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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원정대 2화
01. 결심 (2)
그래도 하나는 먹였다 싶어 루이스는 한시름 놓았다. 날씨도 더워지고 하니 입맛이 더 없어 졌는지, 얼마 전부터 첸은 식사 때마다 음식을 남겨 미하엘과 루이스를 비롯해 집사와 유모, 하녀 등 테일러가의 전체를 걱정시키고 있었다.
“아빠, 저 이거 먹었으니까 놀아 줘요.”
“응? 어어, 얘가 벌써부터 장사를 하려고 하네? 그래, 뭐 까짓 거. 어차피 자려고 했으니까.”
루이스는 ‘절대로 손해 보면서 살진 않겠군, 기특한 내 아들’ 하고 말하며 첸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 뭐 하고 놀까?”
“퍼즐이요! 삼촌이 저번에 사 주셨어요. 근데 퍼즐이 너무 많아서 어려워요.”
“1500피스짜리 퍼즐입니다, 마님.”
유모의 말을 들은 루이스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섯 살짜리한테, 1500피스…….”
분명 그 사람,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걸 거야. 루이스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금쪽같은 아들이 하자고 하면 해야지. 루이스는 팔을 걷어붙이곤 첸과 함께 러그 위에 앉았다. 퍼즐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첸과 퍼즐 삼매경에 빠져 있던 루이스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푹 빠져 있었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을 차린 루이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유모는 방문으로 달려가 귀를 기울였다. ‘마님, 데이브 경 오셨습니다’ 하는 하녀의 목소리에 유모는 루이스에게 정중히 알렸다.
“데이브 경 오셨습니다, 마님.”
“아, 들어오라고 해요.”
루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브 케이린(27)은 죽은 첸의 친모의 남동생이었다. 첸에게는 둘도 없는 삼촌이었고, 그 또한 첸을 굉장히 아꼈기 때문에 그의 방문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케이린가 또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해서 테일러 가문과 사돈의 인연을 맺은 후 딸자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문은 서로 교류하며 지내고 있었다.
공적으로도 두 가문은 서로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데이브에겐 공적인 이익이든 뭐든 다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데이브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활짝 웃으며 첸을 불렀다. 첸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삼촌의 방문에 ‘삼촌!’ 하고 활짝 웃으며 외치고는 그에게 달려가 단번에 안겼다.
“잘 지냈어? 자식, 더 컸네.”
“헤헤.”
“왔어요?”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루이스에게 데이브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꽃, 또는 태양이라고 불리는 데이브는 그 간판이 딱 맞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매너 있었고, 어느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했다. 바람기도 꽤나 있어 그에게 상처를 입어 울고불고 난리가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선천적인 카사노바, 바람둥이였다. 사람 꼬시는 재주가 타고난 데이브를 루이스는 처음엔 질색했다. ‘세상에서 바람둥이가 제일 싫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탓이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속정이 깊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관계는 이미 개선된 지 오래다.
원래라면 그는 루이스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하고, 루이스 또한 그래야 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이리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내가 준 퍼즐이네?”
“대체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여섯 살짜리한테 1500피스라니. 이거 나보고 다 하라고 준 거죠?”
“이런, 들켰네.”
하하, 하고 웃으며 데이브는 첸을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다. 까르르, 첸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저럴까 싶어 루이스 또한 헤, 하고 풀어진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첸은 그를 미하엘만큼 좋아했다.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듬직한 아버지로서 미하엘을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놀아 주고 즐겁게 해 주는 삼촌으로서 데이브를 좋아했다. 첸에겐 그 무엇도 필요가 없었다. 따스한 아빠, 듬직하고 자상한 아버지, 유쾌하고 재미있는 삼촌. 이 셋만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활짝 웃고 있는 첸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루이스의 표정이 순간 살짝 굳어졌다. 이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른 탓이다. 그의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데이브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금방 표정을 풀고 첸과 놀아 주었다.
