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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이 열리면 1권
3화
#1 (3)
“독한 계집애네. 질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를 때리고 짓밟는 아이들 중에 제일 무자비했던 건 아까 길에서 본 꽃 파는 소녀였다. 소녀는 비실했던 얼굴과 달리 마지막까지 나를 때리다가 사라졌다. 희망이었던 꽃은 짓이겨졌고 신발은 도둑맞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터벅터벅 동쪽의 선술집을 향해 돌아왔다.
엉망인 내 모습을 보고 주인이 놀라 눈을 찌푸렸다. 나는 그 앞에서 입속에 넣어 둔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방값이에요. 침이 묻어 더럽지만 여전히 돈이 맞아요.”
주인은 입을 쩌억 벌리고 놀라워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이 층의 끝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차림새를 바르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으며 터진 입술을 빨아 피를 멎게 했다.
잠들어 있던 그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여전히 누워 있었으나 안색은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 나는 누워 있는 그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 열을 재 보았다.
“다행이에요. 아침보다는 열이 내린 것 같아요.”
“계속 찾았다.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 어딜 갔다 온 거야?”
“그냥 여기저기.”
“신발은 어쩌고 맨발이야?”
나는 그 소리에 발가락을 냉큼 움츠렸다. 흙투성이가 된 발은 그새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신발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미안해요, 아빠. 발이 자라기 전까진 계속 신었어야 했는데 내 부주의 탓이에요.”
그는 나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내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꽃잎을 떼어 주었다.
“꽃밭에서 뛰어놀다가 잃어버렸나 보구나.”
분명 머리를 매만지고 정리했는데 뒤통수에 묻은 꽃잎은 떼어 내지 못했나 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변명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너무 큰 걸 신고 있었던 게 문제였어.”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라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온순한 양이 되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가 엉망이 된 나의 발을 어루만져 주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에 길었던 하루의 일과를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고명하신 공주님의 발을 본 적 있어. 대리석이 깔린 궁정에만 계신 분이니 거친 흙바닥은 편치 않았는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구두에서 발이 빠지고 말았지. 순간 찬란한 보석이 박힌 구두 속의 흰 발이 정체를 드러냈는데 그 발이 어찌나 살집이 많고 못생겼는지, 나는 정말 웃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 발에 비하면 우리 아벨라의 발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아름답고 예뻐. 그뿐인가? 우리 딸의 얼굴은 공주님 저리 가라지.”
그는 상처투성이인 내 발에 축복을 빌며 입을 맞췄다.
“내가 공주님보다 예뻐요?”
“그럼.”
“공주님도 나처럼 흑갈색의 머리예요?”
나는 흑발에 가까운 흑갈색의 머리가 언제나 싫었던 참이었다. 숱이 많고 억세고 약간은 구불거리는 왕성한 검은 머리칼은 결코 고귀해 보이지 않아 속상했다.
“붉은 머리, 갈색 머리, 금발은 흔한 색이잖아. 그러니 특이한 검은 머리는 공주님만의 머리칼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우리 딸이 시시한 공주가 될 존재는 아니지. 넌 여왕이니까.”
기분이 좋아진 내가 그의 농담을 받아쳤다.
“그럼 나는 언제쯤 여왕님이 될 수 있어요?”
“이 밤이 지나면.”
그가 비밀을 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이야.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넌 네가 원하는 여왕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기운 내, 맨발의 공주님. 여왕이 되고 나면 이 모든 슬픔도 한순간에 사라질 테니까.”
그가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맨발의 내 발을 만져 주면서. 나는 그 안에서 평화로움을 느꼈다. 산속 오두막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도 생각했다. 오랜만의 행복감이다. 포근하고 따뜻하며 한없이 안정되는 이 기분. 내일은 더 많은 꽃을 팔아야지. 그래서 아빠를 치료해 줄 의사를 데려오고 아빠의 다리를 대신할 튼튼한 지팡이도 사야겠다. 살 것이 많네. 살 것이 많아. 나는 급해진 마음에 꿈에서조차 들판의 꽃을 꺾느라 바빴다.
