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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이 열리면 1권
5화
#2 (2)
“운 좋은 줄 알아, 이 누더기 하녀야. 만약 내가 진짜 공주였다면 넌 근위대에 밟혀 즉사했을 테니까. 초청받고 온 몸이라 남의 집 하녀를 죽일 수 없으니 이 정도에서 끝내 주는 거야.”
귀족 여자 한 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아벨라를 향해 침을 탁 뱉었다. 귀족의 우아함과 배려는 전혀 없는 악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현실은 실상 이런 것이니까.
“우리 집 하녀였다면 당장 지하실로 끌고 가 채찍질을 했을 텐데.”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하녀는 그녀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발소리가 나지 않고 적막이 흐른다 싶을 때 가만히 눈치를 보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하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아벨라를 일으켰다. 괜찮냐는 걱정의 말이나 위로는 없었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이라는 듯 오히려 대수롭지 않아 했다.
“오늘은 이곳 복도 청소를 하도록 해. 될 수 있으면 아래층으로는 내려오지 말고.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의 눈 밖에 났으니 자칫 오고 가다 마주치면 정말 큰일을 치르게 될 테니까. 내 말 알아들었지? 저 사람들은 신입 하녀라고 해서 봐주지 않아. 저번 달에 너처럼 이곳에 팔려 온 새로운 하녀가 마님이 아끼는 홍차 잔을 깨서 맞아 죽은 일이 있었어. 오래 살고 싶으면 입조심하고 행동 조심해.”
하녀의 주의와 당부는 거칠었지만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복도 청소를 하기 위해 들고 왔던 자신의 물통과 걸레를 아벨라에게 건네주었다. 아벨라는 충격과 혼란에 빠져 하녀가 건네준 걸레를 받지도 못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나리가 다시 널 찾을 거라는 꿈은 버려. 초대된 손님들 중에는 가난한 귀족 아가씨들도 많아. 그녀들이 나리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알아? 몸 바칠 기회를 가지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떤다구. 하물며 한 번 품은 하녀는 기억도 못 할 거야. 어제 화장실에 가서 똥을 쌌는지 안 쌌는지는 기억해도 너는 기억 못 한다구. 너처럼 어리바리한 누더기 하녀는 특히 더.”
하녀는 조금 전 아벨라를 괴롭힌 귀족 여자 두 명도 그 무리 중 한 명일 거라고 알려 주었다.
“아니라면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저들이 대낮부터 나리의 침실 근처를 벌써 어슬렁거릴 리 없거든. 하긴, 귀족으로 태어나도 돈이 없으면 허울뿐인 거지 뭐. 가난한 귀족은 몸이라도 팔아 명예를 유지해야 하고, 돈 많은 귀족은 배불리 먹고 하루하루 새로운 여자와 음탕하게 지내며 시간을 축내는 게 그들 일인걸.”
하녀는 달관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느슨해진 앞치마를 다시 한번 질끈 묶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단을 내려갔다.
“네 담당을 찾아서 네가 어디에 배치된 아이인지 알아 오마. 그 전까진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아벨라는 그녀가 놓고 간 걸레를 들어 머리카락에 묻은 침을 천천히 닦아 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숙이고 가녀린 어깨를 떨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아빠는 어디 갔고 선술집에 있던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곳은 어디고 저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울음이 터지려 했다.
“그 밤을 마지막으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벨라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는 무지막지한 고통을 느꼈다.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아벨라는 곧바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조금 전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여파라고 하기엔 고통이 너무 심했다. 그때였다.
“제길. 꼴같잖은 것들이.”
갑자기 입에서 거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전부 죽여 버릴까 보다. 모두 없애 버릴까 보다.”
그녀의 두 눈이 난간 아래를 향해 희번덕거렸다. 조금 전 자신을 괴롭힌 두 귀족 여자를 찾기 위해서다. 성마른 분노가 치솟았다. 모욕당한 걸 생각하니 당장 씹어 먹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전신을 휘감는 또 다른 고통이 머리의 뒷부분에서 퍼져 나와 그러질 못했다.
“머리에 불이……!”
뒤통수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고 철퇴가 연속해서 머리를 가격하는 느낌이었다. 무자비한 고통이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녀의 마른 두 손이 잡고 있던 난간을 우지끈 부러트렸다.
