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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고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내 역량으로는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부탁 같은 걸 하면 어쩌지? 안드로이드가 하면 안 되는 말 같은 건 없나? 아까 사장님 있을 때 진작 좀 물어볼걸, 아까는 생각이 안 났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것과는 별개로 닐은 두 사람을 향해 꽃처럼 방긋 웃어 주었다. 다행히도 둘의 반응은 꽤 괜찮았다.
“얘 제법 귀엽다. 안녕?”
닐은 최대한 어제 레이디의 귀여웠던 모습을 떠올리며 수줍은 듯이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다행히도 대화는 길지 않았다. 대화보다는 둘은 이 ‘안드로이드’가 얼마나 인간 같은지에 대해 살피기 바빴다. 여자가 닐의 손을 쥐어 만지작거리면서 체온과 촉감에 좀 놀라고, 얼마나 사람처럼 숨을 쉬고 움직이는지에 대해 감탄했다.
그야 사람이니 정말 사람같이 느껴지겠지. 닐은 조금 양심이 쿡쿡 찔려 오는 걸 외면했다.
“하나 사 줄까?”
제 몸값이, 아니, 안드로이드의 몸값이 얼마인지 알고 있는 닐은 마치 원하는 신발을 산다는 투로 말하는 남자의 말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괜찮아?”
“뭐 어때. 진짜 사람도 아닌데.”
부자들은 저런 거구나. 안드로이드를 무슨 아이스크림 사듯 간단히 사고. 아무튼 닐이 바짝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둘은 손을 한번 만진 것 외에는 별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고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굉장히 신사 숙녀처럼―아니 실제로도 신사 숙녀들이었지만―닐을 살펴보며 품평을 하거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애완동물에게 하듯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혹은 더 나아가도 그저 뺨을 꼬집어 보는 게 다였다. 그마저도 뺨을 꼬집어 보는 건 항상 샵 어느 구역에나 대기하고 있는 정중하고 예의 바른 직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뭐지? 닐이 잠시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안드로이드 홍보 겸 장난감 홍보라면서, 막 옷 벗겨 놓고 이렇고 저런 일들을 하는 게 아니었어?
“새로운 안드로이드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데?”
커다란 덩치의 경호원을 대동하고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고 와 뭔지 모를 평을 하고 가는, 플래티넘 금발과 초록색 눈이 인상적인 점잖고 잘생긴 신사가 있는가 하면…….
“어머나, 너무 괜찮다.”
“눈 색 좀 봐. 되게 잘 구현했는데.”
“비바체로 입히면 잘 맞을 것 같아.”
“아냐, 지브라로 입히는 쪽이 더 어울려. 아니면 하나씩 사서 입혀 버리자.”
마치 인형을 평가하듯 뭘 입힐까 수다를 떨며 까르르 웃더니 놀랍게도 한 열 대쯤 예약하는 아름다운 자매도 있었다.
아무튼 닐은 진열되어 앉아 있는 내내 온갖 귀여움이란 귀여움은 다 받았다. 그들 모두 안드로이드를 일종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나 인형처럼 여기고 대했다. 닐은 그들의 그런 태도가 굉장히 생소하면서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들 안드로이드 프리티를 보면 한 번씩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을 하고 지나갔다.
점검 시간이 되고, 레이디는 잠시 무대에서 내려져 샵과 연결된 휴게실로 이동되었다. 퍽 힘들었던 닐도 그 곁에 앉아 반쯤 넋을 놓은 채 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물어 왔다.
“약이라도 했나?”
헤롱거리고 있던 닐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무슨, 뭔 약…….”
“…….”
“……이요?”
언제 왔지……. 아, 그러고 보니 점검 시간이니 미하일이 점검을 하러 온 건 당연한 일이구나. 더듬거리는 닐의 행동에 그가 조금 소리 내어 웃더니 묘한 시선으로 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이 매장에 들른 손님들이 보낸 시선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글쎄, 꼭 개다래 잔뜩 먹은 고양이 같은걸.”
아주 자연스럽게 닐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더니 미하일은 애틋한 표정으로 닐만 바라보고 있던 레이디의 가슴을 두드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똑, 똑똑, 똑 네 번 두드려 주자 잠자듯 레이디의 눈이 감겼다. 그는 레이디의 몸에서 유일하게 안드로이드라는 걸 드러내는 귀 뒤, 거의 잘 보이지 않는 교묘한 덮개를 열어 가지고 온 장비를 연결했다. 닐이 그 모습을 지켜보자 미하일이 무심하게 설명했다.
“꿈꾸는 모드야.”
“네?”
“가슴을 네 번 두드리면 안드로이드들은 그날 모은 데이터를 정리하며 대기 상태에 빠지지. 난 그걸 꿈을 꾼다고 불러.”
닐은 레이디를 다루는 미하일의 손길이나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얼마나 안드로이드를 좋아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미하일의 안드로이드 프리티가 되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정말 잠시뿐이었다.
아무리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다고는 해도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몸이 뻐근해 주물러 주던 닐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물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그런 건 잘 안 해요?”
“뭘?”
레이디의 온도를 체크하며 미하일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제 일을 다시 떠올리자 닐의 뺨이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사장님이 한 것처럼 만…지거나…… 음, 뭘 넣고…….”
“아, 그거.”
그가 뭔가 설명할 것처럼 대답해 놓고는 레이디에 완전히 열중하는 바람에 닐은 머뭇머뭇 질문을 다시 삼켰다. 한 번은 물어도 두 번은 못 묻겠다……. 아무튼 미하일이 안드로이드에 집중하면 거의 대답을 안 해 준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나중에 그냥 제프리에게 물어봐야지. 닐이 열심히 예쁜 레이디와 잘생긴 사장이나 구경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점검이 끝났다. 레이디를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재우듯 내버려 둔 미하일이 닐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손에 척 쥐여 주는 게 아닌가.
“자, 먹고.”
닐이 제 손에 놓인 작은 스낵바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하일을 다시 쳐다보자 더 달라는 뜻으로 보았는지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더니 다시 하나 더 꺼내 주었다. 아, 아니. 더 달라고 쳐다본 게 아닌데. 내가 좀 불쌍해 보이나 왜 다들 먹을 걸 주지 못해 안달이지…….
“원래 러시아에서는 간식시간마다 이걸 먹어. 러시아 과자 먹어 봤나?”
닐이 다시 제 손바닥 위의 스낵바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영국 브랜드 과자 아닌가? 아무리 봐도 영국 과자인데? 물음표가 몇십 개 정도 떠올랐으나 미하일에게 물을 용기는 없었다. 아무튼 좀 허기지기도 해서 잘 먹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입에 냠 물었다. 그때 미하일이 레이디에게 사용했던 장비를 스윽 끌고 왔다.
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장비 중 심전도 패치처럼 보이는 것을 닐의 손목과 손바닥에 착 붙였다. 약간 두툼한 천 같은 물건으로 접착성이 꽤나 좋았다.
“어, 전…… 안드로이드가 아닌데요?”
“점검 시간이잖아.”