“가련한 부녀 같으니.”
어둠 속에서 낯선 누군가가 말했다. 문은 열리지도 않았고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는 상태였다.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한 남자가 그들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비몽사몽 잠들었던 나는 낯선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늦었나?”
남자의 말에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던 그가 말라비틀어진 입술로 대답했다.
“조금.”
“항구에서 만나길 원하다니 여전히 취향은 쓰레기군. 세월이 흘러도 촌스러운 본능은 고쳐지지 않나 보지?”
“우리가 만나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었나?”
그의 말에 남자가 묘하게 웃었다.
“하긴. 항구는 낮엔 역동적이고 활기가 넘치지만 반대로 해가 진 밤엔 무법천지라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제일 좋지. 저 드넓은 강 속에 시체를 다 넣으려면 대체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거야? 지겹게시리.”
흑빛의 강을 등진 남자가 지루함을 표시하며 은근히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몰골이 꽤나 재밌군.”
“철근을 옮기다가 다쳤어.”
“누군가에게 판 건 아니고?”
“다리를 파는 인간도 있나?”
“인간이 아닌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기도 해. 연금술사들은 불사의 고기를 끓인 물을 먹는다더군. 마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나? 하여튼 이놈의 런던은 문제가 많아. 동서양의 비책이라는 이름하에 터무니없는 것들이 다 유입되니 별 뜬소문이 다 떠돌잖아. 안 그래?”
남자는 우중충한 런던의 날씨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며 쓸데없는 몇 마디를 더했다.
“그런데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흔한 홍차 한 잔 내놓지 않을 텐가?”
남자는 앉을 의자 하나 없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남자의 모든 말을 무시했다. 자신의 상황을 보고서도 느긋하게 차 타령을 하는 건 그의 원래 성격이었다고 쳐도 지금은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편지를 일곱 통이나 보냈다.”
“열 통을 보냈어도 올 수 없었어. 먼 곳으로 사냥을 갔었거든. 신선한 것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남자는 묘한 말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잠든 척한 채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마저 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아빠의 친구일까? 어른들의 대화는 이해되지 않았다. 스무고개 하듯 주고받는 말이 모두 의문투성이라 더욱 그랬다. 나는 피곤했던 일과 때문에 다시 잠들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해 눈을 감은 채 귀만 열고 있었다.
“낭패야. 계집이라니. 아들이면 네 명성을 이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계집이 그 피를 이었군. 어미는 역시 그녀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어둠 속에서 초를 밝혔다. 다 타 버린 터라 불이 붙지 않았던 초는 그가 손을 대자 신기하게도 불빛을 뿜어냈다.
“그래서 나를 찾은 이유는? 촌구석에 처박혀 수렵이나 하다 보니 도시가 그리워졌나? 이곳에 머물 생각이야? 자리를 마련해 줘?”
“그럴 수 있다면.”
“그럼 돈이 필요하겠군. 원하는 액수를 말해. 그 정도는 적선의 의미로 줄 수 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을 텐데.”
직설적인 질문에 남자가 싱긋 웃었다.
“서론이 길었지? 아이는 인간인가?”
그 질문에 나를 안고 있던 그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팔에 안겨 자고 있던 나는 잠결인 양 등을 돌려 뒤돌아 누웠다. 그는 새근거리며 잠든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이가 산에 풀어 놓은 염소를 몰러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 모두가 죽을 거라고 했지. 아이를 구조했을 때 이미 맥박이 희미했거든. 나는 죽어 가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짐승의 피를 마시게 했어. 아이는 오래 앓기는 했지만 결국 살아났지.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좋은 소식이야. 뱀파이어로군.”
“하지만 아이는 나이를 먹고 조금씩 자라고 있어.”
“그럼 인간? 뱀파이어는 늙지 않으니까.”
“그런데 피를 받아들였지. 단 한 번이지만 아주 강하게.”
“귀족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어. 미식가를 사칭해 그런 걸 즐기는 식욕 이상자들 말이야. 아이는 인간이로군.”
“귀족들은 피를 마시면 죽지 않고 살아나나? 인간의 귀족은 그래?”