아벨라는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홀로 외롭게 두통을 이겨 낸 그녀가 한참 뒤에야 감긴 눈을 천천히 떴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벨라는 두통이 주는 고통을 참기 위해 가지고 있던 체력을 다 소진한 듯 힘없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혼란과 놀라움의 연속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걸까. 기진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는 문득 복도 쪽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이게…… 뭐야?”
아벨라가 무릎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낯선 모습은 자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창가에 어렴풋이 비친 모습은 분명 자신이 맞았다.
“이게…… 누구 얼굴이야? 내가 왜 이래?”
아벨라는 말도 안 된다며 하녀가 놓고 간 물통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도 조금 전 창가에 비친 얼굴이 똑같이 나타났다.
“이게 나라고? 내 얼굴이 이런 얼굴이었다고?”
오밀조밀 하얗고 작은 얼굴이 어느새 완연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앙상한 양 볼 위에 푹 꺼진 커다란 눈은 아사 직전의 사람처럼 온전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굶은 듯 뼈밖에 안 남은 광대뼈가 힘겹게 얼굴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길고 풍성하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남자들의 머리처럼 바짝 잘려 삐뚤삐뚤했다. 아벨라는 기겁을 하며 물통에서 뒷걸음쳤다.
“아, 안 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사이에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열한 살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있을 수 있어?”
벌어진 입에서 연신 경악의 물음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워졌다.
“뭔가 잘못됐어. 대단히 잘못됐어. 그래. 침착해야 해, 아벨라. 생각을 집중하자. 현명하게 행동해야 해.”
아벨라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두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애썼다. 아빠의 죽음을 본 후로 떠오르는 것은? 그 뒤로 기억나는 일들은 뭐지? 갈고리처럼 날카롭고 무서운 다섯 개의 손가락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아빠를 낚아채려 할 때 그것보다 더 빠른 손이 아빠의 목을 뽑아 버렸다. 그걸 보고 나는 어떻게 했지? 나는!
“대체 하룻밤 사이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빠의 죽음을 본 후 기절했던 자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신을 잃고 지냈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럼 귀족의 집 하녀가 되어 있는 이유는 뭘까? 자신의 신분이 한순간에 바뀌어 있는 이유는 대체 뭐지?
“당장 이곳을 나가야 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꿈이라면 깨야 했고 아니라도 이곳에 더 이상 머물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선술집으로 가야 한다. 그곳으로 돌아가 기억을 다시 찾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아빠를 찾아야 해!”
아벨라는 복도를 내달렸다. 처음 자신을 질책했던 하녀가 내려간 계단을 그대로 따라 내려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커다란 저택의 복도는 긴 터널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방들이 즐비했고 어디든 커다란 로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 넓은 곳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모두 파티가 열리고 있는 일 층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벨라는 그렇게 저택 안에서 길을 잃은 듯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가 닫혀 있는 커다란 문 하나를 발견했다. 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든 출구는 큰 법이다. 아벨라는 그 문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그 순간,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며 그대로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와장창창.
그녀가 떨어진 곳은 파티가 한창인 일 층 중앙 홀. 닫힌 문은 난간 공사 중인 이 층 발코니 입구로, 아벨라는 그 문을 출구로 착각해 연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 선율이 멈췄다. 동시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저게 뭐야?”
허공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물체에 놀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파티를 위해 준비해 놓은 커다란 포도주통이 한순간에 박살이 나며 부서졌기 때문이다. 맛이 좋아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포도주가 입도 대기 전에 전부 바닥에 쏟아지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붉은빛의 포도주가 알싸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바닥을 적셔 나가자 누군가가 이 사달의 원인이 누구냐며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그때 아벨라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포도주를 흠뻑 뒤집어써 핏빛이 된 채로.
사람들이 뜨악해했다. 심성이 약한 어떤 여자는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아벨라를 보며 파티를 위한 새로운 쇼냐며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핏빛의 붉은 물을 뒤집어쓴 여자의 모습이었으니 누구든 놀라기에 충분했다.
“누굽니까, 당신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파티장에 난데없이 나타난 여자가 귀족이 아닐 리 없다. 선뜻 다가서진 못했지만 자못 용기 있는 한 신사가 나서서 묻자 사람들은 더욱 숨을 죽이며 아벨라를 쳐다보았다. 정적이 흐르고 침묵이 오갔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며 아벨라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딪힌 어딘가가 아팠지만 사람들의 시선보단 아프지 않았다.
차갑고 경멸스러운 눈빛들 속의 호기심.
