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밤의 문이 열리면 1권
4화
#1 (4)
그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는 내 등을 애정 어리게 쓰다듬었다.
“아니. 내 딸을 사랑하게 되면 누구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 아이를 지키게 될 거야. 나처럼.”
그가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이마에 따뜻한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 따뜻함이 얼마나 깊고 충만한지 나는 하마터면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뜰 뻔했다.
“과연 이 비린내 나는 아이에게 흠뻑 빠질 누군가가 있을까?”
“아이는 계속 크고 있어. 성인이 됐을 때 미하이를 뛰어넘는 미모를 가지고 세상을 흔들 거야. 그러면 인간과 어울려 살지, 뱀파이어와 함께 살지는 내 딸에게 결정할 권리가 생길 테지.”
남자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감은 눈 위로 꺼져 가는 촛불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자고 있는 나를 한참 내려다보며 의심과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 작은 계집이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그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겐 그런 느낌이었다. 기대감을 전혀 갖지 않는 약간의 비아냥이 그의 목소리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상품은 뭐지?”
몸이 잠시 흔들렸다. 그가 안고 있던 나를 놔두고 침대에서 홀연히 일어났다.
“나.”
그와 남자가 서로를 보고 마주 섰다. 남자가 조금 웃은 듯했다.
“피테르. 끝까지 날 웃길 셈이냐?”
남자는 아빠를 보고 피테르라고 불렀다. 피테르. 순고하고 정의로운 이름 피테르.
“이건 진심이야. 그러니 나의 요구를 들어줘.”
문득 가물거리던 촛불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창문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오고 있었다. 동족을 죽인 자를 처벌하기 위해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 진동이 이곳의 공기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노출된 모양이다. 그가 남자를 향해 서둘러 말했다.
“계약해.”
독촉하는 그의 말과 달리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원을 그리며 걷는 그는 느긋한 태도로 진상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여유는 정말이지 소름 돋을 만큼 객관적이어서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제발 계약한다고 말해. 당신의 미하이를 빼앗은 나를 죽일 기회는 오늘뿐이야.”
초조하게 되묻는 그가 어두운 창문을 보며 재촉을 거듭했다. 온다. 오고 있다. 멀쩡한 창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그들이 얼마나 전속력으로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봤다. 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감고 있던 실눈을 살포시 떴다.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마티어스!”
그의 입에서 절규 같은 한마디가 터졌다. 창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다섯 개의 날카로운 갈고리가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그러나 갈고리보다 먼저 그를 낚아채는 것이 있었다. 마티어스라는 남자가 그를 향해 두 팔을 뻗더니 곧장 그의 목을 뽑아 버렸다.
퍼억!
두 손에 들고 있는 건 누구의 얼굴? 떨어지는 피는 누구의 피? 내가 놀라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남자가 말했다.
“계약 성립.”
목이 뽑힌 그의 몸뚱이가 내 쪽으로 서서히 쓰러졌다. 나의 유일함이며 나의 안식처인 단 하나의 가족이!
“아빠아아아아아!”
나는 어둠 속에서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살인자의 손에서 비명도 없이 그가 죽었다.
“안 돼애애애애애!”
쟁반 위에 놓여 있던 머리는 어린 양이 아니었나. 목이 잘려 슬피 울던 건 내 아버지의 눈물이었나. 나는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곤 쓰러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침대 위의 나와 그의 몸과의 간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를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어둠의 허공을 허우적거릴 뿐 아무것도 잡아채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혼란과 분노 속에서 나의 몸은 바보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촛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내 몸은 딱딱하게 굳은 채 도무지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 내 얼굴을 확 덮쳐 온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물을 끼얹은 듯 주르륵 흐르는 무엇인가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피?”
뜨끈한 그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목과 가슴과 배를 적셨다. 비린내와 고약한 냄새들이 후각을 후벼 파고들어 왔다.
