 깊지 않을까. 제 비대한 몸뚱이는 순식간에 집어삼키리라. 무엇보다 이런 몸 상태로는 그 냉기를 견딜 수 없을 테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곳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이곳에서 죽었다가는 괜히 은인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 마침 이른 새벽이라 사람도 없겠다 싶어 길게 숨을 토해 낸 후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주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간신히 두 다리로 바닥에 섰지만 순간 어지럼증이 핑 돌아 다급하게 침대를 짚었다. 동시에 뜨거운 배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헛구역질을 하며 몸을 구부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속이 조금 잠잠해져 천천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오늘따라 다친 다리가 더 아픈 것 같아 작은 골방인데도 문까지 가는 길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힘겹게 한 발 한 발 떼며 간신히 방을 나가 두리번거리자 복도와는 반대인 막힌 벽면에 붙은 쪽문이 보였다.
처음에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던 거대한 문과는 달리 너무도 초라했다.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나갈 수만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자 고리만 걸려 있을 뿐 자물쇠가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빼곡한 숲이 보였다. 재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문 앞쪽과 건물을 돌아가는 작은 길, 정면으로 보이는 숲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호수에서 빠져나올 때도 숲을 가로질렀었다. 물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아마도 저는 그곳을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분명 신전의 호화로운 정원과 큰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만약 제가 그 길을 이용한다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조용히 죽을 자리를 찾아도 모자랄 판에 눈에 띄어서 좋을 것도 없고, 차라리 숲속으로 가자 싶어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길이 없어도 신전 반대쪽 방향으로만 잡으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 못 찾으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죽을 자리를 찾으면 그만이다.
이래저래 상관없다 싶어 숲 안으로 들어가 풀을 헤치고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갔다. 어두운 길이라 한 걸음 떼기도 버거워 몇 번이고 힘이 빠져 나동그라지기를 반복했다. 옷이 여기저기 잔가지에 걸리거나 찢겨 엉망이었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온몸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온몸을 식은땀으로 흠뻑 젖신 끝에야 어렴풋이 멀리서 빛이 보였다. 재희는 그곳을 향해 비틀비틀 걸었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자 어느새 떠오른 해가 푸른 호수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찾았다. 이제 저곳까지만 가면 되는데 지친 몸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난감함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엉금엉금 기어 호수로 다가갔다.
팔이 후들후들 떨릴 때쯤에야 재희는 겨우 호수에 도착했다.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그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며칠 지나서인지 자잘한 흉터를 빼고는 얼굴 곳곳에 자리 잡은 폭력의 흔적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두툼한 살덩이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며칠 호되게 앓더니 살이 많이 빠졌다. 그래 봐야 여전히 볼품없는 꼴이지만 제 얼굴조차 잊고 산 지 오래라 호수에 비친 모습이 생소했다.
신기한 마음에 뚫어져라 수면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차갑다 못해 얼음 같은 물에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으로 갈수록 점점 차오르는 물 높이를 보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말로 죽을 수 있다. 이제 더는 고통받지 않아도 되리라. 마치 앙금을 다 털어 내듯 환하게 웃은 재희가 목까지 차오르는 깊이에 스르르 눈을 감고 다시 한 발을 떼었다. 순간 쑥 꺼지듯 몸이 내려앉았다. 본능이 살고자 허우적거렸다. 재희는 저절로 움직이려는 팔다리를 억눌러 바로 했다. 그러자 몸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도 호흡을 조르는 것 같은 숨 막힘도 잠시였다. 비스듬히 누워 가라앉던 몸이 어느새 호수 밑바닥에 닿았다. 그 순간, 재희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품 안에 감싸는 듯한 아늑한 느낌을 받으며 마지막 의식을 놓았다.



3장. 기회 그리고 구원


물속이 이렇게나 따뜻했던가. 편안하다. 분명 차가워야 할 물이 이상하게도 아늑하기만 해 재희는 저도 모르게 가만히 미소 지었다. 역시 죽음을 택한 건 제 짧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진작 이럴 것을 왜 그리도 지칠 때까지 달려온 것인가.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순간 저 또한 미련 없이 뒤따라야 했다. 그랬다면 오랫동안 그 끔찍한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일까. 유재희라는 인간은 죽었다.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아직은 죽지 않았단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재희는 몸이 부유하는 듯한 아늑함에서 흠칫 놀라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분명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시야에 들어오는 건 사방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뿐이다.
그 생경한 광경에 재희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역시나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없었다. 재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파.”
아프다는 건 꿈이 아니라는 뜻이다. 도무지 이해 못 할 상황에 정신이 멍해졌다. 도대체 여긴 어디고,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죽었는데? 분명히 차가운 호수 안으로 가라앉지 않았나. 등에 호수 바닥이 닿는 감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설마 누군가가 구해 준 건가. 하지만 신전 안에 이토록 광활한 들판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란 말인가. 혹 죽어서 오는 곳인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황급히 제 몸을 바라보니 여기저기 찢기고 엉망진창인 옷 그대로에 맨발이었다.