남자가 미끈한 미간을 살포시 일그러뜨렸다. 다소 날카롭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거슬린 탓이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질문은 내가 했어. 지금 네 딸이 어떤 존재인지 내게 묻는 거냐?”
남자의 질책에 그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에 고뇌가 깊이 서렸다.
“아이는 하프야. 지금껏 평범하게 인간의 음식을 먹고 생활해 왔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뒤 가볍게 넘어지기만 해도 피를 마셔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는 거야.”
“피를 마셨으니 각성했겠지. 맛만 본 게 아니라 피를 마시고 살아났으니 이제 슬슬 갈증이 나는 거다. 그걸 예측 못 하고 아이에게 피를 줬다니, 후회해 봤자 네 잘못이야.”
“그럼 아비로서 죽게 내버려 뒀어야 해?”
“아이를 낳아 본 적 없어서 아비의 마음이 어떤지 난 몰라. 하지만 그렇게 애가 타면 다른 방법을 강구했어야 되는 거겠지.”
“어떤 방법을 썼어야 하는데?”
“글쎄. 기억을 지워 버린다면 좀 나으려나?”
“기억을 지우면 본성도 사라지나? 지우고 나면 그다음은? 본성은 감추고 무시한다고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드러날 수밖에 없고 들춰지는 거야. 인간들과 함께 있다가 그게 드러나면 내 딸은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되긴.”
남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며 그의 무지함을 타박했다.
“당연히 사람들에 의해 죽겠지. 마녀라고 오해를 받아 화형당하거나 뱀파이어로 낙인 찍혀, 심장에 말뚝이 박혀서 생매장당하거나. 인간들은 새로운 것을 처음 봤을 때 꽤나 배타적으로 행동하거든.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강하게 반발하고 즉시 제거해 버리는 습성이 있어. 그러니 네 딸은 죽지 않을까?”
처음부터 유들하고 가벼운 말투를 유지하는 남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주 가볍게 사용했다. 그러나 남자의 언행을 아빠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천성을 아는 것처럼, 그의 본능은 원래 그런 것처럼.
“난 마술사나 연금술사가 아니야. 기억을 지우는 힘은 없어.”
“그렇겠지. 동물이나 잡아먹고 사는 하급계층인 네가 뭘 할 줄 알겠나.”
남자는 잠든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에겐 그동안 뭘 먹였지? 넌 전사니 인간 사냥을 했나?”
“아이는 갓 구워 낸 빵을 좋아해. 수프는 감자나 고구마. 신선한 야채도 좋아하고 가끔 염소 고기를 구워 주면 기분이 좋아져 많이 웃어.”
“나와 비슷하군. 나도 싱싱한 인간의 피를 마시면 힘이 나고, 들뜬 여자의 피는 입속을 간질여서 좋아하지.”
“본성을 죽이고 인간들과 함께 살자니 내가 늙지를 않는군. 아이는 계속 자라서 어른이 될 텐데 아비는 언제나 서른 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어떻겠어?”
“역시 겪어 보질 않아서 몰라, 나는.”
“아이에게 숨기고 감추는 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스스로를 컨트롤해서 살아갈 방법을 말이야. 생존의 방법.”
“그런 방법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넌 전사잖아.”
“안타깝게도 나는 나를 죽이려고 찾아오는 적들을 물리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야.”
남자의 얼굴이 드디어 뭔가를 알았다는 듯 화색이 돌았다.
“이제 알았다. 갑자기 숲을 버리고 런던으로 온 이유가 뭔가 했더니 은신처가 발각돼서 그런 거였군.”
“나와 있으면 아이는 계속 위험 속에서 살게 돼. 난 아이만은 안정적으로 살길 원한다.”
“그래서 아예 적진으로 들어온 거야? 아이의 안전을 바란다면서?”
“놈들이 끝장을 보고 싶어 하니 나도 이제 그만 끝을 낼 수밖에.”