거의 30분을 목마에, 말타기로 격렬하게 놀아 주던 데이브는 루이스의 중제로 겨우 쉴 수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더 놀고 싶다는 첸에게 루이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낮잠 잘 시간이라며 첸을 끌고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첸은 이제 겨우 여섯 살이었다. 낮잠을 충분히 자야 하는 나이다.
칭얼거리며 더 놀고 싶다던 첸은 루이스의 토닥임과 자장가에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 살금살금 첸의 방에서 나온 루이스는 정원으로 향했다. 덥긴 하지만 화창한 날씨여서 그런지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이미 데이브가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의 차 시중을 받은 루이스는 웃으며 하녀에게 고마우니 이제 가 봐도 된다고 말했고, 하녀 또한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떴다. 함께 차를 마시던 두 사람 중 먼저 말을 꺼낸 건 데이브였다.
“아주 거하게 폭탄 하나 날리셨다고 들었어.”
“……그 사람이 말하던가요?”
데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루이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다시금 그의 말이 들려왔다.
“얼마 전에, 다짜고짜 저한테 전화가 와서는, 그러더군. 대체 뭐라고 했냐고. 네 녀석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냐며.”
“하, 당치도 않은 말을.”
과연 당치도 않을까. 데이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미하엘이 자신과 루이스의 관계를 질투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는 일이었다. 신체 건장하고 멋지고 완벽한(그는 나르시스 기질도 조금 있었다) 자신과 가깝게 지내니 불안했던 것이겠지. 데이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루이스의 입장에선 그저 어이가 없었다. 자신과 데이브의 사이를 질투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그저 자신에게 친한 형 같은 존재였다. 미하엘이 질투할 만한 분위기가 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데이브는 어렸을 적 전쟁터에 나가 죽은 형과 닮았다. 데이브 또한 그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해서 가깝게 지냈던 것뿐인데. 전화까지 해서 다 까발려 버리다니.
“좀 충격이군. 각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은 갈대라고 하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그저 사랑한 척한 거지, 이미 식었어요.”
사랑한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목숨보다도 미하엘을 사랑했다. 신이 자신에게 미하엘 대신 목숨을 내놓으라 한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줄 것이다. 생살도 잘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안 되었다. 지금은 그를 사랑해서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어서도 안 되었다.
사교계에 퍼지지만 않았다 뿐이지, 이미 테일러 가문에선 암암리에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자상하긴 해도 항상 품위를 지키던 주인이 한순간에 무너져 안방마님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며 선물 공세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그 또한 루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변덕쟁이에다 철없는 속물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미하엘을 사랑하는 만큼, 배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이 아이 또한 소중했다. 이혼을 한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나를 잃는 것보다 조금 상처 입더라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혼을 하겠다?”
“불편합니다, 이런 이야기.”
“첸은 어쩌고?”
찌릿, 가슴 한구석 가장 아프고 상처 입은 곳을 헤집는 그의 물음에 루이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굳은 얼굴로 데이브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첸은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나 하나쯤 없다고 어떻게 안 될 겁니다. 테일러가엔 나 말고도 그 아이를 사랑해 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요. 데이브, 당신을 포함해서.”
솔직히 혈혈단신으로 돈 벌며 애 키우는 홀로서기 미혼모도 아니고, 자신 하나쯤 없어도 첸은 충분히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첸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 때문에 이미 생겨 버린 생명을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버릴 수는 없었다.
첸은 잘할 것이다. 이곳에는 그 아이를 사랑해 줄 아버지도 있고, 데이브도 있고, 하녀들도 있고, 유모도, 집사도 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배 속의 아이는 아니다. 이 아이의 존재가 밝혀지면 이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버림을 받게 된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이 아이를 책임지고, 사랑으로 보살펴 줘야만 했다. 첸에게는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잔인하군.”
“데이브.”
“사랑이 식었다는 이유만으로 공작 부인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정말로?”
“못 할 것도 없죠. 잊으신 것 같은데, 전 뼛속까지 평민입니다. 이런 성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게 내겐 맞아요.”