나는 느꼈다. 그리고 눈치챘다. 촛불이 꺼진 저 어둠 속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야만적인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는 걸. 창문을 뚫고 들어온 갈고리들이 단 한 명에 의해 모두 죽어 나가고 있다는 걸. 하여, 내 온몸을 뒤덮은 그것이 갈고리들의 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채 새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삼키는 어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어둠. 나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듯 소리 지르다가 결국 침대 아래로 고꾸라지며 기절하고 말았다.
#2 (1)
정신이 없다. 머리가 멍하다. 여기는 어딜까. 눈은 떴지만 아직 이곳이 어딘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아벨라는 시야에 들어온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두 눈을 껌벅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선술집의 이 층 방이 아니었다. 그 방의 천장을 유심히 보지 않아 어떤 문양을 하고 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대리석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팠다. 오래 잠을 잔 것처럼 무거운 느낌도 들었다. 아침에 꽃을 팔고 선술집으로 돌아와 뭘 했더라.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아빠에게 고백한 뒤 위로를 받았고 그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깊은 밤, 그곳에 누가 찾아왔었다.
“그가 누구더라. 누가 찾아왔더라.”
머리가 유난히 아팠다. 기억 또한 맑지 못했다. 아벨라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다 우뚝 몸을 멈췄다.
기억이 났다. 아빠의 목이 잘린 게.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가 죽었다는 게. 그녀가 스프링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며 허겁지겁 침대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흥건한 피도, 무시무시한 갈고리를 가진 이상한 정체의 그들도. 그리고 아빠도.
“……아빠.”
그녀가 그를 부르며 침대를 벗어났다. 그때 발목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실크 이불이다. 아벨라는 뒷걸음질 쳤다. 이곳은 낡고 비좁은 선술집이 아니었다. 다른 곳이었다. 그것도 크고 화려한 침실.
아벨라는 이해되지 않는 광경에 충격을 받고 무작정 그곳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대리석이 깔린 긴 복도가 나타났다. 아벨라는 좌우를 살피기 무섭게 무작정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아아아! 어디 있어요?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던 지난밤의 일로 인해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는데 살인을 당한 그가 보이지 않자 무서움이 전신을 훑었다. 그때였다. 복도를 내달리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 확 낚아채 걸음을 멈추게 했다.
“너.”
아벨라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자신의 팔을 잡아챈 사람은 하녀복을 입은 오십 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였다. 그녀는 손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저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네가 왜 저기서 나와?”
그건 아벨라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이 왜 낯선 침실에서 깨어난 건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하녀는 아벨라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재빨리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짜고짜 빈방으로 아벨라를 밀쳐 넣었다.
“너 어디 소속이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벌써 나리 눈에 든 거냐?”
아벨라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아빤 어디 있어요? 여긴 어디예요?”
“술이 아직 덜 깼어?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이잖아. 벌거벗고 복도를 활보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밤새 나리에게 시달렸다 해도 그렇지,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건 앞으로 바뀔 팔자를 예상해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아벨라는 하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녀는 자신의 말을 듣고서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벨라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계속 멍청하게 굴래? 언제까지 알몸으로 서 있을 거야?”
“네?”
“옷! 네 옷 어디다 벗어 놓고 왔냐구!”
그제야 아벨라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내, 내가 왜 옷을……?”
아벨라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현실에 놀라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대체 너 어디 소속이야? 이렇게 멍청한 애가 어떻게 나리의 눈에 띄어 여기까지 온 거지?”
하녀는 답답한 듯 꼼짝 말고 이곳에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아벨라가 나온 침실로 가서 누더기 옷 한 벌을 빠르게 가져왔다.
“내게 걸린 걸 다행으로 알아. 그렇잖아도 오늘 저택에서 있을 파티 준비로 인해 잔뜩 신경이 예민하신 마님께 걸렸다면 넌 이 자리에서 바로 채찍질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을 거다.”
“이건…… 내 옷이 아니에요.”
“네 게 아니라면 누구 거라는 거야?”