그때 귀족들은 보았다. 핏빛 포도주를 뒤집어쓴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을. 그리고 그것이 귀족은 결코 입지 않는 누더기라는 것을 알았다. 다가왔던 신사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짓는가 싶었다. 그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아벨라에게 던졌다.
“이런 되먹지 못한 거지가!”
이어지는 말은 더 심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야? 누가 이 거지 좀 끌어내요! 어떻게 거지가 파티장에 들어온 거야?”
남자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아벨라는 곧장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혔고 뺨을 맞았으며 그 자리에서 짐승처럼 끌려 나갔다.
“이, 이거 놔요! 내게 이러지 말아요! 나는……!”
뒷말은 남자의 발길질에 의해 그대로 사라졌다. 달려온 사내들이 아벨라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개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아벨라는 발버둥 치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실수였어요! 문을 잘못 열고 들어온 내 실수예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소리치는 그녀의 입으로 주먹이 쑤시고 들어왔다. 아벨라는 고통의 소리도 내지 못했다. 폭력은 무자비했고 거침없었으며 그녀를 짐승처럼 때리고 짓밟았다. 그들은 그녀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무식하고 흉포하게 매질할 리 없었다.
“그……만둬요. 나는…… 겨우 열한 살이에요. 열……한 살의…… 아벨라.”
털썩.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마구간에 던져졌다. 파티를 망친 존재는 인간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말들이 놀란 듯 제자리에서 겅중겅중 뛰었다. 하인들은 아벨라를 바닥에 던져 놓고는 또다시 매질했다. 그들은 매질하는 내내 왜 중요한 파티를 망쳤는지 되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어떻게 저택에 기어들어 온 거냐고 묻잖아!”
“물건을 훔치려고 들어온 거야? 도둑인 거야? 이 층에선 뭘 하고 있었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냐니까!”
그녀도 모르는 이유를 그들은 끈질기게 대답하라고 요구했다. 폭력이 무서워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또다시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물고 늘어졌고 결국 아벨라가 기절해서야 그 질문을 멈췄다.
“어라? 이것 봐라. 벌써 기절했네.”
“야. 죽으면 곤란해. 나리께서 파티가 끝나면 직접 벌을 준다고 했는데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우리가 골치 아파진다구.”
저택의 늙은 주인은 화를 참지 못해 룸에 들어가 괴성 같은 고함을 연신 내질렀다고 했다. 수석 하녀와 하인들은 그의 분노를 받들어 당장 아벨라를 끌고 나가 몰매를 거듭했지만 주인의 화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손님들 앞에서 분노를 감추느라 결국 입꼬리에 경련까지 난 그는, 지하실에 뜨거운 쇠꼬챙이를 달궈 놓으라는 말을 남기고 나서야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니 죽으면 안 된다는 하인들의 말에 아벨라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또 다른 고통을 받는다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이 마구간 문을 잠그고 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말들은 이상하게 계속 흥분한 채였다. 기둥에 묶인 줄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뛰었고 아벨라로부터 멀어지려고 자꾸만 푸르릉거렸다. 왜? 단순히 피투성이 사람을 봤기 때문에? 아니면 자신들의 마구간을 침입한 사람이 기분 나빠서?
아니다. 말들은 두려워 날뛰고 있었다. 기절해 있는 아벨라를.
힘이 센 수컷 말이 허공을 향해 앞발을 들어 올리며 연속해서 발길질을 하더니 급기야 묶인 줄을 끊었다. 마구간엔 스물두 마리의 말이 있고 그 안엔 자신의 암컷 말이 있었다. 자신은 이곳의 우두머리로서 위험한 불청객인 아벨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말은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아벨라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앞발을 들어 아벨라의 머리를 콱, 내리찍었다.
콰악.
땅바닥을 정확히 내리찍는 소리가 마구간 안을 울렸다. 지켜보던 말들이 한순간에 소리를 죽였다. 수컷 말의 앞발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제거했는지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기절해 있던 아벨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말들은 놀랐다. 아벨라가 수컷 말의 앞발 하나를 꽉 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수컷 말은 당황했다. 분명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아벨라가 손에 힘을 꾹 주는가 싶더니 말의 앞발이 반대로 확 꺾였다. 부러진 앞다리 때문에 말이 허무하게 앞으로 쾅 고꾸라졌다. 순식간이었다. 아벨라의 이빨이 말의 배를 콱 문 것은.