루이스의 말에 데이브는 눈을 내리깔고 하하, 하고 낮게 웃었다.
“하나만 묻지.”
루이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혼하겠다는 마음, 진심인가?”
“……네.”
루이스의 대답을 들은 데이브는 몇 초간 웃음 어린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봉투를 받아 들고 즉시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천천히 데이브에게로 향했다.
창백해진 얼굴빛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의 감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데이브가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었다. 하, 하고 루이스가 세차게 숨을 들이켰다.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루이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카일을 매수했지. 그의 형이 어머니 수술비를 들고 카지노로 날랐고, 수술비를 다 날린 것도 모자라 천문학적인 빚을 졌거든.”
“카일……이? 카일이 이 사진을 찍었단 말입니까?”
루이스가 하, 하고 숨을 터트렸다. 봉투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유동 인구 적은 구석에 위치한 작은 산부인과에서 몰래 나오는 자신의 사진이었다. 불안한 듯 주변을 살펴 가며 나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루이스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카일은 미하엘의 직속 보좌관이다. 카일이 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미하엘의 명령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알게 될 수도 있다. 그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될 수도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수면제 먹고 강제로 산부인과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 다시는 하지 마.’
다시금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상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강제로, 산부인과 수술대에 올려 져 배 속의 아이가 조각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 루이스는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갔다. 그런 그를 살짝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데이브는 우선 그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돈으로 매수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그는 그 사실을 몰라.”
그의 말에 현실 감각이 돌아온 듯, 루이스는 하, 하고 애처롭게 막혔던 숨을 작게 터트렸다.
“모르겠죠. 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
중얼거리듯 내뱉은 루이스의 말을 들은 데이브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엄청난 액수로 매수한 사진이 고작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사진이라니, 난 정말로 실망하고 김이 샜는데 말이지. 다른 남자의 아이라도 가진 건가?”
“미쳤습니까?”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루이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의 외침에 데이브는 능청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루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다 까발려진 마당에, 데이브에게 감출 것은 더 이상 없었다.
“혼전 계약서가…… 있어요.”
“혼전 계약서?”
진심으로 의외라는 듯, 그의 눈동자에 충격이 스쳤다. 루이스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피임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만에 하나라도 아이가 생긴다면…….”
“생긴다면?”
“……무조건적으로 중절 수술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하, 하고 데이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정말 깨 볶고 콩깍지가 단단히 씐 잉꼬부부로 알려진 그들의 뒤에 그런 속사정이 있었다니. 아니, 그보다 미하엘의 루이스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었고 그 누구보다 그 마음이 깊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테일러 가문처럼 나라에 손꼽히는 귀족 가문의 경우는 우성 자손들이 많을수록 좋았다. 우성 알파나 우성 오메가의 경우, 일반인보다 뛰어난 재능과 학습 능력을 가진다. 그런데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혼전 계약서라니?
아니, 갖는다는 것은 둘째치고, 생기면 낙태라니. 그것도 혼전에 그 내용으로 계약서까지? 그런 계약서는 중매 계약 결혼을 하는 부부들도 안 쓴다. 미하엘이 혹시 아이혐오증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말인가?”
“아뇨, 그 계약서는 그저 서약서 같은 거예요. 법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적은 게 아닙니다.”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혼할 일도 없을 텐데. 그리고 각하께서 설마 진심이겠어? 그저 겁을 주려고…….”
“……진심이에요.”
루이스의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절대로, 절대로 아이만은 안 된다고, 혹여나 생기기라도 하면 자신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강제로 수술대 위에 올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그의 눈동자를.
“그 사람은 진심입니다. 제가 중절을 거부하기라도 하면…… 아마 강제로라도 끌고 갈 겁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그렇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뚫어져라 노려볼 뿐이었다. 데이브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정말 설마설마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사실일 것이다. 사색이 되어 남편이 강제로 끌고 갈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나저나, 아까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거금을 쓰셨다고요?”
