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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원정대 3화
01. 결심 (3)
미하엘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모습에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처음엔 이혼을 하자는 그의 말에 그냥 어이가 없었고, 혹시 뭐가 불만인가, 시위하는 건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선물을 갖다 바치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데이트 신청을 하고…….
그가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해 주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점차 당황했다. 그래도 ‘그냥 화가 난 것이겠지, 화가 풀리면 다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평민들은 귀족과 혼인하면 안 되는 겁니다. 미하엘, 난 평생 평민으로 살았어요. 귀족들이 부리는 사치, 생활, 예법…… 난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너무도 가혹해.”
끝이 아니라는 듯, 루이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과 혼인할 때, 난 이런 생활을 기대한 게 아닙니다. 사랑 하나만 보고 버티기엔, 이곳은 내게 너무 힘듭니다.”
그의 말에 미하엘은 감정을 억누른 표정으로 작게 이를 갈았다. 자신의 어린 연인이 그토록 힘들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다시금 미하엘의 입에서 으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하다니. 정말 널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미하엘.”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귀족의 생활이 힘들다? 평민으로 살아와서? 첸의 엄마가 되는 것이 힘들어? 허니, 정말로 내가 그 거짓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물론, 순순히 믿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태껏 봐 왔던 미하엘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 믿는 사람이었고,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거짓말이라고 단정을 지어 버리면 그 후 부터는 절대로 그 생각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설명을 하고 속이려 해도 그는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난 이미 당신과 이혼하기로 결심했고, 그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요.”
그의 말을 들은 미하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루이스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미하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 이혼이 그리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테일러 가문에서 쫓겨날 만한 만행을 저질러야 될지도 몰랐다.
말없이 얼굴을 쓸어내리던 미하엘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을 바라보며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꾹 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좋아. 네가 이혼하고 싶다는 이유가 그것들이라면…… 좋아. 그래, 이제부터 하고 싶지 않은 것 하지 마. 첸도 돌보지 않아도 돼. 꿈?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길거리에서 동냥질하는 일만 아니라면 뭐든 다 허락하지.”
“……뭐라고요?”
루이스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하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욕먹는 게 싫어?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하는 게 힘들어? 그것들은 천성이 그런 것들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를 깎아내리며 자기만족을 할 연놈들이지. 그런 개만도 못한 것들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어.”
“미하엘.”
“원한다면 안 들리도록 해 주지. 그럼 돼?”
루이스는 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싶었지만 진지하기 그지없는 미하엘의 눈동자가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 씹은 루이스는 그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떻게요? 제 욕을 하면 처벌하겠다는 법이라도 만드실 겁니까?”
“그래, 된다면.”
“미하엘.”
루이스가 대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미하엘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는 발악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루이스가 다른 행성을 자신에게 주면 이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우주를 멸망시켜 달라고 말하더라도 말이다.
그저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설사 말이 안 되고 이룰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 해 주겠다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루이스를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리광 부리지 말아요. 설령 저를 비난하던 이들이 모두 태도를 바꾸고 절 찬양하더라도, 내 마음은 변함없을 겁니다. 미하엘, 아직도 모르겠어요? 난 모든 것이 벅차고 힘듭니다. 이 모든 것이.”
루이스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 모두 버리고 우리 둘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 살자고 하면 갈 건가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봐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당신 하나만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그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닌 거 같네요.”
그의 말에 미하엘은 마치 머리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루이스는 애써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잘한 것이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몰아붙일 게 뻔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또한 상처를 받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눈앞이 흐려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표정을 굳혔다. 더 이상 미하엘은 그를 잡지 않았다. 루이스는 얼마 전부터 묵고 있는 빈방으로 향하며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
얼마 전, 이혼 통보를 한 후부터 루이스는 그냥 음식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언제 수면제를 먹고 신체를 검사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제국엔 뛰어난 마법사들이 있었다. 드물긴 하지만, 마법사들은 감정 조종 마법 또한 펼칠 수 있었다.