5화
#2 (2)
“운 좋은 줄 알아, 이 누더기 하녀야. 만약 내가 진짜 공주였다면 넌 근위대에 밟혀 즉사했을 테니까. 초청받고 온 몸이라 남의 집 하녀를 죽일 수 없으니 이 정도에서 끝내 주는 거야.”
귀족 여자 한 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아벨라를 향해 침을 탁 뱉었다. 귀족의 우아함과 배려는 전혀 없는 악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현실은 실상 이런 것이니까.
“우리 집 하녀였다면 당장 지하실로 끌고 가 채찍질을 했을 텐데.”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하녀는 그녀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발소리가 나지 않고 적막이 흐른다 싶을 때 가만히 눈치를 보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하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아벨라를 일으켰다. 괜찮냐는 걱정의 말이나 위로는 없었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이라는 듯 오히려 대수롭지 않아 했다.
“오늘은 이곳 복도 청소를 하도록 해. 될 수 있으면 아래층으로는 내려오지 말고.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의 눈 밖에 났으니 자칫 오고 가다 마주치면 정말 큰일을 치르게 될 테니까. 내 말 알아들었지? 저 사람들은 신입 하녀라고 해서 봐주지 않아. 저번 달에 너처럼 이곳에 팔려 온 새로운 하녀가 마님이 아끼는 홍차 잔을 깨서 맞아 죽은 일이 있었어. 오래 살고 싶으면 입조심하고 행동 조심해.”
하녀의 주의와 당부는 거칠었지만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복도 청소를 하기 위해 들고 왔던 자신의 물통과 걸레를 아벨라에게 건네주었다. 아벨라는 충격과 혼란에 빠져 하녀가 건네준 걸레를 받지도 못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나리가 다시 널 찾을 거라는 꿈은 버려. 초대된 손님들 중에는 가난한 귀족 아가씨들도 많아. 그녀들이 나리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알아? 몸 바칠 기회를 가지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떤다구. 하물며 한 번 품은 하녀는 기억도 못 할 거야. 어제 화장실에 가서 똥을 쌌는지 안 쌌는지는 기억해도 너는 기억 못 한다구. 너처럼 어리바리한 누더기 하녀는 특히 더.”
하녀는 조금 전 아벨라를 괴롭힌 귀족 여자 두 명도 그 무리 중 한 명일 거라고 알려 주었다.
“아니라면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저들이 대낮부터 나리의 침실 근처를 벌써 어슬렁거릴 리 없거든. 하긴, 귀족으로 태어나도 돈이 없으면 허울뿐인 거지 뭐. 가난한 귀족은 몸이라도 팔아 명예를 유지해야 하고, 돈 많은 귀족은 배불리 먹고 하루하루 새로운 여자와 음탕하게 지내며 시간을 축내는 게 그들 일인걸.”
하녀는 달관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느슨해진 앞치마를 다시 한번 질끈 묶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단을 내려갔다.
“네 담당을 찾아서 네가 어디에 배치된 아이인지 알아 오마. 그 전까진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아벨라는 그녀가 놓고 간 걸레를 들어 머리카락에 묻은 침을 천천히 닦아 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숙이고 가녀린 어깨를 떨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아빠는 어디 갔고 선술집에 있던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곳은 어디고 저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울음이 터지려 했다.
“그 밤을 마지막으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벨라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는 무지막지한 고통을 느꼈다.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아벨라는 곧바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조금 전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여파라고 하기엔 고통이 너무 심했다. 그때였다.
“제길. 꼴같잖은 것들이.”
갑자기 입에서 거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전부 죽여 버릴까 보다. 모두 없애 버릴까 보다.”
그녀의 두 눈이 난간 아래를 향해 희번덕거렸다. 조금 전 자신을 괴롭힌 두 귀족 여자를 찾기 위해서다. 성마른 분노가 치솟았다. 모욕당한 걸 생각하니 당장 씹어 먹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전신을 휘감는 또 다른 고통이 머리의 뒷부분에서 퍼져 나와 그러질 못했다.
“머리에 불이……!”
뒤통수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고 철퇴가 연속해서 머리를 가격하는 느낌이었다. 무자비한 고통이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녀의 마른 두 손이 잡고 있던 난간을 우지끈 부러트렸다.