닐이 손을 꼭 쥐어 주먹을 말게 하며 미하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닐은 이제 슬슬 이 사장님이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냥 잠자코 따랐다. 우물우물 스낵바를 씹으면서 바라보자 미하일이 수치를 기록하는 전자 패드를 들어 올리며 이것저것 체크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제프리를 관대하게 봐준 것이나 정말 안드로이드도 아닌데 이렇게 섬세하게 살펴 주는 것을 보아 행동은 좀 엉뚱해도 사람은 좋은 것 같았다. 또다시 닐의 마음속에서 미하일을 향한 호감도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는 혼자 사나?”
“아. 네, 아마도…….”
로니 크로거 때문에 가질 못하는 제 집을 떠올리며 닐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다시 그 집에 갈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집은 집이고 앞으로 혼자 살긴 할 테니까. 스낵바를 모두 먹자 미하일이 다시 주머니에서 몇 개 꺼내 얹어 주었다. 닐은 아무 생각 없이 바스락거리며 포장지를 깠다. 안드로이드인 척하는 건 생각보다 기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보니 애인은 없나 보지?”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아, 그랬군.”
예쁜 레이디와 미하일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게 흐뭇해 닐은 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많이 염려한 것에 비해 자신이 꽤 안드로이드 연기도 잘 해내고 판매 실적도 많이 올린 것 같아 계속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아무튼 미하일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다시 그 작은 무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무대로 돌아가기 전 닐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미하일에게 물었다.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죠?”
레이디를 깨우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있던 미하일이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웃었다. 그럼, 아주 잘하고 있지. 닐은 그런 미하일의 대답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자신이 잘하고 있느냐고 아주 호기롭게 물은 게 무색하도록 사고는 아주 빨리 터지고 말았다.
***
깊은 밤이 될수록 방문하는 손님들의 분위기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균 연령층도 낮보다 좀 더 올라갔고, 안면 인식 방지 홀로그램 장치를 사용하는 사람도 꽤 있었으며 유명한 연예인이나 다른 분야의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닐은 방송에서 자주 봤던 가수가 목에 아무리 봐도 개 목걸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을 차고 있는 걸 보고 좀 놀랐다. 한편으로는 미하일이 왜 보안이 중요하다고 했는지도 이해했다. 이런 유명인들이 있으니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거지.
어디 개 목걸이뿐인가, 정말 개처럼 기어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차림새의 손님도 있었기에 처음에 닐은 당황했지만, 사람이 개 목걸이를 하건 기어서 오건 한결같은 레이디의 태도를 보고 자신도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하긴 지금은 안드로이드지 사람은 아니지 않나. 사실 당황한 것도 처음뿐이지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공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응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나 매우 지극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닐이 보기에는 아마 VIP쯤 되는 것 같았다. 방금 막 들어온 사람도 그랬다.
“미스터 로버트!”
걱정이 되는 건지 아니면 이유가 있는 건지, 자꾸만 닐이 있는 곳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왔다 갔다 돌아다니던 제프리가 지금 막 들어온 남자에게 매우 싹싹하게 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 중에는 연예인들이 꽤 많았는데, 괜히 연예인은 아닌지 다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손님도 마찬가지로, 키도 매우 훤칠했고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가 우아하고 당당했다.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대체 어디서 보았지?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게 그나마 놀라움을 표시하는 표정을 최대한 자제한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게 저 남자는 닐이 어젯밤 내내 공부한 잡지에서 여러 번 나왔던 사람이었다. 모델이었구나!
“제프리, 오랜만이네.”
로버트라는 남자가 미소를 짓자 마치 뒤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역시 모델은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하고 닐이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뭐 필요한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가볍게 구경이나 해 보려고.”
우아하게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기던 모델은 레이디와 닐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응시했다. 그가 약간 혀를 차며 다시 지나치려는데 제프리가 슬슬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새로 나온 제품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새로 나온 제품이라고? 이봐, 제프리. 언제부터 여기서 이런 종류의 매매를 했던 거지? 굉장히 불쾌한데.”
그 말에 닐은 마음이 뜨끔 찔렸고 제프리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버트가 그런 미소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자, 모델 특유의 강렬한 시선에 압박을 받아 그의 미소가 다소 줄어들었다.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 제품은 사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예요.”
“안드로이드라고?”
반은 놀라고 반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며 로버트가 다시 닐과 레이디를 돌아보았다. 제프리의 미소가 다시 환해졌다. 로버트는 뒤늦게 사람과 안드로이드를 구별하게 만들어 주는 피부의 홀로그램 타투를 발견했다. 물론, 닐의 경우에는 가짜 홀로그램 제조번호였고 정말 사람이었지만.
“오지 않은 사이에 놀라운 게 생겼는데.”
얼른 다가온 제프리가 만져 보라는 의미로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닐의 손을 끌어 로버트에게 내밀었다. 그는 놀라워하며 닐의 손을 들어 살폈다.
“이건…… 정말 신기하군.”
검지를 펴 봤다가 구부렸다가 손목의 뼈를 더듬어 보기도 하며 로버트가 감탄했다. 닐은 심장이 떨려 죽을 지경이었던지라, 미소 짓고 있는 입가에 경련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닐의 피부를 만져 보고 이리저리 자세히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동공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다른 손님들도 했던 행동이지만 이 사람이 하니 부담감의 레벨이 달랐다. 닐이 눈을 조금 빠르게 깜박거렸다.
“이렇게 사람 같으면 나 대신 일해도 되겠는데.”
닐의 손목을 느리게 꾹꾹 눌러 만지면서 로버트가 중얼거렸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죠.”
제프리가 신나게 떠벌렸다. 야……. 나는 진짜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아무튼 다른 손님이 불러 제프리가 설명을 하러 날아간 사이 로버트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닐을 살폈다. 모델이라 그런지 시선이 아주 강렬해서 아까부터 좀 민망했던 닐은 괜스레 베시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도 할 수 있나?”
“그럼요. 미스터 로버트.”
닐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잡지 표지에 나왔던 그를 한 번에 기억한 건 그가 많은 모델 중 사이에서도 유독 더 눈에 띄고 두드러져 보였던 탓이다. 바짝 다가온 그에게서 알싸한 향수 냄새가 훅 났다. 가만, 향수가 아니라 페로몬인가? 베타인 닐은 알파와 오메가보다 페로몬에 둔했다. 코가 간질간질한 게 페로몬보다는 향수인 모양이다.
“인공지능도 꽤 괜찮은걸.”
연신 놀라워하며 빙글빙글 닐을 살피다가 그가 레이디로 향했다. 그는 안드로이드의 손을 만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여자 피부 차이도 정말 잘 구현했고.”
그런데 로버트가 레이디를 살펴보는 사이 그의 향수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지 간질간질하던 코가 일을 치고 말았다. 최대한 참는다고 참긴 했는데 그만 작게 재채기 소리를 내고 만 것이다. 속으로는 사색이 되었지만 닐은 얼른 딴청을 피우며 다른 손님에게 눈웃음을 보내는 척했다.
“흠.”
로버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는 최선을 다해 모른 척했다. 분명 실내 온도가 최적으로 맞추어져 있을 텐데도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무 시선을 돌리고 있을 수도 없어서 다시 바라보며 꽃처럼 방긋 웃어 주자 로버트가 도리어 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맙소사…….’