그런 마법에 당했을지도 모른다며 언제 자신을 병원으로 끌고 갈지 몰랐다. 실제로 옛날엔 재벌 부인이 밖으로 나도는 자신의 남편에게 감정 조종 마법으로 돌아오게끔 의뢰했고, 그게 들통 나 큰 처벌을 받았었다. 법적으로 민간인의 감정 조종 마법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감정 조종 마법은 제국의 기사단과 높은 직위의 극소수 귀족들만이 쓸 수 있었다.
미하엘은 황제 다음으로 파급력이 큰 대귀족이었다. 설사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가 자신에게 감정 조종 마법을 것일지도 모른다는 염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방심을 해서는 안 되었다.
오메가들은 임신을 하면 특유의 페로몬이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루이스는 남몰래 데이브를 통해 받아 온, 페로몬을 억제하는 약을 복용하는 중이었다. 아이에게 최대한 해가 가지 않게끔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미하엘은 임신 사실을 단번에 눈치챌 것임이 분명했다.
“난 언니의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 거예요. 하지만 루이스, 당신이 만약 알파 아이를 낳는다면 일에 차질이 생겨요.”
“미하엘이 제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설사 제 배 안에 있는 아이가 알파라 하더라도 낳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아이가 걱정된다면 차라리 미하엘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중절하는 쪽을 택하는 게 안정적일 텐데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우린 지금, 미하엘이 마음을 바꾸고 그 아이를 낳는 것을 택하는 걸 염려하는 겁니다. 당신 말처럼 미하엘이 당신을 강제로 낙태시킨다면야, 난 환영이죠. 하지만 당신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있는 미하엘을 백 프로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낙태당하는 건 대환영이야’라고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너무도 태연했다. 고스란히 듣고 있던 데이브가 ‘잔나’ 하고 조용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떳떳하다는 듯했다.
“당신에겐 유감이지만, 정말이에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막말로, 제가 정말 알파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가 걸림돌이라고 말하는 당신이 손을 쓸지 어떻게 알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데이브와 약속했어요. 잔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잔나는 데이브의 여동생이자 첸의 이모였다. 그녀의 말에 데이브에게 고개를 돌린 루이스는 무슨 말인지 설명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브가 입을 열려는 찰나, 잔나가 말을 가로챘다.
“절대로 당신의 아이를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당신은 그저 데이브와 함께 멀리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데이브가 절 데리고 떠난다면, 미하엘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알아요. 아마 케이린가에 압력을 넣겠죠. 당연해요. 그래서 전 데이브를 파문시킬 겁니다.”
“……파문이라고요?”
“데이브도 동의한 일이에요. 애초부터 데이브는 가문에 관심도 없었고, 별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데이브는 루이스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입을 꾹 다문 채 데이브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조용히 물었다.
“잔나는 첸을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야망 때문이라고 쳐도…… 데이브, 당신은 어째서죠?”
잔나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데이브는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다른 행성으로 도망쳐 봤자 그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글쎄, 나도 몰라.”
“데이브.”
“루이스, 넌 모르겠지만 난 원래부터 이 행성을 뜰 생각이었어. 솔직히 좀 질렸었거든. 몇 년이고 여행이나 할까, 아예 돈 들고 튀어서 혼자 살아 버릴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 하지만 돈이 없어서 번번이 실패했고 말이야.”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바람둥이 한량인 데이브는 쓸 수 있는 돈이 한정적이었다. 전 케이린가의 가주가 생을 마감할 때 현 케이린 가주 잔나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고, 지원을 하기만 하면 펑펑 날려 대는 데이브의 낭비벽 때문에 냉정히 데이브에게서 지원을 끊은 지 오래였다.
옛날부터 다른 행성으로 뜨고 싶어 하는 오빠의 꿈을 잘 알고 있던 잔나는 그걸 이용해 데이브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데이브를 아무도 모르는 행성으로 데리고 가 주기만 한다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해 주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데이브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잔나의 제안을 들었을 때 바로 승낙했지. 루이스 너도 안쓰러웠고 말이야.”