아벨라는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홀로 외롭게 두통을 이겨 낸 그녀가 한참 뒤에야 감긴 눈을 천천히 떴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벨라는 두통이 주는 고통을 참기 위해 가지고 있던 체력을 다 소진한 듯 힘없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혼란과 놀라움의 연속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걸까. 기진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는 문득 복도 쪽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이게…… 뭐야?”
아벨라가 무릎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낯선 모습은 자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창가에 어렴풋이 비친 모습은 분명 자신이 맞았다.
“이게…… 누구 얼굴이야? 내가 왜 이래?”
아벨라는 말도 안 된다며 하녀가 놓고 간 물통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도 조금 전 창가에 비친 얼굴이 똑같이 나타났다.
“이게 나라고? 내 얼굴이 이런 얼굴이었다고?”
오밀조밀 하얗고 작은 얼굴이 어느새 완연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앙상한 양 볼 위에 푹 꺼진 커다란 눈은 아사 직전의 사람처럼 온전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굶은 듯 뼈밖에 안 남은 광대뼈가 힘겹게 얼굴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길고 풍성하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남자들의 머리처럼 바짝 잘려 삐뚤삐뚤했다. 아벨라는 기겁을 하며 물통에서 뒷걸음쳤다.
“아, 안 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사이에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열한 살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있을 수 있어?”
벌어진 입에서 연신 경악의 물음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워졌다.
“뭔가 잘못됐어. 대단히 잘못됐어. 그래. 침착해야 해, 아벨라. 생각을 집중하자. 현명하게 행동해야 해.”
아벨라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두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애썼다. 아빠의 죽음을 본 후로 떠오르는 것은? 그 뒤로 기억나는 일들은 뭐지? 갈고리처럼 날카롭고 무서운 다섯 개의 손가락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아빠를 낚아채려 할 때 그것보다 더 빠른 손이 아빠의 목을 뽑아 버렸다. 그걸 보고 나는 어떻게 했지? 나는!
“대체 하룻밤 사이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빠의 죽음을 본 후 기절했던 자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신을 잃고 지냈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럼 귀족의 집 하녀가 되어 있는 이유는 뭘까? 자신의 신분이 한순간에 바뀌어 있는 이유는 대체 뭐지?
“당장 이곳을 나가야 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꿈이라면 깨야 했고 아니라도 이곳에 더 이상 머물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선술집으로 가야 한다. 그곳으로 돌아가 기억을 다시 찾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아빠를 찾아야 해!”
아벨라는 복도를 내달렸다. 처음 자신을 질책했던 하녀가 내려간 계단을 그대로 따라 내려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커다란 저택의 복도는 긴 터널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방들이 즐비했고 어디든 커다란 로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 넓은 곳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모두 파티가 열리고 있는 일 층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벨라는 그렇게 저택 안에서 길을 잃은 듯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가 닫혀 있는 커다란 문 하나를 발견했다. 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든 출구는 큰 법이다. 아벨라는 그 문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그 순간,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며 그대로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와장창창.
그녀가 떨어진 곳은 파티가 한창인 일 층 중앙 홀. 닫힌 문은 난간 공사 중인 이 층 발코니 입구로, 아벨라는 그 문을 출구로 착각해 연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 선율이 멈췄다. 동시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저게 뭐야?”
허공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물체에 놀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파티를 위해 준비해 놓은 커다란 포도주통이 한순간에 박살이 나며 부서졌기 때문이다. 맛이 좋아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포도주가 입도 대기 전에 전부 바닥에 쏟아지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붉은빛의 포도주가 알싸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바닥을 적셔 나가자 누군가가 이 사달의 원인이 누구냐며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그때 아벨라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포도주를 흠뻑 뒤집어써 핏빛이 된 채로.
사람들이 뜨악해했다. 심성이 약한 어떤 여자는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아벨라를 보며 파티를 위한 새로운 쇼냐며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핏빛의 붉은 물을 뒤집어쓴 여자의 모습이었으니 누구든 놀라기에 충분했다.
“누굽니까, 당신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파티장에 난데없이 나타난 여자가 귀족이 아닐 리 없다. 선뜻 다가서진 못했지만 자못 용기 있는 한 신사가 나서서 묻자 사람들은 더욱 숨을 죽이며 아벨라를 쳐다보았다. 정적이 흐르고 침묵이 오갔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며 아벨라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딪힌 어딘가가 아팠지만 사람들의 시선보단 아프지 않았다.
차갑고 경멸스러운 눈빛들 속의 호기심.