뜬금없이 다리가 잘렸다 싶더니. 남자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의 대화도 슬슬 끝을 내야겠군. 네가 죽인 두 뱀파이어의 비명이 어젯밤 이 도시를 흔들었다. 그들에게도 들렸을 거야. 그들은 동족을 죽인 자들에게만큼은 잔인한 대가를 받아 내지. 그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들어야겠다. 나를 찾은 이유는?”
“이 아이를 당신들의 사교계에 데뷔시켜 줘.”
그는 여느 때보다 진중하고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전후에 그런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데뷔를 시켜 줘. 최고의 이슈메이커가 되어 모두의 이목을 받을 수 있게끔 멋지게 말이야.”
“글쎄. 내가 그렇게 해 줘야 할 이유가 있던가?”
“그냥 하는 부탁은 아니야. 그에 상응하는 진상품이 있으니 거절 못 할 거다.”
계약을 할 때는 반드시 상대가 만족할 만한 선물을 하는 게 좋다. 아빠의 말에 남자는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받고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퇴출당한 뱀파이어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네 딸은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텐데 그래도 데뷔를 시키겠다고? 더구나 아이는 잡종이야. 이 바닥에서 전사보다 더한 처우를 당하는 게 하프인 걸 모르는 건 아닐 테지?”
“최고의 이슈거리로 데뷔시키면 돼. 이 아이가 짐승의 왕이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어 했던 미하이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가능할 거야.”
그의 말에 남자가 꽤나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차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 방에 들어온 이래 제일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하이의 미모는 과히 최고였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고자 목숨을 버린 사내도 여럿이었으니까. 너의 말대로 사교계가 들썩이겠군.”
“그래. 사교계에선 미하이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미담처럼 말하곤 하지. 딸이 살아서 뒷세계를 전전하고 있다는 걸 알면 반드시 손을 뻗는 자가 있을 거야. 어차피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아이라면 나는 내 아이를 아예 그 세계로 보내 보호받게 만들겠어.”
“산속에 틀어박혀 수렵만 하다 보니 세상 물정 잘 모르나 본데, 착각하지 마. 누가 퇴출당한 전사의 딸을 보호해 주려 하겠나? 그런 강심장을 가진 자는 없어.”
3화
#1 (3)
“독한 계집애네. 질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를 때리고 짓밟는 아이들 중에 제일 무자비했던 건 아까 길에서 본 꽃 파는 소녀였다. 소녀는 비실했던 얼굴과 달리 마지막까지 나를 때리다가 사라졌다. 희망이었던 꽃은 짓이겨졌고 신발은 도둑맞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터벅터벅 동쪽의 선술집을 향해 돌아왔다.
엉망인 내 모습을 보고 주인이 놀라 눈을 찌푸렸다. 나는 그 앞에서 입속에 넣어 둔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방값이에요. 침이 묻어 더럽지만 여전히 돈이 맞아요.”
주인은 입을 쩌억 벌리고 놀라워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이 층의 끝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차림새를 바르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으며 터진 입술을 빨아 피를 멎게 했다.
잠들어 있던 그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여전히 누워 있었으나 안색은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 나는 누워 있는 그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 열을 재 보았다.
“다행이에요. 아침보다는 열이 내린 것 같아요.”
“계속 찾았다.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 어딜 갔다 온 거야?”
“그냥 여기저기.”
“신발은 어쩌고 맨발이야?”
나는 그 소리에 발가락을 냉큼 움츠렸다. 흙투성이가 된 발은 그새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신발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미안해요, 아빠. 발이 자라기 전까진 계속 신었어야 했는데 내 부주의 탓이에요.”
그는 나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내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꽃잎을 떼어 주었다.
“꽃밭에서 뛰어놀다가 잃어버렸나 보구나.”
분명 머리를 매만지고 정리했는데 뒤통수에 묻은 꽃잎은 떼어 내지 못했나 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변명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너무 큰 걸 신고 있었던 게 문제였어.”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라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온순한 양이 되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가 엉망이 된 나의 발을 어루만져 주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에 길었던 하루의 일과를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고명하신 공주님의 발을 본 적 있어. 대리석이 깔린 궁정에만 계신 분이니 거친 흙바닥은 편치 않았는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구두에서 발이 빠지고 말았지. 순간 찬란한 보석이 박힌 구두 속의 흰 발이 정체를 드러냈는데 그 발이 어찌나 살집이 많고 못생겼는지, 나는 정말 웃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 발에 비하면 우리 아벨라의 발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아름답고 예뻐. 그뿐인가? 우리 딸의 얼굴은 공주님 저리 가라지.”