닐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들켰나? 아르바이트 시작한 첫날부터 이렇게 들켜 버리고 마는 건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그는 겨우 웃는 것만을 유지했다. 로버트가 바짝 가까이 다가와 살피자 거의 울 것만 같았다.
“이상한데.”
로버트가 닐의 손등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앞뒤로 뒤집어 보기도 했다. 이제는 손이 떨리려고 해 닐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레이디가 갑자기 기지개를 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로버트의 시선이 바로 옆으로 옮겨졌다.
“하아…….”
레이디는 가볍고 나른한 한숨을 쉬는 것처럼 하품을 하고는 우아하고 날렵한 고양이처럼 소파 위로 몸을 뉘였다. 레이디가 로버트에게 찡긋 눈웃음을 쳐 보였다. 닐을 한번, 레이디를 한번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조금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느낌 탓인가…….”
하마터면 첫날부터 일을 그르칠 뻔했다 생각하며 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나가는 다른 고객에게 응대를 하는 사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 로버트는 이제는 완전히 닐에게서 관심이 사라진 것 같았다.
닐은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로버트가 있을 때처럼 재채기가 나오는 일도, 실수를 하는 일도 없었다. 매장을 한 바퀴 돌고 온 뒤 로버트가 다시 힐끔 닐과 레이디를 보고 가긴 했어도, 그 후로는 다 괜찮았다.
첫날에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완전히 지쳐 버린 닐은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이럭저럭 타냐가 알려 준 대로 깨끗하게 화장을 지우고 난 뒤에는 뭔가 챙겨 먹을 기운도 없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
다음 날 아침, 그는 여전히 조금 피곤한 상태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고객들이 안드로이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미하일이 저에게 한 것처럼 야한 짓을 시키지는 않았다. 궁금했지만 미하일을 쉽게 만날 수는 없으니 제프리에게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안드로이드가 얼마짜린데 그걸 함부로 손대게 하겠어? 잘못했다가 망가지면 내 꼴 나는 건데. 네 취향은 알겠지만, 그렇게까지 원하는 건 좀…….”
원해? 원하긴 뭘 원해? 닐이 잠시 짠 눈으로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놈이 안드로이드를 망가트려서 이 사달을 내고 있어? 그리 말해 놓고 자신도 찔리는지 제프리가 시선을 회피하며 일부러 바쁜 것처럼 벨벳 커튼을 부산스럽게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제프리의 얼굴이 더 어두워 보이는데 느낌 탓일까? 뭔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의 작은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오늘 닐은 어제보다 좀 느슨한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앞에서 보면 그저 좀 헐렁한 니트와 바지를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뒤에서 보면 등까지 깊이 파인 옷 사이로 흰 날개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타냐의 취향이 백분 반영된 것이었는데 자신의 날개 피어싱을 보여 주며 이건 어떠냐고 묻는 바람에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야만 했다.
양팔로 다리를 끌어 모으고 바닥에 깔린 쿠션 위에 앉은 닐이 사람들에게 방긋방긋 미소를 보냈다. 제프리는 닐에게 이 일이 적성에 맞을 거라고 했는데, 이 일은 그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그는 순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좋았다. 물론 제 수치스러운 부위나 행동을 남들에게 보여 주는 것도 자신의 취향에 맞긴 하였으나 그쪽은 로니 크로거와의 경험 때문에 바닥까지 깔아 눕혀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로니 크로거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 일을 좀 더 괜찮게 즐길 수 있었을까?
아무튼 어제에 비해 오늘은 다소 한산한 편이었는데, 오전부터 매장에 방문한 사람 중 다소 인상적인 고객이 있었다.
“씨발, 존나 끝내준다.”
제 앞에 서서 연신 거친 감탄을 내뱉고 있는 고객은 젊은 남성으로, 제프리의 말에 따르자면 고생 모르고 자란 철부지 도련님들이라 했다. ‘Tear’에서 그다지 반기지 않는 고객들이기도 했다. 돈은 많지만 사고를 치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리 돈을 많이 낸다 해도 사고를 치는 순간 그들은 다시는 이곳에 발도 들일 수가 없게 되곤 했다.
그런데 닐은 이 젊은 고객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글쎄, 입고 있는 옷이나 차고 있는 신발에서 고급스러운 느낌은 줄줄 흘러나왔으나 그간 봐 왔던 신사 숙녀들과는 다르게 행동거지에 할렘가의 양아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로니 크로거와 그 똘마니들처럼.
시건방지고 거만한 태도로 남자가 닐의 턱을 잡아 휙휙 거칠게 돌려 보자 직원이 경고했다.
“고객님, 안드로이드를 함부로 다루시면 안 됩니다.”
“아, 내가 사면 될 거 아냐. 얼만데?”
닐은 이런 상황에서도 안드로이드처럼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고 미소를 짓느라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는데, 그럴수록 남자의 눈이 더욱 달갑지 않은 느낌으로 빛났다.
“이 안드로이드는 판매하는 상품이 아닙니다. 또한 아직은 예약 구매만 가능합니다.”
“글쎄 예약이고 뭐고 얼마냐니까?”
직원으로부터 예약 판매하는 안드로이드의 가격을 들은 남자가 뭐라 욕설을 지껄이더니 마지못해 손을 떼어 냈다. 그러니까 회원비를 낼 돈은 있지만 안드로이드를 살 만한 돈은 없는 것이다. 하긴 어지간한 부자 아니고서야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용돈으로 주거나 하진 않겠지. 저런 자식이라면 더욱이.
“대여는 안 돼?”
“이 안드로이드는 대여하지 못하는 상품입니다.”
직원이 매우 상냥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뭐라고 할 것처럼 얼굴을 구겼지만, 어느새 매장 안으로 들어와 대기하는 사설 경비원을 보고는 다시 수그러들었다. 보통은 저렇게 사설 경비원이 바로 들어오지 않는데 아무래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사람인 모양이다.
남자는 어떻게든 닐을 어찌해 보겠다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주위를 어슬렁거렸는데, 그 행동거지가 마치 하이에나 같았다. 당연히 직원도 떠나지 않고 그 근처를 지켰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 속에 대치 상황이 이어지다가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간 줄 알아서 안도했더니 들고 온 건 안드로이드 안내 종이 책자였다. 남자가 히죽히죽 기분 나쁘게 웃어 댔다.
“가서 물어봤는데, 나는 손 못 대도 직원을 시켜서 제품 테스트 할 수는 있다며?”
“그렇습니다.”
직원이 마치 그린 듯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씩 웃은 남자가 정말이지 하이에나 같은 움직임으로 어슬렁거리더니 지시했다.
“옷 좀 벗어 봐.”
어제부터 무던히 각오하고 있던 상황이라 닐은 그다지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순간 짓궂은 마음이 들어 일부러 그윽한 시선을 보내 주며 니트를 벗자 남자가 잠시 홀린 듯 닐을 바라보았다. 빙긋 웃어 주고는 눈을 내리깔며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사람이 아닌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면 이런 대우가 그렇게 기분이 나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왕이면 이런 명령을 하는 사람이 미하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생각을 하고는 닐이 불현듯 저도 모르게 놀랄 때였다. 직원이 갑자기 저지하고 나섰다.