루이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데이브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테일러 가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 줬다. 심각한 바람둥이이긴 하지만 그의 속정이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루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잔나는 아니었다. 잔나는 욕망이 많은 여자였다. 뼛속까지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었으며 이익을 위해선 사람을 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루이스와 잔나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루이스는 잔나가 설마 미하엘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가, 하고 짧게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이내 바로 지웠다. 말도 안 되지. 잔나는 미하엘을 오히려 싫어했다. 특히나, 루이스와 결혼한 이후로 더 싫어했다. 질투 때문이 아니라, 대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볼품없는 평민과 결혼한 미하엘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잔나는 죽은 언니의 아들인 첸을 테일러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 야망을 갖고 있었다. 막말로, 첸이 테일러 가문의 수장이 된다면 케이린가에게도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격이었다. 케이린가는 평범한 백작 가였기 때문에 대귀족이 아니었다. 그런 케이린가에서 테일러 가문과 사돈을 맺은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자 복이었다.
하지만 첸의 친어미가 죽었다. 이제 케이린가가 매달릴 곳은 첸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 가문의 주인인 미하엘의 아이를 가진 루이스는 정말 크나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난 절대 도박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박을 하려고 합니다. 난 당신이 떠나서 영영 모습을 감추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어요.”
“…….”
“데이브가 안전하게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부디,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마음을 굳히길 바랄게요.”
시간이 더 지난다면, 미하엘이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덧붙였다. 잔나가 자리를 뜨고, 한동안 앉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솔직히 미하엘이 순순히 이혼을 해 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죽는 시늉까지 한다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고집을 부렸었다.
이혼 절차를 밟지도 않고 다른 행성으로 떠난다니. 생각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거의 보름 만에 함께하는 가족의 식사 자리였다. 최근 루이스의 이혼 통보로 인해 미하엘은 아들과 아내의 밥상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도끼눈을 뜨고 ‘당신이 끼어든다면 굶겠어요’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같이 먹고 싶다는 첸의 바람 때문에 루이스는 하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허니, 이것 좀 먹어 봐. 네가 좋아하는 구운 파인애플이야.”
샛노란 파인애플 구이를 포크로 찍어 루이스의 접시에 살포시 내려놓는 깜찍한 미하엘의 행동에도 루이스의 표정은 여전했다. 묵묵히 식탁만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포크질을 하는 공작 부인의 모습에 집사와 시종들은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눈치만 봤다.
마님께서 가주님에게 쌀쌀맞게 대한 지 보름 가까이 지났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성 안의 분위기가 날이 가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다.
제발, 마님. 모든 것을 다 가진 아름다운 남자를 남편으로 뒀으면서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가요. 제발 마음을 풀고 저희들 좀 살려 주세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주인님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요!
시종들은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루이스 또한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냉대하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하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때마다 루이스는 자신의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야’라는 마음으로 고독히 그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아빠, 화났어요?”
“응?”
묵묵히 스테이크를 입에 가져가던 루이스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첸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첸이 옆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단번에 굳어 있던 표정을 밝힌 루이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전혀. 아빠가 화가 왜 나? 달링, 방금 뭐라고 했죠? 생각 좀 하느라 못 들었어요.”
생긋 웃고 있는 루이스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향해 ‘달링’이라고 말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거의 보름 만에 접하는 터라 미하엘은 이마저도 행복하고 감사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파인애플…….”
“아, 미안해요. 오늘은 과일이 좀 안 당겨서. 당신이나 많이 드세요.”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루이스의 모습에 첸은 바로 안심했지만, 첸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더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에 속으로 울부짖어야 했다.
애꿎은 물만 연신 벌컥벌컥 들이키던 미하엘은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흠칫 몸을 굳히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왜 더 안 먹고?”
“속이 좀 안 좋네요. 미안해요. 아들,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
네에, 하고 웃으며 대답하는 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원래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루이스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사라지자마자 미하엘은 복잡한 심경을 애써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갖는 가족의 식사 자리가 이렇게 끝나다니. 너무도 허무했다. 차라리 첸은 따로 식사를 준비해 주고 단둘이 가졌다면 어느 정도 대화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머릿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물을 들이키는 미하엘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온 루이스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들었다.
“욱……!”
쇠고기 특유의 피비린내와 육즙 때문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한참 동안 변기를 붙잡고 씨름하던 루이스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한참 동안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마음 약해질 때가 아니었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루이스는 화면을 켰다.
자신의 휴대폰은 도청될 확률이 있다며 데이브가 주고 간 휴대 전화였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안, 받아들일게요. 어떻게 하면 되죠?]