“음? 아, 그거?”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카일이 제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아신 거죠?”
“각하께서 무덤 판 거지. 그 전화 받고 무슨 일인가 싶어 예의주시하고 있었거든.”
그럼, 그가 데이브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더라면 이미 임신 사실이 발각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이야기인가? 아니, 분명 그렇겠지. 이혼 통보를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곤 유모, 집사, 그리고 미하엘 그. 이렇게 딱 세 사람밖에 몰랐으니까. 유모와 집사는 영혼부터 테일러 가문의 사람이었기에 테일러 가문에 누가 될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만 알고 있다면 소문이 퍼질 리가 없지. 물론 지금은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긴 하지만. 하지만 그나마도 다행인 것이, 여태껏 루이스가 쌓은 막강한 신뢰감 덕분에 소문의 수위는 아주 얕은 수준이었다.
“어……쩌면 좋죠? 그 사람이 알면, 알면…… 아이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분명, 분명 알게 되자마자 아이를 잃을……!”
“루이스, 진정해.”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 그렇게 외치며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최측근인 카일이 알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위기임이 당연했다. 아무리 돈으로 매수했다 하더라도 뚫린 입에 두 발 멀쩡한 인간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족쇄를 매달고 귀와 혀를 자르고 두 눈을 멀게 하며 감금하지 않는 이상, 카일의 입은 언제든지 발설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도 초조했다. 당장에 그가 알게 될까 봐. 배 속에서 꼬물거리는 이 작은 생명을 잃게 될까봐. 루이스는 괴로운 표정으로 아아, 하고 신음했다.
“내가 도와줄게.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서.”
“왜요? 당신이 왜 저를 돕는다는 겁니까?”
진심으로 이유를 알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모습에 데이브는 시선을 내리며 짧게 웃음 지었다. 그의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좁힌 루이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죠.”
***
“그렇게 해서, 신데렐라는 밤 12시가 되자마자 당황하며 왕자님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습니다. 마법이 풀려 버리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는 벗겨진 유리 구두를 미처 줍지 못하고…… 첸?”
동화책을 읽어 주던 루이스는 곱게 눈이 감겨 있는 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아이를 불렀다. 이미 첸은 꿈나라에 가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동화책을 덮으며 협탁에 올려놓은 루이스는 첸의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을 해 주었다.
루이스는 밤마다 이렇게 동화책을 읽어 주곤 했다. 첸 또한 루이스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밤마다 어떤 동화책을 읽어 줄 거냐고 다리에 매달려 캐물을 정도였다. 협탁 위에 올려 져 있는 조명의 불을 끈 루이스는 첸이 잠에서 깨지 않게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보이는 자신의 남편의 모습에 눈으로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천천히 문을 닫은 뒤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허니, 잠깐 이야기 좀 해.”
“애 깨요. 조용히 해요.”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미하엘에게 루이스는 최대한 억누른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첸의 방 앞 복도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다행히 손목을 잡아당기거나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첸의 성에서 본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며 루이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아름다웠다. 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가득 수놓아져 있었고, 달빛 아래로 보이는 꽃들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딱 지금 같은 상황이 참 많았었지.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를 품에 가두고. 달빛 아래 어두운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탐하고, 날라 다니는 반딧불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하지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 그것들은 그저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예정인데 말이다.
“허니.”
“당신은 몰라. 내가 얼마나 힘들고 불행한지.”
다리 위 난간 앞에 서서 그는 입을 열었다. 두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자리에 선 미하엘은 그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너무 힘이 들어. 365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틀어 박혀 있어야 하는 이 큰 저택도, 고작 스물넷이라는 나이로 한 아이의, 그것도 다른 사람의 아이의 보모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도. 언제나 나를 깎아내리고 모욕 주기 바쁜 언론과 귀족들.”
“루이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꿈을 포기하고 전국의 주목을 받는다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고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미하엘, 나 너무 힘들어요. 그만해요, 우리.”