“손님, 이제 점검 시간입니다.”
“뭐라고?”
직원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던 남자가 팍 인상을 썼다.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안드로이드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오, 씨…….”
휴식 시간이나 다름없는 점검 시간을 열렬히 기다려 온 닐이기에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이 상황이 매우 즐겁게 느껴졌다. 그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직원을 따라 졸졸 휴게실 겸 안드로이드 정비실로 따라갔다. 등 뒤로 남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직원이 익숙하게 안드로이드들을 안에 밀어 넣고 나간 지 얼마 안 있어 미하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오늘도 퍽 편한 옷차림이었다. 그런 차림인데도 여전히 빛이 나 보이는 건 대체 왜지. 닐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하일이 즐거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음, 지금은 저녁인데요, 사장님.”
“러시아에서는 지금부터가 아침의 시작이야.”
그 말에 따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맞을지도 모른다 싶어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긴 저녁이라도 러시아는 아마 아침일지도 몰라. 그리고 설사 아니라고 해도 사장이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사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냥 미하일이라고 불러.”
오늘도 레이디를 꿈꾸도록 재워 버리고 장비를 꺼내며 미하일이 무심하게 말하는데, 닐은 순간 좀 설레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으려고 애쓰며 태연하게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왜 이 사람은 이름도 잘생긴 것 같지.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닐이 속으로 끙끙 앓았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게, 미하일은 그가 근 몇 년 동안 만난 사람 중 가장 근사하고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만약에 안드로이드인 척하다가 상황이 지나치게 감당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요?”
“응?”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은데 억지로 계속 시킨다든가…….”
아까는 별생각 없이 호기롭게 남자를 약 올렸는데 생각해 보니 그가 언제든지 또 방문할 수 있는 일이라 걱정이 되었다. 미하일은 느릿하게 장비를 레이디와 연결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말했다.
“그럼 그냥 고장 내 버려.”
“네?”
“뭐 에러가 일어난 것처럼……. 귀한 안드로이드니까 다들 기겁해서 모시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미하일이 싱긋 웃으며 닐을 바라보았다.
“한번 해 볼래?”
“네?”
“자, 이렇게…….”
팔이 슥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자 갑자기 긴장이 되어 닐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예쁜 미소를 지은 그가 헉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 꽉 허리를 끌어안았다. 닐이 얼어붙었다.
“이제 눈을 감고, 축 늘어지는 거야. 고장 난 안드로이드처럼. ……어서.”
그가 재촉하자 잠시 망설이던 닐이 고분고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느리게 닫으며 고개를 늘어트렸다. 부끄러움을 참으며 팔도 천천히 떨구자 미하일의 시선이 유독 더 따갑게 느껴졌다. 슬슬 뒤로 꺾인 목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도통 미하일이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아 발을 꼼지락거릴 때쯤, 뜨끈하고 습한 것이 뺨에서 입술 끝부분까지 슥 지나갔다. 닐이 기겁하며 번쩍 눈을 떴다. 미하일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닐을 놔주며 칭찬했다.
“잘하네. 하지만 그래도 눈은 뜨지 말았어야지.”
그러고는 닐이 이도저도 어쩌지도 못하고 뺨에 어정쩡 손을 올리다 말기를 반복하자 제 소매를 죽 잡아당겨 뺨을 문질러 주기까지 했다.
“더러웠어?”
“어, 아뇨, 네, 아뇨…….”
핥을 줄은 몰라서 당황한 나머지 닐이 버벅거리자 미하일은 한번 웃고는 레이디를 점검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동안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애꿎은 청바지만 쥐어뜯었다. 미하일은 잠시 후 어제처럼 닐에게 사탕 서너 개를 쥐여 주었다. 오늘은 바쁜지 어제와 달리 몇 가지 대화만 나누고 휙 가 버렸는데, 닐은 사탕 한 개는 먹지 않고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내가 사장님을 좋아하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하긴 로니 크로거 같은 인간만 보다가 차원이 다른 사람을 보니 그럴 만도 해. 사실 그런 비주얼이면 안 좋아하는 게 더 힘들지 않나? 미하일에 대한 생각으로 약간 붕붕 뜬 상태로 나온 닐은 다시 무대에 앉았다가 저도 모르게 화사하게 웃었다. 덕분에 오늘 따라 고객들 호응도 좋았다.
그런 닐의 정신을 다시 바짝 차리게 만든 것은 로버트의 등장이었다. 오늘은 가볍게 구경하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관찰하러 나왔다는 자세로 당당하게 뚜벅뚜벅 닐의 앞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미스터 로버트!”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라 환하게 미소 지어 주자 로버트도 섹시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닐은 생각했다. 나 생각보다 엄청 얼굴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전 애인들 얼굴이 다들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어…….
“안녕, 프리티. 오늘도 예쁘게 하고 있네.”
감사하다고 대답하는 대신 닐은 부러 수줍은 듯 웃으며 슬쩍 시선을 피해 주었다. 가능한 사람들과 짧게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쪽이 좋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아직 그는 뭐가 안드로이드다운 반응이고 태도인지 감을 잘 잡지 못해서 열심히 레이디를 보며 배우는 중이었다. 다행히 로버트는 닐에게 말을 더 걸진 않았지만 대신 팔짱을 끼고 서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다 났다.
“정말 모델 대신에 안드로이드를 세워도 되겠는데.”
안드로이드라서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크게 중얼거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들으라고 하는 건지 닐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전자여라……. 보통은 길어 봤자 5분 정도 있다가 가니 시선 처리도 쉽고 괜찮았지만, 저렇게 눈앞에 떡 서서 빤히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면역이 없는 닐에게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마침내 로버트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안도한 나머지 기뻐 죽을 지경이었다.
“프리티, 일어나서 한 바퀴 돌아 볼래?”
닐은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일어나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버트가 다시 천천히 돌라고 명령하자 안드로이드를 사려고 이러는 걸까 의아해하며 닐이 느릿느릿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았다. 그의 예리한 시선이 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흠…….”
어쩜 이렇게 사람 같을 수가 있지, 중얼거리는 로버트의 말을 들으며 다시 양심이 쿡쿡 찔려 올 때였다.
“아저씨, 다 썼으면 좀 비켜 주죠?”
나 써야 하니까. 굉장히 시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닐의 몸이 순간 굳었다. 설마 했는데 다시 왔구나……. 아직 오늘 영업이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기에 닐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반쯤 악의로 뭉친 것 같은 사람은 상종하기가 아예 싫었으나, 세상에 돈 벌기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더욱이 이 일은 보수도 셌고 그다지 윤리적인 종류의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가 심하게 행동할 경우 제지할 직원이 있다는 점 정도였다.
로버트는 무례하게도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른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야 척 봐도 로버트에 비하자면 저 남자는 애송이 같아 보이긴 했다. 과연 그가 그대로 남자를 무시했다.
“이봐요, 다 썼으면 비켜 달라니까?”
“어디서 뭐가 짖나.”