“이건 너무 커서 입을 수가 없어요. 어른의 옷이잖아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리의 침실에 나뒹구는 건 이거 하나였어. 우리 하녀들은 이런 옷을 입지 않아. 이런 누더기를 입을 사람이 지금 여기 너 말고 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아벨라는 하녀의 윽박지름 때문이 아니라 알몸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누더기 옷을 입었다.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아빠도 그녀가 목욕을 할 때는 어린 그녀를 배려해 집 밖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존중과 배려만을 받아 온 그녀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보여 준 것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저택에 팔려 온 모양인데 기본 지식도 없는 애를 혼자 돌아다니게 하다니, 네 사수를 찾아 당장 혼쭐을 내 줘야겠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 벌거숭이 계집애가 나리의 침실 근처를 어슬렁거린 게 알려지기라도 해 봐. 너는 당연하고 관리 못 한 우리도 함께 매질당할 일이야.”
하녀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며 몸서리를 치더니 옷을 입는 아벨라를 한심하게 노려보았다.
“나리도 참. 아무리 불같은 성정의 마님 눈을 피해 몰래 여자를 안는다고 해도 그렇지, 이제 하다 하다 이런 부랑자 같은 애를 침실로 끌어들이시는 거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산 듯 삐쩍 마른 계집을. 이런 몸뚱이를 보고도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드나?”
하녀는 살집 하나 없이 바짝 달라붙은 가슴과 흉하게 말라 부러질 것 같은 아벨라의 두 다리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하여튼 천하의 난봉꾼 같으니.”
하녀의 퉁명스러운 투덜거림에 아벨라는 누더기를 입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옷이 클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제법 맞았다. 더구나 말랐다는 말에 자신을 몸을 내려다보니 정말 보기 흉할 만큼 온몸이 삐쩍 말라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또래 아이들처럼 적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빠의 정성으로 오히려 도시의 굶주린 아이들보다 더 풍족한 의식주 생활을 해 왔던 그녀다.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아벨라는 불현듯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퍼뜩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낯선 이곳이 어딘지 살펴보았다.
그때 반대편에서 두 명의 귀족 아가씨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치장을 한 여자들은 부드러운 깃털이 달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여유로운 수다를 나누고 있었는데, 인형처럼 잘 꾸민 차림새가 아벨라의 시선을 끌었다.
지척에서 귀족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빠와 함께 먼 거리에서 궁전을 구경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은 없었다. 마차를 타고 내리던 귀족들보다도 한층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들. 아벨라는 예쁜 그녀들을 보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공주님들인가 봐.”
공주들이 틀림없었다. 어린 아벨라는 생전에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은 예쁜 여자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화가 됐다. 걸어가던 한 명이 아벨라를 향해 다시 걸어왔다. 깜짝 놀란 하녀가 황급히 아벨라의 머리를 눌러 숙이게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조금 전 그 말. 누가 한 거지?”
하녀는 귀족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용, 용서하세요. 그렇잖아도 일을 처음 하는 애라 제가 당장 교육을 시킬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족 여자는 하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아벨라의 턱을 부채 끝으로 슬쩍 들어 올리는 듯하더니 세차게 뺨을 내리쳤다.
철썩.
부채 끝에 달려 있던 청동 장식이 아벨라의 뺨에 고스란히 상처를 냈다. 아벨라는 너무 아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자신의 뺨을 감싸 쥐었다.
“공주님이 지나간다는 걸 알면 무릎 꿇고 인사를 해야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이유는 뭐지?”
귀족 여자는 기분이 언짢다며 부채로 아벨라의 머리통을 툭툭 두들겼다.
“귀족이 지나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거야? 당장 길을 비켜서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바닥까지 조아려야 될 거 아냐? 네 옆에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하녀처럼.”
귀족 여자는 우물쭈물하는 아벨라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얘 좀 봐.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녀가 당장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라며 두 손으로 아벨라를 확 밀쳤다. 무방비 상태인 아벨라가 뒤로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해 피해가 더 컸다.
콰당.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뒤통수를 찧고 만 아벨라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귀족 여자가 조금은 기분이 풀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나자빠진 모습 좀 봐. 마치 밟혀 죽은 개구리 같네. 이것들은 꼭 행동으로 보여 줘야 굽실거린다니까.”