01. 결심 (2)
그래도 하나는 먹였다 싶어 루이스는 한시름 놓았다. 날씨도 더워지고 하니 입맛이 더 없어 졌는지, 얼마 전부터 첸은 식사 때마다 음식을 남겨 미하엘과 루이스를 비롯해 집사와 유모, 하녀 등 테일러가의 전체를 걱정시키고 있었다.
“아빠, 저 이거 먹었으니까 놀아 줘요.”
“응? 어어, 얘가 벌써부터 장사를 하려고 하네? 그래, 뭐 까짓 거. 어차피 자려고 했으니까.”
루이스는 ‘절대로 손해 보면서 살진 않겠군, 기특한 내 아들’ 하고 말하며 첸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 뭐 하고 놀까?”
“퍼즐이요! 삼촌이 저번에 사 주셨어요. 근데 퍼즐이 너무 많아서 어려워요.”
“1500피스짜리 퍼즐입니다, 마님.”
유모의 말을 들은 루이스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섯 살짜리한테, 1500피스…….”
분명 그 사람,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걸 거야. 루이스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금쪽같은 아들이 하자고 하면 해야지. 루이스는 팔을 걷어붙이곤 첸과 함께 러그 위에 앉았다. 퍼즐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첸과 퍼즐 삼매경에 빠져 있던 루이스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푹 빠져 있었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을 차린 루이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유모는 방문으로 달려가 귀를 기울였다. ‘마님, 데이브 경 오셨습니다’ 하는 하녀의 목소리에 유모는 루이스에게 정중히 알렸다.
“데이브 경 오셨습니다, 마님.”
“아, 들어오라고 해요.”
루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브 케이린(27)은 죽은 첸의 친모의 남동생이었다. 첸에게는 둘도 없는 삼촌이었고, 그 또한 첸을 굉장히 아꼈기 때문에 그의 방문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케이린가 또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해서 테일러 가문과 사돈의 인연을 맺은 후 딸자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문은 서로 교류하며 지내고 있었다.
공적으로도 두 가문은 서로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데이브에겐 공적인 이익이든 뭐든 다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데이브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활짝 웃으며 첸을 불렀다. 첸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삼촌의 방문에 ‘삼촌!’ 하고 활짝 웃으며 외치고는 그에게 달려가 단번에 안겼다.
“잘 지냈어? 자식, 더 컸네.”
“헤헤.”
“왔어요?”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루이스에게 데이브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꽃, 또는 태양이라고 불리는 데이브는 그 간판이 딱 맞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매너 있었고, 어느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했다. 바람기도 꽤나 있어 그에게 상처를 입어 울고불고 난리가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선천적인 카사노바, 바람둥이였다. 사람 꼬시는 재주가 타고난 데이브를 루이스는 처음엔 질색했다. ‘세상에서 바람둥이가 제일 싫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탓이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속정이 깊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관계는 이미 개선된 지 오래다.
원래라면 그는 루이스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하고, 루이스 또한 그래야 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이리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내가 준 퍼즐이네?”
“대체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여섯 살짜리한테 1500피스라니. 이거 나보고 다 하라고 준 거죠?”
“이런, 들켰네.”
하하, 하고 웃으며 데이브는 첸을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다. 까르르, 첸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저럴까 싶어 루이스 또한 헤, 하고 풀어진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첸은 그를 미하엘만큼 좋아했다.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듬직한 아버지로서 미하엘을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놀아 주고 즐겁게 해 주는 삼촌으로서 데이브를 좋아했다. 첸에겐 그 무엇도 필요가 없었다. 따스한 아빠, 듬직하고 자상한 아버지, 유쾌하고 재미있는 삼촌. 이 셋만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활짝 웃고 있는 첸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루이스의 표정이 순간 살짝 굳어졌다. 이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른 탓이다. 그의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데이브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금방 표정을 풀고 첸과 놀아 주었다.