이번에는 확실히 누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닐은 다소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대놓고 순진한 척 둘을 바라보았다. 이때는 누구보다 구경꾼 노릇이 쉬웠다. 저처럼 이런 순진한 안드로이드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고 누가 의심하겠나?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고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내 역량으로는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부탁 같은 걸 하면 어쩌지? 안드로이드가 하면 안 되는 말 같은 건 없나? 아까 사장님 있을 때 진작 좀 물어볼걸, 아까는 생각이 안 났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것과는 별개로 닐은 두 사람을 향해 꽃처럼 방긋 웃어 주었다. 다행히도 둘의 반응은 꽤 괜찮았다.
“얘 제법 귀엽다. 안녕?”
닐은 최대한 어제 레이디의 귀여웠던 모습을 떠올리며 수줍은 듯이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다행히도 대화는 길지 않았다. 대화보다는 둘은 이 ‘안드로이드’가 얼마나 인간 같은지에 대해 살피기 바빴다. 여자가 닐의 손을 쥐어 만지작거리면서 체온과 촉감에 좀 놀라고, 얼마나 사람처럼 숨을 쉬고 움직이는지에 대해 감탄했다.
그야 사람이니 정말 사람같이 느껴지겠지. 닐은 조금 양심이 쿡쿡 찔려 오는 걸 외면했다.
“하나 사 줄까?”
제 몸값이, 아니, 안드로이드의 몸값이 얼마인지 알고 있는 닐은 마치 원하는 신발을 산다는 투로 말하는 남자의 말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괜찮아?”
“뭐 어때. 진짜 사람도 아닌데.”
부자들은 저런 거구나. 안드로이드를 무슨 아이스크림 사듯 간단히 사고. 아무튼 닐이 바짝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둘은 손을 한번 만진 것 외에는 별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고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굉장히 신사 숙녀처럼―아니 실제로도 신사 숙녀들이었지만―닐을 살펴보며 품평을 하거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애완동물에게 하듯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혹은 더 나아가도 그저 뺨을 꼬집어 보는 게 다였다. 그마저도 뺨을 꼬집어 보는 건 항상 샵 어느 구역에나 대기하고 있는 정중하고 예의 바른 직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뭐지? 닐이 잠시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안드로이드 홍보 겸 장난감 홍보라면서, 막 옷 벗겨 놓고 이렇고 저런 일들을 하는 게 아니었어?
“새로운 안드로이드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데?”
커다란 덩치의 경호원을 대동하고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고 와 뭔지 모를 평을 하고 가는, 플래티넘 금발과 초록색 눈이 인상적인 점잖고 잘생긴 신사가 있는가 하면…….
“어머나, 너무 괜찮다.”
“눈 색 좀 봐. 되게 잘 구현했는데.”
“비바체로 입히면 잘 맞을 것 같아.”
“아냐, 지브라로 입히는 쪽이 더 어울려. 아니면 하나씩 사서 입혀 버리자.”
마치 인형을 평가하듯 뭘 입힐까 수다를 떨며 까르르 웃더니 놀랍게도 한 열 대쯤 예약하는 아름다운 자매도 있었다.
아무튼 닐은 진열되어 앉아 있는 내내 온갖 귀여움이란 귀여움은 다 받았다. 그들 모두 안드로이드를 일종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나 인형처럼 여기고 대했다. 닐은 그들의 그런 태도가 굉장히 생소하면서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들 안드로이드 프리티를 보면 한 번씩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을 하고 지나갔다.
점검 시간이 되고, 레이디는 잠시 무대에서 내려져 샵과 연결된 휴게실로 이동되었다. 퍽 힘들었던 닐도 그 곁에 앉아 반쯤 넋을 놓은 채 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물어 왔다.
“약이라도 했나?”
헤롱거리고 있던 닐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무슨, 뭔 약…….”
“…….”
“……이요?”
언제 왔지……. 아, 그러고 보니 점검 시간이니 미하일이 점검을 하러 온 건 당연한 일이구나. 더듬거리는 닐의 행동에 그가 조금 소리 내어 웃더니 묘한 시선으로 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이 매장에 들른 손님들이 보낸 시선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글쎄, 꼭 개다래 잔뜩 먹은 고양이 같은걸.”
아주 자연스럽게 닐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더니 미하일은 애틋한 표정으로 닐만 바라보고 있던 레이디의 가슴을 두드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똑, 똑똑, 똑 네 번 두드려 주자 잠자듯 레이디의 눈이 감겼다. 그는 레이디의 몸에서 유일하게 안드로이드라는 걸 드러내는 귀 뒤, 거의 잘 보이지 않는 교묘한 덮개를 열어 가지고 온 장비를 연결했다. 닐이 그 모습을 지켜보자 미하일이 무심하게 설명했다.
“꿈꾸는 모드야.”
“네?”
“가슴을 네 번 두드리면 안드로이드들은 그날 모은 데이터를 정리하며 대기 상태에 빠지지. 난 그걸 꿈을 꾼다고 불러.”
닐은 레이디를 다루는 미하일의 손길이나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얼마나 안드로이드를 좋아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미하일의 안드로이드 프리티가 되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정말 잠시뿐이었다.
아무리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다고는 해도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몸이 뻐근해 주물러 주던 닐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물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그런 건 잘 안 해요?”
“뭘?”
레이디의 온도를 체크하며 미하일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제 일을 다시 떠올리자 닐의 뺨이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사장님이 한 것처럼 만…지거나…… 음, 뭘 넣고…….”
“아, 그거.”
그가 뭔가 설명할 것처럼 대답해 놓고는 레이디에 완전히 열중하는 바람에 닐은 머뭇머뭇 질문을 다시 삼켰다. 한 번은 물어도 두 번은 못 묻겠다……. 아무튼 미하일이 안드로이드에 집중하면 거의 대답을 안 해 준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나중에 그냥 제프리에게 물어봐야지. 닐이 열심히 예쁜 레이디와 잘생긴 사장이나 구경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점검이 끝났다. 레이디를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재우듯 내버려 둔 미하일이 닐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손에 척 쥐여 주는 게 아닌가.
“자, 먹고.”
닐이 제 손에 놓인 작은 스낵바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하일을 다시 쳐다보자 더 달라는 뜻으로 보았는지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더니 다시 하나 더 꺼내 주었다. 아, 아니. 더 달라고 쳐다본 게 아닌데. 내가 좀 불쌍해 보이나 왜 다들 먹을 걸 주지 못해 안달이지…….
“원래 러시아에서는 간식시간마다 이걸 먹어. 러시아 과자 먹어 봤나?”
닐이 다시 제 손바닥 위의 스낵바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영국 브랜드 과자 아닌가? 아무리 봐도 영국 과자인데? 물음표가 몇십 개 정도 떠올랐으나 미하일에게 물을 용기는 없었다. 아무튼 좀 허기지기도 해서 잘 먹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입에 냠 물었다. 그때 미하일이 레이디에게 사용했던 장비를 스윽 끌고 왔다.
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장비 중 심전도 패치처럼 보이는 것을 닐의 손목과 손바닥에 착 붙였다. 약간 두툼한 천 같은 물건으로 접착성이 꽤나 좋았다.
“어, 전…… 안드로이드가 아닌데요?”
“점검 시간이잖아.”