4화
#1 (4)
그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는 내 등을 애정 어리게 쓰다듬었다.
“아니. 내 딸을 사랑하게 되면 누구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 아이를 지키게 될 거야. 나처럼.”
그가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이마에 따뜻한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 따뜻함이 얼마나 깊고 충만한지 나는 하마터면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뜰 뻔했다.
“과연 이 비린내 나는 아이에게 흠뻑 빠질 누군가가 있을까?”
“아이는 계속 크고 있어. 성인이 됐을 때 미하이를 뛰어넘는 미모를 가지고 세상을 흔들 거야. 그러면 인간과 어울려 살지, 뱀파이어와 함께 살지는 내 딸에게 결정할 권리가 생길 테지.”
남자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감은 눈 위로 꺼져 가는 촛불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자고 있는 나를 한참 내려다보며 의심과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 작은 계집이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그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겐 그런 느낌이었다. 기대감을 전혀 갖지 않는 약간의 비아냥이 그의 목소리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상품은 뭐지?”
몸이 잠시 흔들렸다. 그가 안고 있던 나를 놔두고 침대에서 홀연히 일어났다.
“나.”
그와 남자가 서로를 보고 마주 섰다. 남자가 조금 웃은 듯했다.
“피테르. 끝까지 날 웃길 셈이냐?”
남자는 아빠를 보고 피테르라고 불렀다. 피테르. 순고하고 정의로운 이름 피테르.
“이건 진심이야. 그러니 나의 요구를 들어줘.”
문득 가물거리던 촛불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창문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오고 있었다. 동족을 죽인 자를 처벌하기 위해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 진동이 이곳의 공기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노출된 모양이다. 그가 남자를 향해 서둘러 말했다.
“계약해.”
독촉하는 그의 말과 달리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원을 그리며 걷는 그는 느긋한 태도로 진상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여유는 정말이지 소름 돋을 만큼 객관적이어서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제발 계약한다고 말해. 당신의 미하이를 빼앗은 나를 죽일 기회는 오늘뿐이야.”
초조하게 되묻는 그가 어두운 창문을 보며 재촉을 거듭했다. 온다. 오고 있다. 멀쩡한 창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그들이 얼마나 전속력으로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봤다. 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감고 있던 실눈을 살포시 떴다.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마티어스!”
그의 입에서 절규 같은 한마디가 터졌다. 창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다섯 개의 날카로운 갈고리가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그러나 갈고리보다 먼저 그를 낚아채는 것이 있었다. 마티어스라는 남자가 그를 향해 두 팔을 뻗더니 곧장 그의 목을 뽑아 버렸다.
퍼억!
두 손에 들고 있는 건 누구의 얼굴? 떨어지는 피는 누구의 피? 내가 놀라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남자가 말했다.
“계약 성립.”
목이 뽑힌 그의 몸뚱이가 내 쪽으로 서서히 쓰러졌다. 나의 유일함이며 나의 안식처인 단 하나의 가족이!
“아빠아아아아아!”
나는 어둠 속에서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살인자의 손에서 비명도 없이 그가 죽었다.
“안 돼애애애애애!”
쟁반 위에 놓여 있던 머리는 어린 양이 아니었나. 목이 잘려 슬피 울던 건 내 아버지의 눈물이었나. 나는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곤 쓰러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침대 위의 나와 그의 몸과의 간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를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어둠의 허공을 허우적거릴 뿐 아무것도 잡아채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혼란과 분노 속에서 나의 몸은 바보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촛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내 몸은 딱딱하게 굳은 채 도무지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 내 얼굴을 확 덮쳐 온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물을 끼얹은 듯 주르륵 흐르는 무엇인가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피?”
뜨끈한 그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목과 가슴과 배를 적셨다. 비린내와 고약한 냄새들이 후각을 후벼 파고들어 왔다.