거의 30분을 목마에, 말타기로 격렬하게 놀아 주던 데이브는 루이스의 중제로 겨우 쉴 수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더 놀고 싶다는 첸에게 루이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낮잠 잘 시간이라며 첸을 끌고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첸은 이제 겨우 여섯 살이었다. 낮잠을 충분히 자야 하는 나이다.
칭얼거리며 더 놀고 싶다던 첸은 루이스의 토닥임과 자장가에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 살금살금 첸의 방에서 나온 루이스는 정원으로 향했다. 덥긴 하지만 화창한 날씨여서 그런지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이미 데이브가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의 차 시중을 받은 루이스는 웃으며 하녀에게 고마우니 이제 가 봐도 된다고 말했고, 하녀 또한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떴다. 함께 차를 마시던 두 사람 중 먼저 말을 꺼낸 건 데이브였다.
“아주 거하게 폭탄 하나 날리셨다고 들었어.”
“……그 사람이 말하던가요?”
데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루이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다시금 그의 말이 들려왔다.
“얼마 전에, 다짜고짜 저한테 전화가 와서는, 그러더군. 대체 뭐라고 했냐고. 네 녀석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냐며.”
“하, 당치도 않은 말을.”
과연 당치도 않을까. 데이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미하엘이 자신과 루이스의 관계를 질투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는 일이었다. 신체 건장하고 멋지고 완벽한(그는 나르시스 기질도 조금 있었다) 자신과 가깝게 지내니 불안했던 것이겠지. 데이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루이스의 입장에선 그저 어이가 없었다. 자신과 데이브의 사이를 질투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그저 자신에게 친한 형 같은 존재였다. 미하엘이 질투할 만한 분위기가 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데이브는 어렸을 적 전쟁터에 나가 죽은 형과 닮았다. 데이브 또한 그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해서 가깝게 지냈던 것뿐인데. 전화까지 해서 다 까발려 버리다니.
“좀 충격이군. 각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은 갈대라고 하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그저 사랑한 척한 거지, 이미 식었어요.”
사랑한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목숨보다도 미하엘을 사랑했다. 신이 자신에게 미하엘 대신 목숨을 내놓으라 한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줄 것이다. 생살도 잘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안 되었다. 지금은 그를 사랑해서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어서도 안 되었다.
사교계에 퍼지지만 않았다 뿐이지, 이미 테일러 가문에선 암암리에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자상하긴 해도 항상 품위를 지키던 주인이 한순간에 무너져 안방마님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며 선물 공세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그 또한 루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변덕쟁이에다 철없는 속물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미하엘을 사랑하는 만큼, 배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이 아이 또한 소중했다. 이혼을 한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나를 잃는 것보다 조금 상처 입더라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혼을 하겠다?”
“불편합니다, 이런 이야기.”
“첸은 어쩌고?”
찌릿, 가슴 한구석 가장 아프고 상처 입은 곳을 헤집는 그의 물음에 루이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굳은 얼굴로 데이브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첸은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나 하나쯤 없다고 어떻게 안 될 겁니다. 테일러가엔 나 말고도 그 아이를 사랑해 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요. 데이브, 당신을 포함해서.”
솔직히 혈혈단신으로 돈 벌며 애 키우는 홀로서기 미혼모도 아니고, 자신 하나쯤 없어도 첸은 충분히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첸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 때문에 이미 생겨 버린 생명을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버릴 수는 없었다.
첸은 잘할 것이다. 이곳에는 그 아이를 사랑해 줄 아버지도 있고, 데이브도 있고, 하녀들도 있고, 유모도, 집사도 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배 속의 아이는 아니다. 이 아이의 존재가 밝혀지면 이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버림을 받게 된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이 아이를 책임지고, 사랑으로 보살펴 줘야만 했다. 첸에게는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잔인하군.”
“데이브.”
“사랑이 식었다는 이유만으로 공작 부인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정말로?”