닐이 손을 꼭 쥐어 주먹을 말게 하며 미하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닐은 이제 슬슬 이 사장님이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냥 잠자코 따랐다. 우물우물 스낵바를 씹으면서 바라보자 미하일이 수치를 기록하는 전자 패드를 들어 올리며 이것저것 체크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제프리를 관대하게 봐준 것이나 정말 안드로이드도 아닌데 이렇게 섬세하게 살펴 주는 것을 보아 행동은 좀 엉뚱해도 사람은 좋은 것 같았다. 또다시 닐의 마음속에서 미하일을 향한 호감도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는 혼자 사나?”
“아. 네, 아마도…….”
로니 크로거 때문에 가질 못하는 제 집을 떠올리며 닐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다시 그 집에 갈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집은 집이고 앞으로 혼자 살긴 할 테니까. 스낵바를 모두 먹자 미하일이 다시 주머니에서 몇 개 꺼내 얹어 주었다. 닐은 아무 생각 없이 바스락거리며 포장지를 깠다. 안드로이드인 척하는 건 생각보다 기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보니 애인은 없나 보지?”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아, 그랬군.”
예쁜 레이디와 미하일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게 흐뭇해 닐은 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많이 염려한 것에 비해 자신이 꽤 안드로이드 연기도 잘 해내고 판매 실적도 많이 올린 것 같아 계속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아무튼 미하일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다시 그 작은 무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무대로 돌아가기 전 닐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미하일에게 물었다.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죠?”
레이디를 깨우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있던 미하일이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웃었다. 그럼, 아주 잘하고 있지. 닐은 그런 미하일의 대답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자신이 잘하고 있느냐고 아주 호기롭게 물은 게 무색하도록 사고는 아주 빨리 터지고 말았다.
깊은 밤이 될수록 방문하는 손님들의 분위기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균 연령층도 낮보다 좀 더 올라갔고, 안면 인식 방지 홀로그램 장치를 사용하는 사람도 꽤 있었으며 유명한 연예인이나 다른 분야의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닐은 방송에서 자주 봤던 가수가 목에 아무리 봐도 개 목걸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을 차고 있는 걸 보고 좀 놀랐다. 한편으로는 미하일이 왜 보안이 중요하다고 했는지도 이해했다. 이런 유명인들이 있으니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거지.
어디 개 목걸이뿐인가, 정말 개처럼 기어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차림새의 손님도 있었기에 처음에 닐은 당황했지만, 사람이 개 목걸이를 하건 기어서 오건 한결같은 레이디의 태도를 보고 자신도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하긴 지금은 안드로이드지 사람은 아니지 않나. 사실 당황한 것도 처음뿐이지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공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응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나 매우 지극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닐이 보기에는 아마 VIP쯤 되는 것 같았다. 방금 막 들어온 사람도 그랬다.
“미스터 로버트!”
걱정이 되는 건지 아니면 이유가 있는 건지, 자꾸만 닐이 있는 곳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왔다 갔다 돌아다니던 제프리가 지금 막 들어온 남자에게 매우 싹싹하게 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 중에는 연예인들이 꽤 많았는데, 괜히 연예인은 아닌지 다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손님도 마찬가지로, 키도 매우 훤칠했고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가 우아하고 당당했다.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대체 어디서 보았지?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게 그나마 놀라움을 표시하는 표정을 최대한 자제한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게 저 남자는 닐이 어젯밤 내내 공부한 잡지에서 여러 번 나왔던 사람이었다. 모델이었구나!
“제프리, 오랜만이네.”
로버트라는 남자가 미소를 짓자 마치 뒤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역시 모델은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하고 닐이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뭐 필요한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가볍게 구경이나 해 보려고.”
우아하게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기던 모델은 레이디와 닐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응시했다. 그가 약간 혀를 차며 다시 지나치려는데 제프리가 슬슬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새로 나온 제품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새로 나온 제품이라고? 이봐, 제프리. 언제부터 여기서 이런 종류의 매매를 했던 거지? 굉장히 불쾌한데.”
그 말에 닐은 마음이 뜨끔 찔렸고 제프리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버트가 그런 미소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자, 모델 특유의 강렬한 시선에 압박을 받아 그의 미소가 다소 줄어들었다.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 제품은 사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예요.”
“안드로이드라고?”
반은 놀라고 반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며 로버트가 다시 닐과 레이디를 돌아보았다. 제프리의 미소가 다시 환해졌다. 로버트는 뒤늦게 사람과 안드로이드를 구별하게 만들어 주는 피부의 홀로그램 타투를 발견했다. 물론, 닐의 경우에는 가짜 홀로그램 제조번호였고 정말 사람이었지만.
“오지 않은 사이에 놀라운 게 생겼는데.”
얼른 다가온 제프리가 만져 보라는 의미로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닐의 손을 끌어 로버트에게 내밀었다. 그는 놀라워하며 닐의 손을 들어 살폈다.
“이건…… 정말 신기하군.”
검지를 펴 봤다가 구부렸다가 손목의 뼈를 더듬어 보기도 하며 로버트가 감탄했다. 닐은 심장이 떨려 죽을 지경이었던지라, 미소 짓고 있는 입가에 경련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닐의 피부를 만져 보고 이리저리 자세히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동공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다른 손님들도 했던 행동이지만 이 사람이 하니 부담감의 레벨이 달랐다. 닐이 눈을 조금 빠르게 깜박거렸다.
“이렇게 사람 같으면 나 대신 일해도 되겠는데.”
닐의 손목을 느리게 꾹꾹 눌러 만지면서 로버트가 중얼거렸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죠.”
제프리가 신나게 떠벌렸다. 야……. 나는 진짜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아무튼 다른 손님이 불러 제프리가 설명을 하러 날아간 사이 로버트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닐을 살폈다. 모델이라 그런지 시선이 아주 강렬해서 아까부터 좀 민망했던 닐은 괜스레 베시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도 할 수 있나?”
“그럼요. 미스터 로버트.”
닐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잡지 표지에 나왔던 그를 한 번에 기억한 건 그가 많은 모델 중 사이에서도 유독 더 눈에 띄고 두드러져 보였던 탓이다. 바짝 다가온 그에게서 알싸한 향수 냄새가 훅 났다. 가만, 향수가 아니라 페로몬인가? 베타인 닐은 알파와 오메가보다 페로몬에 둔했다. 코가 간질간질한 게 페로몬보다는 향수인 모양이다.
“인공지능도 꽤 괜찮은걸.”
연신 놀라워하며 빙글빙글 닐을 살피다가 그가 레이디로 향했다. 그는 안드로이드의 손을 만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여자 피부 차이도 정말 잘 구현했고.”
그런데 로버트가 레이디를 살펴보는 사이 그의 향수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지 간질간질하던 코가 일을 치고 말았다. 최대한 참는다고 참긴 했는데 그만 작게 재채기 소리를 내고 만 것이다. 속으로는 사색이 되었지만 닐은 얼른 딴청을 피우며 다른 손님에게 눈웃음을 보내는 척했다.
“흠.”
로버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는 최선을 다해 모른 척했다. 분명 실내 온도가 최적으로 맞추어져 있을 텐데도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무 시선을 돌리고 있을 수도 없어서 다시 바라보며 꽃처럼 방긋 웃어 주자 로버트가 도리어 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맙소사…….’