문자메시지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루이스는 욕실 안에서 깊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괴로웠다.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잔나와 데이브는 루이스에게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잔나는 유능한 마법사였다. 얼굴을 덧씌우는 가면과 다른 이름으로 우주 여권을 만들고, 타이나 행성과 환경과 문화가 비슷한 행성을 수소문한 뒤 거처와 함선 편도권을 마련했다.
지구라는 행성이었다. 타이나 행성에서 우주 환승 센터를 약 아홉 번을 갈아타고 웜 홀을 거쳐 가야 하는 행성으로, 도착하는 데만 약 2년이 걸리는 행성이었다.
하지만 지구인들의 모습이 타이나 인과 매우 엇비슷하다는 점, 환경이나 문화 등이 흡사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그곳으로 결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이제 루이스는 테일러 가문과 미하엘의 눈을 피해서 우주 공항에 도착해 함선에 오르기만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테일러 가문의 눈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귀족의 안주인이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받고 감시 수준으로 보호받는 상황이라 섣불리 움직였다간 함선에 오르지도 못하고 일이 무산될지도 몰랐다.
일단 루이스에게 쏠린 미하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혼 통보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미하엘이 바빠서 저택에 자주 돌아오지 않고 밖을 나도는 것을 핑계 삼아 그를 안심시켰다.
당신이 얼굴도 자주 안 비추고 일만 하러 다니니 외로워서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는 루이스를 순순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사랑스럽게 웃으며 입을 맞춰 오는 루이스의 모습에 미하엘은 금방 안심하고 루이스의 이혼 통보를 잊어 가기 시작했다. 콩깍지의 힘이었다.
“허니, 우리 여행이나 갈까?”
“여행이요?”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 둘이서만 조용히 다녀오는 거야. 휴양지도 괜찮고.”
“……저야 좋죠.”
루이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의 몸을 껴안고 있는 미하엘의 팔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를 뒤에서 껴안은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는 미하엘은 루이스의 씁쓸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왕이면 첸도 같이 가요.”
루이스는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미하엘의 팔을 풀고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행복하다는 듯 눈을 곱게 접은 채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에 미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01. 결심 (3)
미하엘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모습에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처음엔 이혼을 하자는 그의 말에 그냥 어이가 없었고, 혹시 뭐가 불만인가, 시위하는 건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선물을 갖다 바치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데이트 신청을 하고…….
그가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해 주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점차 당황했다. 그래도 ‘그냥 화가 난 것이겠지, 화가 풀리면 다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평민들은 귀족과 혼인하면 안 되는 겁니다. 미하엘, 난 평생 평민으로 살았어요. 귀족들이 부리는 사치, 생활, 예법…… 난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너무도 가혹해.”
끝이 아니라는 듯, 루이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과 혼인할 때, 난 이런 생활을 기대한 게 아닙니다. 사랑 하나만 보고 버티기엔, 이곳은 내게 너무 힘듭니다.”
그의 말에 미하엘은 감정을 억누른 표정으로 작게 이를 갈았다. 자신의 어린 연인이 그토록 힘들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다시금 미하엘의 입에서 으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하다니. 정말 널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미하엘.”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귀족의 생활이 힘들다? 평민으로 살아와서? 첸의 엄마가 되는 것이 힘들어? 허니, 정말로 내가 그 거짓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물론, 순순히 믿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태껏 봐 왔던 미하엘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 믿는 사람이었고,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거짓말이라고 단정을 지어 버리면 그 후 부터는 절대로 그 생각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설명을 하고 속이려 해도 그는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난 이미 당신과 이혼하기로 결심했고, 그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요.”
그의 말을 들은 미하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루이스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미하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 이혼이 그리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테일러 가문에서 쫓겨날 만한 만행을 저질러야 될지도 몰랐다.
말없이 얼굴을 쓸어내리던 미하엘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을 바라보며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꾹 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좋아. 네가 이혼하고 싶다는 이유가 그것들이라면…… 좋아. 그래, 이제부터 하고 싶지 않은 것 하지 마. 첸도 돌보지 않아도 돼. 꿈?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길거리에서 동냥질하는 일만 아니라면 뭐든 다 허락하지.”
“……뭐라고요?”