“못 할 것도 없죠. 잊으신 것 같은데, 전 뼛속까지 평민입니다. 이런 성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게 내겐 맞아요.”
루이스의 말에 데이브는 눈을 내리깔고 하하, 하고 낮게 웃었다.
“하나만 묻지.”
루이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혼하겠다는 마음, 진심인가?”
“……네.”
루이스의 대답을 들은 데이브는 몇 초간 웃음 어린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봉투를 받아 들고 즉시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천천히 데이브에게로 향했다.
창백해진 얼굴빛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의 감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데이브가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었다. 하, 하고 루이스가 세차게 숨을 들이켰다.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루이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카일을 매수했지. 그의 형이 어머니 수술비를 들고 카지노로 날랐고, 수술비를 다 날린 것도 모자라 천문학적인 빚을 졌거든.”
“카일……이? 카일이 이 사진을 찍었단 말입니까?”
루이스가 하, 하고 숨을 터트렸다. 봉투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유동 인구 적은 구석에 위치한 작은 산부인과에서 몰래 나오는 자신의 사진이었다. 불안한 듯 주변을 살펴 가며 나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루이스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카일은 미하엘의 직속 보좌관이다. 카일이 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미하엘의 명령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알게 될 수도 있다. 그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될 수도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수면제 먹고 강제로 산부인과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 다시는 하지 마.’
다시금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상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강제로, 산부인과 수술대에 올려 져 배 속의 아이가 조각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 루이스는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갔다. 그런 그를 살짝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데이브는 우선 그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돈으로 매수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그는 그 사실을 몰라.”
그의 말에 현실 감각이 돌아온 듯, 루이스는 하, 하고 애처롭게 막혔던 숨을 작게 터트렸다.
“모르겠죠. 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
중얼거리듯 내뱉은 루이스의 말을 들은 데이브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엄청난 액수로 매수한 사진이 고작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사진이라니, 난 정말로 실망하고 김이 샜는데 말이지. 다른 남자의 아이라도 가진 건가?”
“미쳤습니까?”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루이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의 외침에 데이브는 능청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루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다 까발려진 마당에, 데이브에게 감출 것은 더 이상 없었다.
“혼전 계약서가…… 있어요.”
“혼전 계약서?”
진심으로 의외라는 듯, 그의 눈동자에 충격이 스쳤다. 루이스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피임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만에 하나라도 아이가 생긴다면…….”
“생긴다면?”
“……무조건적으로 중절 수술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하, 하고 데이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정말 깨 볶고 콩깍지가 단단히 씐 잉꼬부부로 알려진 그들의 뒤에 그런 속사정이 있었다니. 아니, 그보다 미하엘의 루이스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었고 그 누구보다 그 마음이 깊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테일러 가문처럼 나라에 손꼽히는 귀족 가문의 경우는 우성 자손들이 많을수록 좋았다. 우성 알파나 우성 오메가의 경우, 일반인보다 뛰어난 재능과 학습 능력을 가진다. 그런데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혼전 계약서라니?
아니, 갖는다는 것은 둘째치고, 생기면 낙태라니. 그것도 혼전에 그 내용으로 계약서까지? 그런 계약서는 중매 계약 결혼을 하는 부부들도 안 쓴다. 미하엘이 혹시 아이혐오증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말인가?”
“아뇨, 그 계약서는 그저 서약서 같은 거예요. 법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적은 게 아닙니다.”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혼할 일도 없을 텐데. 그리고 각하께서 설마 진심이겠어? 그저 겁을 주려고…….”
“……진심이에요.”
루이스의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절대로, 절대로 아이만은 안 된다고, 혹여나 생기기라도 하면 자신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강제로 수술대 위에 올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그의 눈동자를.
“그 사람은 진심입니다. 제가 중절을 거부하기라도 하면…… 아마 강제로라도 끌고 갈 겁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그렇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뚫어져라 노려볼 뿐이었다. 데이브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정말 설마설마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사실일 것이다. 사색이 되어 남편이 강제로 끌고 갈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나저나, 아까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거금을 쓰셨다고요?”