나는 느꼈다. 그리고 눈치챘다. 촛불이 꺼진 저 어둠 속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야만적인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는 걸. 창문을 뚫고 들어온 갈고리들이 단 한 명에 의해 모두 죽어 나가고 있다는 걸. 하여, 내 온몸을 뒤덮은 그것이 갈고리들의 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채 새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삼키는 어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어둠. 나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듯 소리 지르다가 결국 침대 아래로 고꾸라지며 기절하고 말았다.
#2 (1)
정신이 없다. 머리가 멍하다. 여기는 어딜까. 눈은 떴지만 아직 이곳이 어딘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아벨라는 시야에 들어온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두 눈을 껌벅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선술집의 이 층 방이 아니었다. 그 방의 천장을 유심히 보지 않아 어떤 문양을 하고 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대리석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팠다. 오래 잠을 잔 것처럼 무거운 느낌도 들었다. 아침에 꽃을 팔고 선술집으로 돌아와 뭘 했더라.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아빠에게 고백한 뒤 위로를 받았고 그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깊은 밤, 그곳에 누가 찾아왔었다.
“그가 누구더라. 누가 찾아왔더라.”
머리가 유난히 아팠다. 기억 또한 맑지 못했다. 아벨라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다 우뚝 몸을 멈췄다.
기억이 났다. 아빠의 목이 잘린 게.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가 죽었다는 게. 그녀가 스프링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며 허겁지겁 침대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흥건한 피도, 무시무시한 갈고리를 가진 이상한 정체의 그들도. 그리고 아빠도.
“……아빠.”
그녀가 그를 부르며 침대를 벗어났다. 그때 발목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실크 이불이다. 아벨라는 뒷걸음질 쳤다. 이곳은 낡고 비좁은 선술집이 아니었다. 다른 곳이었다. 그것도 크고 화려한 침실.
아벨라는 이해되지 않는 광경에 충격을 받고 무작정 그곳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대리석이 깔린 긴 복도가 나타났다. 아벨라는 좌우를 살피기 무섭게 무작정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아아아! 어디 있어요?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던 지난밤의 일로 인해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는데 살인을 당한 그가 보이지 않자 무서움이 전신을 훑었다. 그때였다. 복도를 내달리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 확 낚아채 걸음을 멈추게 했다.
“너.”
아벨라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자신의 팔을 잡아챈 사람은 하녀복을 입은 오십 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였다. 그녀는 손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저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네가 왜 저기서 나와?”
그건 아벨라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이 왜 낯선 침실에서 깨어난 건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하녀는 아벨라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재빨리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짜고짜 빈방으로 아벨라를 밀쳐 넣었다.
“너 어디 소속이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벌써 나리 눈에 든 거냐?”
아벨라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아빤 어디 있어요? 여긴 어디예요?”
“술이 아직 덜 깼어?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이잖아. 벌거벗고 복도를 활보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밤새 나리에게 시달렸다 해도 그렇지,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건 앞으로 바뀔 팔자를 예상해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아벨라는 하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녀는 자신의 말을 듣고서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벨라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계속 멍청하게 굴래? 언제까지 알몸으로 서 있을 거야?”
“네?”
“옷! 네 옷 어디다 벗어 놓고 왔냐구!”
그제야 아벨라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내, 내가 왜 옷을……?”
아벨라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현실에 놀라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대체 너 어디 소속이야? 이렇게 멍청한 애가 어떻게 나리의 눈에 띄어 여기까지 온 거지?”
하녀는 답답한 듯 꼼짝 말고 이곳에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아벨라가 나온 침실로 가서 누더기 옷 한 벌을 빠르게 가져왔다.
“내게 걸린 걸 다행으로 알아. 그렇잖아도 오늘 저택에서 있을 파티 준비로 인해 잔뜩 신경이 예민하신 마님께 걸렸다면 넌 이 자리에서 바로 채찍질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을 거다.”
“이건…… 내 옷이 아니에요.”
“네 게 아니라면 누구 거라는 거야?”