루이스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하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욕먹는 게 싫어?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하는 게 힘들어? 그것들은 천성이 그런 것들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를 깎아내리며 자기만족을 할 연놈들이지. 그런 개만도 못한 것들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어.”
“미하엘.”
“원한다면 안 들리도록 해 주지. 그럼 돼?”
루이스는 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싶었지만 진지하기 그지없는 미하엘의 눈동자가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 씹은 루이스는 그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떻게요? 제 욕을 하면 처벌하겠다는 법이라도 만드실 겁니까?”
“그래, 된다면.”
“미하엘.”
루이스가 대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미하엘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는 발악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루이스가 다른 행성을 자신에게 주면 이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우주를 멸망시켜 달라고 말하더라도 말이다.
그저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설사 말이 안 되고 이룰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 해 주겠다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루이스를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리광 부리지 말아요. 설령 저를 비난하던 이들이 모두 태도를 바꾸고 절 찬양하더라도, 내 마음은 변함없을 겁니다. 미하엘, 아직도 모르겠어요? 난 모든 것이 벅차고 힘듭니다. 이 모든 것이.”
루이스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 모두 버리고 우리 둘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 살자고 하면 갈 건가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봐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당신 하나만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그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닌 거 같네요.”
그의 말에 미하엘은 마치 머리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루이스는 애써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잘한 것이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몰아붙일 게 뻔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또한 상처를 받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눈앞이 흐려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표정을 굳혔다. 더 이상 미하엘은 그를 잡지 않았다. 루이스는 얼마 전부터 묵고 있는 빈방으로 향하며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얼마 전, 이혼 통보를 한 후부터 루이스는 그냥 음식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언제 수면제를 먹고 신체를 검사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제국엔 뛰어난 마법사들이 있었다. 드물긴 하지만, 마법사들은 감정 조종 마법 또한 펼칠 수 있었다.
그런 마법에 당했을지도 모른다며 언제 자신을 병원으로 끌고 갈지 몰랐다. 실제로 옛날엔 재벌 부인이 밖으로 나도는 자신의 남편에게 감정 조종 마법으로 돌아오게끔 의뢰했고, 그게 들통 나 큰 처벌을 받았었다. 법적으로 민간인의 감정 조종 마법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감정 조종 마법은 제국의 기사단과 높은 직위의 극소수 귀족들만이 쓸 수 있었다.
미하엘은 황제 다음으로 파급력이 큰 대귀족이었다. 설사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가 자신에게 감정 조종 마법을 것일지도 모른다는 염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방심을 해서는 안 되었다.
오메가들은 임신을 하면 특유의 페로몬이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루이스는 남몰래 데이브를 통해 받아 온, 페로몬을 억제하는 약을 복용하는 중이었다. 아이에게 최대한 해가 가지 않게끔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미하엘은 임신 사실을 단번에 눈치챌 것임이 분명했다.
“난 언니의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 거예요. 하지만 루이스, 당신이 만약 알파 아이를 낳는다면 일에 차질이 생겨요.”
“미하엘이 제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설사 제 배 안에 있는 아이가 알파라 하더라도 낳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아이가 걱정된다면 차라리 미하엘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중절하는 쪽을 택하는 게 안정적일 텐데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우린 지금, 미하엘이 마음을 바꾸고 그 아이를 낳는 것을 택하는 걸 염려하는 겁니다. 당신 말처럼 미하엘이 당신을 강제로 낙태시킨다면야, 난 환영이죠. 하지만 당신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있는 미하엘을 백 프로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낙태당하는 건 대환영이야’라고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너무도 태연했다. 고스란히 듣고 있던 데이브가 ‘잔나’ 하고 조용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떳떳하다는 듯했다.
“당신에겐 유감이지만, 정말이에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막말로, 제가 정말 알파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가 걸림돌이라고 말하는 당신이 손을 쓸지 어떻게 알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데이브와 약속했어요. 잔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잔나는 데이브의 여동생이자 첸의 이모였다. 그녀의 말에 데이브에게 고개를 돌린 루이스는 무슨 말인지 설명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브가 입을 열려는 찰나, 잔나가 말을 가로챘다.