닐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들켰나? 아르바이트 시작한 첫날부터 이렇게 들켜 버리고 마는 건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그는 겨우 웃는 것만을 유지했다. 로버트가 바짝 가까이 다가와 살피자 거의 울 것만 같았다.
“이상한데.”
로버트가 닐의 손등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앞뒤로 뒤집어 보기도 했다. 이제는 손이 떨리려고 해 닐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레이디가 갑자기 기지개를 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로버트의 시선이 바로 옆으로 옮겨졌다.
“하아…….”
레이디는 가볍고 나른한 한숨을 쉬는 것처럼 하품을 하고는 우아하고 날렵한 고양이처럼 소파 위로 몸을 뉘였다. 레이디가 로버트에게 찡긋 눈웃음을 쳐 보였다. 닐을 한번, 레이디를 한번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조금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느낌 탓인가…….”
하마터면 첫날부터 일을 그르칠 뻔했다 생각하며 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나가는 다른 고객에게 응대를 하는 사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 로버트는 이제는 완전히 닐에게서 관심이 사라진 것 같았다.
닐은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로버트가 있을 때처럼 재채기가 나오는 일도, 실수를 하는 일도 없었다. 매장을 한 바퀴 돌고 온 뒤 로버트가 다시 힐끔 닐과 레이디를 보고 가긴 했어도, 그 후로는 다 괜찮았다.
첫날에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완전히 지쳐 버린 닐은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이럭저럭 타냐가 알려 준 대로 깨끗하게 화장을 지우고 난 뒤에는 뭔가 챙겨 먹을 기운도 없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여전히 조금 피곤한 상태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고객들이 안드로이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미하일이 저에게 한 것처럼 야한 짓을 시키지는 않았다. 궁금했지만 미하일을 쉽게 만날 수는 없으니 제프리에게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안드로이드가 얼마짜린데 그걸 함부로 손대게 하겠어? 잘못했다가 망가지면 내 꼴 나는 건데. 네 취향은 알겠지만, 그렇게까지 원하는 건 좀…….”
원해? 원하긴 뭘 원해? 닐이 잠시 짠 눈으로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놈이 안드로이드를 망가트려서 이 사달을 내고 있어? 그리 말해 놓고 자신도 찔리는지 제프리가 시선을 회피하며 일부러 바쁜 것처럼 벨벳 커튼을 부산스럽게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제프리의 얼굴이 더 어두워 보이는데 느낌 탓일까? 뭔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의 작은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오늘 닐은 어제보다 좀 느슨한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앞에서 보면 그저 좀 헐렁한 니트와 바지를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뒤에서 보면 등까지 깊이 파인 옷 사이로 흰 날개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타냐의 취향이 백분 반영된 것이었는데 자신의 날개 피어싱을 보여 주며 이건 어떠냐고 묻는 바람에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야만 했다.
양팔로 다리를 끌어 모으고 바닥에 깔린 쿠션 위에 앉은 닐이 사람들에게 방긋방긋 미소를 보냈다. 제프리는 닐에게 이 일이 적성에 맞을 거라고 했는데, 이 일은 그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그는 순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좋았다. 물론 제 수치스러운 부위나 행동을 남들에게 보여 주는 것도 자신의 취향에 맞긴 하였으나 그쪽은 로니 크로거와의 경험 때문에 바닥까지 깔아 눕혀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로니 크로거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 일을 좀 더 괜찮게 즐길 수 있었을까?
아무튼 어제에 비해 오늘은 다소 한산한 편이었는데, 오전부터 매장에 방문한 사람 중 다소 인상적인 고객이 있었다.
“씨발, 존나 끝내준다.”
제 앞에 서서 연신 거친 감탄을 내뱉고 있는 고객은 젊은 남성으로, 제프리의 말에 따르자면 고생 모르고 자란 철부지 도련님들이라 했다. ‘Tear’에서 그다지 반기지 않는 고객들이기도 했다. 돈은 많지만 사고를 치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리 돈을 많이 낸다 해도 사고를 치는 순간 그들은 다시는 이곳에 발도 들일 수가 없게 되곤 했다.
그런데 닐은 이 젊은 고객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글쎄, 입고 있는 옷이나 차고 있는 신발에서 고급스러운 느낌은 줄줄 흘러나왔으나 그간 봐 왔던 신사 숙녀들과는 다르게 행동거지에 할렘가의 양아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로니 크로거와 그 똘마니들처럼.
시건방지고 거만한 태도로 남자가 닐의 턱을 잡아 휙휙 거칠게 돌려 보자 직원이 경고했다.
“고객님, 안드로이드를 함부로 다루시면 안 됩니다.”
“아, 내가 사면 될 거 아냐. 얼만데?”
닐은 이런 상황에서도 안드로이드처럼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고 미소를 짓느라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는데, 그럴수록 남자의 눈이 더욱 달갑지 않은 느낌으로 빛났다.
“이 안드로이드는 판매하는 상품이 아닙니다. 또한 아직은 예약 구매만 가능합니다.”
“글쎄 예약이고 뭐고 얼마냐니까?”
직원으로부터 예약 판매하는 안드로이드의 가격을 들은 남자가 뭐라 욕설을 지껄이더니 마지못해 손을 떼어 냈다. 그러니까 회원비를 낼 돈은 있지만 안드로이드를 살 만한 돈은 없는 것이다. 하긴 어지간한 부자 아니고서야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용돈으로 주거나 하진 않겠지. 저런 자식이라면 더욱이.
“대여는 안 돼?”
“이 안드로이드는 대여하지 못하는 상품입니다.”
직원이 매우 상냥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뭐라고 할 것처럼 얼굴을 구겼지만, 어느새 매장 안으로 들어와 대기하는 사설 경비원을 보고는 다시 수그러들었다. 보통은 저렇게 사설 경비원이 바로 들어오지 않는데 아무래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사람인 모양이다.
남자는 어떻게든 닐을 어찌해 보겠다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주위를 어슬렁거렸는데, 그 행동거지가 마치 하이에나 같았다. 당연히 직원도 떠나지 않고 그 근처를 지켰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 속에 대치 상황이 이어지다가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간 줄 알아서 안도했더니 들고 온 건 안드로이드 안내 종이 책자였다. 남자가 히죽히죽 기분 나쁘게 웃어 댔다.
“가서 물어봤는데, 나는 손 못 대도 직원을 시켜서 제품 테스트 할 수는 있다며?”
“그렇습니다.”
직원이 마치 그린 듯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씩 웃은 남자가 정말이지 하이에나 같은 움직임으로 어슬렁거리더니 지시했다.
“옷 좀 벗어 봐.”
어제부터 무던히 각오하고 있던 상황이라 닐은 그다지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순간 짓궂은 마음이 들어 일부러 그윽한 시선을 보내 주며 니트를 벗자 남자가 잠시 홀린 듯 닐을 바라보았다. 빙긋 웃어 주고는 눈을 내리깔며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사람이 아닌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면 이런 대우가 그렇게 기분이 나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왕이면 이런 명령을 하는 사람이 미하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생각을 하고는 닐이 불현듯 저도 모르게 놀랄 때였다. 직원이 갑자기 저지하고 나섰다.