“이건 너무 커서 입을 수가 없어요. 어른의 옷이잖아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리의 침실에 나뒹구는 건 이거 하나였어. 우리 하녀들은 이런 옷을 입지 않아. 이런 누더기를 입을 사람이 지금 여기 너 말고 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아벨라는 하녀의 윽박지름 때문이 아니라 알몸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누더기 옷을 입었다.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아빠도 그녀가 목욕을 할 때는 어린 그녀를 배려해 집 밖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존중과 배려만을 받아 온 그녀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보여 준 것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저택에 팔려 온 모양인데 기본 지식도 없는 애를 혼자 돌아다니게 하다니, 네 사수를 찾아 당장 혼쭐을 내 줘야겠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 벌거숭이 계집애가 나리의 침실 근처를 어슬렁거린 게 알려지기라도 해 봐. 너는 당연하고 관리 못 한 우리도 함께 매질당할 일이야.”
하녀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며 몸서리를 치더니 옷을 입는 아벨라를 한심하게 노려보았다.
“나리도 참. 아무리 불같은 성정의 마님 눈을 피해 몰래 여자를 안는다고 해도 그렇지, 이제 하다 하다 이런 부랑자 같은 애를 침실로 끌어들이시는 거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산 듯 삐쩍 마른 계집을. 이런 몸뚱이를 보고도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드나?”
하녀는 살집 하나 없이 바짝 달라붙은 가슴과 흉하게 말라 부러질 것 같은 아벨라의 두 다리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하여튼 천하의 난봉꾼 같으니.”
하녀의 퉁명스러운 투덜거림에 아벨라는 누더기를 입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옷이 클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제법 맞았다. 더구나 말랐다는 말에 자신을 몸을 내려다보니 정말 보기 흉할 만큼 온몸이 삐쩍 말라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또래 아이들처럼 적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빠의 정성으로 오히려 도시의 굶주린 아이들보다 더 풍족한 의식주 생활을 해 왔던 그녀다.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아벨라는 불현듯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퍼뜩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낯선 이곳이 어딘지 살펴보았다.
그때 반대편에서 두 명의 귀족 아가씨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치장을 한 여자들은 부드러운 깃털이 달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여유로운 수다를 나누고 있었는데, 인형처럼 잘 꾸민 차림새가 아벨라의 시선을 끌었다.
지척에서 귀족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빠와 함께 먼 거리에서 궁전을 구경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은 없었다. 마차를 타고 내리던 귀족들보다도 한층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들. 아벨라는 예쁜 그녀들을 보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공주님들인가 봐.”
공주들이 틀림없었다. 어린 아벨라는 생전에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은 예쁜 여자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화가 됐다. 걸어가던 한 명이 아벨라를 향해 다시 걸어왔다. 깜짝 놀란 하녀가 황급히 아벨라의 머리를 눌러 숙이게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조금 전 그 말. 누가 한 거지?”
하녀는 귀족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용, 용서하세요. 그렇잖아도 일을 처음 하는 애라 제가 당장 교육을 시킬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족 여자는 하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아벨라의 턱을 부채 끝으로 슬쩍 들어 올리는 듯하더니 세차게 뺨을 내리쳤다.
철썩.
부채 끝에 달려 있던 청동 장식이 아벨라의 뺨에 고스란히 상처를 냈다. 아벨라는 너무 아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자신의 뺨을 감싸 쥐었다.
“공주님이 지나간다는 걸 알면 무릎 꿇고 인사를 해야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이유는 뭐지?”
귀족 여자는 기분이 언짢다며 부채로 아벨라의 머리통을 툭툭 두들겼다.
“귀족이 지나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거야? 당장 길을 비켜서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바닥까지 조아려야 될 거 아냐? 네 옆에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하녀처럼.”
귀족 여자는 우물쭈물하는 아벨라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얘 좀 봐.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녀가 당장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라며 두 손으로 아벨라를 확 밀쳤다. 무방비 상태인 아벨라가 뒤로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해 피해가 더 컸다.
콰당.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뒤통수를 찧고 만 아벨라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귀족 여자가 조금은 기분이 풀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나자빠진 모습 좀 봐. 마치 밟혀 죽은 개구리 같네. 이것들은 꼭 행동으로 보여 줘야 굽실거린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