“절대로 당신의 아이를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당신은 그저 데이브와 함께 멀리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데이브가 절 데리고 떠난다면, 미하엘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알아요. 아마 케이린가에 압력을 넣겠죠. 당연해요. 그래서 전 데이브를 파문시킬 겁니다.”
“……파문이라고요?”
“데이브도 동의한 일이에요. 애초부터 데이브는 가문에 관심도 없었고, 별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데이브는 루이스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입을 꾹 다문 채 데이브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조용히 물었다.
“잔나는 첸을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야망 때문이라고 쳐도…… 데이브, 당신은 어째서죠?”
잔나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데이브는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다른 행성으로 도망쳐 봤자 그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글쎄, 나도 몰라.”
“데이브.”
“루이스, 넌 모르겠지만 난 원래부터 이 행성을 뜰 생각이었어. 솔직히 좀 질렸었거든. 몇 년이고 여행이나 할까, 아예 돈 들고 튀어서 혼자 살아 버릴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 하지만 돈이 없어서 번번이 실패했고 말이야.”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바람둥이 한량인 데이브는 쓸 수 있는 돈이 한정적이었다. 전 케이린가의 가주가 생을 마감할 때 현 케이린 가주 잔나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고, 지원을 하기만 하면 펑펑 날려 대는 데이브의 낭비벽 때문에 냉정히 데이브에게서 지원을 끊은 지 오래였다.
옛날부터 다른 행성으로 뜨고 싶어 하는 오빠의 꿈을 잘 알고 있던 잔나는 그걸 이용해 데이브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데이브를 아무도 모르는 행성으로 데리고 가 주기만 한다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해 주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데이브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잔나의 제안을 들었을 때 바로 승낙했지. 루이스 너도 안쓰러웠고 말이야.”
루이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데이브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테일러 가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 줬다. 심각한 바람둥이이긴 하지만 그의 속정이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루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잔나는 아니었다. 잔나는 욕망이 많은 여자였다. 뼛속까지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었으며 이익을 위해선 사람을 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루이스와 잔나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루이스는 잔나가 설마 미하엘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가, 하고 짧게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이내 바로 지웠다. 말도 안 되지. 잔나는 미하엘을 오히려 싫어했다. 특히나, 루이스와 결혼한 이후로 더 싫어했다. 질투 때문이 아니라, 대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볼품없는 평민과 결혼한 미하엘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잔나는 죽은 언니의 아들인 첸을 테일러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 야망을 갖고 있었다. 막말로, 첸이 테일러 가문의 수장이 된다면 케이린가에게도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격이었다. 케이린가는 평범한 백작 가였기 때문에 대귀족이 아니었다. 그런 케이린가에서 테일러 가문과 사돈을 맺은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자 복이었다.
하지만 첸의 친어미가 죽었다. 이제 케이린가가 매달릴 곳은 첸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 가문의 주인인 미하엘의 아이를 가진 루이스는 정말 크나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난 절대 도박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박을 하려고 합니다. 난 당신이 떠나서 영영 모습을 감추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어요.”
“…….”
“데이브가 안전하게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부디,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마음을 굳히길 바랄게요.”
시간이 더 지난다면, 미하엘이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덧붙였다. 잔나가 자리를 뜨고, 한동안 앉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솔직히 미하엘이 순순히 이혼을 해 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죽는 시늉까지 한다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고집을 부렸었다.
이혼 절차를 밟지도 않고 다른 행성으로 떠난다니. 생각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거의 보름 만에 함께하는 가족의 식사 자리였다. 최근 루이스의 이혼 통보로 인해 미하엘은 아들과 아내의 밥상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도끼눈을 뜨고 ‘당신이 끼어든다면 굶겠어요’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같이 먹고 싶다는 첸의 바람 때문에 루이스는 하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허니, 이것 좀 먹어 봐. 네가 좋아하는 구운 파인애플이야.”
샛노란 파인애플 구이를 포크로 찍어 루이스의 접시에 살포시 내려놓는 깜찍한 미하엘의 행동에도 루이스의 표정은 여전했다. 묵묵히 식탁만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포크질을 하는 공작 부인의 모습에 집사와 시종들은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눈치만 봤다.
마님께서 가주님에게 쌀쌀맞게 대한 지 보름 가까이 지났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성 안의 분위기가 날이 가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다.