그제야 발바닥에 까슬까슬하면서도 부드러운 잔디의 감촉이 느껴졌다. 작게 신음을 흘리다가 떨리는 손을 들어 심장 위로 올렸다. 두근두근. 멈췄어야 할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고. 힘차게 주장하는 박동에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흐으, 싫어.”
싫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더는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 건지. 억울하고 분해서 마치 속을 게워 내듯이 울컥울컥 눈물이 차올라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눈물이 후드득 쏟아지더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로 지칠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그저 죽고 싶다는 한 가지 바람만을 품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눈을 감고 숨만 색색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눈두덩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생경한 그 느낌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온기의 주인은 없었다. 다만 서서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주변 풍경이 변해 갔다. 재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흡 멈추었다. 잔디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제 주위로 작은 새싹들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둘 수줍게 고개를 내민 이파리들이 비정상일 정도로 빨리 자라나고, 작디작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떨어지자 작은 봉오리가 생겼다. 그리고 얼마 후 봉오리가 서서히 벌어지며 난생처음 보는 색색의 예쁜 꽃이 되었다.
그렇게 피어난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늘어나며 제 주변을 빼곡하게 채웠을 때 재희는 다시 한 번 탄성을 터트렸다. 티 없이 맑은 새파란 하늘 위로 새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좀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태양과 달이 떠올랐다가 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아무것도 없었던 초원 위로 널찍한 바위가 생기고, 하나둘 나무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동시에 다른 쪽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재희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빼곡한 꽃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작은 길이 열린다. 재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와 때때로 우뚝 멈춰 가만히 눈을 감고 사방에서 풍겨 오는 꽃향기를 맡았다.
마치 제 자신이 벌꿀이 된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는 향기에 코를 킁킁거리자 순식간에 기분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좋다. 편안하다. 그 외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달콤하고, 은은하고, 그러면서도 청량한 느낌에 어느새 심장은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또 뭐가 나올까. 다시 눈을 뜨고 꽃길을 걸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광경이 보여 재희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물레방아같이 생긴 바위 사이로 앙증맞은 작은 폭포가 떨어져 내렸다. 그 밑으로 졸졸 흐르는 개울물은 너무도 깨끗해 제 어두운 마음까지 정화해 주는 듯했다. 마치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물속을 보자 작은 물고기들이 하나둘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저를 인식한 듯 동글동글한 조약돌 사이로 쏙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작게 키득거리며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괜찮을까. 분명 심장이 뛰고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감촉도 선명하다. 그럼에도 재희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주저하게 된다. 혹 제 손을 담갔다가 더러워질까. 혹 만졌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왠지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재희는 섣불리 손을 뻗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지나치는 건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았다. 결국 유혹을 못 이겨 침을 꼴깍 삼키고 괜히 손을 옷자락에 몇 번 닦아 내고는 조심조심 뻗었다.
보드랍게 물결치는 물 표면의 감촉에 작게 탄성을 흘리다가 좀 더 깊이 손을 넣고 조심스럽게 휘저었다. 퉁퉁한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물의 감촉이 좋아 절로 웃음을 머금다가 용기 내서 머뭇머뭇 발을 뻗어 물속에 담갔다. 발을 감싸는 물이 너무도 시원했다.
“꿈만, 같아.”
나른하게 풀어진 기분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재희는 지레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제 목소리를 두고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까. 이곳엔 저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좋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다. 자유, 편안함. 제 아픔까지도 포근하게 감싸 주는 이런 곳에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꿈같은 상황에 재희는 가만히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아름답고 포근한 곳.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물소리와 꽃향기. 싱그러운 풀 내음이 피어오르고 희미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지금 느끼는 이 모든 게 사라질까 숨조차 조심스럽게 쉬면서, 따뜻하게 퍼지는 감동에 재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게 행복이겠지.’
행복이 달리 있을까. 거창한 건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딱 좋았다. 처음으로 느낀 기분 좋은 감정에 재희의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그때, 어렴풋이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재희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왔던 길을 돌아보자 어느새 꽃길이 넓어지고 주변의 지형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리의 근원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재희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웃음소리와 말소리는 인간이 아니라면 낼 수 없다. 그건 곧 이곳에 다른 인간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재희는 재빨리 바위 뒤로 숨었다. 제발 저를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눈을 꾹 감고 얼마나 있었을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말소리에 숨을 흡 들이마시고 슬그머니 눈을 떠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재희는 멍한 얼굴로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인간이 아니야?’
작다.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키에 투명하게 비치는 날개까지.
“요정?”
경악할 사실에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흠칫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들었으면 어쩌지? 뭐라고 해야 할까. 아니, 말을 했다가 끔찍하게 싫어하면? 그래서 이곳에서 나가라고 하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 재희는 시큰해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재희는 다시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바위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봐서는 다행히 제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동화책에나 나오는 요정들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진짜 작아. 요정은 저렇게 작구나.’