그때 귀족들은 보았다. 핏빛 포도주를 뒤집어쓴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을. 그리고 그것이 귀족은 결코 입지 않는 누더기라는 것을 알았다. 다가왔던 신사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짓는가 싶었다. 그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아벨라에게 던졌다.
“이런 되먹지 못한 거지가!”
이어지는 말은 더 심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야? 누가 이 거지 좀 끌어내요! 어떻게 거지가 파티장에 들어온 거야?”
남자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아벨라는 곧장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혔고 뺨을 맞았으며 그 자리에서 짐승처럼 끌려 나갔다.
“이, 이거 놔요! 내게 이러지 말아요! 나는……!”
뒷말은 남자의 발길질에 의해 그대로 사라졌다. 달려온 사내들이 아벨라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개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아벨라는 발버둥 치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실수였어요! 문을 잘못 열고 들어온 내 실수예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소리치는 그녀의 입으로 주먹이 쑤시고 들어왔다. 아벨라는 고통의 소리도 내지 못했다. 폭력은 무자비했고 거침없었으며 그녀를 짐승처럼 때리고 짓밟았다. 그들은 그녀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무식하고 흉포하게 매질할 리 없었다.
“그……만둬요. 나는…… 겨우 열한 살이에요. 열……한 살의…… 아벨라.”
털썩.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마구간에 던져졌다. 파티를 망친 존재는 인간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말들이 놀란 듯 제자리에서 겅중겅중 뛰었다. 하인들은 아벨라를 바닥에 던져 놓고는 또다시 매질했다. 그들은 매질하는 내내 왜 중요한 파티를 망쳤는지 되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어떻게 저택에 기어들어 온 거냐고 묻잖아!”
“물건을 훔치려고 들어온 거야? 도둑인 거야? 이 층에선 뭘 하고 있었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냐니까!”
그녀도 모르는 이유를 그들은 끈질기게 대답하라고 요구했다. 폭력이 무서워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또다시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물고 늘어졌고 결국 아벨라가 기절해서야 그 질문을 멈췄다.
“어라? 이것 봐라. 벌써 기절했네.”
“야. 죽으면 곤란해. 나리께서 파티가 끝나면 직접 벌을 준다고 했는데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우리가 골치 아파진다구.”
저택의 늙은 주인은 화를 참지 못해 룸에 들어가 괴성 같은 고함을 연신 내질렀다고 했다. 수석 하녀와 하인들은 그의 분노를 받들어 당장 아벨라를 끌고 나가 몰매를 거듭했지만 주인의 화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손님들 앞에서 분노를 감추느라 결국 입꼬리에 경련까지 난 그는, 지하실에 뜨거운 쇠꼬챙이를 달궈 놓으라는 말을 남기고 나서야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니 죽으면 안 된다는 하인들의 말에 아벨라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또 다른 고통을 받는다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이 마구간 문을 잠그고 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말들은 이상하게 계속 흥분한 채였다. 기둥에 묶인 줄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뛰었고 아벨라로부터 멀어지려고 자꾸만 푸르릉거렸다. 왜? 단순히 피투성이 사람을 봤기 때문에? 아니면 자신들의 마구간을 침입한 사람이 기분 나빠서?
아니다. 말들은 두려워 날뛰고 있었다. 기절해 있는 아벨라를.
힘이 센 수컷 말이 허공을 향해 앞발을 들어 올리며 연속해서 발길질을 하더니 급기야 묶인 줄을 끊었다. 마구간엔 스물두 마리의 말이 있고 그 안엔 자신의 암컷 말이 있었다. 자신은 이곳의 우두머리로서 위험한 불청객인 아벨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말은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아벨라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앞발을 들어 아벨라의 머리를 콱, 내리찍었다.
콰악.
땅바닥을 정확히 내리찍는 소리가 마구간 안을 울렸다. 지켜보던 말들이 한순간에 소리를 죽였다. 수컷 말의 앞발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제거했는지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기절해 있던 아벨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말들은 놀랐다. 아벨라가 수컷 말의 앞발 하나를 꽉 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수컷 말은 당황했다. 분명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아벨라가 손에 힘을 꾹 주는가 싶더니 말의 앞발이 반대로 확 꺾였다. 부러진 앞다리 때문에 말이 허무하게 앞으로 쾅 고꾸라졌다. 순식간이었다. 아벨라의 이빨이 말의 배를 콱 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