제발, 마님. 모든 것을 다 가진 아름다운 남자를 남편으로 뒀으면서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가요. 제발 마음을 풀고 저희들 좀 살려 주세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주인님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요!
시종들은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루이스 또한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냉대하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하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때마다 루이스는 자신의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야’라는 마음으로 고독히 그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아빠, 화났어요?”
“응?”
묵묵히 스테이크를 입에 가져가던 루이스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첸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첸이 옆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단번에 굳어 있던 표정을 밝힌 루이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전혀. 아빠가 화가 왜 나? 달링, 방금 뭐라고 했죠? 생각 좀 하느라 못 들었어요.”
생긋 웃고 있는 루이스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향해 ‘달링’이라고 말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거의 보름 만에 접하는 터라 미하엘은 이마저도 행복하고 감사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파인애플…….”
“아, 미안해요. 오늘은 과일이 좀 안 당겨서. 당신이나 많이 드세요.”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루이스의 모습에 첸은 바로 안심했지만, 첸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더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에 속으로 울부짖어야 했다.
애꿎은 물만 연신 벌컥벌컥 들이키던 미하엘은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흠칫 몸을 굳히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왜 더 안 먹고?”
“속이 좀 안 좋네요. 미안해요. 아들,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
네에, 하고 웃으며 대답하는 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원래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루이스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사라지자마자 미하엘은 복잡한 심경을 애써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갖는 가족의 식사 자리가 이렇게 끝나다니. 너무도 허무했다. 차라리 첸은 따로 식사를 준비해 주고 단둘이 가졌다면 어느 정도 대화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머릿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물을 들이키는 미하엘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온 루이스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들었다.
“욱……!”
쇠고기 특유의 피비린내와 육즙 때문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한참 동안 변기를 붙잡고 씨름하던 루이스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한참 동안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마음 약해질 때가 아니었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루이스는 화면을 켰다.
자신의 휴대폰은 도청될 확률이 있다며 데이브가 주고 간 휴대 전화였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안, 받아들일게요. 어떻게 하면 되죠?]
문자메시지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루이스는 욕실 안에서 깊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괴로웠다.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잔나와 데이브는 루이스에게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잔나는 유능한 마법사였다. 얼굴을 덧씌우는 가면과 다른 이름으로 우주 여권을 만들고, 타이나 행성과 환경과 문화가 비슷한 행성을 수소문한 뒤 거처와 함선 편도권을 마련했다.
지구라는 행성이었다. 타이나 행성에서 우주 환승 센터를 약 아홉 번을 갈아타고 웜 홀을 거쳐 가야 하는 행성으로, 도착하는 데만 약 2년이 걸리는 행성이었다.
하지만 지구인들의 모습이 타이나 인과 매우 엇비슷하다는 점, 환경이나 문화 등이 흡사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그곳으로 결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이제 루이스는 테일러 가문과 미하엘의 눈을 피해서 우주 공항에 도착해 함선에 오르기만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테일러 가문의 눈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귀족의 안주인이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받고 감시 수준으로 보호받는 상황이라 섣불리 움직였다간 함선에 오르지도 못하고 일이 무산될지도 몰랐다.
일단 루이스에게 쏠린 미하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혼 통보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미하엘이 바빠서 저택에 자주 돌아오지 않고 밖을 나도는 것을 핑계 삼아 그를 안심시켰다.
당신이 얼굴도 자주 안 비추고 일만 하러 다니니 외로워서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는 루이스를 순순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사랑스럽게 웃으며 입을 맞춰 오는 루이스의 모습에 미하엘은 금방 안심하고 루이스의 이혼 통보를 잊어 가기 시작했다. 콩깍지의 힘이었다.
“허니, 우리 여행이나 갈까?”
“여행이요?”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 둘이서만 조용히 다녀오는 거야. 휴양지도 괜찮고.”
“……저야 좋죠.”
루이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의 몸을 껴안고 있는 미하엘의 팔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를 뒤에서 껴안은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는 미하엘은 루이스의 씁쓸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왕이면 첸도 같이 가요.”
루이스는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미하엘의 팔을 풀고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행복하다는 듯 눈을 곱게 접은 채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에 미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