“손님, 이제 점검 시간입니다.”
“뭐라고?”
직원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던 남자가 팍 인상을 썼다.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안드로이드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오, 씨…….”
휴식 시간이나 다름없는 점검 시간을 열렬히 기다려 온 닐이기에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이 상황이 매우 즐겁게 느껴졌다. 그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직원을 따라 졸졸 휴게실 겸 안드로이드 정비실로 따라갔다. 등 뒤로 남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직원이 익숙하게 안드로이드들을 안에 밀어 넣고 나간 지 얼마 안 있어 미하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오늘도 퍽 편한 옷차림이었다. 그런 차림인데도 여전히 빛이 나 보이는 건 대체 왜지. 닐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하일이 즐거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음, 지금은 저녁인데요, 사장님.”
“러시아에서는 지금부터가 아침의 시작이야.”
그 말에 따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맞을지도 모른다 싶어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긴 저녁이라도 러시아는 아마 아침일지도 몰라. 그리고 설사 아니라고 해도 사장이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사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냥 미하일이라고 불러.”
오늘도 레이디를 꿈꾸도록 재워 버리고 장비를 꺼내며 미하일이 무심하게 말하는데, 닐은 순간 좀 설레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으려고 애쓰며 태연하게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왜 이 사람은 이름도 잘생긴 것 같지.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닐이 속으로 끙끙 앓았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게, 미하일은 그가 근 몇 년 동안 만난 사람 중 가장 근사하고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만약에 안드로이드인 척하다가 상황이 지나치게 감당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요?”
“응?”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은데 억지로 계속 시킨다든가…….”
아까는 별생각 없이 호기롭게 남자를 약 올렸는데 생각해 보니 그가 언제든지 또 방문할 수 있는 일이라 걱정이 되었다. 미하일은 느릿하게 장비를 레이디와 연결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말했다.
“그럼 그냥 고장 내 버려.”
“네?”
“뭐 에러가 일어난 것처럼……. 귀한 안드로이드니까 다들 기겁해서 모시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미하일이 싱긋 웃으며 닐을 바라보았다.
“한번 해 볼래?”
“네?”
“자, 이렇게…….”
팔이 슥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자 갑자기 긴장이 되어 닐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예쁜 미소를 지은 그가 헉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 꽉 허리를 끌어안았다. 닐이 얼어붙었다.
“이제 눈을 감고, 축 늘어지는 거야. 고장 난 안드로이드처럼. ……어서.”
그가 재촉하자 잠시 망설이던 닐이 고분고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느리게 닫으며 고개를 늘어트렸다. 부끄러움을 참으며 팔도 천천히 떨구자 미하일의 시선이 유독 더 따갑게 느껴졌다. 슬슬 뒤로 꺾인 목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도통 미하일이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아 발을 꼼지락거릴 때쯤, 뜨끈하고 습한 것이 뺨에서 입술 끝부분까지 슥 지나갔다. 닐이 기겁하며 번쩍 눈을 떴다. 미하일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닐을 놔주며 칭찬했다.
“잘하네. 하지만 그래도 눈은 뜨지 말았어야지.”
그러고는 닐이 이도저도 어쩌지도 못하고 뺨에 어정쩡 손을 올리다 말기를 반복하자 제 소매를 죽 잡아당겨 뺨을 문질러 주기까지 했다.
“더러웠어?”
“어, 아뇨, 네, 아뇨…….”
핥을 줄은 몰라서 당황한 나머지 닐이 버벅거리자 미하일은 한번 웃고는 레이디를 점검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동안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애꿎은 청바지만 쥐어뜯었다. 미하일은 잠시 후 어제처럼 닐에게 사탕 서너 개를 쥐여 주었다. 오늘은 바쁜지 어제와 달리 몇 가지 대화만 나누고 휙 가 버렸는데, 닐은 사탕 한 개는 먹지 않고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내가 사장님을 좋아하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하긴 로니 크로거 같은 인간만 보다가 차원이 다른 사람을 보니 그럴 만도 해. 사실 그런 비주얼이면 안 좋아하는 게 더 힘들지 않나? 미하일에 대한 생각으로 약간 붕붕 뜬 상태로 나온 닐은 다시 무대에 앉았다가 저도 모르게 화사하게 웃었다. 덕분에 오늘 따라 고객들 호응도 좋았다.
그런 닐의 정신을 다시 바짝 차리게 만든 것은 로버트의 등장이었다. 오늘은 가볍게 구경하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관찰하러 나왔다는 자세로 당당하게 뚜벅뚜벅 닐의 앞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미스터 로버트!”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라 환하게 미소 지어 주자 로버트도 섹시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닐은 생각했다. 나 생각보다 엄청 얼굴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전 애인들 얼굴이 다들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어…….
“안녕, 프리티. 오늘도 예쁘게 하고 있네.”
감사하다고 대답하는 대신 닐은 부러 수줍은 듯 웃으며 슬쩍 시선을 피해 주었다. 가능한 사람들과 짧게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쪽이 좋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아직 그는 뭐가 안드로이드다운 반응이고 태도인지 감을 잘 잡지 못해서 열심히 레이디를 보며 배우는 중이었다. 다행히 로버트는 닐에게 말을 더 걸진 않았지만 대신 팔짱을 끼고 서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다 났다.
“정말 모델 대신에 안드로이드를 세워도 되겠는데.”
안드로이드라서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크게 중얼거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들으라고 하는 건지 닐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전자여라……. 보통은 길어 봤자 5분 정도 있다가 가니 시선 처리도 쉽고 괜찮았지만, 저렇게 눈앞에 떡 서서 빤히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면역이 없는 닐에게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마침내 로버트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안도한 나머지 기뻐 죽을 지경이었다.
“프리티, 일어나서 한 바퀴 돌아 볼래?”
닐은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일어나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버트가 다시 천천히 돌라고 명령하자 안드로이드를 사려고 이러는 걸까 의아해하며 닐이 느릿느릿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았다. 그의 예리한 시선이 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흠…….”
어쩜 이렇게 사람 같을 수가 있지, 중얼거리는 로버트의 말을 들으며 다시 양심이 쿡쿡 찔려 올 때였다.
“아저씨, 다 썼으면 좀 비켜 주죠?”
나 써야 하니까. 굉장히 시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닐의 몸이 순간 굳었다. 설마 했는데 다시 왔구나……. 아직 오늘 영업이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기에 닐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반쯤 악의로 뭉친 것 같은 사람은 상종하기가 아예 싫었으나, 세상에 돈 벌기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더욱이 이 일은 보수도 셌고 그다지 윤리적인 종류의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가 심하게 행동할 경우 제지할 직원이 있다는 점 정도였다.
로버트는 무례하게도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른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야 척 봐도 로버트에 비하자면 저 남자는 애송이 같아 보이긴 했다. 과연 그가 그대로 남자를 무시했다.
“이봐요, 다 썼으면 비켜 달라니까?”
“어디서 뭐가 짖나.”
이번에는 확실히 누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닐은 다소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대놓고 순진한 척 둘을 바라보았다. 이때는 누구보다 구경꾼 노릇이 쉬웠다. 저처럼 이런 순진한 안드로이드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고 누가 의심하겠나?