예쁘다. 사랑스럽다. 그런 말은 요정들을 두고 하는 말일 테다. 작은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고, 쉼 없이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마치 투명한 구슬 위에 물방울이 통통 떨어져 잔잔하게 퍼지는 것처럼 맑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한참을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요정들이 우르르 이동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살금살금 뒤따라갔다. 요정은 저들뿐만이 아니었다. 색색의 꽃에 앉아 있는 요정부터, 물을 뿌리는 요정, 반짝반짝 빛을 뿌리며 날아다니는 요정들까지.
거기다 요정과는 달리 날개도 없이 허공을 유영하는 존재들도 있었고, 작은 몸으로 아장아장 길을 따라 줄지어 걷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또한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매우 작았다. 작은 동물부터 신기하게 생긴 동물, 커다란 맹수까지 다가와 요정들과 어울리는 모습. 마치 먹이사슬이라는 게 없는 듯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재희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큼지막한 나무 뒤에 숨어 훔쳐보았다.
평화만이 존재하는 듯한 모습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재희는 이내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자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거대한 몸체를 뒤덮은 검은 비늘, 날카로운 발톱, 그보다 더 날카로워 보이는 이빨, 거대한 날개. 설마 책 속에나 나오는 드래곤이라는 말인가. 경악스러운 존재에 숨을 바짝 죽이고 사태를 지켜봤다. 만약 저 드래곤이 동물들이나 요정들을 해치면 어쩌지?
상대가 최강이라 알려진 드래곤인 이상 힘도 없는 자신이 막아선다고 한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언제라도 튀어 나갈 태세로 몸에 힘을 바짝 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런 제 걱정이 무색하게 동물들도 요정들도 드래곤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을 표하고 경외하며 다가갔다. 그 스스럼없는 행동에 탄성을 흘리고 다시 드래곤을 보니 무섭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눈빛이 순박했다.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블랙드래곤은 이 세계를 조율하고 지키기 위해 탄생한 존재란다. 그러니 내가 피조물을 사랑한 만큼 알카모스 또한 생명을 사랑하고 자연을 아끼지.”
갑자기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희는 흠칫 굳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 외의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들었던 목소리 같은데 눈에 보이지는 않아 당황스러웠다. 이런 곳에 귀신 같은 게 있을 턱이 없는데.
더 이상한 건 드래곤도 요정들도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게만 들리는 목소리일까. 무어라 물어보고 싶었지만 혹 저들이 제 목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마치 제 생각을 아는 듯 답이 들려왔다.
“파아툼. 이 세계의 신이란다. 그리고 지금 너의 모습도, 목소리도, 저 아이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단다.”
파아툼. 이 세계의 신.
재희는 믿을 수 없는 말에 입 안에서 다시 중얼거렸다. 진짜 신이라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미처 묻기도 전에 시야가 일렁거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고, 곧 아득해지는 정신에 재희는 힘없이 비틀대다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

몸을 감싸는 온기, 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 짓던 재희가 묘한 기시감에 스르르 눈을 떴다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은 여전히 꽃밭 사이에 앉아 있었다. 재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흘렸다.
‘꿈이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행복한 이곳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가슴 깊이 안도했다가,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없다. 분명 이 세계의 신이라고 한 목소리를 들었는데.
‘설마 볼 수는 없는 건가?’
하긴 신을 보는 인간이라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인지 원망인지 모를 감정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제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 사내들이 했던 말과 상황을 떠올려 보면 신의 힘뿐이었다. 신이 아니고서야 다른 세계에서 사람을 데려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다. 어째서 쓸모도 없는 저를 이곳까지 데려왔느냐고. 저 같은 것도 인간이라고 간호해 준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세계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만을 바라지 않던가. 신이라면 제가 어떤 대우를 받을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데려왔다는 건 무슨 뜻일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혼란에 진득한 한숨을 내쉴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있는 형태를 가늠하며 천천히 다가가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우뚝 멈췄다. 이곳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세계다. 그리고 저 하나만이 이질적이었다. 이곳에서도 저는 이방인에 지나지 않을 터라 자칫 저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기 전, 신이 분명 이곳의 생명체는 자신을 볼 수도 없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리고 용기 내어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자 재희는 멈칫 굳어 버렸다. 분명 아까까진 알카모스라는 검은 비늘의 드래곤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수많은 드래곤들이 생겨 있었다. 은빛 비늘을 찬란하게 빛내는 드래곤부터, 붉은 비늘의 드래곤, 푸른 비늘의 드래곤, 녹빛의 드래곤에 작은 크기의 어린 드래곤들까지.
그 장엄할 정도의 광경에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갔다.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순박한 눈빛의 드래곤들은 알카모스를 중심으로 모여 그보다 훨씬 작은 동물들과 요정들의 말을 들으며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그 광경이 재희에겐 참으로 색다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