“음? 아, 그거?”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카일이 제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아신 거죠?”
“각하께서 무덤 판 거지. 그 전화 받고 무슨 일인가 싶어 예의주시하고 있었거든.”
그럼, 그가 데이브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더라면 이미 임신 사실이 발각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이야기인가? 아니, 분명 그렇겠지. 이혼 통보를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곤 유모, 집사, 그리고 미하엘 그. 이렇게 딱 세 사람밖에 몰랐으니까. 유모와 집사는 영혼부터 테일러 가문의 사람이었기에 테일러 가문에 누가 될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만 알고 있다면 소문이 퍼질 리가 없지. 물론 지금은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긴 하지만. 하지만 그나마도 다행인 것이, 여태껏 루이스가 쌓은 막강한 신뢰감 덕분에 소문의 수위는 아주 얕은 수준이었다.
“어……쩌면 좋죠? 그 사람이 알면, 알면…… 아이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분명, 분명 알게 되자마자 아이를 잃을……!”
“루이스, 진정해.”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 그렇게 외치며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최측근인 카일이 알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위기임이 당연했다. 아무리 돈으로 매수했다 하더라도 뚫린 입에 두 발 멀쩡한 인간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족쇄를 매달고 귀와 혀를 자르고 두 눈을 멀게 하며 감금하지 않는 이상, 카일의 입은 언제든지 발설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도 초조했다. 당장에 그가 알게 될까 봐. 배 속에서 꼬물거리는 이 작은 생명을 잃게 될까봐. 루이스는 괴로운 표정으로 아아, 하고 신음했다.
“내가 도와줄게.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서.”
“왜요? 당신이 왜 저를 돕는다는 겁니까?”
진심으로 이유를 알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모습에 데이브는 시선을 내리며 짧게 웃음 지었다. 그의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좁힌 루이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렇게 해서, 신데렐라는 밤 12시가 되자마자 당황하며 왕자님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습니다. 마법이 풀려 버리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는 벗겨진 유리 구두를 미처 줍지 못하고…… 첸?”
동화책을 읽어 주던 루이스는 곱게 눈이 감겨 있는 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아이를 불렀다. 이미 첸은 꿈나라에 가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동화책을 덮으며 협탁에 올려놓은 루이스는 첸의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을 해 주었다.
루이스는 밤마다 이렇게 동화책을 읽어 주곤 했다. 첸 또한 루이스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밤마다 어떤 동화책을 읽어 줄 거냐고 다리에 매달려 캐물을 정도였다. 협탁 위에 올려 져 있는 조명의 불을 끈 루이스는 첸이 잠에서 깨지 않게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보이는 자신의 남편의 모습에 눈으로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천천히 문을 닫은 뒤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허니, 잠깐 이야기 좀 해.”
“애 깨요. 조용히 해요.”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미하엘에게 루이스는 최대한 억누른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첸의 방 앞 복도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다행히 손목을 잡아당기거나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첸의 성에서 본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며 루이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아름다웠다. 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가득 수놓아져 있었고, 달빛 아래로 보이는 꽃들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딱 지금 같은 상황이 참 많았었지.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를 품에 가두고. 달빛 아래 어두운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탐하고, 날라 다니는 반딧불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하지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 그것들은 그저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예정인데 말이다.
“허니.”
“당신은 몰라. 내가 얼마나 힘들고 불행한지.”
다리 위 난간 앞에 서서 그는 입을 열었다. 두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자리에 선 미하엘은 그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너무 힘이 들어. 365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틀어 박혀 있어야 하는 이 큰 저택도, 고작 스물넷이라는 나이로 한 아이의, 그것도 다른 사람의 아이의 보모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도. 언제나 나를 깎아내리고 모욕 주기 바쁜 언론과 귀족들.”
“루이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꿈을 포기하고 전국의 주목을 받는다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고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미하엘, 나 너무 힘들어요. 그만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