그는 상처투성이인 내 발에 축복을 빌며 입을 맞췄다.
“내가 공주님보다 예뻐요?”
“그럼.”
“공주님도 나처럼 흑갈색의 머리예요?”
나는 흑발에 가까운 흑갈색의 머리가 언제나 싫었던 참이었다. 숱이 많고 억세고 약간은 구불거리는 왕성한 검은 머리칼은 결코 고귀해 보이지 않아 속상했다.
“붉은 머리, 갈색 머리, 금발은 흔한 색이잖아. 그러니 특이한 검은 머리는 공주님만의 머리칼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우리 딸이 시시한 공주가 될 존재는 아니지. 넌 여왕이니까.”
기분이 좋아진 내가 그의 농담을 받아쳤다.
“그럼 나는 언제쯤 여왕님이 될 수 있어요?”
“이 밤이 지나면.”
그가 비밀을 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이야.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넌 네가 원하는 여왕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기운 내, 맨발의 공주님. 여왕이 되고 나면 이 모든 슬픔도 한순간에 사라질 테니까.”
그가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맨발의 내 발을 만져 주면서. 나는 그 안에서 평화로움을 느꼈다. 산속 오두막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도 생각했다. 오랜만의 행복감이다. 포근하고 따뜻하며 한없이 안정되는 이 기분. 내일은 더 많은 꽃을 팔아야지. 그래서 아빠를 치료해 줄 의사를 데려오고 아빠의 다리를 대신할 튼튼한 지팡이도 사야겠다. 살 것이 많네. 살 것이 많아. 나는 급해진 마음에 꿈에서조차 들판의 꽃을 꺾느라 바빴다.
“가련한 부녀 같으니.”
어둠 속에서 낯선 누군가가 말했다. 문은 열리지도 않았고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는 상태였다.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한 남자가 그들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비몽사몽 잠들었던 나는 낯선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늦었나?”
남자의 말에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던 그가 말라비틀어진 입술로 대답했다.
“조금.”
“항구에서 만나길 원하다니 여전히 취향은 쓰레기군. 세월이 흘러도 촌스러운 본능은 고쳐지지 않나 보지?”
“우리가 만나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었나?”
그의 말에 남자가 묘하게 웃었다.
“하긴. 항구는 낮엔 역동적이고 활기가 넘치지만 반대로 해가 진 밤엔 무법천지라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제일 좋지. 저 드넓은 강 속에 시체를 다 넣으려면 대체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거야? 지겹게시리.”
흑빛의 강을 등진 남자가 지루함을 표시하며 은근히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몰골이 꽤나 재밌군.”
“철근을 옮기다가 다쳤어.”
“누군가에게 판 건 아니고?”
“다리를 파는 인간도 있나?”
“인간이 아닌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기도 해. 연금술사들은 불사의 고기를 끓인 물을 먹는다더군. 마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나? 하여튼 이놈의 런던은 문제가 많아. 동서양의 비책이라는 이름하에 터무니없는 것들이 다 유입되니 별 뜬소문이 다 떠돌잖아. 안 그래?”
남자는 우중충한 런던의 날씨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며 쓸데없는 몇 마디를 더했다.
“그런데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흔한 홍차 한 잔 내놓지 않을 텐가?”
남자는 앉을 의자 하나 없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남자의 모든 말을 무시했다. 자신의 상황을 보고서도 느긋하게 차 타령을 하는 건 그의 원래 성격이었다고 쳐도 지금은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편지를 일곱 통이나 보냈다.”
“열 통을 보냈어도 올 수 없었어. 먼 곳으로 사냥을 갔었거든. 신선한 것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남자는 묘한 말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잠든 척한 채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마저 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아빠의 친구일까? 어른들의 대화는 이해되지 않았다. 스무고개 하듯 주고받는 말이 모두 의문투성이라 더욱 그랬다. 나는 피곤했던 일과 때문에 다시 잠들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해 눈을 감은 채 귀만 열고 있었다.
“낭패야. 계집이라니. 아들이면 네 명성을 이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계집이 그 피를 이었군. 어미는 역시 그녀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어둠 속에서 초를 밝혔다. 다 타 버린 터라 불이 붙지 않았던 초는 그가 손을 대자 신기하게도 불빛을 뿜어냈다.
“그래서 나를 찾은 이유는? 촌구석에 처박혀 수렵이나 하다 보니 도시가 그리워졌나? 이곳에 머물 생각이야? 자리를 마련해 줘?”
“그럴 수 있다면.”
“그럼 돈이 필요하겠군. 원하는 액수를 말해. 그 정도는 적선의 의미로 줄 수 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을 텐데.”
직설적인 질문에 남자가 싱긋 웃었다.
“서론이 길었지? 아이는 인간인가?”
그 질문에 나를 안고 있던 그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팔에 안겨 자고 있던 나는 잠결인 양 등을 돌려 뒤돌아 누웠다. 그는 새근거리며 잠든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이가 산에 풀어 놓은 염소를 몰러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 모두가 죽을 거라고 했지. 아이를 구조했을 때 이미 맥박이 희미했거든. 나는 죽어 가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짐승의 피를 마시게 했어. 아이는 오래 앓기는 했지만 결국 살아났지.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좋은 소식이야. 뱀파이어로군.”
“하지만 아이는 나이를 먹고 조금씩 자라고 있어.”
“그럼 인간? 뱀파이어는 늙지 않으니까.”
“그런데 피를 받아들였지. 단 한 번이지만 아주 강하게.”
“귀족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어. 미식가를 사칭해 그런 걸 즐기는 식욕 이상자들 말이야. 아이는 인간이로군.”
“귀족들은 피를 마시면 죽지 않고 살아나나? 인간의 귀족은 그래?”
남자가 미끈한 미간을 살포시 일그러뜨렸다. 다소 날카롭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거슬린 탓이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질문은 내가 했어. 지금 네 딸이 어떤 존재인지 내게 묻는 거냐?”
남자의 질책에 그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에 고뇌가 깊이 서렸다.
“아이는 하프야. 지금껏 평범하게 인간의 음식을 먹고 생활해 왔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뒤 가볍게 넘어지기만 해도 피를 마셔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는 거야.”
“피를 마셨으니 각성했겠지. 맛만 본 게 아니라 피를 마시고 살아났으니 이제 슬슬 갈증이 나는 거다. 그걸 예측 못 하고 아이에게 피를 줬다니, 후회해 봤자 네 잘못이야.”
“그럼 아비로서 죽게 내버려 뒀어야 해?”
“아이를 낳아 본 적 없어서 아비의 마음이 어떤지 난 몰라. 하지만 그렇게 애가 타면 다른 방법을 강구했어야 되는 거겠지.”
“어떤 방법을 썼어야 하는데?”
“글쎄. 기억을 지워 버린다면 좀 나으려나?”
“기억을 지우면 본성도 사라지나? 지우고 나면 그다음은? 본성은 감추고 무시한다고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드러날 수밖에 없고 들춰지는 거야. 인간들과 함께 있다가 그게 드러나면 내 딸은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되긴.”
남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며 그의 무지함을 타박했다.
“당연히 사람들에 의해 죽겠지. 마녀라고 오해를 받아 화형당하거나 뱀파이어로 낙인 찍혀, 심장에 말뚝이 박혀서 생매장당하거나. 인간들은 새로운 것을 처음 봤을 때 꽤나 배타적으로 행동하거든.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강하게 반발하고 즉시 제거해 버리는 습성이 있어. 그러니 네 딸은 죽지 않을까?”
처음부터 유들하고 가벼운 말투를 유지하는 남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주 가볍게 사용했다. 그러나 남자의 언행을 아빠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천성을 아는 것처럼, 그의 본능은 원래 그런 것처럼.
“난 마술사나 연금술사가 아니야. 기억을 지우는 힘은 없어.”
“그렇겠지. 동물이나 잡아먹고 사는 하급계층인 네가 뭘 할 줄 알겠나.”
남자는 잠든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에겐 그동안 뭘 먹였지? 넌 전사니 인간 사냥을 했나?”
“아이는 갓 구워 낸 빵을 좋아해. 수프는 감자나 고구마. 신선한 야채도 좋아하고 가끔 염소 고기를 구워 주면 기분이 좋아져 많이 웃어.”
“나와 비슷하군. 나도 싱싱한 인간의 피를 마시면 힘이 나고, 들뜬 여자의 피는 입속을 간질여서 좋아하지.”
“본성을 죽이고 인간들과 함께 살자니 내가 늙지를 않는군. 아이는 계속 자라서 어른이 될 텐데 아비는 언제나 서른 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어떻겠어?”
“역시 겪어 보질 않아서 몰라, 나는.”
“아이에게 숨기고 감추는 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스스로를 컨트롤해서 살아갈 방법을 말이야. 생존의 방법.”
“그런 방법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넌 전사잖아.”
“안타깝게도 나는 나를 죽이려고 찾아오는 적들을 물리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야.”
남자의 얼굴이 드디어 뭔가를 알았다는 듯 화색이 돌았다.
“이제 알았다. 갑자기 숲을 버리고 런던으로 온 이유가 뭔가 했더니 은신처가 발각돼서 그런 거였군.”
“나와 있으면 아이는 계속 위험 속에서 살게 돼. 난 아이만은 안정적으로 살길 원한다.”
“그래서 아예 적진으로 들어온 거야? 아이의 안전을 바란다면서?”
“놈들이 끝장을 보고 싶어 하니 나도 이제 그만 끝을 낼 수밖에.”
뜬금없이 다리가 잘렸다 싶더니. 남자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의 대화도 슬슬 끝을 내야겠군. 네가 죽인 두 뱀파이어의 비명이 어젯밤 이 도시를 흔들었다. 그들에게도 들렸을 거야. 그들은 동족을 죽인 자들에게만큼은 잔인한 대가를 받아 내지. 그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들어야겠다. 나를 찾은 이유는?”
“이 아이를 당신들의 사교계에 데뷔시켜 줘.”
그는 여느 때보다 진중하고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전후에 그런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데뷔를 시켜 줘. 최고의 이슈메이커가 되어 모두의 이목을 받을 수 있게끔 멋지게 말이야.”
“글쎄. 내가 그렇게 해 줘야 할 이유가 있던가?”
“그냥 하는 부탁은 아니야. 그에 상응하는 진상품이 있으니 거절 못 할 거다.”
계약을 할 때는 반드시 상대가 만족할 만한 선물을 하는 게 좋다. 아빠의 말에 남자는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받고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퇴출당한 뱀파이어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네 딸은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텐데 그래도 데뷔를 시키겠다고? 더구나 아이는 잡종이야. 이 바닥에서 전사보다 더한 처우를 당하는 게 하프인 걸 모르는 건 아닐 테지?”
“최고의 이슈거리로 데뷔시키면 돼. 이 아이가 짐승의 왕이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어 했던 미하이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가능할 거야.”
그의 말에 남자가 꽤나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차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 방에 들어온 이래 제일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하이의 미모는 과히 최고였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고자 목숨을 버린 사내도 여럿이었으니까. 너의 말대로 사교계가 들썩이겠군.”
“그래. 사교계에선 미하이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미담처럼 말하곤 하지. 딸이 살아서 뒷세계를 전전하고 있다는 걸 알면 반드시 손을 뻗는 자가 있을 거야. 어차피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아이라면 나는 내 아이를 아예 그 세계로 보내 보호받게 만들겠어.”
“산속에 틀어박혀 수렵만 하다 보니 세상 물정 잘 모르나 본데, 착각하지 마. 누가 퇴출당한 전사의 딸을 보호해 주려 하겠나? 그런 강심장을 가진 자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